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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숙종실록 23권, 숙종17년 9월 2일 계축 2번째기사 1691년 청 강희(康熙) 30년
사육신의 무덤과 노산 대군의 묘에 제사하게 하다
임금이 노량진(露梁津)을 건너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무덤이 길 옆에 있는 것을 보고 그 절의(節義)에 감동하여 특별히 명하여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게 하고, 이어서 명하여 근시(近侍)를 노산 대군(魯山大君)의 묘(墓)에 보내어 제사하게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김덕원(金德遠)이 말하기를,
"육신의 무덤은 예전부터 전하여 오는 말이 있기는 하나, 그래도 명백히 의거할 만한 증험이 없습니다.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인 고(故) 군수(郡守) 박숭고(朴崇古)가 일찍이 이를 위하여 비석을 세워 표지(表識)하였으나 감히 조상의 무덤이라고 틀림없이 말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 사당에 제사하게 하였다. 사당은 강가에 있어 무덤과는 언덕하나 사이로 가까운데, 선비들이 일찍이 세운 것이었다. 또 예관(禮官)이 복관(復官)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함에 따라, 전교하기를,
"육신은 명(明)나라의 방효유(方孝孺)165) 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곧 복관하고, 사당의 편액(扁額)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명현(柳命賢)이 다른 대신(大臣)에게 묻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물을 필요가 없다 하고 결단하여 행하였으니, 매우 성대한 거조(擧措)이다. 이윽고 승지(承旨) 목창명(睦昌明)·김원섭(金元燮)이 청대(請對)하여 번갈아 아뢰기를,
"여러 조정에서 서두르지 않은 데에는 은미한 뜻이 있는 듯하니, 이제 쉽사리 거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고, 힘껏 청하여 마지않으니, 임금이 비로소 전에 명한 것을 우선 멈추고 노산묘(魯山墓)의 제사만을 거행하게 하였다. 목창명이 전례를 본떠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보내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3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52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풍속-예속(禮俗)
[註 165]방효유(方孝孺) : 명초(明初)의 학자로서, 혜제(惠帝)에게 중용되었는데, 성제(成帝)가 제위(帝位)를 찬탈(簒奪)하고, 방효유를 불러 조서(詔書)를 초(草)하게 하니, 붓을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죽이면 죽을 뿐이고, 조서는 초할 수 없다."하였음. 마침내 성제가 저자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게 하였는데, 족친과 벗으로서 연좌되어 죽은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음.
176.숙종실록 23권, 숙종 17년 12월 6일 병술 2번째기사 1691년 청 강희(康熙) 30년
성삼문 등 사육신을 복작하고, 관원을 보내 치제하게 하다
해조(該曹)에 특별히 명하여 성삼문(成三問) 등 여섯 사람을 복작(復爵)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사당의 편액(扁額)을 민절(愍節)이라 내리고,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나라에서 먼저 힘쓸 것은 본디 절의(節義)를 숭장(崇奬)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신하가 가장 하기 어려운 것도 절의에 죽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저 육신(六臣)이 어찌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거스를 수 없는 것인 줄 몰랐겠는가마는, 그 마음이 섬기는 바에는 죽어도 뉘우침이 없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 충절(忠節)이 수백 년 뒤에도 늠름(凛凛)하여 방효유(方孝孺)·경청(景淸)205) 과 견주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선왕의 능(陵)에 일이 있어서 연(輦)이 그 무덤 옆을 지남에 따라 내 마음에 더욱 느낀 것이 있었다. 아! 어버이를 위하는 것은 숨기는 법인데, 어찌 이 의리를 모르랴마는, 당세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는 분부에 성의(聖意)가 있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실로 세조(世祖)의 유의(遺意)를 잇고 세조의 성덕(盛德)을 빛내는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3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57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註 205]경청(景淸) : 성제(成帝)가 제위(帝位)를 찬탈(簒奪)하자, 방효유(方孝孺) 등과 순국(殉國)하기로 약속하였다가, 혼자 칼을 품고 궁궐에 들어갔는데, 성제가 경청을 의심하여 몸을 수색하게 하고, 칼을 찾아낸 다음 이를 힐책하니 경청이 "옛 주인을 위해 복수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하였음. 성제가 노하여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그 족친까지 아울러 죽였음.
177.숙종실록 23권, 숙종 17년 12월 21일 신축 1번째기사 1691년 청 강희(康熙) 30년
도목정을 행하여, 삼남·서북의 인재와 사육신의 후예도 수용하게 하다
임금이 친히 도목정(都目政)을 살폈다. 양전(兩銓)211) 에 명하여 삼남(三南)·서북(西北)의 인재와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후예도 수용(收用)하게 하였다. 조식(趙湜)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3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57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註 211]양전(兩銓) : 두 전조(銓曹), 곧 이조(吏曹)와 병조(兵曹).
178.숙종실록 24권, 숙종 18년 3월 25일 갑술 2번째기사 1692년 청 강희(康熙) 31년
고 부총관 성승의 관작을 복구하다
고(故) 부총관(副摠管) 성승(成勝)의 관작(官爵)을 복구했다. 성승은 성삼문(成三問)의 아비로서 육신(六臣)들이 죽음을 당하였을 적에 성승도 끼었었다. 임금이 이미 육신의 관작을 복구하자, 홍주(洪州)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기를,
"성승의 분묘(墳墓)가 본주(本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데 그가 살던 집과의 거리가 가까와 몇 리뿐이고, 성삼문의 아내도 그 옆에 장사했는데, 성승 부자(父子)의 가산(家産)은 모두 관아에서 몰수했었습니다. 본도(本道) 연산현(連山縣)에 있는 성씨(成氏) 가문의 전민(田民)이 지금 충훈부(忠勳府)에 속해 있는데, 듣건대 그 노비[臧獲]들이 지금도 해마다 한 차례씩 초혼제(招魂祭)를 차린다고 합니다. 육신들의 관작을 이미 복구하셨고 보면 성승에게도 다르게 할 것이 없습니다. 또 그 전민(田民)도 도로 내주어 남아 있는 분묘에서 나무하거나 목축하는 것을 금할 수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해부(該府)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복주(覆奏)하기를,
"성씨 가문의 전토(田土)를 지금 마땅히 내주어야 하는데, 노비(奴婢)에 있어서는 의거할 만한 문서가 없으니, 본부(本府)의 노비 중에 연산현(連山縣)에 있는 사람들을 특별히 나누어 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했다.
