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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가을문예2(2005-2010)
<2010 진주가을문예>
<알츠하이머>... 박미선 작
어느 날, 나는. 구름이 찔끔찔끔 흘리고 간 볼트를 주워 먹다 돼지우리로 들어왔다 찌지직, 뚝, 뚝
<나는 참새> 나는
전깃줄 잘라 고무줄놀이를 한다 살찐 돼지, 털로 새끼줄을 꼬아 목에 채웠다 코에 코뚜레를 끼우고 밤의 팬티를 갈아입혔다 가슴살 조금씩 잘라 밥상보를 만들자 앙상해진 두 다리가 콘센트에 꽂혔다 조잘거리던 혀를 뽑아, 나는
돼지의 기억들로 수의를 만들고 있다 눈에선 쌀뜨물이 흘러 나왔다 돼지는 머리에 꽃밭을 만들어 나를 유혹했다 뚝배기 안에는 구멍 숭숭한 양말들이 눌어붙어 있다 한 숟가락씩 먹을 때마다 불러오는 건 배가 아니라 허기였다
발등에 무화과나무 한그루 심을 수 없다 머리를 주머니에 꾸역꾸역 쑤셔 넣으며 만원이 되길 기다려 보고, 솜사탕을 손가락에 먹여 보기도 한다 돼지 안의 돼지 한 마리 지퍼를 열고 유치원에 간다 비오는 날 대추나무 가지에 네발 사다리를 올려놓고 싶다 아직은 아니라고 안녕, 안녕, 주머니에 넣어둔 만원이 수염을 낳을 될 때까지 잠시 풍선껌을 씹으며 기다려 돼지야
묵은 김치를 꺼내려 김치 냉장고를 연다 숨이 하얗게 끊겨 겨울을 내뿜고 있는, 먼저 돼지와 협상한, 어머니의 손 전화 한 구.
<심사평/강희근>
"<알츠하이머>를 쓴 응모자는 순도가 높다. 참새, 돼지우리, 전깃줄, 뚝배기, 한 숟가락, 냉장고, 어머니 등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언어들이 언어 독자적으로 뛰고 있다". "우리는 그 뛰기를 보면서 소녀가 땅에다 그림을 그려 놓고 칸칸이 뛰는 놀이(사방놀이)를 보는 듯한 경쾌함을 느끼게 되었다. 꼭 의미를 추구하는 분들은 이 시를 읽으며 우리가 대충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메타세콰이어>를 쓴 응모자나 <서울, 아이티공화국 그리고 농담>을 쓴 응모자도 상당한 수련을 한 것으로 인정된다. <메타세콰이어>의 적정한 상상력이나 <서울, 아이티공화국 그리고 농담>의 상상력 뛰기는 다 시를 허구의 틀로 본다는 점에서 실력이 출중하다". "그렇더라도 이번 수상은 그 허구의 순도 면에서 훨씬 기량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 <알츠하이머>를 낸 분에게 돌아갔다. 만장일치다. 상은 한 판의 씨름과 같다. 둘째·셋째 판에서는 승자가 어느 쪽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자' 다시 시작하자"
<2009 진주가을문예>
뱀/임재정
1.
꿈꾸는 물질, 나는. 찡그린 관자놀이를 내닫는 핏줄, 혹은 두개의 혀. 당신 생각으로
타오르는 불꽃. 사월
산자락을 불타오르는, 불길 꿈틀대는 등허리, 홀로그램 속 삼천
삼백의 개구리, 등의
얼룩은. 날아오르는
수만 벌레들의 꿈틀, 꿈의 틀인데. 나는
이런 밤들의 열병식이라 말하면
그래도 내 행진을 엿보다 끌려드시겠어요?
2.
불타는 산을 본 일 있다. 그때 나는 인간계와 통정하는 삼천만 통점의 혀로 세상을
핥는 벙어리 부처를 상
상했다. 날개란 지상엔 무효한 양식이므로, 간절히 가벼워지는 연기들의 구도
3.
