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悲 愴
趙 官 善
이혼!
열려진 안방 문틈을 비집고 흘러나온, 엄마가 아빠에게 건낸 제안인 듯 했다. 아니 그것은 제안이 아니라 엄마의 일방적 통보 또는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밤, 아버지는 오히려 담담하거나 또는 시종 죄인의 표정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엄마의 날 선 통보를 이미 당신의 심중에 담아놓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 그렇게도 당당하지 못한 것인지 이혼을 요구하는 엄마 앞에서 아버지는 시종 죄인의 자세로 일관했다. 당초에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는 엄마의 지청구 같은 푸념도 있었지만 당신께서 큰 방 한 켠을 지리도록 차지하고부터서는 언어를 쏟아내기 위해 가족이 함께 자리한 적이 별로 없었다. 물론 평소에도 언어를 아끼시는 아버지였지만 엄마는 아버지의 침묵이 자신의 가슴에 큰 바위덩이를 얹어놓게 한다고 종종 불평했다. 내 손으로 내 눈을 찔렀다는 엄마의 불평에도 아버지의 언어는 오래도록 활성되지 않았다.
“이제 놓아줄 때도 됐잖아요. 당신과 결혼하고 언제 한 번 행복하다고 느낄 시간이 있었나요? 줄곳 먹고 살려고, 아이들 키우겠다고 내가 안 해본 일이 무엇이에요. 정말 세상에 있는 직업이란 직업은 다 겪어봤을 거예요. 그래도,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잘 살 날이 오겠지.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잘 살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나에요. 정말 그런 생각만으로 살아 왔어요. 그래서 한 때는 희망이라는 언어에 도취되기도 했었지만 이젠 아니에요. 더는 견뎌낼 수 없어요. 부모형제마저 불목하는 마당에 무슨 희망을 찾겠다고…….”
“………….”
엄마의 불평불만에도 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엇을 참아낼 수가 없다는 것인지 엄마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의 불평불만에 대하여 아버지가 뱉어낼 반박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묵묵부답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의 자리보전의 원인이야 가족부양의 책임이 전제된 것이겠지만 아버지의 자리보전으로 지급받은 보상금을 날린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안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아버지는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선척적으로 유달리 긴 아버지의 허리는 당신의 육신과 영혼을 옭아매는 족쇄였다.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공사장에서 엠뷸런스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갔던 아버지는 오랜 시간 병원 문을 나서지 못했었다. 그 당시 엄마는 당장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로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요양급여가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안도하던 엄마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병원생활은 길었다. 더하여서 병원에서의 치료에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의사의 소견에 아버지는 떠밀리듯 병원문을 나서야 했던 것이다.
퇴원 이후 아버지는 안방 지킴이로 변해갔다. 아버지의 병원생활로 오랜 시간 지급되던 요양급여가 산재보상금으로 바뀐 이후 엄마는 읍내에 작은 반찬가게를 열었었다. 손 끝이 맵다고 소문난 엄마인지라 한동안은 괜찮았지만 엄마의 반찬가게가 잘 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지근거리에 비슷한 반찬가게가 연이어서 문을 열었다. 결국 엄마의 반찬가게 수입은 손익분기점 아래로 떨어졌다. 엄마는 업종변경을 위해 반찬가게를 접고 조금은 고급스러운 양품점을 열었지만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어느날 매출을 상회하는 임대료를 견딜 수 없었다고 엄마가 말했던 것이다. 산재로 지급받은 아버지의 보상금은 엄마의 손에서 반의 반 이상으로 토막났지만 엄마를 원망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위해 항상 수고했다고 만 했던 것이다.
