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시문은 1650년경에 7대손 朴崇古에 의하여 收拾ㆍ編輯되었고, 「六先生遺稿」 3권 3책 중 제1권 1책으로 合集되어 1658년 외손 李慶億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六先生遺稿」는 권수에 序와 凡例가 있고 권1에 「朴先生遺稿」, 권2에 「成先生遺稿」, 권3에 李塏ㆍ河緯地ㆍ柳誠源ㆍ兪應孚의 詩文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附錄에는 6인의 행력과 遺事를 내용으로 한 ‘事實’이 있고, 권말에 金尙憲의 跋을 붙였다. 「六先生遺稿」는 편집 즉시 간행되지 못하고 10여 년이 지난 1658년에 編者가 永春縣監으로 부임하여 관찰사 李慶億의 도움을 받아 간행하였으며, 이때에 다시 李慶億과 編者의 跋을 붙였다. 이 「六先生遺稿」중 권1에 수록된 저자의 시문은 애당초 편자의 부친인 朴宗男이 수습한 유문과, 1648년(인조 26)에 편자가 鄭崑壽의 후손 鄭惟顯의 집에서 입수한 「平陽逸稿」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는 鄭崑壽가 평소에 모아 두었던 것이라 하는데, 편집 형태나 수록내용 등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본 문집에는 詩 29수와 文 42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문체에 따라 詩ㆍ賦ㆍ箋ㆍ箴ㆍ頌ㆍ文으로 분류하여 편차하였다. 문집 凡例에 의하면 수집한 시문의 분량이 적은 탓으로 일일이 문체에 따라 세분하지 않고 다만 인용한 서명을 수록된 시문 題下에 밝혔으며, 편집대본들을 傳寫하는 과정에서 오류로 인정되거나 의심 나는 부분에 대해서도 함부로 고치지 않고 傳本 그대로의 謄寫를 원칙으로 하였다고 한다.
初刊 이후로도 저자의 시문만을 별도로 간행하지는 않은 듯하다. 반면에 合集인 「六先生遺稿」는 그 후로도 補刻ㆍ追刻을 거쳐 간행되었다. 1792년(정조 16)에 저자의 후손 朴基正이 白雲洞書院(順興)에 보관되어 있던 초간 板木을 彰節書院(寧越)으로 옮기고 六臣의 遺墨(7件)을 補刻하여 강원도 관찰사 尹師國의 발과 함께 간행하였으며, 그 후 1879년(고종 16)에는 후손 朴海哲이 마멸된 刻板을 補修하고 洪在鉉과 李寅龜의 발을 붙여 간행하였다.《補刻本》 현재 流傳하는 「朴先生遺稿」는 板式 및 내용으로 미루어 모두 「六先生遺稿」에 수록된 문집과 동일본으로서, 이를 분리하여 製冊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서의 저본은 1658년에 간행된 「六先生遺稿」3권 3책 중 合集된 「朴先生遺稿」1권 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