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하13장15~22절
제목 : 다말을 버린 암논
암논은 원하는 것을 빼앗은 후 다말을 쫓아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분노하지만 어떤 징계도 하지 않고, 압살롬은 다말을 위로하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1. 암논의 변심(15~19)
1)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습니다(15절).
“[15]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병이 날 정도로(2절) 애모(愛慕) 했던 자를 이제 성적 욕구를 채우고 난 후에는 도리어 심히 미워하는 암논의 심리현상은 변태 성욕자(變態性慾者)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즉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 하등 동물적인 욕정에만 사로잡혀 있을 경우, 일단 육체적 욕망이 충족되고 나면 심한 수치감과 허탈감, 상대방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 심리 현상인 것입니다.
2) 다말이 그에게 나를 쫓아내는 것은 그 악보다 더하다고 합니다(16절)
“[16]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암논이 다말을 자기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방금 자신에게 추행(醜行)을 당한 다말의 수치심을 더욱 자극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암논의 행위는 자기 때문에 불행한 생(生)을 맞이하게 된 다말에 대하여 약간의 동정심도 베풀지 아니한 잔악한 행위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다말은 자기를 쫓아 보내는 암논의 행위가 이전의 그의 추행보다 더 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다말을 내보내고 문짓장을 지르라 합니다(17절)
“[17]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문빗장을 지르라. - 암논의 이러한 행위는 실로 자신의 양심에 빗장을 지르는 것이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문빗장을 스스로 지르는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다말에게 조금이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수치심을 억누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만이라도 주었더라면 다말과 하나님으로부터 일말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었을 젓입니다.
그러나 암논은 스스로를 차꼬 채우듯 보다 철저히 악으로 일관하였으니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38, 39절).
4)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릅니다(18절).
“[18]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채색 옷('케토네트 파심')은 '소매가 달린 긴 겉옷'이란 뜻입니다.
아마도 이는 공주와 같은 귀족 신분이 입는 소매가 길고 아름답게 장식된 나들이옷을 의미할 것입니다. 창 37:3 주석 참조.
5)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습니다(19절)
“[19]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 이는 자신의 수치스럽고도 비참한 현실에 대한 슬픔과 고뇌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행동입니다(삼상4:12 ; 왕하 5:8). 1:2 주석 참조.
아마도 다말은 조금 전 과자를 구울 때 사용한 화로나 벽난로에서 취한 재(8절)를 머리에 뒤집어 썼을 것입니다(Pulpit Commentary).
채색 옷을 찢고. - 옷을 찢는 행위 역시 금식이나 굵은 베옷을 입는 행위(왕상21:27 ; 에 4:3 ;시 35:13)와 더불어 참을 수 없는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던 히브리인들의 한 표현법이었습니다. 1:2 주석 참조.
손을 머리 위에 얹고. - 머리는 그 사람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창 40:13 주석참조.
따라서 다말이 손을 머리 위에 얹은 것은 자신의 머리에 수치스러운 것이 임한 것을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표현이었습니다(렘 2:37).
*렘2: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
아마도 다말은 이러한 행위로써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한 억울함(11-14절)을 포함한 아울러 자신의 순수함과 결백함을 나타내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2. 압살롬의 반응과 다윗의 반응(20~22절)
1) 다말이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서 보냅니다(20절)
“[20]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 매우 슬피 울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다말의 모습을 본 압살롬이 암논의 추행을 짐작하고선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완곡하게따져 묻는 말(euphemism)입니다.
여기서 즉, '...너와 함께 잇었느냐'하는 물음은 남녀의 동침 여부를 우회적으로 묻는 말인 것입니다(창 39:10).
한편, 본절의 원문에는'암논'이 '아미논'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미논'이 '암논'에 대한 경멸어(輕蔑語)라고도 주장합니다.
사방은 잠잠히 있고. - 이 같은 압살롬의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 아버지 다윗이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입니다(21절).
(2) 암논에게 복수할 좋은 묘책이 떠오를 때까지는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암논에게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은 채 2년 동안 기회를 노린
점을 볼 때 압살롬의 복수심은 대단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22-29절).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 당시 일부다처제가 성행하던 세태 속에서 오라비는 자기 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습니다(창 34:31).
따라서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자기 누이를 진정시킨 것입니다(Pulpit Commentary).
처량하게 지내니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멤'은 '황폐한', '다 망가진'이란 뜻을 가집니다.
