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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춘문예공모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수지
폭우
손보미
그녀의 남편은 전자제품 상점의 판매원이었는데, 어느 날 손님이 없는 매장을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넘어졌다. 그는 평소에도 익살스럽게 행동하는 걸 좋아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편이었기 때문에 동료들은 그가 일부러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병원에 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시간이 약간-그게 비록 일이 분에 불과하다 해도-지체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매우 불쾌해져서 울어버렸다. 다행히도 그녀의 남편은 가벼운 뇌진탕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간단한 검사를 몇 가지 더 한 후 일주일쯤 병원에서 휴식을 취한다면 별일 없을 거라고 말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매우 편안해 보였고,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이토록 컨디션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규모가 작은 무역회사의 접수원이었는데, 근무가 끝나면 곧장 병원으로 가서 남편의 휴식이 완전해질 수 있도록 도왔다. 며칠 후, 그녀의 남편은 퇴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결국 닷새째 되는 날 저녁에 그녀는 남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그녀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농담을 던지며 쾌활한 모습으로 출근하는 남편을 보면서 어떤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날 저녁, 일찍 퇴근해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그녀는 자신들의 결혼생활을 되돌아보며 일종의 회환에 잠겼고, 앞으로는 뭔가 달라질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에 사로잡혔다. 그들에게는 아주 약간의 여윳돈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남편은 그 돈으로 전문대학에 입학할 수도 있다. 대학을 졸업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이를 가질 수도 있다. 그녀는 남자아이를 원했다......그날 저녁 내내 그녀는 조금 들뜬 상태였지만 문득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바람에 그녀는 이 이야기를 구성해내는 중요한 사견의 면면-이를테면 그날, 그녀의 남편은 장식용 아로마 향초를 몇 번이나 넘어뜨렸고, 물컵도 두 번 이상 놓쳤다-은 보지 못했거나, 혹은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날 저녁 이후 그녀는 충만함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며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에 사로잡혔다가, 나흘 후 아침 그의 남편이 울상이 되어서 “여보 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땅 위로 다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들이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어떤 의사는 “안구에 직접적인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딱딱하고 학술적인 말을 늘어놓았고, 또다른 의사는 “일종의 스위치만 켜주면 시력이 돌아올 겁니다”라는 문학적 비유를 곁들여 설명했다. 공통적으로 그 이야기들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이 년 동안 세 번의 수술을 받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지막 수술비를 마련하게 위해 더 작고 누추한 집으로 이사해야만 했고 얼마 정도 빚을 져야만 했다. 남편이 세 번째-마지막-수술을 받던 날, 대기실에 있던 그녀는 마치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고, 약간의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자주 자신의 낡은 스웨터의 소매로 콧물을 닦았다. 그러다가 대기실에 널브러져 있는 잡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를 읽는 행위가 지신의 초라한 스웨터를 감춰주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지만 불행하게도 거의 모든 잡지가 그녀에게 별 재미를 주지 못했고, 어떤 것은 단 한 글자에도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이유를 그녀의 심리상태나, 혹은 병원 대기실에 있는 잡지-골프나 테니스를 다뤘거나, 혹은 고전음악이나 발레,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가 그녀의 통속적인 취향과 몹시 동떨어져 있었던 것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판단을 내리는 건 좀 부당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는 잡지들은 너무나 오래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병원의 원장은 잡지를 사는 일은 쓸데없다고 여겨서 수년 전부터 금지한 상태였다. 그녀가 조금이나마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건 <BlueShoe>라는 블루스 음악 전문 잡지였다(이 잡지는 미국에서 1990년대에 발간된 것으로 한국에는 1994년과 1995년에 걸쳐 총 여덟 권에 발간되었지만,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간이 중지되었다. 그녀가 읽은 것은 1995년 여름호였다). 그녀는 블루스가 음악의 한 종류라는 것조차 몰랐고 그저 끈적끈적하고 야한 춤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날 <BlueShoe>에서 읽은 어떤 블루스 음악의 노랫말을 오랜 후까지 기억했다. “나를 여기에 두지 말아요. 내가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나는 그렇게 음탕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잠시 후 레지던트가 수술이 끝났음을 알려주었고, 집도의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겠으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녀는 읽던 잡지를 가방에 쑤셔넣은 후, 레지던트를 따라 좁은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
그들은 빗줄기를 뚫고 구르메 식당에 도착했다. 조금 늦었을뿐 그들 부부가 구르메 식당 방문을 아예 취소한 건 아니었다. 부부는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 저녁마다 구르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식당 주인인 마스터 장은 비에 젖은 그들을 위해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군요. 태풍이 올라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잠시 후, 미스터 장은 절인 올리비가 담긴 그릇과 와인을 들고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부부는 기숙사가 딸린 중학교로 진학한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느냐 마느냐하는 케케묵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미스터 장의 등장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잠시 끊겼다. 미스터 장은 사십대 후반으로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미스터 장’은 단골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미스터 장은 와인을 따르면서 지나가는 말투로, 그러나 깍듯한 태도로 질문했다.