네게 사다리를 놓는 날들이다. 발가락을 자른 발끝으로 걸어가
네게서 붉는 참꽃의 나날들이다 고통만큼
높은 사다리가 있을까.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때, 손을 놓고
두 발을 뗀다. 추락하는 것으로 거듭 불타오
르는 날들이다. 삼천 개 혀를 단 한 입에 달고 나는 침묵한다.
어떤 원시를 불러야 석 달 열흘 너를 타오를 수 있을까.
*케찰코아틀, 이 세상 모든 불타는 혀의 총합. 나
는 얼마나 작은 불꽃으로 너의 창가를 시작하는가.
불타는 산
케찰코아틀
내 심장을 천천히 씹어 삼키시다
*케찰코아틀 : 깃털 달린 뱀. 아즈텍 문명의 위대한 천상 신으로
알려져 있다. 우주의 질서, 세계와 인간의 생멸주기를 결정하기도
한다.
심사평
#진주가을문예(2008년)
아버지의 연필/전영광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지ㅣ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로 올라가
겨우내 돌아오지 않았다
강철연필들은 처음으로 주인의 이름을 새겼고
얼어붙은 산 밑 저수지에서 떵떵
망치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찬물에 손이라도 씻는지 지난보에는 물푸레
푸른 물이 내려 오기도 했다 오늘도
녹슨 강철연필들만 벌겋게 복습 중이다
旌 旋 全 公 重 鉉 之 墓
시 심사평(서정춘)
'허허벌판에 詩匠이 되길'
기술은 있되 장인정신이 없는 삶은 망해버리기 마련이다. 장인정신은 어제 써먹은 기술을 오늘 아침에 쓸모없다 버릴 줄 아는 성정머리가 있어야 좋겠다. 누가 보면 꼭 벌어먹기에 좋은 짓거리를 하는 사람 말이다. 광명의 획득은 그런 짓거리 끝에 얻어지는 것 아닐까.
보자, 본심으로 넘어온 편수는 모두 160편. 단 응모자의 이름은 모두 빠져있고 응모 번호만으로 대체 되어 있다.
'섬망'외 9편이 우선 눈에 들었다. 의식과 무의식을 종횡무진 오락가락하며 쓴 정신주의 시라고 할까. 그 장대한 사유가 정진, 또 정진해서 우주의 깊이, 우주의 가락을 터득했더라면, 놀라운 대시인의 출현을 알릴 뻔 했다. 재기는 살리되, 너무 이른 이상이 되지 말고, 세계의 고전들을 탐독하여 자기화하는 노력의 대가인 이상이 되길!
'빙어'외 7편이 또 눈에 들었다. '빙어'에서 노숙자의 신세를 "라면 몇 가닥 보이는 내장을 비워냈다"고 본 것이나, '동해(凍害)'에서 "내 어머니 배에 튼 자국은 더 깊어진다"라고 아름답고 섬세하게도 세필화를 그렸다. 하지만 딱히 이 당돌한 시대를 업고 갈 뜨거운 힘과 맞선 찬 지성이 동시에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연필'외 8편이 가장 나중에 눈에 들었다. 음, 돌쟁이 생부의 생사를 잘도나 그리고 있군. 돌 속의 부처를 석공이 불러낸다고 않던가, 돌쟁이의 강철연필이 죽음을 펄철 살아있는 돌 육신으로 불러냈구나!
모든 시인은 강철연필로 죽음을 불러내는지 모른다. 하여, 가장 믿음직한 시인을 세상에 내보낸다. '새로 쓰는 계곡(史)'의 "밤꽃이 허연 눈썹으로 바라보던 식구들 저녁이 있다" 등등 또 다른 시편들이 믿음을 더했다.
혹,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허허벌판 시장(詩匠)이 되길!
2007년 진주신문가을문예 당선자]
보이저氏 / 김현욱
1.
보이저* 氏의 돌잔치는 지구 밖에서 열렸다
보름달 위에 차린 돌상을 받아
홀로 돌잡이를 하였는데
웬일인지 보이저氏는 아무 것도 집지 않았다
돌상 너머 파랗게 빛나던 구슬은 이미 멀리 있다는 걸
보이저氏는 운명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의 품속으로 무작정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2.
