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울했던
시절 박치기 한 방으로 통쾌함을 선사했던 김일선수
기념체육관
(2015. 8.
23)
거금도 일주로도를 달리면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김일기념체육관이었다.
고흥군 출신 스포츠 스타로는 김일
선수를 비롯해 축구의 박지성, 김태영,
골키퍼 김영광 선수, 권투의
유제두, 백인철, 배구의 신진식 선수 등이 있고
예술계로는 천경자 화백과 판소리의
국창으로 불렸던 김연수 명창등이 있다.
김일 선수의 석상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왠지 낯설지가 않다.
이곳이 어전리 즉 엄마의 고향이자
외가가 있던 곳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초등학생 때 광희동과
장충동에서
살아 김일 선수의 경기를
장충체육관에 가서 직접 봤기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친근하고 푸근하다.
1970년대 프로레슬링은 김일 선수를
필두로 당수의 명인 천규덕(배우 천호진 씨
부친),
장영철, 꾀돌이 여건부 선수 등이
활약하고 있었고 레슬링 경기만
열리면
동네 꼬마들까지 흑백 TV 앞에 앉게
만든 최고의
흥행 스포츠 이벤트였다.
특히 일본인인 안토니오 이노끼나
자이언트 바바와의 경기가 벌어지면
국민감정까지 더해져 모두 애국자가 된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1970년대 박정희는 독재를 하고
자신의 친일행위를 지우는데
축구와 레슬링, 권투 등 격투기
스포츠를 잘 활용했다.
그래서 1970년대에는 레슬링과
권투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참에 김일 선수가 박정희에게
고향 금산에서 질 좋은 김이 많이 생산되고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으니 금산에
전기를 가설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 청이 받아들여져 금산에 전기가
공급됐으니 애향심도 대단한 분이셨다.
내 기억으로 당시 김일 선수의 체격은 180cm에 120Kg 정도로
그시절 우리나라 사람들 체격으로는 거인이었다.
김일선수가 입장시에 입는 가운으로 내
기억으로는
흰색으로 된 긴 가운을 주로 입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고 경기화와 출장시 휴대했다는 가방이며 참피온벨트는 없었다.
예전 레슬링 경기는 초반에는 항상
상대의 기술과 반칙에 일방적으로 당하다가
막바지에 전세를 역전시키고 승리를 쟁취하는 뻔한 스토리를 가졌다.
그럼에도 다들 경기에 몰입했고
열광적으로 응원했었다.
당시 내가 직접 본 경기 중 하나는
타이거마스크와의 대결이었는데
마지막 장면에 상대 선수의 마스크를
벗겨내는 장면이 있었다.
당시 경기 중에 마스크가 상대 선수에
의해 벗겨지면
최고 수준의 수모를 겪는 것이라고들
했던 기억도 난다.
또 기억나는 시합으로는 상대방 선수의
이름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당시 레슬링계의
악동으로 불렸던 압둘라 부처란 거구와의 대결로
선수 소개시에 브러쉬로 이를 갈며 관중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한 후
시합에서는 김일 선수의
이마를 물어 뜯어 링 위에는 피가
낭자했었다.
김일 선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가 흐르는 이마로 상대에게
박치기를 연속으로
매다 꽂아 순간 전세를 역전시켜 통쾌함을 줬었다.
또 다른 기억으로는 당수로 유명했던
천규덕 선수가 경기장으로 끌려온 소를
수십여대 내려쳐서 쓰러 뜨렸는데
지금 같으면 동물학대로 지탄받을 행위가
수 천명이 지켜보는 경기장에서 버젓이
행해졌고 전국으로 생중계됐었다.
불과 40여년 전의 일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변했고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진보가
있었슴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운암 김일선생기념관이라는 현판이 있는
걸로 봐서는
생가터로 생각되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군수물자가 부족했던
일본은 개까지
공출해 개 껍질로
군용 방한모자를 만들었다.
당시 소년 김일이 키우던 진도개도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해 돌아 왔지만 다시
잡혀가 죽임을 당했다.
그후 선생은 보호해 주지 못했던
죄책감을 항상 갖고 있었고
어느날 삼중스님에게 이 사실을 털어
놓았는데 그럼 비석이라도
세워주라는 삼중스님의 말씀을 듣고
이 비석을 놓았다고 한다.
운암 김일 선생
공적비
부인의 묘과 함께 있는데 봉분이 없는
걸로 봐서는 수목장으로 보인다.
선생은 거의 모든 역대 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으셨다.
김일기념체육관에서는 금산면의
미생(계미, 을미, 정미)들의 하계수련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사진을 올리는 이유는 내 외가와
김일 선생이 먼 인척이 되고
서로 왕래가 있었다는 얘기를 살아
생전의 엄마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의 가운데 앉아계신 분이
외조부이신데 당시 무척 세련된
분이었다고 들었다. (친일은 안하셨다고 함)
가령 큰삼촌이 뱀 등
동물을 잘 다루는 것을 눈여겨 보시곤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전남 제 1호 수의사로 만드셨고 둘째
삼촌은 부산 해양대학교로 보내셨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남녀평등으로
교육시켜 지금 80대인
이모들이 당시에 유치원읃
다녔고 모두 순천여고를 나왔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매는커녕 욕도 하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우리 애한테 지금껏
구타나 매를 든적이 없다. ㅎㅎ
이 글은 고흥군 초청 홍보 팸투어에
참가하고 쓴 글입니다.
첫댓글 박치기 선수 김일을 모르시는분들이 없겠죠
이곳에서 보니 좋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