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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김시천선생님께서 권해 주신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 자서전을 읽었다.
교수님이 이 책을 번역하는데 관여하기도 했고 본인이 동양철학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 분때문이라 한다.
이 분은 1895년에 태어나서 1990년에 사망하셨다. 96세의 천수를 누리셨다.
그 분에 대한 평가는 그의 묘비명을 보면 알 수 있다.
" 삼사에서 고금의 철학을 해석하고,육서로 신리학의 체계를 세웠다."
삼사와 육서는 이 분의 저작물로 삼사는 중국철학소사,중국철학사,중국철학사신편이고, 육서는 36년에서 48년동안의 항일전쟁시기에 쓴 정원육서를 말하는 것 같다. 삼사는 철학사 학자로서 '따라서 설명하는 것(照着講)'이였고 정원육서는 철학자로서 '이어서 설명하는 것(接着講)'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신리학은 펑유란선생님(이하 펑유란이라 칭함)의 사상체계를 통칭하는 것이라 한다.
펑유란은 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학과정시절에 논리학에 흥미를 갖으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과 특히 철학은 인기도 없고 돈도 안되는 학문인가 보다. 베이징대학 입시원서를 받는 접수안내원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 거보면, 어떠튼 그는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1915년에 입학하고 1919년에 컬럼비아대학원으로 유학을 가 죤 듀이의 문하에서 철학을 연구한다.
펑유란의 초창기 철학적 고민의 출발은 '왜 중국은 서구에 비해 근대화가 뒤쳐졌는가?'였다 한다. 중국이 왜 서양보다 뒤처졌는가하면 당시 보통의 논리는 이렇다한다. 우선은 중국이 서양에 비해 과학과 기술이 뒤떨어졌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연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양은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았고 탐구하고 극복할 과제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은 행복은 맘에서 구하는 것이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자연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합일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자연을 극복하고 개조하는 분야가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가 중국이 당시에 발전하지 못한 원인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차이가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양에서도 정신문명을 중시하는 태도가 있고 동양에서도 물질문명을 중시하는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본성은 본디 같은 것이고 사상도 모두 같다고 펑유란은 보고 있다. 이 논증을 그는 그의 박사논문에 쓰고 나중에 '인생철학'이라는 책에 싣는다. 이 책에서 그는 세상의 주요 사상들을 개괄하면서 총 열 개의 유파로 나누었다. 그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천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보고 어느 쪽이 좋고 나쁜가, 어느 쪽을 더 중시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유파들은 나뉘어 진다. 이 분류에서 동서양 사상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차이라고 본다. 서양은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을 통해 새 것인 사회로 진화되면서 물질문명적인 문화가 주도적인 것이 되고 중국은 헌 것에 머물면서 새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신문명이 주도적인 체 남아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근대화가 되면 중국에도 옛 것과 다른 근대철학이 발전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근대화라는 것이 서구를 따라 가는 것이긴 하지만 똑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반봉건반제국주의 입장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고민하였고, 중국 철학사를 집필하면서 옛것에서 새것을 발견하고 중국고유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라 신실재론과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유심론자였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혁명이후 많은 곤난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마오쩌둥의 깊은 신뢰를 얻는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되었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를 자학(子學)시대와 경학(經學)시대로 나뉘었다. 춘추전국시대인 子學時代는 지존이 없이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평등하게 각 학파가 논쟁을 벌였던 시기이다. 이렇게 백가쟁명의 시대가 되었던 사회적 배경은 당시 통치를 담당했던 귀족이 쇠락하고 원래 있던 사회규범이 붕괴하고(禮崩樂壞), 사회제도가 해체된다.(天下無道) 당시 귀족을 위해 봉사했던 지식인 무리들이 원래의 자리를 잃고 민간으로 흘러든다. 이들은 귀족세력의 최하층을 이루었지만 사민(四民)의 으뜸이 된다. 그들은 지식을 생산하고 팔면서 생계를 도모하고 자신의 이론을 스스로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것이 발전하여 학파를 이루고 백가쟁명의 국면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경학시대는 유교가 지존이 되고 세상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면서 경직된 사회체제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철학이 계승해야할 시대로 자학시대를 꼽았다.
