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신경 가소성'이라는 말을 알게되었다.
이 말은 뇌과학에서 나온 말로, 일단 '신경'이란 말은 '뉴론'이라고 한다는 것만 알고 넘어가자.
(자꾸 신경쓰이니까)
내가 관심을 가진 말은 '가소성'이란 용어로 생각보다 의미가 깊다.
한자에서 '가 (可)'란 '옳다, 좋다, 동의하다, 허락하다'는 뜻이다. 허가란 말을 생각하면 된다. 또는 입장불가의 가를 생각해도 된다. 그러니까 '가'가 들어가면 무조건 '예스'란 뜻이다.
'소(塑)'라는 한자는 좀 복잡하게 생겼다. 뜻은 '흙이겨 만들 소'이다. 이 말은 '흙을 조물락 쪼물락거려 어떤 형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미술대에 조소과라고 있는데 그때 '소'가 이 '소'이다. 이 말 그대로 조소과 학생들은 찰흙으로 인체를 정말 잘 만든다. 그리고 누구나 어린시절 찰흙 공작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소'이다. 참고로 소조는 안에서 부터 밖으로 만들어가는 개념이고, 조각은 밖에서 부터 안으로 깍아들어가는 개념이다. 조소과에는 이 두가지 개념이 다 들어간 '만들기'전반의 활동을 한다. 그래서 조소과, 혹은 소조과라고 한다.
성은 성질이니까 패쓰.
따라서 가소성이란 말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어떤 형체를 만들수 있는 성질, 또는 수동으로 그런 형체로 만들어 지는 성질'
그렇다면 이 말이 왜 의미가 깊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말하겠다.
어린이의 능력과 인격의 형성이 바로 가소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흔히 아이들의 능력을 '원석'에 비유한다. 그 이유는 이 원석을 잘 다듬고 갈면 '보석'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가소성'이란 말을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이유이다.
어린이는 정말 문자그대로 '가소성'의 화신이다. 하지만 이 아이가 어른이 되면 점점 굳어져가게된다. 즉 가소성이 떨어져가는 것이다. 하지만 몸은 한계가 있지만 마음과 정신의 차원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것이 가소성이란 말을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 봐야할 두 번째 이유이다.
가소성이란 말에서 '가'는 미래의 가능성과 연결된다. 하지만 이미 '성형이 된' 어른의 입장에선 '소성-복원'이란 말이 기다리고 있다. '소성복원'이란 '이러한 만드는 능력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돌아오지는 않는다. 뭔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열'이다. 무슨 열? 그렇다. '열정'의 열인 것이다.
소성복원 : 가열하면 원형으로 돌아가는 플라스틱의 경향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했다. '부드러운 것은 삶의 무리이고, 딱딱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다." 어린아이를 보라. 얼마나 부드러운가! 늙은이를 보라! 얼마나 딱딱한가! 이 말이다. 그 이유는 '가소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열'을 만나면 원형으로 돌아가는 이 소성복원처럼 늙은이도 '열정'을 가지면 자신의 능력을 회복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 대한 열정인가? 어린아이같은 호기심으로 만물의 신비와 창조에 대한 열정. 뭔가를 새롭게 배우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사색하고, 명상하고, 만들어 내는 그런 열정을 말한다.
그래서 가소성을 회복하는 소성복원력이 중요한 것이다. 초당 선생님이 글을 올리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만사 다 그렇고 그런거지 뭐! 뻔하지 뭐! 이런 식으로 가면 가소성이 떨어지는 '죽음의 무리'에 동참한다는 메세지이다. 우리는 이것의 반대 노선으로 가야 젊고 활기있게 살 수 있다는 것. 그 방법중 하모니카로 옛 동요도 불어보고, 사랑과 이별을 연주를 통해서 느껴보고, 또 신나는 곡도 베이스 넣어 쿵짝 거려도 보는 것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열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
정열이란 모닥불 같은 것이다. 해변가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광란의 파티를 즐기는 것. 이런 것이 정열이라면 열정이란 그 화려한 불이 다 꺼진 뒤에 남은 빠알간 숯불 같은 것. 이 불이 더 뜨겁다는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새는줄 모르는 이유는 이 도둑이 정열의 도둑이 아니라 열정의 도둑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가소성이란 말에서 약간의 개념정립을 배웠다.
흔히 우리들은 '플라스틱'하면 바가지를 떠올린다. 이것은 재료의 새로움 때문이다. 이전 자연그대로의 바가지가 아닌 새로운 재료의 바가지였기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이 말이 고착되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일단 영어의 '플라스토(plasto)'는 '창조, 형성, 발달, 가소성'등의 의미를 가진 결합사다. 두번째 '플라스터(plaster)'하면 회반죽이나 석고란 뜻이며 이런 재료로 뭔가를 바르거나 만드는 행위이다. 이처럼 '플라스틱(plastic'이란 말의 원래 뜻은 '성형이 가능한'이 제1의미이다. 영어에서 '틱'들어가면 그러 그러한 경향성이 있는, 그러 그러한 성질이 있는의 뜻이된다. 가령 '플라토닉 러브'할 때의 '닉'이 그런 것이다. 어떤 특징이 포함된 전체를 말하고 싶을 때 이렇게 어미가 바뀐다. 그러니까 플라스틱하면 바가지만 떠올리지 말고 앞으로 '어떤 형상의 가능성이 있는....뭔가를 빚어 만들 수 있는' 그런 성질, 경향을 떠올리자.
이리하여 나는 가소성에 대한 호기심때문에 위의 글 한 편과 가소성을 영어로 플라스티스티(plasticity)라고 하는 것도 알게되었다. 가소성은 좀더 쉬운 말로는 형상력, 뭔가를 형상화 시키는 성형능력이라고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이란 알아가는 길이 아닌가! 깨닫는 과정 아닌가! 모르던 것, 애매모호한 것들은 구름낀 날씨같다. 하지만 이해하고 알게되면 해가 뜬 맑은 날씨가 된다. 맑은 날씨는 나를 기분좋게하고 상쾌하게한다. 그래서 배우고 때로 익히는 일이 즐겁다. 또한 <이해는 용서다>라고 단 카스터가 말했다. 인생을 알고, 인생이 뭔지 이해하게되면 우리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용서할 수있게된다. 용서또한 가소성의 산물이다. 그는 용서라는 행위를 성형혹은 형성했기 때문이다. 의식이 화석화된 사람, 집착에 완전 천착된 사람은 가소성을 잃어 버린 사람이다. 예술의 창조능력은 다름 아닌 가소성의 유지능력으로서 우리 인생을 보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한다.
간혹 하모니카란 악기가 작다고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사람을 만난다. 가소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작다-크다라는 카테고리에 갇혀 딱딱해져 버렸기때문이다. 가소성이 활발발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모든 악기에는 신이 출몰한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하모니카에도 신이 출몰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간단한 선 한 줄에도 정신이 출몰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짧은 글에서 작가의 정신이 출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글과 그림과 음악에서 작가나 연주자의 가소성을 감상한다. 이 과정에서 동시에 자신의 가소성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