이번 <문화탐방>장소로 조선시대 진경산수화가 전시되고 있는 '간송미술관'을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고옹이 원래 계획했던 대로 남산으로 잡았다. 남산 기슭에서 가 볼만한 곳을 물색해 보니 대한극장 부근에 우리 전통가옥을 재현한 '남산골한옥마을'이 있고, 남산도서관 옆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는데, 다가오는 6월이 '보훈의 달'이기도 하여 후자를 택하게 되었다. 더욱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듯하나 실제로 깊이 알고 있지 못하여 이번이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다. 요즘도 남산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고옹의 경우는 별 감회가 없을지 몰라도, 여기 와 본 기억들이 아득한 나머지 翁들에겐 도서관 부근 풍광마저 새삼스럽게 느껴졌는데 잘 트리밍된 나무와 잔디밭은 소시적의 그곳이 아니었다.
남산도서관 뒷편으로 돌아가니 안중근 의사 동상이 나타나 굳이 이정표를 보지 않아도 부근에 기념관이 있음을 짐작케 하였다. 옛날에도 안의사 동상이 있었고 뭔 기념관 같은 게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났는데, 동상도 예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기념관은 2007년 부터 성금을 모아 2010년에 새로이 건립하였단다. 건물은 온통 유리로 되어 있고 출입구는 지하로 들어가듯이 밑으로 경사져 이어졌다. 메인홀에 들어서니 붉은 글씨로 "大韓獨立"이라 쓰여진 대형 태극기에 앞에 안중근 의사가 앉아 계셨다.
(여기서 부터는 기념관에서 제공한 카탈로그와 인터넷 관련 사이트에 나와있는 내용을 얽어 짜깁기 하니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
출생과 가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였다고 한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한 베네딕토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 등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거부가 되어 재산을 축적하였으므로 선생은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를 지냈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 고 하였다.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有豊), 안순풍(安順豊)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양반이 아닌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음에 틀림없다. 또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또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고, 안인필(安仁弼)이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유소년기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동학농민군 진압
안중근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자발적으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데 참여하였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집안
안중근의 집안은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본명을 받았으며 천주교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불어를 배웠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기도 하었다.
계몽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얻지 못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온다. 이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네는 대구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본의 계속적인 방해로 실패로 돌아간다.
의병 활동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사건의책임을 지고 강제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였다. 그뒤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14])에 선출되었다. 1908년에는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2차례 진입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어 회령군 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 안중근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으나 이 패배로 인해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출정하여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 초, 안중근은 뜻이 맞는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한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톡을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南長春), 콴청쯔(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차이쟈거우에서 암살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차이쟈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를 맞혔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안중근 의사 의거 장면도. 당시 일본 신문에 게재됐던 그림이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旅順)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3월 26일 교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마지막 행적
2008년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 부터 순국한 3월 26일 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을 남겼다. 2008년 3웡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9년 김구 역시 안두희에게 암살당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旅順) 감옥의 죄수 묘역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는 뒤에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 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출범한 안중근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는 최근 안중근이 순국한 뤼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뤼순감옥구지묘지를 안중근의 유해 매장지로 추정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을 정부에 의뢰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야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