엄마는 당신으로 인해 줄어든 아버지의 나머지 보상금을 은행에 예치하고 읍내에서 한참 떨어진 공장으로 출퇴근했다. 회사통근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라 다른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이 엄격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엄마의 퇴근시간은 들쑥날쑥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이미 내 자신에 대한 미래를 혼자서 결정짓고 나는 읍내에 소재한 공고에 원서를 넣었었다. 물론 대학진학이 허용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속내엔 공고를 졸업하더라도 집안 형편이 호전되면 대학진학이 가능할 것이라는 계산 또한 속내 깊이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니 내가 철이 들고서 엄마의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부스스한 머릿결로 아침버스를 타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서던 엄마를,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골목길을 기진맥진 오르던 엄마만이 내 기억에 존재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의 보상금을 공중분해시킨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보다도, 아빠 대신 가족의 생계를 잇고자 동분서주했던 엄마의 그간의 고생보다도 엄마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아빠는 행복했겠으며 나아가 우린들 행복했겠는지를 엄마는 생각해 보았는지를 묻고 싶었다.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단어는 예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행복의 구체적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지만 어쨌던 나는 행복의 굴레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거리에 존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어느 누구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는데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라는 굴레에서 혼자 빠져나가겠다는 엄마의 저의를 나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엄마 말대로 누군들 지금까지의 이 생활이 즐거웠겠는지는 고사하고라도 어차피 굴레를 이룬 구성체라면 자기가 조성한 구성체에 대한 책임은 해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안 돼! 말이면 다 말이야? 엄만 그걸 말이라고 해?”
내 방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안방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목청을 높였다. 열여홉, 어린 나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어리지 않았다. 아직 완성된 어른의 개체가 나이라지만 어른으로서의 생각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엄마의 입을 통과한 언어는 내 고막에 깊은 앙금을 깔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세상에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어렵다는 엄마들, 모두 엄마처럼 이혼하자고 하지는 않을 거 아냐. 이제 우리가 이만큼 컷는데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잖아. 나 대학 안 가고 취업한다고 했잖아. 미연이도 여고 졸업하면 취업한댔잖아. 고작 이 년이야. 당장은 일 년이구. 적어도 삼 년이면 미연이도 졸업해. 대학을 졸업하면 갈 자리가 없지만 오히려 고졸취업이 쉬워. 내가 대학을 안 가겠다는 것도 돈을 벌겠다는 의도야. 미연이도 그렇고. 이제 조금만 참으면 엄마 고생도 줄어들 것 아니야. 물론 엄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줄도 알아. 하지만 지금 엄마가 아빠와 이혼할려는 건 엄마 혼자 행복하자는 뜻 아니야. 엄마 혼자서 잘 살아 보겠다는 것 아니야?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봐. 가족이 뭐야? 어려워도 서로 아껴주고 격려해 주는 게 가족 아니야? 그런데 엄마 스스로 가족의 틀을 깨자는 거 아니야.”
사실이었다. 나는 진즉에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무엇보다 가정형편상이라는 이유가 컷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고민하는 동내 선배들을 내 눈으로 목격한 것이 어디 한 두 사람이든가. 물론 형편이 허용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차라리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시간과 자금으로 그동안에 기술을 익혀 내 사업 또는 자영업을 해보겠다는 의지도 내포돼 있었던 것이다. 나의 미래에 관한 플랜을 아빠엄마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엄마는 그 시간을 참아내지 못하고 가족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파괴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울화가 치밀었다. 동생은 물론 아직은 나도 미성년자였기에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아빠엄마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실정인데 가정의 기둥인 두 사람이 각각의 길을 찾아가겠다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엄마의 선언을 들으면서 도래해서는 안 될 큰 재앙이 우리 집안을 스나미로 휩쓸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눈앞의 무엇인가를 닥치는 대로 내던지고 싶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박살을 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던지고말고 할 힘이 미치지 못하는 미성년자인, 설익은 개체였다.
아카시아 향기가 좁은 읍내를 뒤덮던 날, 엄마는 종일토록 집을 비웠다. 엄마의 부재가 불편해도 그래도 저녁이면 엄마가 돌아오겠지, 저녁이 지나고 밤이 깊어서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설마 오시겠지, 더러는 자정뉴스가 끝날 때 쯤에 방문을 열며 약간은 취기 있는 얼굴로 돌아오시던 엄마를 생각하며 조그만 더 있으면 돌아오겠지 하며 우리는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거실이랄 것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제멋대로 떠들고 있는 TV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틈을 비집고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우리 남매의 고막을 파고들었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물좀다오.”
기침소리에 썪여 거실로 삐져나온 건조한 아버지의 음성에 동생은 짜증을 냈다. 사춘기인지 요즘들어 부쩍 짜증이 많아진 미연이였다. 아니 어쩌면 사춘기가 늦게 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기야 여중 3학년이면 늦은 사춘기리라.
“물 떠 드려!”
역시나 짜증을 담은 내 명령에 동생도 지지 않으려는 듯 한 소리를 했다.
“오빠는 맨날 나만 시켜.”