“아이가 어디 멀리 있나봅니다.”
“이야기한 적 없나요? 우리 아들은 우수한 학생들만 받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기숙사가 딸린 학교죠. 지금은 이학년이에요.” 부인이 대답했다.
“많이 보고 싶으시겠습니다.”
“네, 아주 많이요. 이번 방학에는 집에 올 거예요.”
사람들은 그들이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사십대 초반으로 결코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할 수는 없었고, 지쳐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신뢰감을 주는 표정을 짓는 남자였다. 아내는 남편보다 다섯 살이 어렸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지만 얼굴을 보면 책이 빽빽하게 꽂힌 고급 원목 책장과 반들반들하게 닦인 값비싼 경첩, 혹은 작지만 격식 있는 티테이블이 연상되는 여자였다. 미스터 장은 직업적인 호기심과 관찰력으로, 그녀가 ‘이번 방학에는’이라고 표현한 것을 알아차렸지만, 역시 직업적인 감각으로 그것에 대해 질문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식당 문을 닫을 시간이 훌쩍 넘은 뒤에도, 그들 부부는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때로 그는 격양된 몸짓을 보였고, 그녀는 이따금씩 두 손으로 냅킨을 쥐어짰다. 직원들을 먼저 퇴근시킨 미스터 장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물잔을 채워주었다. 부부는 그제야 식당에 남은 손님이 자신들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너무 늦게까지 있었군요. 미안합니다. 곧 돌아가겠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더 필요하신 거 없습니까?”
미스터 장은 웃으며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손님도 없는데, 우리랑 한잔하면 어떻습니까?” 그가 말했다. 미스터 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술은 마시지 않겠습니다만, 영업시간이 끝났으니 그럼 잠깐 앉겠습니다.”
미스터 장은 그들 옆에 앉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난 어제 밤늦게까지 집에서 혼자 TV쇼를 하나 봤어요. 이이는 어제 동료 교수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거든요.” 그리고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누설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고 “이이는 얼마 전에 전임발령을 받았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어쨌든 어제 유명한 여배우가 나왔는데......이름이 뭐더라? 얼마 전에 무슨 영화에도 출연한 여자인데......우체국의 편지를 훔치는 이야기였는데, 여보 혹시 그 영화 기억해요?”
그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여자는 이혼녀인데 말이에요. 자기 아이에게 집중력 장애가 있다는 거에요. ADHD 말이에요. 여덟 살짜리 아이였는데.”
“요즘은 그런 애들이 워낙 많으니까.” 그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걱정되지 않습니까?” 미스터 장이 물었다.
“뭐가요?” 그녀가 물었다.
“내 아이가 저러면 어쩌나, 뭐 그런 생각.”
“글쎄요, 우리 아들은 한 번도 우리 속을 썩인 적이 없어요. 공부도 워낙 잘하고. 훌륭한 아들이죠.”
그가 아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남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대신 익살스러운 태도로 미스터 장에게 질문했다.
“우선 결혼부터 하는 게 어떠세요?”
“전 이것저것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사장님은 그런 생각을 할 필요 없어요. 영리한 분이시니까요. 결혼을 하고 애를 낳으면 그 아이도 분명 머리가 좋을 거예요.”
“제가 영리한지 그렇지 않은지 부인이 어떻게 아십니까?”
미스터 장이 약간 심술궂은 표정을 하고 물었다.