【태백산사고본】 26책 2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63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농업-전제(田制) / 신분-천인(賤人)
179.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5월 27일 갑자 2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유학 이숙이 조광조·박태보 등의 충절과 합향을 상소하다
유학(幼學) 이숙(李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이 조광조(趙光祖)가 참소에 걸려 배척을 당하여 포부를 안은 채 지하로 돌아간 것은 바로 송시열(宋時烈)과 전후에 있어 서로 같습니다. 청컨대, 송시열을 조광조의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배식(配食)하도록 허가해 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고(故) 목사(牧使) 박태보(朴泰輔)·고 판서(判書) 오두인(吳斗寅)과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세화(李世華) 등은 피를 흘리며 장소(章疏)를 올리고 머리를 짓찧으며 극력 간하여 성삼문(成三問) 등의 사육신(死六臣)과 서로 부합합니다. 증직(贈職)과 정려(旌閭)의 은전을 양신(兩臣)에게는 이미 허가하였는데, 유독 이세화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정표(旌表)의 규정은 생존하고 사망한 것에 관계가 없으니, 청컨대, 박태보·오두인을 육신(六臣)의 민절사(愍節祠)에 합향(合享)하도록 허가하시고 또 이세화의 정려(旌閭)를 허가해 주소서."
하고, 끝에 아뢰기를,
"고(故) 감찰 연최적(延最績)은 모기와 등애처럼 미력(微力)함은 헤아리지 않고 시퍼런 칼날[白刃]도 밟을 수 있다는 것만 알았으며, 국법의 준엄한 것은 생각치 않고 끊어진 윤리를 부식하려고만 하였습니다. 일에 따라 늘어놓아 행여 전하께서 깨달으시기를 기대하며 육신은 문드러지고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였으니, 족히 박태보 등과 백중(伯仲)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국정(國政)을 고쳐 새롭게 하는 시기를 당하여 정려(旌閭)의 은전을 유독 연최적에게만 내리지 않으시니, 신은 삼가 민망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려보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송시열을 선정에게 배식(配食)하는 일은 한 선비의 상소로 인하여 성급하게 경솔한 의논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세화가 홀로 생명을 보전하여 성조(聖朝)의 명재상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천행(天幸)이라 하겠으나, 죽은 이를 대우하는 것과는 구분할 바가 있을 듯합니다. 박태보·오두인의 죽음을 성삼문 등에 비유한 것은 처지(處地)를 바꾸면 다 그러하리라는 것은 알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이미 같지 않고 일도 또한 다르니 향사(享祀)의 거행은 더욱 마땅히 신중을 기하여야 합니다. 연최적은 형벌을 받고 죽으면서도 끝내 말을 바꾸지 않았으니, 또한 족히 일절(一節)의 선비는 된다고 하겠습니다. 정표(旌表)의 은전은 비록 논의할 수 없더라도 증작(贈爵)은 혹시 원통하게 죽은 사람에게 내릴 수 있는 일이니, 이것은 오직 전하의 재가(裁可)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여 연최적에게 증작을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6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311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풍속-예속(禮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180.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2월 10일 병진 1번째기사 1697년 청 강희(康熙) 36년
강관 임윤원·조태채가 수령을 가려 뽑는 방법을 진달하다
옥당(玉堂)의 관원을 소대(召對)하였다. 강관(講官) 임윤원(任胤元)·조태채(趙泰采)가 수령을 가려 뽑는 방법을 진달하였다. 조태채가 아뢰기를,
"처음 벼슬한 자를 승진시켜 수령으로 삼으려면, 마땅히 먼저 처음 벼슬하는 이를 가려 뽑아야 합니다."
하고, 임윤원은 말하기를,
"전함(前銜)358) 을 다시 수령으로 삼으려는 자는 앞서의 실적을 상고하여 가려 뽑아 임명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기고,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도록 명하였다. 조태채가 성삼문(成三問)의 제사를 맡아 지내는 자를 거두어다 기용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33책 31권 65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477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註 358]전함(前銜) : 전임(前任).
181.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9월 30일 신축 1번째기사 1698년 청 강희(康熙) 37년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할 것을 청한 전 현감 신규의 상소문
전 현감(縣監)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마음에 품고 있던 바를 진달하였는데, 비답(批答)을 내리기 전에 빈청(賓廳) 대신(大臣) 이하가 마침 입시하였다. 임금이 환시(宦侍)에게 명하여 그 상소를 대신에게 보이도록 했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옛날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은 하늘이 내신 성군(聖君)으로서 하청(河淸)200) 의 운(運)을 만나 화란(禍亂)을 평정하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돌아갔습니다. 노산군(魯山君)201) 께서는 어린 나이에 보위(寶位)에 올랐으나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하시고 하늘의 명에 응하고, 사람의 뜻에 따라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위(禪位)한 것을 본받아 별궁(別宮)으로 물러나 상왕(上王)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때 세조께서는 겸허하게 이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여 종팽(宗祊)의 부탁에 의하여 하는 수 없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목하고 겸허하게 사양하신 미덕(美德)은 요·순[唐虞]의 훌륭함과 맞먹는데, 그 선위를 받은 교서(敎書)를 살펴보면 또한 만세(萬世)에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육신(六臣)202) 의 변(變)이 뜻밖에 나오게 되었으며, 권남(權擥)과 정인지(鄭麟趾) 등이 은밀히 보좌한 논의가 또 따라서 이를 격동시켜, 세조께서 상왕을 보호하려는 은혜로 하여금 유종의 미(美)를 거둘 수 없게 했으니, 육신의 복위(復位) 계획은 다만 노산군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으므로, 충신(忠臣)·의사(義士)의 감회가 지금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는 것은 성상께서 환히 알고 계시어 이미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운명은 길고 짧음이 있고 일은 꺼리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한 조각 외로운 분묘(墳墓)가 저 멀리 황폐한 곳에 있은 지 이미 50여 년이 되었으나, 향화(香火)가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종(中宗)께서 등극하시고서 비로소 폐지되었던 은전(恩典)을 거행케 하여, 특별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제물을 갖추어 치제(致祭)케 하였습니다. 