이 년 터울인 우리 남매에게 오빠동생은 고작 시간의 개념에 불과한 순서일 뿐, 우리 남매는 매사에 토닥거렸으며 항상 다툼을 달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동생은 언제나 나를 오빠라 불렀다는 사실이다.
동생의 반항에도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맨날 저만 시킨다는 동생의 반박이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엄마는 끝내 귀가하지 않았다. 엄마의 외박이, 엄마의 부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우리 남매는 냉장고에서 몇 가지 반찬을 꺼내놓고 보온밥통에 들어 있는 공기밥을 퍼내 빈 창자를 채우고 등교를 해야 했다.
“공부 끝나고 누구든 빨리오너라. 오늘은 옆에 누가 있어야겠구나.”
신발을 꿰어 신는 남매에게 아버지의 부탁이 귀를 파고들었다.
“예.”
우리 남매의 대답이 동시에 떨어졌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도 동생도 방과 후에 바로 집으로 오지 않을 것이란 걸.
구질구질했다. 철 들기전의 어린 개체들에게는 먹고 입을 것만 제공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었지만 어느날 문득 우리의 삶이 주변에 보이기가 부끄럽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이후부터 나나 동생은 주변에 우리라는 실체를 감추고 숨기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변에 대한 우리의 감추기나 숨기기는 언제나 우리 안에서 종료됐으며 우리는 집안의 기둥인 아빠엄마에게는 여하히도 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환경이 그러하다 보니 오히려 어른으로 성장하는 시간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빨라지고 있기도 했다.
등굣길에 누구든 빨리 와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은 내가 현관문을 닫는 순간부터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동생도 나와 같았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결국 학교가 파하고도 내 발길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이미 집안의 모든 사정이 대학진학을 허용하지 않고 있음을 인지한 나는 쓰잘데 없는 공부를 핑계로 도서관엘 들려 만화책 몇 권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배가 고파서야 집으로 향하는 발길을 떼야 했다.
무료한 일상이었다. 학생의 본분이 공부에 있다지만 진학이 차단된 고2학생에겐 공부가 무의미했다. 더하여서 학급에서 겨우 바닥권을 벗어나고 있는 학업성적이 내 인생의 전도를 막고 있다는, 막연한 열패감도 나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필요성의 유무를 떠나 졸업장을 손에 쥘 때까지는 학교를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 안에 내재된 굳센 각오였다.
엄마는 하루의 부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저녁 밥상에 올려진 반찬 가짓수가 어제보다 두어가지 많다는 것 외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집안 분위기는 역시나 냉랭했고 아버지는 엄마의 눈치를 보는 듯 했으며 구심력을 상실한 아버지의 몸짓 만큼이나 엄마의 몸짓은 원심력을 유지한 채 우리들 굴레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언제 왔어! 엄마?”
생각지도 못한, 동생을 대신한 엄마의 모습에 나는 반색을 나타냈다.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띠면서 나는 부재할 엄마를 생각했고 저녁 밥상을 챙길 미연이를 생각했었다. 허리를 다친 이후 심화된 척추디스크로 인한 아버지의 거동불편은 아버지 곁에 누구든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제외한 구성원 모두는 나름대로의 출타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외할머니 보고 왔다. 많이 아파하셔. 아빠가 말 안 하시든? 엄마 외갓집에 다녀온다고?”
엄마가 내겐 던진, 묻지 않은 답변이고 질문이었다. 엄마의 외가행을 아버지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들딸에게 엄마의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여 우리들이 엄마의 부재를 확인하고자 외갓집에 전화라도 한다면, 그리하여 엄마의 출타가 친정행이 전혀 사실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로인해 야기될 아들과 딸의 실망과 분노의 결과를 차단하기 위한 아버지의 배려쯤으로 나는 생각했다.
“얼마나 아프셔?…….”
“많이.”
“외삼촌네는 안 가신데?”
“안 물어봤어.”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모들이야 외할머니의 딸이니까 이해됐지만 외삼촌이 셋이나 있는데도 아무도 외할머니를 모셔가지 않은 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실려면 외삼촌들은 왜 낳았데? 그것도 셋씩이나. 다른 집들은 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더구먼.”