“난 생긴 것만 봐도 그 사람이 영리한지 아닌지 알아요. 대학 다닐 때 정식으로 관상을 좀 배웠거든요. 남편과 결혼한 이유도 남편이 관상이 좋아서였는걸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고, 미스터 장도 따라 웃었다.
“여하튼 그 배우가 말하기를, 자기 애가 옆집에 혼자 사는 노인과 지나치게 친해졌다는 거에요. 거의 매일 그 집에 놀러 가고, 자신이 집에 있어도 옆집에서 놀고 오겠다고 가서는 몇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더라는 거죠. 우리 모두 알다시피 여배우는 매우 바쁜 사람이고 옆집 사람과 친목을 나눌 시간 같은 건 없잖아요. 옆집 노인과 왕래는 없었지만, 가끔 지나가다 본 노인의 모습이나, 오고가며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판단했을 때, 노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나봐요. 그래서 옆집에 가서 자신의 아이와 어울리지 말아달라 부탁했다고 하더라고요. 좀 무례한 행동이지 않나요?”
미스터 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남편은 되물었다.
“여배우가 방송에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요.” 그녀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잠시 후 그들 부부가 계산을 하기 위해 일어섰다. 어느새 비가 그쳤고, 비냄새가 섞인 늦여름 밤의 아련한 바람이 식당의 얼어놓은 문을 통해 들어왔다. 미스터 장이 보기에 그들 부부의 표정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고, 화가 난 것처럼 보였으며 또 얼마쯤은 슬퍼보였다. 미스터 장은 차 쪽으로 걸어가는 부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
남편이 시력을 잃은 후, 그녀는 별다른 불평 없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집에 돌아오면 좁은 탁자에다 저녁식사를 차렸다. 식사가 끝나면 돈 계산에 열중했다. 그녀는 빨리 빚을 갚고 싶었지만 그녀의 월급과 남편이 받은 퇴직금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녀가 계산기와 씨름하는 동안, 남편은 점자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들었다. 그는 게스트들이 우르르 나와서 청취자들이 보내온 웃긴 사연을 읽어주는 걸 좋아했다. 그는 그녀에게 컴퓨터 자판에 점자를 표시해줄 것을 부탁했고, 그녀가 출근해 있는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판으로 쳤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면 출력해서 방송국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그것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절반 정도는 방송국으로 보냈지만, 나머지 절반은 잃어버렸다. 어쨌든 남편의 사연이 소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 항상 듣던 채널이 지겹다고 생각한 그는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히 자신이 사는 구의 홍보직원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구는 구민들의 문화생활 수준을 높이려고 합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아주 저렴한 수업료로 다른 구와는 차별화되는 강좌를 열 예정입니다.” 구청에서는 ‘도서관의 역사’라든지, ‘이탈리아 음식의 격조’ ‘플로베르와 찰스 디킨스’라는 이름의 강좌를 야심차게 열었고, 각 분야의 권위자에게 고액의 수강료를 지불하고 수업을 맡겼다. 구청의 이러한 노력은 지역 뉴스에 ‘시민과 함께하는 인문학’ 내지는 ‘구민 바로 곁에 있는 격조 있는 문화탐방’이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홍보되었고, 호평이 잇따랐다. 그는 아내에게 그 강좌에 대해 이야기해줬고, 일주일에 한 번쯤은 이런 강좌를 들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강좌는 ‘미국의 대중음악’이었다. 미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남편이 시력을 잃은 후에는 라디오를 즐겨 들었기 때문에 대중음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 저녁이 되면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외투를 걸치고 차가운 바람을 헤치며 집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구청가지 걸어갔
다. 그녀는 강좌를 들으러 걸어가는 그 길과, 강의실의 냄새, 네모반듯한 책상, 그리고 항상 값비싼 캐시미어코트를 걸치고 오는 강사를 좋아했다. 강사는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다고 했으며, 그에 걸맞게 미국의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영화, 소설, 시, 연극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노트에 강의 내용을 빽빽하게 기록해두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남편에게 얘기해주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항상 궁금해했지만 물어본 적이 없었다.