그 후에 노산군에게 후사를 세워주자는 논의가 이약빙(李若氷)의 상소에서 처음 발의되었는데, 그 때의 대신(大臣)들은 올바르게 의논하지 못하여 심지어 과감하게 말한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불측(不測)한 죄를 받게까지 하였으니, 아!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선조(宣祖) 때에는 또 관찰사(觀察使) 정철(鄭澈)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묘표(墓表)를 개수(改修)하고 제물은 1품(一品)의 의식을 쓰게 하였으니, 우리 열성(列聖)께서 추원 보본(追遠報本)203) 의 은전이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으며, 지하(地下)에서의 한(恨)도 거의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서는 오히려 다하지 못한 바가 있다고 여깁니다. 무릇 왕위에 올랐던 임금으로서 재앙을 만나 폐출(廢黜)된 경우, 한(漢)나라의 창읍왕(昌邑王)과 제(齊)나라의 울림왕(鬱林王)과 우리 나라의 연산군(燕山君)·광해군(光海君)과 같은 이는 모두 혼암(昏暗)한 덕(德)으로 법도를 망쳤으므로 자신이 천명(天命)을 끊은 것이니, 그 칭호(稱號)를 깎아내리고 지위를 낮추어 죽지 않을 정도로 대해주면서, 제(帝)는 왕(王)으로 강등이 되고 왕은 군(君)으로 강등되는 것도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에 선위(禪位)를 한 임금과 같은 경우는 일찍이 말한 만한 실덕(失德)이 없는데, 혹은 일시(一時)의 권의(權宜)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말하기 어려운 사세(事勢)에 몰려서 자리를 사양하고 한가롭게 나가 있는 이야 주(周)나라·한(漢)나라 이후 어느 시대에는 없었겠습니까만, 존호(尊號)의 일컬음을 깍아내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어찌 선위한 일은 쫓겨난 것과는 다르고, 사양한 자취는 적대 관계보다 다르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신(臣)은 굳이 시대가 먼 전대(前代)의 일을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원나라 순제(順帝)에게,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공양왕(恭讓王)에 대해 살아서 대할 때나 죽어서 장사지냄에 있어 모두 제왕(帝王)의 예(禮)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성(異姓) 사이에 대(代)가 바뀔 때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구나 왕실(王室)의 가까운 지친(至親)으로서 주고받는 성대한 일을 행하였는데, 도리어 왕호(王號)를 없애는 것이 옳겠습니까? 노산군이 온 나라에 군림(君臨)한 것은 하루아침이 아니었으며, 온 국민이 모두 사랑하고 추대할 줄 알았으며, 이미 왕위를 사양한 뒤에도 오히려 상왕(上王)이라고 일컬었으니, 당시에도 왕호(王號)를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가령 육신(六臣)이 변을 꾸미는 일이 없었고, 노산군이 그 천명(天命)을 끝까지 누리게 되었으면 장사나 제사 때에 반드시 왕례(王禮)를 사용했을 것은 단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 육신은 천명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복위를 꾀했다가 다만 그 화를 재촉했을 뿐인데, 노산군이야 어찌 거기에 관여함이 있었겠습니까? 관고(貫高)의 변(變)에 조오(趙敖)가 함께 연좌되지 않았던 것은204) 그 모의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까? 그러니 당시 노산군에게 왕호(王號)를 다시 일컬을 수 없었던 것은 혹 사세에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어찌 오늘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성상께서 이미 육신에 대해서는 그 절의(節義)를 아름답게 여기셔서 특별히 정포(旌褒)하시고 사당을 세우도록 윤허(允許)하여 빛나는 편액(扁額)까지 하사(下賜)하셨으니, 육신의 고충 열지(孤忠烈志)는 성상에게 인정을 받아 백대(百代) 이후에까지 더욱 빛나게 된 것입니다. 아! 저 옛 임금을 위하여 절의에 죽은 육신(六臣)은 이미 성상께서 정포해주시는 아름다운 은혜를 받았는데, 더구나 그 육신의 옛 임금으로서 그 모의도 알지 못하였으며, 일찍이 그 덕에 하자도 없었는데도 오히려 편안히 죽지도 못하였고, 제사 때에 왕례(王禮)를 쓰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하(殿下)의 부족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시대가 바뀌고 일이 지나가 언덕은 이미 평평해졌고 쑥대가 우거지고 풀이 무성하여 여우와 토끼들이 뛰어다니며, 봄바람의 두견새 소리는 시인(詩人)들의 싯귀에 들어가며 보리밥 한식절(寒食節)에는 시골 늙은이들의 탄식 소리를 되삼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무한한 울분이 지하(地下)에서 엉키고 맺혀서 백세(百世)토록 변화하지 않고 있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또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께서 양양(洋洋)하게 오르내리실 적에 외로운 고혼(孤魂)을 다 슬퍼하지 못함이 있는지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왕호(王號)를 추복(追復)하여 제사 때에는 왕례를 쓰며, 그 침원(寢園)을 봉하여 수호군(守護軍)을 더 두고 별도로 사당을 세워서 그 의물(儀物) 갖추는 것을 한결같이 명나라에서 경태제(景泰帝)205) 를 추복한 고사(故事)와 같게 한다면, 법으로 보더라도 참람함이 되지 않고 옛일을 참고하더라도 진실로 인정이나 예절에 부합되는 것이니, 신(神)을 위로할 수가 있게 되어 천심(天心)이 기뻐할 것이며, 인정(人情)도 반드시 흡족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臣)은 중종(中宗)의 폐비(廢妃) 신씨(愼氏)206) 의 일에 대하여 더욱 가슴 아프게 슬퍼하고 있습니다. 연산군(燕山君)이 음학 무도(淫虐無道)하여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우리 중종 대왕께서 밖으로는 군신(群臣)들의 추대(推戴)를 받고 안으로는 모후(母后)의 명을 받아, 잠저(潜邸)에서 용비(龍飛)하여 대통(大統)을 이어받았던 것입니다. 부인(夫人) 신씨(愼氏)는 배필이 된 지 여러 해였으나, 곤범(壼範)에 결함이 없어 곤위(壼位)에 올라, 명분이 올바르고 의리에 순응하여 왕후[翟褕]의 높은 자리에 앉아 신민(臣民)의 하례를 받았으므로, 종묘 사직에 주인이 있고 나라 사람들이 기대를 하였었는데, 원훈(元勳)이었던 박원종(朴元宗) 등은 다만 자신들의 문제만 생각하고 대의(大義)를 돌보지 않고서 종사(宗社)의 계획을 핑계삼아, 정청(庭請)의 논의을 주도하여 군부(君父)를 협박해서 마침내 폐출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경장(更張)하는 초기에 근본을 단정히 해야 하는 교화를 다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삼가 중종께서 정청(庭請)에 답한 내용을 보면,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였으니, 중종께서 그리워하여 차마 버리지 못한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훈신(勳臣)의 강청(强請)에 못이겨서 은혜를 끊고 인정을 자르고서 폐출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박원종 등이 제멋대로 협박한 죄는 어떻게 정의(正義)로운 선비의 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삼가 그 때에 정청(庭請)의 계청(啓請)을 보니, ‘의거(義擧) 때에 신수근(愼守勤)을 먼저 제거시킨 것은 대사(大事)를 성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딸이 대내(大內)에 입시(入侍)하고 있으니, 만약에 곤위(壼位)에 있게 되면 인심이 의구심을 갖게 되는데, 인심이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종사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협박하는 말입니다. 