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지리산
<조선왕조실록과 이성계굴>
국보 151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조선왕조실록에 지리산에 관한 기사가 138번 기록되어있다. 정확하게 지리산이 125번이며 두류산이 13번이다.
실록(이하 실록으로 표기)에 등재된 내용은지리산에 눈이 많이 왔다든가 비가 많이 와서 산이 무너져서 사람 몇 명이 죽고 한 기상소식에서부터, 포수가 대웅(큰곰)을 잡았다는 이야기,
화개골에 아지트를 두고 있는 도둑의 괴수를 잡기위해 포졸 몇이 모월 모시에 출동을 하였다는 기록,
민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지리산 어느 골에 숨었으며, 올해는 도토리가 풍작이라는 등...
조선조 500여 년간의 자연과 인문 지리 그리고 현존하는 지리산의 사찰 및 사라진 폐사지 등의 종교소식도 아울러 전하고 있어 지리산 역사탐구에 좋은 교과서가 되어준다.
한편 실록에는 인문 지리 등의 역사 외에도 허구와 진실이 가미된 전설과 민담들도 상당수 언급을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예시하는 의미가 내재된 실록 1권에 기록한 암석이서(巖石異書)설화이다.
관련된 태조실록의 국역문을 옮긴다.
[태조 1권] 1년( 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7월 17일 병신
<태조가 잠저에 있을 당시 여러 가지 개국의 조짐이 나타나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렴하기는 하나 이미 늙었으며,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기는 하나 조금 고지식하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사람은 공(公)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문밖에 이르러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지리산(智異山) 바위 속에서 얻었습니다.”하는데, 그 글에,“목자(木子) 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하고, 또,“비의(非衣) ·주초(走肖) ·삼전 삼읍(三奠三邑)”등의 말이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이해 들어오게 하니 이미 가버렸으므로, 이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경복흥(慶復興)고려 공민왕 때의 재상
*최영(崔瑩) 고려 공민왕 때의 명장, 최영장군.
이상의 기록을 두고서 세간에서는 암석이서(巖石異書)즉 ‘지리산바위 출전 이서’라고 일컫는다.
異書는 이성계가 왕위 등극 이전인 사가에 있던 시절
어떤 불승이 지리산의 어느 바위에서 찾았다고 하면서 직접 이성계에게 바친 책을 가리키는데,
책 가운데는“木子乘猪下 復正三韓境(목자승저하 복정삼환경)”라는 글귀가 있었으며,
‘이성계가 다시 삼한을 바로 잡는다’ 이며, 여기서 ‘목자’는 이(李)씨를, ‘저(猪’)는 이성계가 을해생(乙亥生) 돼지띠이므로 바로 이성계를 암시한다는 뜻이라고 전한다. 실록에서는 이서(異書)를 전해준 자가 어떤 불승(佛僧)이라고 했는데
민간 속에 전해오는 설화 속에서는 그 어떤 불승이 ‘무학대사’로 각색이 되어 전한다.
무학대사의 등장은 그가 태조의 왕사이었기에 당연지사로 여겨진다.
한편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암석이서(巖石異書)의 설화를 바탕으로 태조의 위업을 찬양하기 위해 시를 짓고 노래로 만들기도 한다. 이름 하여 수보록(受寶籙) 이라고 한다. 수보록은 궁중잔치에서 연주되던 궁중무악으로 새해 및 양로연(養老宴)의 아악으로 사용 되었으며, <악학궤범>에 가사와 악보가 전한다.
이 사실도 실록의 기록에 있다.<태조실록 4권 태조2년 7월 26일 >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궁중잔치 때마다 역성혁명의 위대함을 축하하는 수보록(受寶籙)의 연주를 즐겼다고 보면 되겠다.
<이성계굴은 지리산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실록의 기록이라고 해도 巖石異書 전설은
고려를 뒤엎은 반역자요 조선의 창건주인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고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인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설화인줄 뻔히 알면서도 전설의 주체가 지리산이라는 사실이 관심을 끈다.
예언서의 출처가 조선팔도의 허구 많은 산중의 바위들 중에서 하필이면 왜 지리산의 바위이며 비록 설화속의 지명이지만 스님이 이서를 끄집어낸 바위굴은 지리산에 있기나 한 것인지,
하여서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지리산 역사가 탐구의 불씨를 지핀다.
사실 지리산 암석이서(巖石異書)의 전설은 오래전부터 지리산자락에 전해져오는 설화이다.
물론 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회자된 설이겠지만 그 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이성계 굴’이 있다고 전해져 오면서, 소위 지리산 도사들 이라고 불리는 산속에서 도학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산 아래 중산리 주민들 상당수도 석굴의 소재와 함께 암석이서의 설화도 훤 히 꿰차고 있을 정도이다.
한편 이성계굴에 대한 전설은 실록의 기록과는 다른 각도로 전하는 또 하나의 설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의 야심을 품고 지리산과 백두산 그리고 남해 금산의 산신에게 허락을 받고자 기도를 올렸는데
지리산의 산신만은 승낙 하지 않아 왕이 된 후 산의 이름마저 불복산(不伏山)이라고 바꾸어서 경상도의 지리산을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하며, 당시 이성계가 기도를 올린 곳이 이성계 굴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상에 회자되는 전설속의 이성계굴이 분명히 있기는 한데 각계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석굴의 위치가 각각이다.
지금까지 대개의 사람들은 법주굴이 이성계굴이라고 알고 있어왔으며,
7대째 중산리에서 살아온 토박이 류재복(86세)어르신께서도 지금의 법주굴이 이성계 굴이라고 하신다.
어릴 적에 선친께서 지리산을 등반하러온 선비들의 산행안내를 하시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고도 하는 류씨 어르신은 이성계 굴의 설화에 관한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헌데 천왕봉아래에 또 다른 석굴 즉 진짜 이성계굴이 있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법계사 스님들이다.
스님들이 지칭하는 이성계 굴은 등산인은 물론 지역 주민들께도 잘 알려지지 않은 석굴로서 법계사 주변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예전부터 법계사 스님들의 기도처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전설속의 지명을 가지고 정확하게 여기다 저기다 단정 짓는 것 자체가 진실로 무의미한 일이지만 스님들이 말하는 이성계 굴을 가 본 결과 지하 동굴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곳을 암석이서의 출처지라고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지금 까지 이성계굴이라고 알려진 법주굴은 엄밀하게 논한다면 굴이 아니고 바위처마로 이루어진 산막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하여서 실록에 기록된 “이서(異書)를 바위 속에서 끄집어냈다”라고 한 문맥과도 어울리지가 않는 부분도 주지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굳이 설화에 합당하는 지명을 부여한다면, 누가 보아도 천혜의 기도터인 법주굴은 이성계의 기도처로, 그리고 법계사 스님들의 기도처였다는 바위굴은 암석이서(巖石異書)의 출처지로 해 주고 싶다.
지리산 巖石異書 설화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 있는 픽션인데 비록 전설속의 지명이지만 이곳이든 저곳이든 기록에 부합하는 바위굴까지 존재한다는 것은
지리산이 영산으로서 자리매김하는데 큰 몫을 했다고 보아진다.
출처:류정자님 페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