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과 두로에서 제자들과 성령의 교제를 하다.
성경 말씀: 행 21;1-6,
성구: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에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
<서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두로에서 제자들을 찾아서 성령의 교제를 합니다. 어떤 과정에서 성령의 교제를 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바로고스에서 두로까지 행선하다.(1-3,)
본문 2절에 보면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예루살렘 쪽으로 가는 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배를 타고 가다가 예루살렘 쪽으로 가는 배를 만나서 갈아 탄 것입니다. 밀레도에서 탄 배는 고스로 가서 로도에 이르러 바다야를 거쳐 해안을 따라가는 배입니다. 그러나 로도나 바다야에서는 직접 예루살렘 쪽으로 가는 배가 있습니다. 그런데 로도에서 예루살렘 쪽으로 가는 배를 타지 않고 바다야에서 예루살렘 쪽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은 바울이 있는 시간대에 예루살렘 쪽으로 가는 배가 없어서 바다에에서 배를 갈아 탄 것입니다.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예루살렘 쪽으로 가려면 불편하더라도 여러번 배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불편하더라도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만나서 탄 배는 예루살렘을 가는 배가 아닌 두로를 거쳐서 둘레미아를 거처 가는 배입니다. 또 그 배는 사람만 운송하는 배가 아닌 짐도 운반하는 배입니다. 그래서 두로에서 짐을 내리는 시간이 이레정도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이면 그냥 도보로 가도 되는데 바울은 기다렸다가 배를 타고 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으로 도보로 가면 예루살렘에는 무사히 갈 수 있지만 배를 기다렸다가 가면 제자들을 만나서 성령의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도 성도들과의 성령의 교제를 더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일주일을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성도들과의 성령의 교제를 중요시 여기는 결정을 하여야 합니다.
2. 두로에서 이레 동안 성도의 교제를 하다.(4,)
본문 상반 절에 보면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래를 머물더니... ”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두로에 이레를 머물기로 결정한 것은 특별한 어떤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제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머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찾았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여 제자들을 찾아서 이레를 지내면서 성도들과 성령의 교제를 하였습니다. 즉 모르는 성도들을 찾은 바울이나, 처음 본 사람과 성령의 교제를 나눈 두로의 제자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성도이기 때문에 성령의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서로 안면이 없더라도 성령으로 교제를 하면서 서로 은혜를 나누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교제를 할 때 서로 믿음의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이더라도 성령의 교제를 하여 서로 믿음의 발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하반 절에 보면 “... 그 제자들이 성령에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하고 있습니다. 두로의 제자들과 바울은 서로 성령으로 함께 하기 때문에 성령의 교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것을 성령의 교제 중에 알고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육체적 고난이 있을 것을 성령으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으며, 바울은 인간적으로 고난을 받더라도 로마에 복음을 전하려 가야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으로 고난을 피하라는 권면이나, 고난을 받더라도 전도를 중요시 여기는 바울이나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교제에서 나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의 교제가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3. 두로를 떠나다.(5-6,)
본문 5절에 보면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 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두로에서 여러 날을 지냈는데 다른 곳에서는 주로 강론을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강론보다는 같이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떠나갈 새 어른들만 전송을 나온 것이 아니라, 처자와 함께 하였습니다. 이는 처자들도 함께 성령의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전송할 때 바닷가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 것으로 보아서 모든 가족이 함께 신앙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가족이 함께 교제를 나누다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생활이 성도들의 성령의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가족이 함께 교제를 나누는 성령의 교제를 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 가니라.” 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을 교제하였지만 그들은 성령의 교제이기 때문에 빨리 친근할 수 있어서 배에까지 전송할 수 있었으며, 또 바울이 배에 올라도 전송할 수 있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작별하여도 영적으로는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의 교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제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교제가 가능하며, 교제가 이루어지면 서로 작별을 하더라도 영작으로 계속 교류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교제를 하여 서로 영적으로 교류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결론>
사명을 위해 일하는 행복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역마차에는 세 종류의 좌석이 있었다고 합니다. 1등석과 2등석, 3등석의 요금이 각각 차이가 있었는데 이 차이는 역마차가 고장이 났을 때 드러납니다.
1등석 요금을 낸 사람은 고장이 나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고, 2등석은 마차에서 내려서 길 옆에 서서 마차가 고쳐질 때까지 구경하는 사람이며, 3등석은 내려서 마부와 함께 마차를 밀고 고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부들은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3등석 요금을 낸 사람들이 누군가를 눈 여겨 보았습니다. 일꾼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주고 도와줄 때, 역마차가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도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사람, 구경꾼, 그리고 팔을 걷어붙이고 일하는 일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누리는 여러 가지 행복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는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충성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행복과 보람은 없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사명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빨리 가는 배를 탔으며, 두로에서 머물 때에 제자를 찾아 성령의 교제를 하였으며, 작별하면서도 영적이 교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명으로 생활하여 믿는 사람들끼리 성령의 교제를 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