당초에 신수근을 죽인 것도 이미 반드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데, 또다시 그것으로써 신씨를 폐출시키는 구실의 자료로 삼고 있으니, 신은 신씨가 연좌된 죄명은 무엇이며 폐출된 것은 무슨 의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옛날 한 소제(漢昭帝) 때에 상관안(上官安)207) 이 모반(謀反)하여 멸족(滅族)의 화를 당했으나, 상관후(上官后)208) 는 그 일에 관여하여 들은 적이 없으므로 폐출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심온(沈溫)도 태종 대왕(太宗大王)에게 죄를 입었으나,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모의(母儀)는 처음처럼 변함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신수근의 죄는 종사에 관계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신씨에게 연루될 수 있겠습니까? 훈신(勳臣)들이 그러한 역모로 억측하여 협박한 것은 국모(國母)의 아버지를 죽인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이 조정에서 있으면서 깊이 두려운 마음을 품고서 훗날의 근심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죄명도 없고 경우에도 없는 말을 연출하여 몸을 보전하고 은총을 굳히는 계획을 삼았으나, 그것이 결국 스스로 임금을 무시하는 행위에 빠지고 만세(萬世)에 죄를 얻게 됨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은 군자(君子)였습니다. 장경 왕후(章敬王后)209) 가 돌아갔을 때에 상소하여, 박원종 등의 임금을 협박한 죄를 거론하며 신씨가 죄 없이 폐출당한 사유를 극진하게 말하여 위호(位號)를 회복할 것을 계청(啓請)했었는데, 그 말이 엄격하고 강직하여 오늘날 읽어보아도 오히려 늠름한 생기(生氣)가 있습니다. 아깝게도 그렇게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논의도 당시의 모순된 의논에 의해 막혀서 시행되지 아니하였으니, 신은 매우 애통하게 여깁니다. 그후에 여러 성왕(聖王)이 서로 대를 이어오면서 빠진 전례(典禮)를 강구(講究)하였으나, 이 일만은 추복(追復)하자는 논의가 없으니, 신도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당시에 신씨를 폐출시킨 것은 이미 중종의 뜻이 아니니 위호를 추복하는 것이 어찌 중종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도 때로는 혹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으니, 오래 되었다고 하여 어렵게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서는 신씨를 추복하는 일은 늦출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만약 조종(祖宗)들도 미처 못한 일이라 하여 미루신다면, 신은 거기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릉(貞陵)210) 은 폐위(廢位)된 지 2백 년이 넘었으나 현종(顯宗)께서 복위(復位)시켰고, 소릉(昭陵)211) 은 폐위(廢位)된 지 50년이 넘었으나 중종께서 복위시켰습니다. 그 밖에 선비들이 억울하게 화를 당한 이로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같은 무리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뒤에는 모두 신원되어 여러 조정에서 정포(旌褒)와 추증(追贈)을 받지 않음이 없었고, 그 일이 선왕조(先王朝)에 관계된 일이라고 하여 고쳐야 함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신이 논한 바 두 가지는 그것이 전하의 가법(家法)으로서 전례(典禮)에 있어 거행(擧行)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명의(名義)에 있어서 추복(追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이 상소를 가지고 조정 대신들에게 널리 물으셔서 그냥 두었던 전례(典禮)를 수거(修擧)하여 속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신다면, 비단 우리 성상께서 전대에 빛나고 후세에까지 빛이 날 성대한 덕이고 아름다운 일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오늘날 인심(人心)을 위로하고 천신(天神)을 감동시킬 크나큰 관건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말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일이 지극히 중대한 데 관계되므로,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널리 물어 상의해서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로소 비답을 내리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니, 널리 문의해서 조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을 참고하게 하였다. 승지(承旨) 송상기(宋相琦)가 청하기를,
"우리 나라의 문집(文集)과 만필(漫筆) 중에서 참고가 될 만한 문자(文字)는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조사해 넣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32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05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역사-전사(前史) / 변란-정변(政變)
[註 200]하청(河淸) : 중국 황하(黃河)의 물이 맑아지면 성군(聖君)이 나오게 된다는 고사로, 성군이 나오는 운수.
[註 201]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복위 이전의 군호(君號).
[註 202]육신(六臣) : 세조 2년(1456)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육신(六臣: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을 말함.
[註 203]추원 보본(追遠報本) :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함. 즉 선대 조상에게 해야 할 도리를 하는 것을 일컫는 말.
[註 204]관고(貫高)의 변(變)에 조오(趙敖)가 함께 연좌되지 않았던 것은 : 관고(貫高)는 중국 한(漢)나라 때 조왕(趙王) 장오(張敖)의 신하. 관고는 고제(高帝)가 조왕을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반란을 일으켜 죽게 되었는데, 끝까지 왕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여 조왕은 이 사건에 연좌되지 않았음. 여기에서 조오(趙敖)라고 한 것은 조왕 오(敖)라는 뜻임.
[註 205]경태제(景泰帝) : 명(明)나라 대종(代宗).
[註 206]신씨(愼氏) : 단경 왕후(端敬王后)신씨를 가리킴.
[註 207]상관안(上官安) : 상관후(上官后)의 아버지.
[註 208]상관후(上官后) : 한 소제(漢昭帝)의 후(后).
[註 209]장경 왕후(章敬王后) : 중종 계비(中宗繼妃) 윤씨(尹氏).
[註 210]정릉(貞陵) : 조선 태조의 비 신덕 왕후(神德王后).
[註 211]소릉(昭陵) : 문종(文宗)의 비 현덕 왕후(顯德王后).