강좌가 열린 지 석 달쯤 지났을 때, 구청장은 갑자기 각 부서의 책임자를 불러모았고, 장시간의 회의를 거쳐서 강좌들을 모두 없애기로 결정해버렸다. 어느 수요일, ‘미국의 대중음악’ 강사는 이 수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이고, 다음주 이 시간부터는 ‘생활요가’가 진행될 예정이니 원하는 사람은 계속 수업을 듣고, 아니면 환불을 받으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강사의 얼굴에서는 실망감이나 아쉬움을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홀가분해한다는 인상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그녀는 빈 교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버림받은 기분이었고, 굴욕적인 느낌이었다. 이십 분쯤 후, 그녀는 벗어두었던 외투를 걸쳐입고 건물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주차장을 통과해서 뒷문 쪽으로 나가면 훨씬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항상 그 길을 통해 집으로 가곤 했는데, ‘미국의 대중음악’강사는 그녀가 건물 밖으로 나오던 그 시간에 주차장 한가운데 서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카멜색 캐시미어코트를 걸친 그는 마치 통화를 하고 있는 상대가 바로 앞에 있기라도 한 듯이 흥분해서 주먹을 쥐고 크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차 키를 떨어뜨렸고, 곧바로 주웠지만, 몇 발짝 가지 못해 다시 주먹을 흔들다가 또 떨어뜨리고 멈춰 서버리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화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강사가 그녀를 알아보는 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저는 선생님의 ‘미국의 대중음악’을 듣던 학생이에요. 정말 선생님을 존경해요.” 그녀는 강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불안함을 느꼈고, 그래서 강사가 “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을 때, 안도했다.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들은 아이에 대한 문제로 또다시 실랑이를 벌였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차문을 소리나게 닫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차 안에 남아서 아파트 동 앞에 일렬로 심어놓은 관목의 실루엣과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물웅덩이, 그리고 비에 젖은 보도의 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결국 소방차 전용 주차공간으로까지 시건을 옮겼다.
몇 년 전에 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그가 연락을 받고 집에 도착했을 때, 바로 저 자리에서 소방차 몇 대가 돌아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물었다. “당신이 아이 아버지요?” 당시 열두 살이었던 아들은 멀끔한 모습으로 옆집에 사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는데, 몇 년 전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죽고 자녀들은 모두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씩 그들 부부에게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아들을 돌봐주곤 했다. 하지만 불이 났던 그날 밤은 아내가 아들과 함께 있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다행히 큰불은 아니었어요.” 옆집 할머니는 그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화재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곳은 아들의 방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방을 제외하고는 별 피해가 없었다. “아드님 방에서 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방대원은 그렇게 말했었다. 아들의 앨범이나 옷, 일기장, 상장과 성적표 같은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글세, 자꾸 이 녀석이 집에 가 있겠다고 하지 뭐겠수. 자기도 다 컷다고 하도 고집을 부리기에, 밥만 먹이고 집으로 보냈는데, 이런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았겠수.” 할머니가 그에게 설명했다. 그는 아들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디 갔어?”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앙다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열두 살, 그는 그때 처음으로 이 아이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마 아들의 손을 잡아주거나 안아줄 수 없었다.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이가 참 의젓해요.” 그녀는 작년에 폐암으로 죽었다. 폐암 진단을 받고 난 후 일 개월도 채 살지 못했다. 이제 그 집에는 그녀의 막내아들 부부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과는 별로 왕래가 없었다.
화재가 일어난 후 그들 부부는, 아니 그들 가족은 화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가족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몇 달 후에 아이는 도시 외곽의 기숙사가 딸린 명문 사립중학교로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다. 학비가 비싸고 우수한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들 가족은 미국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아들은 또래보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부부는 아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그 학교에 들어간다면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명문대 입학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아들이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 부부는 부러움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아내는 아들을 멀리 보낸 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아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근처의 중학교로 전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거기에 두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아내를 달랬고, 그러면 그녀는 또 그의 말에 수긍하곤 했다. 하지만 또 어떤 때, 그들은 이 문제로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다. 싸움이 있을 때마다 아내는 문을 ‘탁’ 하고 닫고 어디론가 가버리곤 했다. 그들이 거실에서 싸우고 있었다면 그녀는 침실 문을 탁, 닫고 방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방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면 다른 방으로 문을 탁, 닫고 들어가버렸으며, 차 안이라면 이런 식으로 차 문을 탁,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문을 닫는 행위를 통해 아내가 이 사태를 다른 식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단순히 화를 표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언제나 그 문을 다시 열었고 그들이-그러니까, 그와 아내가-닫힌 세계 속에 함께 있도록 만들었다.