그의 철학체계인 신리학은 보편과 특수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그의 핵심 주장은 리가 사물속에 있다는 것. 즉 보편이 특수 속에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다. 사물의 보편과 그 사물은 있으면서 같이 있고 없으면 같이 없는 것이다. 사물의 특수는 감각의 대상이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사물의 보편은 사유의 대상이며 실험실속에서 그런 보편을 추상해 낼 수 없다.이를 개념화 하면 '구체적 보편'이라 한다. 구체적 보편의 내포는 리이고 외연은 사물이다. 리와 사물,내포와 외연은 원래 함께 있다. 사람의 사유가 그것들을 분석할 때 분별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것은 인식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 두 분야를 헷갈려 해서 이의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리란 사람의 사유가 추상의 방법을 통해 사물로부터 분석해 낸것일 뿐이고 굳이 존재의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리는 사물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리는 사물이고 사물은 곧 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을 들여다 보면 파란만장한 중국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다. 5.4운동을 뒤로 하고 미국 유학을 가서 1923년에 중국으로 되돌아와 허난성 중저우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는 자신이 安心立命할 곳을 찾아 베이징 옌징대학으로 옮기고 28년 칭화대학으로 옮겨 대학의 개혁에 참여 한다. 33년 휴식년에는 유럽을 여행하고 당시 공산혁명에 성공한 소련을 방문한다. 당시 중국은 항일전쟁시기에 접아 들고 그는 38년 부터 45년까지 피난처인 시난연합대학에서 교편생활을 이어간다.당시 국민당 정부하에 있었는데 갈수록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항일전쟁과 관련하여 대학과 학생이 정부에 대립하는 일이 많아 진다. 44년 12월1일에는 급기야 슈류탄 피폭에 의해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펑유란은 교직을 맡고 있는 위치에서 당시 권위를 갖고 있는 교수회의를 통해 이 사태를 수습한다. 그는 강경파와 보수파의 주장을 둘 다 만족시키지 못했으나 그래도 파국을 막은 것으로 스스로 자위를 한다.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9월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 간다. 중국은 혁명의 혼란속에 빠져 들자 그의 미국인 친구들은 미국에 눌러 있기를 권고한다. 그는 왕찬의 등부루에 나오는 문구- 雖信美而非吾土ㅁ, 夫胡可以久留, 비록 좋다고 해도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를 인용하며 48년 중국으로 돌아 온다. 펑유란은 자신은 반동중국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는 끊임없이 자기부정과 사상개조를 해 나간다. 이 점에 있어 자서전에는 매우 솔직한 자기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주역의 건괘 문언전의 修辭立基誠 글을 지어 진실함을 세운다.-를 인용하면서 지식인의 글쓰기의 원칙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정녕 그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73년 林彪비판운동에서 공자비판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행동이 진실된 대중노선에 따른 것인지 군중에 영합하기 위해서 행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 선(線)은 진실함(誠)과 거짓(僞)에 의해 나뉠 것인데 당시 자신은 마오주석과 당중앙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일보 전진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지 못한 점, 자신이 더 받들어진다는 것에 대한 기쁨 마음도 있어 이는 군중에 영합한 측면이 있었다고 진솔하게 이야기 한다.
52년 중국당국이 대학의 모든 철학과를 없애고 베이징대학만 남겨두는 조치를 취하자 베이징대학으로 옮겨 간다. 여기에서 그는 문화대혁명을 겪게 되는데 홍위병들의 지식인탄압에 시련을 겪는다. 책에는 이 상황이 담담히 서술되어 있지만 문화대혁명의 상황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상당히 심한 극좌적 횡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살아나는 중국을 보면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학문적 자세는 어떠했을까? 그는 시경에 나오는 말 周雖舊邦,其命維新, 주가 비록 오랜 나라이지만 그 사명은 새롭다.-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오래된 나라의 정체성과 개성을 지니면서도 새로운 사명의 실현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 이러했기에 보수파와 진보파 둘 사이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삶을 살아왔다고 이야기 한다.
후배 학자들에게 그는 무슨 말을 남길까? 그는 火傳也 不知其盡也, 불이 옮겨 가니 꺼질 줄이 모른다.-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 인류가 수천년에 걸쳐 축적한 지식은 진리의 불꽃이라 그 연료를 끊임없이 대 주어야 계속 연소되고 이어질 수 있다. 그 역할을 한 이들이 철학자요 시인,문학가,예술가,학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연료삼아 피를 토하듯이 저작물들을 남겨 왔고 또한 본인도 그렇게 하려 했다고 한다. 후대에 남기는 저작물을 쓰는 각오는 이러 해야 한다.' "누에는 죽어서야 실을 더 뽑지 않고,초는 재가 되어서야 촛농이 마른다." 즉 누에는 생명을 바쳐 실을 토해내고 초는 목숨을 다하여 빛을 내는 것처럼 분투하며 살 것을 당부하는 듯 하다.