182.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10월 23일 갑자 1번째기사 1698년 청 강희(康熙) 37년
종친과 문무 백관을 대정에 모아 노산군과 신비의 위호를 추복하는 일을 논의하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을 대정(大庭)에 모아, 노산군(魯山君)과 신비(愼妃)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일을 문의하였다.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삼가 《실록(實錄)》의 등본(謄本)을 보건대, 노산군(魯山君)으로 위호(位號)가 강등(降等)된 것은 송현수(宋玹壽)의 변고(變故)238) 가 있은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중종(中宗) 때에 노산군에게 후사(後嗣)를 세워 주는 문제를 의논했는데, 상신(相臣) 정광필(鄭光弼)이 말하기를, ‘후세에서는 경솔하게 의논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후사를 세워 주는 문제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와 같았는데,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예전(禮典)인데 이제 도리어 경솔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신비(愼妃)를 복위(復位)시키는 논의는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의 의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는 중종이 당저(當宁)해 있었고 곤위(壼位)가 바야흐로 비어 있었는데, 그때 승정원(承政院)에 내린 하교(下敎)에 이르기를, ‘이것은 큰 일인데 어찌 대신(大臣)의 말을 듣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 이후에는 일찍이 위호를 추상하는 논의가 조정에 들리지 아니하였는데, 그것은 어찌 그 사체와 예절(禮節)이 김정이 상소했을 때와 같지 아니하여서 그러한 것이었겠습니까? 예(禮)로써 따지면 분명한 문자와 정확한 증거를 근거삼을 만한 것이 없고, 일로써 따지면 진실로 조종조(祖宗朝)의 처분에 관계됩니다. 조주(祧主)를 영녕전(永寧殿)에 곧바로 올리는 한 문제는, 송(宋)나라의 곽후(郭后)의 일239) 을 유창(劉敞)이 의논한 것과 그 미안하고 대처하기 어려운 것이 마치 오늘날 의논하는 자의 논의와 같으니, 더욱더 십분 신중하여 지당(至當)하게 되도록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세백(李世白)은 말하기를,
"노산군(魯山君)이 선위(禪位)했을 때의 일은 대체로 시골 마을의 아낙네와 어린이들도 지금까지 슬퍼하고 있으니, 이는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대의 제왕(帝王)은 비록 선위한 이성(異姓)의 임금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위호를 추후하여 깎아내린 일이 없으며, 명나라의 일도 예를 삼을 만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 제기되고 있는 숭봉(崇奉)의 논의도 마땅히 다를 것이 없습니다만, 다만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에 관계된 것이므로, 신자(臣子)로서는 쉽게 입을 열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신비(愼妃)의 일에 이르러서는 본래 중종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김정(金淨) 등의 상소를 살펴보면 공의(公議)의 소재(所在)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는 진실로 추복(追復)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였으나, 후세에 있어서는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 제신(諸臣)들이 인용(引用)한 바의 유원부(劉原父)240) 의 의논과 정이천(程伊川)241) 의 말은 가장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입니다. 이렇게 추측해보면, 이제 와서 추거(追擧)한다는 것은 아마도 예(禮)의 정도(正道)를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장(閔鎭長)은 말하기를,
"수백 년 동안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그 두 일에 대해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찌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본성(本性)에 있어서 속일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대(前代)의 고사(古事)에도 분명히 근거할 만한 것이 있으니, 위호(位號)를 추복하는 것은 계지 술사(繼志述事)242) 의 도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역대의 임금이 서로 계승하면서 오래도록 거행하지 아니하였던 것인데, 하루 아침에 결단하여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미안함이 있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윤지선(尹趾善)은 질병으로 인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사관(史官)이 명을 받들고 가서 물으니, 말하기를,
"당초에 노산군(魯山君)을 강등(降等)시켜 폐위(廢位)시킨 것은 성삼문(成三問) 등 여섯 신하의 일에서 비롯된 것인데, 성상께서 이미 그 신절(臣節)을 포상하셨으니, 그들의 옛 임금에 대해서 다시 혐의를 남겨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경태제(景泰帝)의 위호를 추복시킨 것과 대략 서로 비슷하니, 그것이 또 옛 예로서 충분히 증거가 될 만한 것입니다. 신비(愼妃)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 폐위를 계청했을 때에 중종(中宗)께서 상당히 난처한 뜻을 보였으며, 《실록(實錄)》에 기록된 것만 해도 충분히 고증이 되어 믿을 수가 있으니, 위호를 추가하여 청묘(淸廟)243) 에 올려서 배향(配享)하는 것은 인정과 예의로 헤아려 볼 때, 진실로 유감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臣)은 예전(禮典)에 실로 밝지 못하오니, 감히 억측의 견해로 논단(論斷)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신완(申琓)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魯山大君)이 선위(禪位)한 뒤의 일은 모두 신료(臣僚)들의 계청(啓請)에 의한 것이고, 신비(愼妃)를 폐위시킨 것은 사실 세 공신(功臣)이 후환(後患)을 염려하여 몸을 보전할 계책이었지 중종의 본뜻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상(聖上)께서 특별히 배려하셔서 이렇게 널리 자문을 구하시니, 수백 년 동안 한이 맺혔던 인심(人心)이 거의 조금이라도 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건대, 나라의 역대 임금이 계승되고 큰 선비와 훌륭한 보필들이 대대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일찍이 이에 대해 의논한 적이 없었던 것은 어찌 의논이 감히 거기에 미칠 수가 없었고, 일도 지극히 말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조종조(祖宗朝)에서 시행하지 못했던 예를 아마도 경솔하게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우참찬(右參贊) 최규서(崔奎瑞)는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일은 명나라에서 경황제(景皇帝)를 추복(追復)한 것과 아주 가깝기는 하나, 일은 다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으며, 신비(愼妃)의 일은 송(宋)나라 원우(元祐) 때에 맹황후(孟皇后)를 복위(復位)시킨 것과 서로 같으나, 선유(先儒)들의 정론(定論)이 이미 있었으니, 오늘의 일에 끌어다가 의논 할 수는 없습니다. 지극히 중대한 일을 억측으로 논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고,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과 신비의 일을 온 나라 사람이 슬퍼함은 세월이 오래 될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는데, 명나라에서 경황제(景皇帝)를 복위(復位)시킨 것과 우리 나라 중종께서 소릉(昭陵)을 복위시키고, 현종(顯宗)께서 정릉(貞陵)을 복위시킨 일이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므로, 후세에 할말이 있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근거할 수 있는 전례를 따라 여러 대에 미처 못했던 일을 거행하는 것은 아마도 계지 술사(繼志述事)하는 성덕(聖德)에 빛이 날 듯합니다."