어린 내 말이 기특했는지 아니면 어이가 없었는지 엄마는 잠시 나를 내려다 봤다. 나를 내려다 보는 엄마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지만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린 나는 성사의 가부여부를 떠나 우리가 외할머니 집에 들어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외삼촌 셋과 우리 엄마를 비롯하여 이모 둘을 키워낸 외할머니 집은 우리 네 식구가 들어가 산다면 우리에게 유착된 이제까지의 가난이 일시에 증발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 심중에 깊이 내재된 상대적 빈곤으로 스스로 친구들의 주변을 맴돌거나 또는 또래들로부터 외면 받던 크고 작은 수모들을 떠올릴 때면 대궐 같은 큰 집에 혼자 살고 계시는 외할머니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을 성장이라 언급한다면 남다른 성장이기도 했다. 흘러가는 시간에 의해 나는 자연스럽게 몸집이 커졌으며 남달리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체격조건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듬뿍 받은 탓인지 또래들보다 어깨죽지의 높이가 높았다. 가난과 배치된 내 어깨죽지의 높이는 다행히 나를 자긍의 기반에 들여놓았던 것이다.
외할머니가 아프시다는 엄마의 말은 내 기분을 저하시켰다. 엄마 또한 평소 때의 우울감이 아닌 듯 했다.
저녁밥상이 치워질 때까지 우리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먹는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두들 수저질을 했지만 외할머니의 와병 소식은 좁은 방 구석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외할머니한테 또 갔다올거야?”
분위기 반전을 위한 동생의 입놀림이었다.
“돌아가시면 기별오겠지.”
엄마의 외할머니에 대한 언급은 건조하고 간단했지만 모름지기 원망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미연이 또한 바라던 엄마의 대답이 아니었으리라.
엄마가 외갓집을 다녀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아버지가 외갓집을 다녀 온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에 없다. 반면 미연이나 내가 두어 번 외갓집을 다녀왔었지만 초등학를 다닐 무렵의 일이었다.
모두 헤아려 열서너 명이나 되는 손주들에 대해서 외할머니는 특별한 애정이나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것이 우리들에게만 한정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 셋, 딸 셋을 둔 외할머니의 근심걱정이 유독 우리 집안에 한정돼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어릴 적 얘기지만 몇 번 나를 앞에 앉혀놓고 외할머니는 우리를 걱정했던 사실을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만 잘 살면 외할미는 아무 걱정이 없는데…….”라는 소리를 나는 외할머니로부터 몇 번인가 들었으며 그런 어느 날 궁금한 나머지 나도 할머니에게 물었던 것이다.
“우리가 왜 걱정인데요?”
“외삼촌들, 큰이모 작은 이모 다 잘 사는데 너희만 가난하잖느냐. 할미는 항상 그것이 걱정이란다.”
내가 철 들기 전의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 외가에 갔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간단히 차린 밥상 앞에 외손자를 앉혀두고 빈부가 무엇인지를 구분 못 할 나에게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 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 학교라는 집단에 처음 소속됐을 때까지 빈부를 알지 못했던 나에게서 외할머니의 근심걱정이 우리 몫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할머니의 그러한 근심걱정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내게 있어 행복의 실체가 아니었을지…….
그랬다. 엄마의 오빠들인 외삼촌 셋 모두는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 위에 큰이모와 엄마 동생인 작은 이모 또한 이모부들이 지방의 공무원들이라 외할머니 눈에는 걱정이 없는 듯 했다. 그에 비하면 엄마의 여섯 남매중 다섯째인 우리엄마의 생활은 외할머니 눈에 근심걱정의 원흉으로 자리잡고 있음이 확연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이, 사람의 생활이 비교되어서는 안 될 일이겠지만 외할머니의 눈은 당신 뱃속으로 출생시킨 여섯 남매의 삶을 당신의 잣대로 지속적으로 재고 있었던 것이리라.
나는 엄마가 왜 또는 무슨 이유로 외갓집을 다녀왔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외갓집은 외할머니 혼자 거주하시는, 그러나 혼자 계시기엔 너무나 넓고 큰 집이었다. 그 집에서 외삼촌들과 이모들이 성장했으며 우리 엄마 또한 그 집에서 아빠와 결혼하기 전까지의 젊은 시절은 보냈다고 언젠가 나의 물음에 엄마가 대답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외갓집을 보면서 또는 생각하면서 나는 종종 우리 집은 물론 친구들과도 비교하거나 부러워했으며 부자와 가난의 차이를 외할머니의 집과 비교할 때도 있었던 것이다.