잠시 후 그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아내는 외출복 차림으로 멍하니 침실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 때문에, 그는 어떤 미국소설을 생각해냈다. 한 남자가 오랜 실패 끝에 자신에게 남겨진 가장 큰 보물이 바로 아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뭔가 이상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게 욕정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뭐가 잘못됐어?”
“아이가 왔다 갔어요. 빨랫거리를 가져다놓았네요.”
아들은 언젠가부터 집에 꼭 들러야 할 일이 있으면 그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 몰래 왔다 가곤 했다. 그들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잠시 동안 그들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잠시 후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디에 전화하려는 거야?” 하지만 그는 그녀가 어디로 전화를 거는지 알고 있었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다. 마지막은 육 개월 전이었다. 그녀는 그의 연구실로 불쑥 찾아와서는, 아이를 데리러 가자고 했었다. 학교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고 말했다. 늘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아이를 데리고 오지 못했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있는 아내의 등을 바라보았다.
“안 돼, 그러지 마. 우리가 이런 짓을 하면 할수록 걔는 우리를 더 싫어할 거야.”
그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고, 잠시 후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네요. 전화를 받지 않아요. 일단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같이 갈 거죠?” 라고 덧붙였다.
*
그날, 그들은 주차장 계단 옆에 서서 자판기 커피를 함께 마셨을 뿐이었다. 그녀는 강의 내용을 필기한 노트를 펼쳐서 보여주었고, 강사는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득 남편의 마지막 수술날 잡지에서 읽었던 노래가사를 읊었다. “나를 여기에 두지 말아요. 내가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나는 그렇게 음탕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그녀는 <BlueShoe>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강사는 빈 종이컵의 바닥을 바라보면서 잡지에 제목이 함께 나와 있지 않앗느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요. 하지만 노래를 부른 가수나 그 노래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었는걸요. 그냥 노래 제목하고 가사만 있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빨개졌다고 생각했고, 그것 때문에 속상했다. 강사는 지금 당장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중에 제목이 생각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BlueShoe>를 가지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한다면 그 잡지를 드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에게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선생님 강의는 정말 유익했어요. 전 정말 많은 걸 배웠답니다.”
헤어질 때, 그녀는 노트의 마지막 장을 찢어서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혹시 그 노래에 대해 알게 된다면 전화 한 통만 주시겠어요?” 그날 밤, 그녀는 남편에게 그날의 강의노트를 읽어주었고, 강사와 자판기 커피를 마신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주 똑똑하신 분이더라고.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강좌가 폐강되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음주 수요일이 되었을 때, 강의를 들으러 가지 않는 그녀에게 남편이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몸이 좋지 않아서 쉬고 싶다고 대답햇다.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라디오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이 라디오에 보낼 사연을 자판으로 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또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수요일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녀는 집에 있었고, 그 다음주에도, 또 그 다음주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좌가 폐강되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남편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언젠가 저녁을 먹던 그녀가 남편에게 물었다. “내 얼굴이 기억나?” 그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가끔 그녀는 거울 속애 비친 자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때가 있었다. 서른세 살에 불과했지만 흰 머리칼이 드문드문 보였고, 볼은 축 늘어져 있었으며, 피부는 거칠었다.