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서종태(徐宗泰)는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위호(位號)를 복위시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인심(人心)이 슬픔을 품고 있은 지가 2백여 년이 되었으니, 지금 추복할 것을 의논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대 조정에서 일찍이 한 번도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어찌 그 일이 성조(聖祖)244) 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신씨(愼氏)의 일은 여러 훈신(勳臣)들이 방자스럽기 이를 데 없어서, 우리 중종[中朝]으로 하여금 배필의 윤기(倫紀)를 보전 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인심(人心)이 원통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 후 1백 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그 일을 논의하여 계청(啓請)한 자가 없었으니, 이는 아마도 선대의 대를 이어받은[繼體] 뒤에는 예(禮)에 거리끼는 바가 있어서 감히 시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가지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진실로 마땅히 십분 시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고, 행 사직(行司直) 박경후(朴慶後)는 말하기를,
"노산 대군과 신비의 일은 예부터 유전되어 지금까지도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역대 조정에서 명신(名臣)과 숙유(宿儒) 중에 추복(追復)에 뜻을 둔 이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한 것은, 어찌 요즈음 세상 사람보다 의견이 미치지 못하여 그러했겠습니까? 이는 아마도 《춘추(春秋)》의 휘친(諱親)245) 하는 도리에 있어서 말하기 어려운 바가 있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처분한 일을 감히 갑자기 경솔하게 고칠 수는 없는 것인데, 신과 같은 천견(淺見)으로서는 진실로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인환(李寅煥), 행 부제학(行副提學) 조상우(趙相愚), 이조 참의(吏曹參議) 홍수헌(洪受瀗)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과 신비의 일은 부인들과 어린이까지도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으니, 인심(人心)은 속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에 와서 이미 폐지된 위호(位號)를 다시 되찾고 이미 쫓아냈던 위(位)를 다시 올려 받들고자 한다면, 지난 역사를 고찰해서 반드시 십분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낸 연후에 그 근거에 의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명나라의 경태제(景泰帝) 때의 일과 송(宋)나라의 맹후(孟后)의 일도 같음과 같지 않음이 있습니다. 경제(景帝)는 영종(英宗) 때에 폐위(廢位)되었다가 헌종(憲宗) 때에 복위되었으니, 이는 조카가 숙부를 복위시킨 것으로서 이는 이른바 같다는 것이고, 맹후는 철종(哲宗) 때에 쫓겨났다가 휘종(徽宗) 때에 복위되었는데 상 태후(尙太后)가 이를 주관하였으니, 이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복위시킨 것으로서 이는 이른바 같지 않다는 것인데, 그 밖에 근거할 만한 일이 있습니까? 감히 억측의 견해를 가지고 대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례(典禮)를 널리 고찰하여 큰 일에 흠이 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고, 장령(掌令) 김덕기(金德基), 응교(應敎) 김시걸(金時傑), 지평(持平) 정유점(鄭維漸), 교리(校理) 이희무(李喜茂), 지평(持平) 이언경(李彦經)들은 모두 말하기를,
"시행하는 것이 옳기는 하되, 또한 열성조에서 시행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니, 경솔하게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교리(校理) 이인병(李寅炳)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일은 오늘날 감히 의논할 수가 없고 감히 말할 수가 없는 의리가 있으며, 신비(愼妃)의 일을 이제 와서 추론(追論)하는 것 역시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부응교(副應敎) 김진규(金鎭圭)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일은 명나라에서 경제(景帝)를 추복(追復)시킨 것이 좋은 예(例)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지금 당장 추복하게 되면, 이는 이미 조묘(祧廟)에 관계되는 것인데 조묘를 영녕전(永寧殿)에 추부(追祔)하는 것은 근거할 만한 예(禮)가 없으니, 이것이 장애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씨(愼氏)에 있어서는 이미 폐위(廢位)된 뒤에 추복하는 것이 아마도 《춘추(春秋)》의 뜻에 어긋날 듯합니다."
하고, 정언(正言) 김창직(金昌直)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을 추복하는 것은 진실로 폐지할 수 없는 논의입니다. 그러나 신씨를 복위(復位)시키는 문제는 중종께서 윤허(允許)하지 않으신 것이니, 이제 와서 추복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부교리(副校理) 남정중(南正重)은 말하기를,
"이 일은 나라 사람들의 다 슬퍼하는 것입니다만,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 것이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옛 기록을 고찰하여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갑자기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정언(正言) 김상직(金相稷)도 어렵게 여겼고 신씨 문제에 이르러서는,
"근거할 만한 예(禮)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백관(百官)이 무릇 4백 91인이었는데, 그 의논에 있어서는 혹은 시행해야 한다고 하고, 혹은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시행할 수 없다고 한 자도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 것이므로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고 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마침내 백관(百官)들 각자가 글로 올린 것을 모두 봉(封)하여 바쳤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 일은 이미 마음속으로 말없이 계획했던 것이나, 마땅히 수의(收議)한 내용이 다 이르기를 기다려 조처하겠다."
하고, 이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기를,
"밖에 있는 대신(大臣)·유신(儒臣)의 수의가 다 이른 다음에 마땅히 빈청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보내겠으니, 그날에 대신(大臣)·육경(六卿)·판윤(判尹)·삼사(三司)를 모두 명초(命招)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32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08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변란-정변(政變)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
[註 238]송현수(宋玹壽)의 변고(變故) : 세조 3년(1457)에 단종의 장인인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가 사사(賜死)된 일을 말함. 송현수는 세조 2년(1456)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대간(臺諫)의 건의로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세조의 두둔으로 무사했는데, 이듬해 금성 대군(錦城大君)이 사사(賜死)되자 정창손(鄭昌孫) 등이 굳이 송현수를 없애기를 건의하므로, 세조는 결국 송현수를 사사하였음.
[註 239]곽후(郭后)의 일 : 곽후는 송나라 인종(仁宗)의 후(后)인 곽 황후(郭皇后). 곽 황후가 인종의 미움을 받아 폐출되었는데, 뒤에 인종이 뉘우쳐 곧 부르려 했으나 갑자기 복위하지 못하고 죽었다. 황후의 호는 회복했으나, 시책(諡冊)과 부묘(附廟)는 하지 못했음.
[註 240]유원부(劉原父) : 원부는 유창(劉敞)의 자(字).
[註 241]정이천(程伊川) : 이천은 송대의 학자인 정이(程頤)의 호.
[註 242]계지 술사(繼志述事) :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계승함.
[註 243]청묘(淸廟) : 종묘.
[註 244]성조(聖祖) : 세조를 가리킴.