외할머니의 기우처럼 우리 집은 풍족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허구헌 날 돈돈돈으로 시작해서 돈돈돈으로 끝나는 엄마의 돈 소리와 그 소리에 주눅이 들어 엄마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나 동생은 물론 아버지의 죽지 꺾인 날개는 외할머니의 기우를 털어낼 수 없는 뿌리였다.
우리 남매는 외사촌이나 이종사촌간에도 조우가 없었다. 아니 엄마 또한 당신의 형제자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음이 확연했다. 그것이 외할머니의 호령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추측했다. 우리를 제외한, 저희들 끼리의 거리감이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해도 어찌됐든 우리는 외가로부터 유리된 개체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외할아버지의 기일을 달력에 표시해둔 아버지의 손글씨가 명징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장인기일!”
장인은 무엇이며 기일은 또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국어사전을 펼쳐놓았을 때 나는 중 1짜리 까까머리였었다.
‘아내의 아버지, 제삿날!’
결국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제삿날을 알고 있었지만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었었다. 그날, 무슨 이유였는지 엄마도 외갓집을 다녀오지 않았었다. 그렇게 중요한 외할아버지의 제삿날에 우리 가족은 모두 집을 지켰지만 엄마는 엄마 대로, 아빠는 아빠 대로 퉁퉁 부은 속내를 안방과 작은 거실 가득 풀어헤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날만 그러했던 게 아니었음을 후일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외할머니 생신날에도 외삼촌 가족들과 이모 가족들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두 외갓집에 모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오기가 돋았었다. 어린 내게 솟아난 오기가 외갓집에 미칠 영향이 무엇이겠는가만 어쨌던 나는 두고보자를 마음에 깊이 음각했던 것이다. 내가 외갓집을 외면한 이유였다.
“너희들도 다 컷으니 엄마를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만약 엄마가 아빠와 이혼한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니?”
뜬금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안 방 문틈을 헤집고 나온 소리를 들은 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나는 아빠와 엄마가 이혼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혼이라니……. 물론 아빠의 병고가 길어져 엄마의 바깥생활이 시작되었기에 힘들어 하는 엄마를 알고는 있었지만 아빠와의 이혼라는 말을 우리들 앞에서 직접 꺼낼 줄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마! 꼭 그래야 해? 엄마 행복만 중요하고 우리는? 우리 행복은 중요하지 않아? 아니 그러면 우리 집은? 아빠는?……. 안 돼, 나는 안 돼. 만약 아빠엄마가 이혼하면 나는 차에 치여 죽든지 강물에 빠져 죽을 거야. 지금도 구질구질한데 엄마마저 없다면 살아서 뭘해. 아니 친구들한테 놀림 받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갈 일은 생각 안해 봤어? 안 돼 죽어도 이혼은 안 돼.”
“……….”
딸의 간곡한 애원에도 말문을 열지 않는 엄마였다. 엄마는 이미 자신 속에 어떤 결정 또는 결과를 조각해 놓고 나머지 가족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임을 나는 알지 못했다. 엄마의 속내에 담긴 우리들과의 단절의 형태와 색깔들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중재자로서의 나의 역할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간이 불과 달포 전이었다. 그러한 시간을,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들에게 오늘이 있게 한 것이라고 예고한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어쨌던 엄마는 우리 남매를 앞에 앉혀놓고 아빠와의 이혼을 얘기했던 것이다. 당신의 앞날을 위한,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 아버지를 포함한 당신의 어린 아들과 딸을 험준한 단애에서 밀어 떨어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신 안에 석회로 굳은 결심을,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아빠와의 이혼을 언급한 것이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 기다리지 마라.”
엄마가 하루 가득 부재로 채워지도록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부재가 하루 더 연장되고 또 하루의 부재가 연속으로 이어지자 아버지는 넘어가는 숨결과 함께 엄마의 영구부재를 예감하신 듯 언어로 뱉어냈다. 아버지의 체념가득한 가슴 속 소리는 결국 우리 남매의 가슴에 큰 못으로 박혀지고 있었다. ‘기다리지 마라’는 아버지의 절망에 찬 음성이 9월의 방 안 공기를 갑작스레 툰드라로 만들고 있었다.
“엄마, 기다리지 말라. 원망하지도 말고. 엄마, 아빠 만나서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아빠는 이런 시간이 올 줄 알고 있었다.”