밤중에 자다가 깨기도 했다. 그녀는 좁고 너저분한 방과 음식물 냄새가 진동하는 싱크대, 바퀴벌레가 드나드는 화장실을 둘러보았고, 마지막에는 남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남편의 배와 등에는 지나치게 살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종종 남편이 마지막 수술을 받는 동안 대기실에 앉아 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약간의 괴로움을 느꼈다. 겨울이 끝날 무렵, 그녀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당시 그는 지팡이를 가지고 종종 혼자서 외출을 하곤 했다. 그녀가 응급실에 갔을 때, 남편은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잇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의 부상은 경미했고 이주쯤 지나자 완치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까지 그 느낌-가슴속에서 무언가 요동치던 그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후로 그는 혼자 외출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항상 집 안에서 자판을 두드리곤 했지만, 사연을 방송국으로 보내달라는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녀는 타자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느낌에 사로잡혔고, 마치 벌을 받는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3월의 마지막 주 수요일, 그녀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미국의 대중음악’강사였다. 그는 그동안 여행을 다녀왔으며,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다고 말했다. “예의에 어긋나는 줄은 알지만, 도대체 그 가사가 어떤 노래인 줄 모르겠어서요. 혹시 그 잡지를 볼 수 있을까요?”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온 집 안을 뒤져서 그 잡지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강사를 만나러 갔다. 그들은 이번에는 구청 근처에 있는 낡은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는 잡지는 다음주에 가져다주겠노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녀는 수요일 저녁마다 다시 외출하기 시작했다. 남편에게는 강좌를 다시 들으러 가는 거라고 말했다. 어떤 면에서 그 말은 완전한 사실이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녀와 강사는 구청에서 멀리 떨어진 카페에서 함께 커피를 마셨다. 강사는 음악, 영화, 소설, 시,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열심히 필기했다. 남편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남편이 맹인이라고 이야기하자, 강사는 맹인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날 밤, 그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남편에게 강의노트를 읽어주었고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읽어주는 걸 이해할 수 있어?”
*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훨씬 더 거세진 빗줄기가 차체를 땔리는 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와이퍼가 쉴새없이 움직였지만, 시야는 계속 흐려지기만 했다. 늦은 시간인데다가 비까지 와서 외곽고속도로는 한산했고, 그것이 문득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아까부터 그의 아내는 입을 꾹 다문 채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얘기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걔는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아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확신해요?”
“저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 안 나? 우리한테 전화해서 망신스러운 일 좀 당하게 하지 말라고 한 거 잊었어?”
“이번에는 억지로라도 끌고 와야 해요.”
“돌아가자. 비가 너무 많이 와. 사고가 날지도 몰라. 내일 아침에 다시 가도 늦지 않아.”
“난 당장 데려올 거야.”
그는 아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조금 전 느꼈던 욕정은 착각이고, 자신이 느낀 감정은 아내를 때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떤 감정의 열기들이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헤집으며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걔는 돌아오지 않아. 시간이 필요해.”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가 갑자기 갓질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이라고요? 무슨 시간?”
그도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비상등 켜.”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화재가 낫던 날 밤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그녀에게 그날 어디에 갔었느냐고, 왜 아이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고 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그날 그녀가 집에 있었다면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랬다면 아이는 그런 식으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혹은 화재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아이가 불길 속에 혼자 남겨지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말이 그의 목구멍엣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내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하늘이 번쩍, 했고, 곧 저 멀리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불을 낸 게 아이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무서운 생각이었고 재빨리 버려야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핸들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여전히 비상들을 켜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비상들을 켜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여전히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로 그를 제지했다.
“위험하잖아. 비도 이렇게 오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제발.”
“상관없어요.”
“여보, 재벌, 너무 위험해. 죽을 수도 있다고.”
“왜 내게 그날, 불이 났던 밤 어디에 있었는지 묻지 않는 거죠?”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물었다. 차 안은 깜깜했지만 가끔 도로 위를 지나는 다른 차들의 불빛이 비쳐들면서 순간적으로 기묘한 무늬가 만들어졌다가 사그라졌다.
그는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당신을 보호하려고 그랬어.”
“나를 보호하려고요? 무엇으로부터요?”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당신의 부정(不貞)으로부터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그날, 집에 불이 났던 날, 내가 어디에 있었는 줄 알아요?”
“어디에 있었는데? 그날 당신이 집에만 있었다면 걔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떠나진 않았을 거야.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으려고 지난 삼 년간 노력해왔어. 그런데 당신은 지금 나에게 뭐라고 하는 거야?”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걔가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 나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날 당신이 아이를 버려뒀었잖아.”
“당신은요? 당신은 그 아이를 버려두지 않았어요? 나를 버려두지 않았어요?”
“무슨 말이야?”
“난 그날 당신을 따라갔었어요.”