책을 덮으며 책의 겉면에 있는 펑유란의 초상화를 들여다 본다. 청말민국초에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내고 중국공산혁명을 보았으며 그 정권하에서 유심론 철학자로 살아왔던 그. 그의 백년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중화민족에 대한 자부심, 사람은 모두 같다는 평등의식, 여행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 학자로서의 성찰과 분투, 삶에 대한 소박함, 낙관성 그리고 솔직함,을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현실에 적응하는 현실주의와 타협주의가 느껴지기도 했고 그의 언행에서 중국중심의 문화주의 냄새도 나기도 했다. 그런면에서 우리나라의 이영희선생님의 지조있는 지식인의 삶이 더 높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알아 가는 것은 내게는 매우 유익하다. 반면교사다. 그들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 이 책이 의미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가슴에 듬직한 뭔가를 얻은 느낌을 간직한 채 책을 책장에 꽂는다.
부록-
1) 인생여정
1918년 대학졸업
1919 5.4운동
1919년 미국 유학 컬럼비아 대학 철학대학원 입학. 죤듀이 문하에서 공부 함
1923년 학위 통과. 허난성 카이펑 중저우대학
1926년 베이징 옴.엔징대학 근무
1928년 칭화대로 옮김
1933년 휴식년제. 유럽을 가다
1938년 쿤밍 시난연합대학~ 1946년5월4일
1946년 9월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초청강연
1948년 중국으로 들어옴
1952년 베이징대학으로 이동
2) 책에 나오는 문구
1. 慾窮千里目,更上一層樓 천리 밖을 보려면 한층 더 올라서야 한다. 338
베이징 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고 학문의 신천지를 경험한 느낌을 이야기 하면서
2. ㅁ 漠無ㅁ, 萬象森然(386)
고요하고 아무런 형체가 없되 모든 형상이 빽빽하다. 리의 세계를 형용한 말
3. 無字天書
볼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흰 종이이지만 볼 줄 아는 사람이 보면 흰종이에 글자가 빽빽하다.
4. 山重水復疑無路,柳暗花明又一村
산도 첩첩,물도 겹겹,길이 없는가 하고 생각했더니 버드나무 녹음에 밝고 고운 꽃이 핀 새 마을이 눈앞에 펼쳐지는 구
나.
문화대혁명시절 홍위병들이 대학을 접수하고 두 파로 나뉘어 폭력이 횡행할 때 그나마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자
선전대가 들어 오는 것을 위안삼으면서 한마디 함.
5. 福無雙至,禍不單行 복은 한꺼번에 들어오지 않고 화는 한가지만 닥치지 않는다.
홍위병이 대학을 접수하고 수난을 받고 있는데 전립선비대증이 심해져서 수술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
6.心服
마음으로 감복함
7. 如七十子之服孔子也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은 것
71년 중국이 유엔에서 합법적 지위를 얻으매 본인이 마오를 존경하는 것은 마오가 실천에 의해 증명하였기 때문이
라고 하면서 인용. 마오의 말이 위엄이 있는 것은 그 말과 행동들이 인민의 의지와 바람을 개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
8. 明於死生之道 죽고사는 도를 아는 것
9. 장횡거의 서명(西銘) 在,吾順事.沒,吾寧也 살아 있음에 나는 사리를 따르고 죽음에 이름에 나는 편안해 진다.
연세든 어머니가 어떤 약이 본인에게 맞다는 말에 저자가 상시 드시라는 말씀에 "그럼 백살까지 살라고?" 말씀하실
때 인용. 선대를 이어 후대에 남기는 일을 다해 책임을 이미 완수했거늘 몇 년 더 살아서 무엇하냐는 뜻으로 받아들
임. 그 것이 죽고 사는 도를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
10. 從容就義 침착하게 의를 따른다
국공대립시기 국민당정부시절 34년 11월에 강연회때 유물사관에 옹호적인 발언을 한 계기로 연행되었을 때 침착함
을 견지하며.
11. 사마천 好學深思之士, 心知基意 배움을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는 선비는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 (340,166쪽)
30년대 이념의 도가니시절 저자가 이해했던 세가지 체제의 의미(意)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즉, 봉건제는 귀
한이를 귀히 여기고(貴貴), 자본제는 부자를 존경하며(尊富),사회주의는 현명한 이를 숭상하는 것(尙賢)이다. 여기서
현명한 이는 학식도 있고 기술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이후에 의미를 안다는 것이 단지 배
우기를 좋아하고 생각을 깊게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며 실천을 해야 하고 그 속에서 직접 생활을 해야 한다고 이
야기 한다.