보이저氏는 이제 서른이다
서른 해 동안 한 일이라곤 고작
두리번두리번 걸어간 것뿐이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보이저氏를 외우며 지나갔다
사춘기와 입시의 블랙홀을 간신히 건넜으나
무한진공의 우주 어디에도
제 몸 하나 붙박아 둘 중력의 직장은 보이지 않았다
우울증이라는 소행성과 부딪칠 뻔 했을 때
보이저氏는 비로소 깨달았다
우주에 취직했다는 걸
죽을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걸
이태백이니 삼팔선이니 이상기후의 지구에서도
용케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대범하게 아이까지 낳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보이저氏는 애오라지 걸어가기만 했다
내 직장은 우주다 내 일은 나아가는 것이다
남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해도 보이저氏는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지구에서 유행하던 주문을 되뇌이며
무소의 뿔처럼 성큼성큼 나아가기만 했다
아직도 보이저氏는
우주 어딘가를 뚜벅뚜벅 걷고 있다
너무 멀리 가버려서
이제는 아무도 보이저氏를 놀릴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다는 걸
보이저氏 조차 모른 채 우주 밖의 지구를 향해
시원(始原)의 자궁을 향해
뚜벅 뚜벅
* NASA에서 1977년 발사한 무인우주탐사선. 현재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다.
**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사
[시 심사평 - 김언희]
뚜벅뚜벅, 성큼성큼
예술은 죽어도 개성이고, 예술은 죽어도 스타일이다. 나서 죽는 동안에 벌어지는 희로애락은 거기서 거기, 새로울 것도 남다를 것도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내용’도 없고, 하늘 아래 새로운 ‘의미’도 없다. 남다를 것 없는 그 무내용과 무의미에 처하는 남다른 태도가 있을 뿐이고, 그 태도를 표현하는 남다른 방식이 있을 뿐이다.
이상이 심사 기준이었다. 그래서 ‘보이저 氏’ 외 4편, ‘나사의 집’ 외 4편, ‘우크라이나에서 온 신발’ 외 4편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나사의 집’ 시편들은 생의 미세한 결과 틈을 포착해 내는 예민한 감성과 그것들을 안정된 호흡으로 건져 올리는 내공이 녹록치 않았다. 문제는 한 편씩 읽었을 때에는 하나 같이 흠잡을 데 없는 수준작이었는데, 다섯 편을 함께 놓고 보니 다섯 편이 한결 같았다. 이 ‘한결 같음’과 ‘흠잡을 데 없음’이 문제였다. 어떤 열정의 결여 혹은 어떤 결여의 결여. 매혹은 과잉이거나 결여에서 온다. 크게 넘치거나 크게 모자랄 때.
‘우크라이나’ 시편들 중에서는 ‘플렉트럼’이 인상적이었다. 짧았으나, 짧으므로 더욱, 생사의 경계를 타고 흐르는 ‘22000 볼트’짜리 직관이 행간에서 ‘백열하는’ 작품이었다. 피복을 입힌 전선/현실이 아니라, 피복이 벗겨진 자신의 전선/현실에 물 묻은 손을 갖다 대는 집요하고 용기 있는 천착만 있다면 22000 볼트짜리 시인이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예감을 갖게 했다.
그래서 결국 ‘보이저 氏’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무엇보다 우리 시에 차고 넘치는 시적 포즈나 제스처가 없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우리 시도 이제 ‘뚜벅 뚜벅, 성큼 성큼’ 걸을 때가 되었다. 나머지 네 편을 각기 다른 어조의 작품으로 묶어 자기가 노는 물의 너비와 깊이를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어법으로 탁월한 시세계를 구현한다고 해도 천편일률은 공산품이 되고 만다. 자신의 작품을 선별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은 자신의 시세계를 일괄할 만한 안목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상은 덫일 수도 있고, 닻일 수도 있다. 덫에도 닻에도 걸리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이미 걸렸다면 죽어라 몸부림치는 수밖에.