[註 245]휘친(諱親) : 친(親)을 위하여 휘(諱)함
183.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4월 13일 임자 1번째기사 1699년 청 강희(康熙) 38년
지경연사 이유가 성삼문을 변호하다 유배되었던 정보를 소설시킬 것을 아뢰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세조조(世祖朝) 때 감찰(監察) 정보(鄭保)의 서매(庶妹)는 바로 한명회(韓明澮)의 첩이었습니다. 정보가 마침 한명회의 집에 갔다가 한명회가 성삼문(成三問)을 추국하는 일 때문에 대궐로 갔다는 말을 듣고서는 분연히 꾸짖어 말하기를, ‘성삼문·박팽년(朴彭年)은 바로 정인 군자(正人君子)인데, 이들을 살해하면 후세에 반드시 악명(惡名)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하고, 인하여 옷소매를 떨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한명회가 그 말을 듣고는 즉시 조정에 아뢰어 드디어 추국하게 되었는데, 그때 정보가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있다고 소리 높여 항언(抗言)하자, 임금이 환열(轘裂)066) 시키도록 명하였다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는 충신(忠臣)의 후예라 하여 특별히 석방하고 드디어 유배(流配)시키도록 하였는데, 유사(有司)가 역율(逆律)을 적용하여 파가 저택(破家潴宅)067) 하였습니다. 이제 장릉(莊陵)을 이미 복위(復位)시켰으니, 이런 사람들도 마땅히 신리(伸理)하여 소설(昭雪)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그 뒤 이판(吏判) 신완(申琓)이 경연 석상에서 진달하여 드디에 복관(復官)시켰다. 처음 임금이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아버지 권전(權專)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여 서인(庶人)을 만들고, 그 아들 권자신(權自愼)은 극형(極刑)을 당하였는데, 중묘조(中廟朝)에 이르러 소릉(昭陵)을 추복(追復)하였으니 반드시 복관시키는 거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으로, 해조(該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사(公私)의 문적(文蹟)을 상고하였으나, 이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 데가 없었고, 《실록(實錄)》까지 상고하였으나 역시 없었다. 이때에 와서 임금이 특명을 내려 권전 부자(父子)를 아울러 복관시키게 하였다.
삼가 안찰하건대, 일찍이 《야승(野乘)》을 상고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문묘(文廟)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 상호군(上護軍) 김오문(金五文)의 따님을 책봉하여 휘빈(徽嬪)이라 호(號)하였었는데, 폐출(廢出)되어 서인(庶人)이 되었다. 또 종부 소윤(宗簿少尹) 봉여(奉礪)의 따님을 책봉하여 순빈(純嬪)이라 호하였었는데, 8년 만에 폐하였다. 그리고 나서 양완(良媛) 권씨(權氏)를 세웠는데, 바로 현덕 왕후(顯德王后)이다. 이 분이 장릉(莊陵)을 출산한 지 7일 만에 훙(薨)하였는데, 소릉(昭陵)에 장사지냈다. 광묘(光廟)병자년068) 에 왕후의 모친인 최씨(崔氏)와 권자신(權自愼)이 성삼문의 옥사(獄事)에 좌죄(坐罪)되어 극형을 받았으므로, 권전(權專)도 추죄(追罪)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그 다음해인 정축년에 왕후도 추폐(追廢)하여 그 재궁(梓宮)을 물가로 옮겨 모셨으므로, 거민(居民)들이 겨우 그곳을 식별하고 있을 정도였다. 중묘(中廟)계유년069) 양사(兩司)와 옥당(玉堂)에서 쟁론하여 처음처럼 복호(復號)시켰다. 그리하여 현릉(顯陵)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는데, 파서 열고 살펴보니 내외의 재궁(梓宮)이 모두 완전하였고, 염습(斂襲)한 제구(諸具)도 부패된 것이 없었다. 이에 새 재궁과 의대(衣襨)로 다시 염습하여 장례지내었다."
하였다. 당시 소급하여 복호(復號)시킬 적에 고비(考妣)의 봉작(封爵)도 반드시 회복시킨 법제가 있었을 터인데도 사승(史乘)에는 전혀 보이는 데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런 명이 내려 궐전(闕典)이 모두 시행되었으니, 신리(伸理)에 유감이 없다 하겠다. 아! 지극한 조처였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김시걸(金時傑)이 영소전(永昭殿)을 이봉(移奉)할 적에는 대신 1원(員)이 배종(陪從)하는 것을 정식(定式)하도록 진달하였는데, 이는 정호(鄭澔)가 상소를 올려 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백산사고본】 36책 33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27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역사-전사(前史)
[註 066]환열(轘裂) : 옛날 극형(極刑)의 하나. 두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양쪽에서 수레를 끌어서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
[註 067]파가 저택(破家潴宅) : 나라에 반역(反逆)을 도모하거나 강상(綱常)에 저촉된 중죄인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파던 형벌.
[註 068]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069]계유년 : 1513 중종 8년.
184.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2월 27일 을유 1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이관명이 연산 선비들이 세운 성삼문 사당에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기를 건의하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성삼문(成三問)의 전장(田庄)과 노비(奴婢)로 훈부(勳府)에서 몰수하였던 것을 조가(朝家)에서 홍주 서원(洪州書院)에 내어 주었습니다. 그 뒤 연산(連山)의 선비들이 유지(遺趾)에 사우(祠宇)를 세워놓고 소(疏)를 올려 사액(賜額)을 청하고, 겸하여 그 곳에 있는 토지나 노비를 청하여 수호(守護)할 자본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해조(該曹)에서 첩설(疊設)이라고 하여 사액하는 것은 막았으나, 토지나 노비에 이르러서는 훈부에 그대로 기속(寄屬)시킬 수 없으니, 해부에 분부하여 낱낱이 연산의 사우(祠宇)에 내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분부하여 내줄 것을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9책 35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590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풍속-예속(禮俗) / 신분-천인(賤人) / 교육-기술교육(技術敎育) / 농업-전제(田制)
185.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3월 13일 경자 3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유생 심정희 등이 고 감찰 정보를 충렬 서원에 배유할 것을 상소하다
용인(龍仁)의 유생 심정희(沈鼎熙) 등이 상소하기를,
"고(故) 감찰(監察) 정보(鄭保)는 성삼문(成三問) 등과 서로 의기가 통하는 벗이 되었습니다. 병자년044) 에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에 한명회(韓明澮)의 첩이 된 그의 서매(庶妹)에게 일러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만일 이 사람을 죽이면 마땅히 만고 죄인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한명회가 이 말을 듣고 곧 대궐에 나아가 고하기를, ‘정보가 난폭한 말을 했습니다.’ 하니, 광묘(光廟)045) 가 친국하였습니다. 정보가 말하기를, ‘일찍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을 정인 군자(正人君子)라고 했기 때문에 실지로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하니, 광묘가 매우 성이 나서 거열(車裂)하라고 명하고 이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물으니, 좌우(左右)에서 대답하기를,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하니, 광묘가 갑자기 말하기를, ‘충신(忠臣)의 후손이구나.’ 하고, 인하여 ‘귀양보내라.’ 명하였습니다. 유사(有司)가 법에 의거하여 그 집터에 연못을 팠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대개 비사(秘史)에 쓰여 있는 글입니다.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가 일찍이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그 대략을 기록하고 특별히 충렬 서원(忠烈書院)의 벽기(壁記)에 붙여 두었는데, 이 서원은 곧 정몽주(鄭夢周)를 향사(享祀)한 곳입니다. 정보(鄭保)가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꽃다움을 전함으로써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않았은즉, 마땅히 배유(配侑)를 허락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에 명하여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9책 35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592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물(人物) / 풍속-예속(禮俗)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044]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045]광묘(光廟) : 세조.