따라서 이 말은 마치 폐인(廢人)처럼 되어 이제 괴로운 나날만을 보내고 있는 다말의 비참한 삶을 잘 드러내 줍니다.
꿈이 사라진 사람의 비참함을 봅니다.
2)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합니다(21절)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이 처럼 다윗 왕은 암논의 범죄 소식을 듣고선 일시적으로 크게 노하기만 했을 뿐 율법에 따라 암논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았습니다(레20:17).
그 이유에 대하여 70인역(LXX)은 "암논이 장자인 고로 다윗이 그를 사랑하여 암논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외에도 또 다른 이유를 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다윗 왕 자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이미 지은 자로서(11:4) 자기 아들의 죄를 심판할 자격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란 점입니다.
그리고 또 자식에 대한 다윗 왕의 약한 마음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상의 점에 비추어 볼 때 다윗은 인간적인 면에서 좋은 아버지였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모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음을 알수 있습니다(잠 23:13, 14 ; 엡 6:4).
*잠23:13,14 “[13]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14]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때문에 이러한 다윗의 잘못은 결국 엄청난 가정의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즉 다윗의 우유부단한 처신에 불만을 품은 압살롬은
결국 암논을 살해하고(23-29절)
더 나아가 다윗에게 반기(叛起)하고 만 것입니다(15장).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 가정교육의 주안점은 자녀의 영혼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녀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준엄하게 징계하여 그로 하여
금 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곧 부모의 참된 역할인 것입니다(딤후 3:16, 17).
*딤후3:16,17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3)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22절)
“[22]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시비간에 말하지 아니하니라. - 누이 동생 다말의 일로 인해 암논을 미워하게 된 압살롬이 그 일에 대하여 암논에게 한 마디도 따지거나 변론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압살롬이 속으로 암논과 절교(絶交)를 선언하고 또한 잔인한 복수극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진의 여부는 상대방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거짓 사랑은 처음에는 아무리 달콤하고 강열하더라도 결국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말에 관해서 암논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욕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두 남자 암논과 압살롬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이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 사건을 일단 덮으려고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또 한 사람은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인 다말은 자신의 수치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짖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떤자가 지혜로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 잘 못을 감추기 위해서 또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죄를 덮는 두 남자 그들은 결국 그 죄의 결과로 둘다 죽고 맙니다.
죄는 감출 것도, 우리의 손으로 해결 할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저질은 죄의 문제든,
아니면 무슨 일을 통해 자신이 깊은 상처를 입었든,
죄로 인한 문제는 주님께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죄를 덮어 두거나, 죄를 죄로 갚으면, 그 죄는 손 댈 수 없이 커져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 죄의 문제를 가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욕망은 혐오로 바뀝니다(15~17절).
암논은 배설하듯 욕정을 채운 후 다말을 미워하며 내어 쫓습니다.
강제로 취했듯이 강제로 버립니다.
범해서는 안 되는 이유, 또 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면서도 끝까지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간음한 후 죄를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악을 더한 것처럼,
그 아들 역시 강제로 능욕한 후 죄를 회피하며 그 어떤 책임(출22:16)도
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이나 상황을 통해 책망하신다면 그때는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가 할 때가 아니라 죄를 깨닫고 돌아설 때입니다.
2) 버림받은 다말은 자신이 당한 모욕과 수치를 숨기지 않습니다(18,19절)
심지어 왕족과 처녀임을 나타내는 채색옷을 찢고 크게 통곡하며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한 억울함을 토로하고, 문빗장 뒤에 숨은 암논의 악행을 폭로합니다.
부당하게 억압받고 유린당하고도 하소연할 곳 없어 절망하는 이들의 외침에 나와 우리 교회는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3) 분노하는 다윗과 달리, 압살롬은 암논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20,22절).
그는 자기 동생을 욕보인 암논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며 복수의 때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암논의 죄는 다말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윗 왕가에 더 큰 위기와 분열로 이어집니다.
4) 다윗은 암논의 악행을 듣고 분노합니다(21절).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인, 과거의 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왕가의 명예를 지키려는 자존심 때문인지 명백히 알 수 없으나, 율법대로(레20:17) 어떤 징계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안일한 대처는 결국 압살롬의 불만을 키우며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불러옵니다(13:23~29).
죄를 묵인하거나 간과할 때 우리 기대와 달리 상황은 결코 무마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화되고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죄를 묻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징계를 통해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 죄의 확산을 막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