그녀는 창문의 빗방울을 걷어내려고 노력하는 와이퍼를 노려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당신을 따라갔었다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와이퍼를 껐고,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물뿐이었다.
“세상에, 정말 이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날 밤 당신은 그 여자 집으로 갔죠. 그 여자의 집으로요. 난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집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두 시간 후쯤 당신이 여자와 나오는 걸 보았어요. 그 여자랑요.”
*
강사를 집으로 초대하자는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똑똑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나도 직접 듣고 싶다고.” 그녀는 가난하고 초라한 생활을 강사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의 남편은 이 일을 아주 용의주도하고 섬세하게 다뤘다. 그는 직접 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강사가 초대에 응할 때까지 아주 끈질기지만 한편으로는 예의바르게 굴면서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그녀는 남편이 아주 잔인하게 굴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고, 어떻게든 이 약속을 취소시키고 싶었지만, 결국은 체념하고 말았다. 그녀는 집을 깨끗이 정리하고, 집 안 구석구석에 살충제를 뿌렸으며, 음식물 쓰레기도 내다버렸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그런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손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고, 그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웃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또 무언가를 자판으로 쳤을 뿐이었다. 그녀는 꽃집에서 사온 제라늄 화분 몇 개를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선반과 벽 사이에서 <BlueShoe>를 발견했지만, 그것을 다시 쑤셔넣어버렸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그녀는 남편이 매장에서 쓰러져 입원했다가 퇴원했던 때, 남편을 위해서 요리를 하던 일이 떠올랐지만 타자 소리 때문에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날 저녁, 강사는 그들의 집으로 왔다. 나중에 이 방문에 대해 무언가 말하도록 아내에게 강요받았을 때, 그가 맨 먼저 떠올린 것은 냄새였다. 불쾌하고 기묘한 냄새. 식사를 하기 전에 그들은 비좁은 탁자에 둘러앉아서 강사가 선물로 가지고 온 CD 몇 장을 차례로 들었다. 스티비 원더나, 다이앤 슈어, 레이 찰스 같은 맹인 뮤지션의 CD였다. “여보, 이 뮤지션들은 모두 눈이 먼 사람들이야.”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지만, 남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중력에 맞서서>라는 노래였다. 맹인 뮤지션의 곡은 아니었고 <위키드>라는 뮤지션에 삽입된 노래였다. 강사는 친절하게도 가사를 번역해주었다. “아주 아름다운 가사예요.”
한계를 인정하는 건 지쳤어요. 남들이 말했다고 해서 받아들이진 않을 거예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내가 해볼 때까진 절대 모르는 거예요. 차라리 중력에 맞서겠어요. 난 중력에 맞설 거야. 작별인사를 해줘요. 당신은 날 끌어내리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 말씀하신 가사와 아주 비슷하죠?” 음악을 듣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뭘 듣고 있어?” 그녀의 남편이 대답했다. “노래, 노래를 듣고 있잖아.” 그들은 <중력에 맞서서>를 리플레이시켰고, 그녀는 준비해놓은 탁자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강사가 식사하던 도중 남편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그녀의 남편이 불숙 말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똑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모르는 것이 없습니까? 저에게도 좀 알려주세요.”
그녀의 남편은 숟가락을 탁자 위에 얼려두고, 깍지를 기고 그위에 턱을 받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했지만, 그는 마치 무언가 보인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남편을 보자, 그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다시 한번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전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엔 저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그렇겠죠. 제가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라디오에 보낸다한들,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겠죠.”
“어떤 이야기를 보내셨습니까?”
“웃기는 이야기들이죠.”
“좀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녀는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원하신다면.”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웃기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 밤, 저녁식사가 놓인 작은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잠시 후에 강사는 전화를 한 통 받았고, 곧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바깥까지 그를 배웅하러 나갔고, 그의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저 멀리 사라져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지난 몇 년간의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남편은 <중력에 맞서서>를 들으며 자판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CD플레이어를 꺼버렸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분은 어쩌면 그렇게 모르는 데 없을까? 아내분도 아주 공부를 오래 하신 분이래.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아들도 아주 똑똑하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여보,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똑똑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아마 우리는 그렇게 똑똑한 아이는 낳을 수 없을 거야. 그렇겠지? 왜냐하면 우리는 멍청하니까.” 그녀는 남편의 눈이 먼 것도, 그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형편인 것도, 그리고 그 밖에 그들이 겪고 있는 불행의 모든 원인이 오로지 그들의 멍청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고, 또 앞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그녀의 남편은 계속 자판만 치고 있었다.