186.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 10월 5일 정축 1번째기사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유생들의 청에 따라 봉산 서원·영월 사우·홍산 사우·평택 사우 등에 사액을 하다
선 정신(先正臣)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을 모신 봉산 서원(鳳山書院)을 문정(文井)으로, 성삼문(成三問) 등 6신(臣)을 모신 영월 사우(寧越祠宇)를 창절(彰節)로, 처사(處士) 김시습(金時習)의 홍산 사우(鴻山祠宇)를 청일(淸逸)로, 홍익한(洪翼漢) 등 3신(三臣)의 평택 사우(平澤祠宇)를 포의(褒義)로 사액(賜額)하였는데, 여러 유생(儒生)들의 소청(疏請)에 따른 것이다. 이 때 서원(書院)의 첩설(疊設)을 금(禁)하고 있었는데,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봉산(鳳山)에 서원이 창건된 뒤로 문교(文敎)가 크게 발전하여, 옛날 활쏘고 말달리기를 숭상하던 시골이 지금은 거문고 소리와 글 읽는 소리로 가득한 유학(儒學)을 힘쓰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굳이 금제(禁制)에 구애되어 진작(振作) 흥기(興起)하는 길을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5책 38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0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풍속-예속(禮俗)
187.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 10월 13일 을유 3번째기사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경상도 유학 곽억령이 함안에 조여의 사당을 짓도록 요청하는 상소
경상도 유학(幼學) 곽억령(郭億齡)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세상을 격려하는 도리는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절의를 숭상하는 것은 보사(報祀)를 숭상하는 일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던대, 경태(景泰)593) 연간에 진사(進士) 신(臣) 조여(趙旅)가 함안(咸安) 땅에서 자취를 감추고 숨어서 살다가, 그 지방에서 지조(志操)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또 거기에 이른바 백이산(伯夷山)이란 것이 있습니다. 아! 조여의 절개가 고죽군(孤竹君)594) 에 양보할 것이 없고, 이 산의 명칭이 우주를 초월해 서로 부합되므로, 마침내 온 도내(道內)의 장보(章甫)들과 서로 모의하여 그의 영혼을 편히 모시고 그 절의(節義)를 제사지낼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서로 의논하기를 단종(端宗)께서 손위(遜位)하던 날 죽음으로 절개를 온전히 한 이로는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成源)·유응부(兪應浮) 6신(六臣)이 있고, 살아 있으면서 의리를 지킨 이로는 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 및 조여(趙旅) 여섯 명이 있는데, 저 성삼문·박팽년 등 육신은 무덤을 한 곳에 만들고 당도 한 곳에 만들어 제향하고 있으니, 이 여섯 명도 또한 마땅히 그들의 예에 따라서 모두 제사하도록 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새로 사당을 세우는 일을 금하였으므로, 감히 곧장 마음대로 시행할 수가 없어 이에 감히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러러 간청합니다. 이 여섯명의 사적(事跡)의 전말은 고(故) 장령(掌令) 신(臣)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노릉지(魯陵誌)》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는데, 근년에 장릉(莊陵)이 복위(復位)되던 날 성명(聖明)께서도 일찍이 명하시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섯 명의 특출한 지조와 고고(孤高)한 절개는 진실로 성삼문·박팽년 등 여러 신하들과 서로 비슷하여 우열(優劣)이 없는데, 사생(死生)의 차이 때문에 그 보답을 다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단종 대왕(端宗大王)은 보위(寶位)를 추복(追復)하였고, 성삼문·박팽년 등 여러 신하들도 묘정(廟庭)에 배향하는데, 유독 함께 충절을 지킨 이로서 배향을 받지 못한다면, 충절에 보답하는 도리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성삼문·박팽년 등 여러 신하들은 본래 동향인(同鄕人)이 아닌데, 그 중 박팽년이 대구(大丘) 사람인 관계로 거기에 사당을 세우고 모두 같이 제사를 지냅니다. 지금 조여(趙旅)는 함안(咸安) 사람이니, 바로 그곳에 두어 칸의 사당을 지어 여섯 명을 함께 제향한다면, 새로 만드는 규정에 해당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이른바 백이(伯夷)란 그 이름이 옛시대와 부합하여 천 길 높이 우뚝 서서 여섯 신하의 절개와 함께 영원히 보존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조여(趙旅)의 사당을 세우지 않을 수 없고, 이 사당에 여섯 신하를 모시어 제향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미 자명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령(條令)에 구애되지 마시고 특별히 윤허하시는 비지(批旨)를 내리시어, 이 밝은 시대의 훌륭한 은전에 모자람이 없게 하소서. 그리하여 열사(烈士)의 영령(英靈)으로 하여금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있게 한다면, 아름다운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예조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5책 38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1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윤리(倫理) / 인물(人物) / 역사-전사(前史)
[註 593]경태(景泰) : 명(明)나라 경제(景帝) 때의 연호.
[註 594]고죽군(孤竹君) : 원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아버지이나, 여기서는 바로 백이·숙제를 가리침.
188.숙종실록 47권, 숙종 35년 2월 12일 갑인 1번째기사 1709년 청 강희(康熙) 48년
경상도 의성의 성삼문의 사우에 사액을 내리다
경상도 의성(義城) 금학산(金鶴山) 밑에 성삼문(成三問)이 살던 옛터가 있는데, 유생(儒生)들이 사우(祠宇)를 창건하고서 박팽년(朴彭年) 등 5신(臣)도 아울러 향사(享祀)하고, 또 이세화(李世華)·오두인(吳斗寅)은 일찍이 방백(方伯)의 좌막(佐幕)을 지냈고 박태보(朴泰輔)는 또한 어사(御史)로 왔던 일을 들어 곁에다가 따로 사당을 세웠었다. 이어 상소를 진달하여 사액(賜額)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그 상소를 예조(禮曹)에 내리니, 예조에서 복계(覆啓)하므로 시행하도록 윤허했다.
【태백산사고본】 54책 47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19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왕실-사급(賜給) / 윤리(倫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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