#진주가을문예(2006년)
천원역/이애경
호남선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천원역*과 만나네
노령역 지나 송정리역 다음 나주역에서 내려야
하지만
나는 천원역에서 슬쩍 내리고 싶네
천 원짜리 지폐는 애들도 시큰둥 한다는데
차창 밖 들녁은 천 원이면 뭐든 살 수 있다고
나풀나풀 유혹하고
뻥튀기처럼 부푼 행복이 숨어있을 것 같기도 한
가난한 나는 그만 이 역에서 내리고 싶네
천 원짜리 밭뙈기나 부쳐 먹고
들녁 하늘에 매달린 노을이나 아침햇살 주워 먹으며
저 자라는 청보리처럼 살고 싶네
바람을 지집 삼아 옆구리에 끼고
덤으로 준다는 별빛이며 달빛이며를
평생 이웃하며 희희낙락 살고 싶네
나부끼는 바람과 한바탕 몸을 섞고 나면
내 몸도 그만 투명한 날개 한 쌍 달지 않겠나 싶은 게
뚝뚝 번지는 석양 아래 고단한 날개를 접고
긴 잠에 들면
내 생 언저리가 더 없이 부드럽겠다 싶은 게
자꾸만 입 안 가득 초록물이 도는 것이네
2006 가을문예 시 심사평
유유자적의 화법 / 김종해
당선작으로 뽑은 시 ‘천원역’은 지역신문이라는 문예공모작의 한계를 극복하고, 중앙지의 신춘문예 당선작과 어깨를 겨룰 만한 시의 품격과 함량을 충족시켜 주는 ‘좋은 시’임을 우선 밝히고 싶다. 당선작 ‘천원역’은 예심을 거쳐 넘어온 여타의 작품을 누르고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 당선작으로 뽑는 일이 오히려 쉬웠다.
최종심까지 남은 작품은 ‘귀면각 선인장’, ‘민들레’, ‘누에가 사는 방’, ‘낙엽이 사는 집’, ‘천원역’ 이상 다섯 편이었다. ‘귀면각 선인장’은 아열대에서 자라는 중남미산 기둥선인장을 의인화해서 쓴 재미있는 시이지만, 이야기의 구성이 산만했다는 흠을 지녔다. 그러나 화자의 독특한 시각이 눈에 띈다.
‘민들레’는 시가 예민하고 가늘고 섬세하다. 갈라진 옹벽의 길을 깁고 있는, 노란 불 켜고 있는 민들레 몇 포기가 눈에 선명하게 잡힌다. 그러나 가작 수준이다. ‘누에가 사는 방’은 촘촘하고 비좁은 고시원에서 실밥 터진 책들, 혹은 터진 실밥을 밤새 깁던 고시원생들의 고단한 삶의 얼룩이 보인다. 시적 응축력이 좀더 필요하다. ‘낙엽이 사는 집’은 표현이 거칠고 시적 구성이 약하지만, 기발한 상상력이 시의 재미를 채워준다. 섬세함과 치밀함, 시적 응축력이 좀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에 비해서 당선작으로 뽑힌 ‘천원역’은 한눈에 심사자를 사로잡았으며, 매끄럽고 잘 숙성된 언어의 리듬으로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여유있는 화법을 풀어내고 있다.
이 시에서 ‘천원역’은 가난한 인간이 가보고 싶은, 경제 부담이 전혀 없는 꿈의 역이다. ‘노을이나 아침햇살 주워먹으며’ ‘청보리처럼’ 살아가는 친환경 청정지역이며, ‘내 생언저리가 더없이 부드럽겠다’는 곳이다. 따라서 ‘천 원짜리 밭뙈기나 부쳐먹고’ ‘덤으로 준다는 별빛이며 달빛이며’를 평생 이웃하며 희희낙락 살아가는 곳, 가난한 사람이 꿈꾸는 곳이 ‘천원역’이다. 지명地名이 주는 친근감을 이 시인은 시로서 재미있게 잘 소화해내고 있다. 함께 투고한 ‘염전’, ‘그녀의 재봉틀’도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좋은 시’로 뽑힐 만하다. 당선자의 앞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