*
그는 그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 시력을 잃은 남편의 손놀림은 아주 기묘했지만, 그것을 대하는 아내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는 마치 완전한 정상인 같았다.
“차라리 내게 어디 가느냐고 한 번이라도 물어보지 그랬어? 그럼 당신은 그때 매주 수요일마다 아이를 혼자 놔두고 나를 따라다녔다는 거야?”
“결국 다 내 탓인 거죠.”
“돌아가자. 집으로 돌아가야 해.”
그들의 차는 여전히 비상등도 켜지 않고, 와이퍼도 작동하지 않는 상태로 갓길에 서 있었다. 비는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여보, 여기서 이렇게 있는 거 너무 위험해. 죽을 수도 있다고.”
“상관없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그 여자가 내가 처음 들어보는 노래에 대해 말했어. 그리고 <BlueShoe>에 대해 말했어. 그거 정말 귀한 잡지잖아. 그걸 한번 보고 싶었고,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났던 것뿐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집에 들어갔을 때, 아주 안 좋은 냄새가 났어. 불쾌하고 기괴한 냄새였어. 우리 집으로 당장 돌아오고 싶었다고. 거기엔 그런 의미밖에 없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거기엔 불쌍한 부부가 있었을 뿐이야.”
“알아요, 눈이 먼 남편.”
“어떻게 알아?”
“여보, 그 여자랑 잤어요?”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이마와 반듯한 콧날과 그리고 가느다란 목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당신도 봤을 거 아냐. 못생기고 가난한 여자였어. 나와 어울리지 않아.”
그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녀는 다시 핸들 위로 엎드렸다. 그는 폭우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 번개 소리와 모든 것이 멈춰버린 자신들의 차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차는 이 세계의 아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대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여자를 만난 건 그때가 마지막이야. 그 집에서 밥을 먹는데 우리 집에 불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고, 난 곧바로 돌아왔어. 그게 다야.”
그녀는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로 물었다.
“그 여자에게 다시 연락한 적도 없어요?”
“그래.”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며칠 후 전화해보았지만 그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후 그 집을 직접 찾아갔지만, 결국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좋아, 우리 아들을 데리러 가자. 당장 데리고 오자.”
그는 이제 그저 이곳을, 이 자리를 벗어나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녀를 정말로 때려야 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그애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있죠. 우리는 그애를 영영 잃어버렸어요.”
그들의 차는 아주 오랫동안 거기, 그런 식으로, 잠시 이 세계에서 사라져 있었다.
*
부부가 돌아간 뒤, 미스터 장은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부부가 먹은 디저트 접시, 와인잔, 포크와 스푼 등을 주방으로 가져가서 싱크대에 넣어두었다. 식탁보를 걷어냈고, 새로운 식탁보를 덮고 빳빳해질 수 있도록 분무기로 물을 좀 뿌려두었다. 그리고 모양을 만들어놓은 새 냅킨을 세워두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앉았던 의자를 테이블 안으로 잘 밀어넣었다. 그는 매장의 전등 스위치를 모두 내리고 나서 주방으로 돌아와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를 다 끝낸 뒤 미스터 장은 할로겐 등만 남겨놓고 주방의 다른 전등불을 꺼두었다.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만들고, 싱크대 앞에 간이의자를 끌어와서 앉았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간간이 천둥 번개가 치고 있었다. 미스터 장은 자신과 상관없는 이 세상의 불행들, 이를테면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떠내려가는 사람들과 부서진 간판의 파편이나 나무 때문에 다친 사람들, 혹은 들이친 물 때문에 집을 잃거나, 자동차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했다. 또한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범죄와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 병으로 쓸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원치 않은 아이를 낳고 있는 여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리고 폭우 속에서 슬픔과 분노 때문에 멈춰버린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미스터 장은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마셨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평안한 삶에 깊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