12. 탕약이야기(156,111쪽)
미국의 선거제도와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보며 탕은 바뀌지 않아도 약이 바뀌는 것처럼 전통을 잘 보존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는 서구인의 의식을 칭찬하는 대목. 맑은 부대에 새 술을 담는 것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이지
만 정작 문제는 새 부대에 낡은 술을 담는 것이라고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치고 변화를 거부하는 중국인의 세태를 비
판.
12. 安心立命
저자는 외국 유학후 여러 대학에서 교수자리를 요청을 받는데 자신이 연구하고 뜻을 펼칠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 했
다.
13. 汝爲君子儒, 母爲小人儒 너는 군자 유가 되어야 하지 소인 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저자가 어렷을 때 복잡한 경조사를 치를 때 이를 관장하는 찬례와 사후객을 보며 이들이 예를 알기에 유자이긴 하나
사후객은 찬례의 명령을 받아 식(式)을 행하는 사람들을 직접 지도하는 사람인지라 노예적인 유자라 생각한다. 여기
에서 찬례가 군자유이고 사후객은 소인유가 된다. 즉 자신은 남을 지도를 받는 사람이 아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14. 妻以夫貴,母以子貴 부인이 남편으로 인해 귀하게 되고 어머니가 아들로 인해 귀하게 된다.
청나라 관아에 아버지가 현감으로 근무하면서 느낀 부분. 현감의 아버지가 들어오면 조용히 관아대문을 들어 가나
어머니가 오시면 의장을 완전히 갖추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들어 온다. 부인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봉건사회가 갖
고 있는 현모양처주의.삼종지도에 대한 여성들에 주어지는 보상
15. 조직과 권위,그리고 사람이 의지를 잃어 버리는 과정
1945년 11월 항일전쟁시기 국민당 정권시절 내전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급
기야 12월 1일 학생들이 수류탄 폭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태는 커지고 국민당 윈난정부가 중재를 나섰으나 마지막 쟁점-지역경비사령관 관린정의 즉각적 사퇴후 수업복귀
와 학생들의 수업복귀후 관린정의 사퇴-을 가지고 정부와 학생측이 대립하게 된다. 이에 펑선생님이 중재를 나서는
데 수 많은 격론속에 학생들의 수업복귀후 15일 이내 관린정이 사퇴한다는 협상안을 마련한다. 수많은 격론속에 학생
들은 이 협상안을 받아 들인다. 관린정은 15일 내에 사퇴하고 다른 지역 고위직으로 이동한다. 강경파가 사령관의 승
진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자 펑선생님은 사령관의 퇴직을 요구했지 다른 곳의 이동까지 책임지지는 않았다고 이야기
한다.
본인이 중재하면서 잘 한것은 연합대 해산이라는 불행을 면하도록 구제한 것이며, 중국 학술계를 위해 자유의 마당
을 남겨 놓은 것이며 '민주의 보루'를 위해 여지를 남긴 것이라 했다. 그러나 진보진영 사람들은 내가 앞장서서 운동을
망쳤다고 비판했다. 이 운동이후 연합대는 겉으론 평온했으나 내부는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교수회는 분열되어 이후
일치된 태도와 행동을 보이지 못했다. 교수자치 학교의 생명력은 사라지고 공허한 형식만이 남았다.
16. 이사회만 있고 회장이 없는 조직이야기
1926년 중국 철학회 베이징분회를 조직할 때, 회장직을 두지 않고 이사회만 두어 업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당시 난
징교육부장관이며 국민당 관방철학을 대표한 자가 천리푸고 회장직을 두면 그가 당연 회장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철학은 정치와 무관해야 된다는 사고가 주를 이뤄 조직을 이사회중심으로 해 놓았던
것이다.
16. 따라서 설명하는 것(照着講)과 이어서 설명하는 것(接着講)
옛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 저자는 중국철학사를 정리하고 자신의 철학체계를 세웠다.
첫댓글 벌써 서평까지! 원 원장님 , 이 글 정리하셔서 책익는마을 책읽는소리 한 꼭지로 보내주시면 좋겠네요. 책익는마을 책읽는소리 앞으로 잘 올리겠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은데요?
빌려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