오래도록 닫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처럼만의 언어로서는 상상밖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엄마는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언어 속에는 체념이 가득했다. 아버지의 그 체념 속엔 나의 절망도 포함돼 있었다. 그렇듯 아버지의 체념은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당신의 속내에 깊은 음영을 깔아두고서 아내의 영구부재를 아들딸에게 알리는 아버지의 속내를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엄마의 부재로 인한 우리들의 앞으로의 불편만 가슴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분개했다. 아내라는 이름을 차치한다손 치더라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굴레를 지켜낼 이유는 충분하게도 남음이 있을 터인데, 그러한 것이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증표일 터인데도 엄마는 가족의 굴레를 스스로 허물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엄마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증거라고 나는 엄마를 매도했다. 아직 체 성장하지 못한 개체의 아들과 딸을 두고서 이혼한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배려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엄마로서의 자리를 지켜 달라고 말한 때가 언제인데……, 지나가던 개가 웃고도 모자랄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정말이지 웃기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지.
아버지는 담담하려 했다. 나는 아버지의 가슴속에 움츠리고 있는 엄마에 대한 배신감을 읽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당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버지의 육신에 남아 있는 기력의 쇠진이 원인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설상가상이었다. 그러한 설상가상은 내가 피할 수 있는 운명이 아니었다. 엄마의 그림자가 컷다는 사실은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극명하게 드러났다. 자리보전이 쉽지 않은 아버지는 우리 남매가 등교한 틈을 이용하여 장복해 오던 처방약을 한 알 남김없이 물에 녹여 당신의 위장 속으로 삼켜넣고 우리와의 관계를 스스로 정리하는 방법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우리와의 인연이 이미 종료된 것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나는 외할머니에게 아버지의 부고를 알렸다. 알릴 곳은 외갓집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친인척이 존재한다는 소릴 들은 적이 없었음은 물론 왕래하는 친인척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외할머니의 반응은 차가웠다. 외손자의 아버지가 임종했는데, 그 외손자가 아버지의 부고를 알렸는데, 한 때는 당신의 사위였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외손자가 아무리 어리다지만, 아니 어리기에 더더욱 귱휼히 생각하고 함께 마음 아파해야 되는 것이었는데 외할머니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먼저 수화기를 놓았던 것이다. 물론 할머니 입장에서야 사위 셋 중의 하나일 뿐이고 여러 명의 외손자 외손녀가 있는 것이라 손가락 마디 만도 못한 인연일 수 있겠으나 나에겐 아버지의 죽음을 알릴 사람이 외갓집밖에 없음을 외할머니가 명징하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는 은행에 예됐던 얼마간의 금전과 동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너무나도 조용히 감장을 했다. 세상에는 죽으라는 법이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세상과의 단절에 절망하고 있을 때 소문을 듣고 찾아주신 이웃 어른들의 손에 의해 아버지의 주검이 세상에서 흔적을 지우는 과정을 거치며 나는 내 가슴속 깊은 곳에다 어디보자를 몇 번이고 주입했다.
진정으로 두고보자 였다. 어떻게든 성공하여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삼촌과 이모들, 그리고 외사촌들과 이종사촌들 모두를 놀라게 할 것이라는 내 안의 다짐, 그것은 다짐이 아니라 강한 복수심의 각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 속의 두고보자가 영글기도 전에 내 심장은 또 단장의 아픔을 껶어야 했다.
그날, 등교하지 않았다는 동생 미연의 담임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내가 이미 하교하여 도서관에서 두고보자를 가슴에 새기고 있던 시간이었다. 나역시 귀가를 안 한 터라 미연의 등교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단숨에 달음박질을 쳐 집에 닿기도 전에 미연이를 불렀다.
“미연아! 미연아!”
나는 천지간이 진동하도록 미연이를 부르며 방문을 열어제켰지만 그곳엔 미연이가 있질 않았다. 아침밥을 같이 나누고 같은 시간 등교를 위해 함께 방문을 나섰던 동생 미연이였는데……, 행방이 묘연했다.
미연이와 나의 학교방향이 동일하지 않은 탓에 우리는 언제나 버스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처지였지만 그날처럼 결석을 하거나 늦도록 집을 비우는 일은 별로없었다.
그날 밤, 내 육신이 지치도록 미연이를 부르며 인근을 찾아 헤매었으나 미연이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후 담임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실종신고를 했지만 안 찾는 것인지 못 찾는 것인지 경찰에서는 아무런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나는 천애고아가 돼 있었다. 아버지의 영원한 부재와 흔적을 감춘 미연이, 엄마는 이미 내 가슴속 깊이에서 유탈된 지 오래였다. 엄마의 종적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를 배신한, 우리를 무시하고 외면한 외갓집에 대한 복수심 등으로 한동안 나는 방황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 번, 엄마가 나를 찾아왔었지만 나는 철저히도 엄마를 외면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미연이의 가출이 엄마를 원인으로 발생하였기에 모든 원망은 엄마에게 귀착돼 있었다. 엄마를 따라가자는 막무가내의 채근을 나는 완력으로 거절했다. 나는 이미 엄마의 아들이 아니었으며 엄마 또한 나의 엄마가 아니었다. 나아가 나를 힘으로 다룰 수 있는 엄마는 더더욱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나를 떠나 나는 홀로 부유하는 부평초 같은 처지였다. 열여덟, 아직 성숙되지 않은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떠났다는 것은 절망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흔적을 나타내지 않는 동생 미연이만은 내 가슴속 깊이 음각되어 단 하루라도 생각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흐르는 시간 속에 합류된 채 공고를 졸업하고 당초의 계획대로 작은 설비회사에 자리를 잡고 대학진학을 가슴에 다져넣고 있었다.
몇 개월째 맑은 하늘의 연속이었다. 겨울 내내 눈다운 눈 한 번 내리지 않은 하늘이었다.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었으나 비는 역시 내리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파종기를 지난 농부들의 가슴에 피멍을 새겨내고 있었다. 지역마다 제한급수를 할 수밖에 없다고 방송마다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개울물이 마르다 못해 저수지마저 거북등처러 갈라터지기 시작했다. 70대 할아버지가 티브이에 출연하여 난생 처음 겪는 가뭄이라고도 했다. 티브이에 등장한 진행자들은 실재로 쩍쩍 갈라터진 논바닥 위에서 가뭄을 방송하기도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회사에서 오후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선반을 점검하고 있는 때에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다. 낯선 음성은 나를 확인했다.
“예, 접니다.”
“김미연 학생을 실종신고 하신 사실이 있죠?”
“예.”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동생입니다.”
“유감입니다만 김미연 학생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지금 가나시 다라병원 영안실에 안치돼 있습니다.”
청천벽력이었다. 비록 소식 한 통 보내오지 않는 동생이었지만 어디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겠지 하는 기대로 견뎌왔던 내 안의 안도가 청천벽력의 절망을 알려왔던 것이다.
가나시!
가나시는 바로 옆 동내 도시였다. 도시 규모에 비해 상수원이 작아서 항상 다른 도시보다 먼저 바닥을 드러낸다는 가나시 저수지였다.
나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택시를 잡아타고 가나시의 다라병원을 찾아갔다. 미연이는 그곳에 있었다. 집을 나서던 날 아침에 입었던 색바랜 교복을 입은 채, 죽음을 알리는 하얀 면포에 덮여 있는 미연이의 주검을 확인하고 오열하고 또 오열했지만 모든 상황이 그렇게 종료된 후였다.
마밧골 저수지바닥에 이상한 물체가 있는 걸 지나가던 등산객이 발견하고 신고했다는 미연이의 시신은 부패상태로 보아 마지막 등교하던 걸음을 그대로 옮겨 저수지를 찾았을 것이라 짐작됐다. 내가 미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검시를 마친 미연이를 집 주변 영안실로 옮겨 장례를 치렀지만 살아 있다한들 열여덟 어린 소녀에 불과한 미연이에게는 한 뼘의 땅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스무 살. 하나의 성체가 됐다지만 나는 아직 미숙한 개체였기에 엄마를 저주했고 외할머니를 저주했고 외갓집의 모든 가족들을 저주하는 데 여념없었다.
내 곁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열여섯, 눈만 마주치면 티격태격 하던 유일했던 동생마저 나를 떠났다. 멀리, 아주 멀리……. 중학교 교복을 입고 촬영한, 상청에 올려졌던 열 네 살 적 미연의 영정사진 만이 작은 거실 한쪽 벽에 걸려 엷은 미소를 담아내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어올리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내 유일한 동생, 미연의 사진 속 얼굴을 오래도록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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