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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국 산업혁명의 토대를 구축한 유대인
1) 해적의 나라가 세계 최강이 되기까지
유럽의 작은 섬나라 영국은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스페인은 물론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에게도 밀리는 변방국이었다. 영국 귀족들은 상업을 천시하여 17세기까지 영국 상선은 해적선과 구별되지 않았다. 모든 배들이 잠재적인 해적선이었다.
17세기 초반 영국경제의 최대 취약점은 모직물이라는 단일 수출상품과 앤트워프라는 단일 수출 시장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러나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이 전란을 피해 모두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자 영국에는 큰 불황이 닥쳐왔다. 그로 인해 영국은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왕실에서 묵인하는 해적질이 극성을 부렸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비밀리에 해적 노릇을 하도록 도와 스페인 상선을 주로 공격하였다는 설도 있다. 실제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공연하게 스페인과 싸우는 네덜란드 북부 일곱 개 주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국의 행동에 스페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588년 무적함대를 영국으로 출격시켰다.
영국은 기동성 좋은 작은 배들로 장거리포를 활용해 치고 빠지는 작전을 벌였다. 당시 장거리포의 사정거리는 스페인보다 영국이 훨씬 길었는데 다른 산업은 다 뒤졌지만 대포 제작기술만은 월등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찔렀다. 이는 세계 권력의 이동이자 해상권의 장악을 뜻한다. 그간 스페인제국의 기세에 눌려 살았던 영국은 이를 계기로 중상주의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되었다.
2) 크롬웰, 항해조례 발표와 유대인의 영국 이주 허용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왕권신수설의 국왕과 의회의 대립은 내란으로 치달아 결국 1645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 군이 승리했다.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을 통해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제를 설립했다. 그가 1651년에 발표한 ‘항해조례’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영국 및 영국 식민지와 무역을 하려면 반드시 영국 배이거나 영국 식민지 선박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해운과 무역업계에서 경쟁국인 네덜란드를 배제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로 인해 1652년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1차 전쟁이 벌어졌으나 3년여 전쟁 끝에 영국이 이기고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하기에 이른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네덜란드의 유대인들로서는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했다. 결국 그들은 랍비 미나세를 대표로 영국에 파견하여 1290년 이후 유대인의 입국이 금지된 영국에 재입국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크롬웰 시대에 영국에서는 실용주의가 대두했고, 이를 계기로 유대인에 대한 평가도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청교도는 유대교와 분위기가 흡사했다. 청교도들은 자기들도 심하게 박해받아왔던 만큼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에 일찍 눈을 떴고, 또한 청교도들의 교리 자체가 <구약성경>을 중시하고 가톨릭에 비판적이어서 유대교와 흡사한 면이 많았다. 성실한 노력으로 일군 부를 오히려 찬양했기에 가톨릭에서 죄악시했던 대부업을 경제 발전의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보고 이자를 5퍼센트 이내에서 허용했다.
크롬웰은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56년 비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영국 이주를 허용했다. 청교도 혁명 당시 유대인 금융인들이 크롬웰을 적극 도왔으며 특히 랍비 미나세가 주도하여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크롬웰에게 대규모의 전쟁 비용을 제공한데 대해 크롬웰은 고마움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크롬웰은 중상주의 정책을 시작하고 귀족과 교회로부터 몰수한 토지도 재분배하면서 유대인 상인들에게 구도심 지역을 경제특구로 지정하는 파격적인 배려를 했다. 이곳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런던 속의 런던인 ‘런던시티(The City)’가 된 것이다.
1660년 영국이 선포한 2차 항해조례는 설탕, 담배, 목화 등 중요 상품을 영국 식민지에서 영국 및 영국령으로만 수출할 수 있도록 했다.
돈 되는 상품을 영국령끼리만 무역하도록 한 것으로 완전히 네덜란드의 목을 조르자는 의도였다. 더욱이 1663년에 발표한 3차 항해조례는 더 가관이었다. 유럽 대륙에서 아메리카 영국 식민지로 수송되는 모든 화물은 먼저 영국에 들려 육지로 내린 후 식민지로 재선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규정했다. 이는 식민지로 향하는 화물에 영국 관세를 부과함으로서 식민지와 다른 국가 간의 직접무역을 제한한 것이다.
결국 영국과 네덜란드는 1665~1667년 2차 전쟁을 했으며 이번에는 네덜란드가 승리했다. 전쟁의 종식과 함께 영국이 아메리카의 뉴욕을 얻는 대가로 네덜란드에게 사탕수수 산지인 수리남을 양도하고 육두구(nutmeg) 산지인 반다제도의 네덜란드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사탕수수와 육두구의 경제적 가치가 더 높았겠지만 전쟁에 이긴 네덜란드가 뉴욕을 포기한 건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큰 실수였다고 하겠다.
3)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유대인들 영국으로 대거 이동
1672년 유럽 대륙에서는 당시 유럽의 강국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야망으로 네덜란드를 침략했다. 열세의 네덜란드는 프랑스를 대적하기 위해 오렌지 가문의 윌리엄 3세를 국가적 위기에 대처할 지도자로 추대했다.
결국 전쟁은 국가 간 역학 구조에 의해 프랑스와 영국, 독일 공국의 ‘동맹군’이 형성되고 네덜란드,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이 되어 이들 간의 전쟁이 되었다.
당시 연합군 사령관 오렌지공 윌리엄의 경제적 뒷받침을 한 사람들이 헤이그의 세파르디계 유대인 그룹이었다. 6년간 전쟁 끝에 윌리엄 3세는 프랑스의 야망을 저지하고 1678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이를 틈타 영국은 11년 만인 1660년에 왕정이 복고되었다. 형인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가 전제정치를 펼치고 가톨릭을 강요하자 이에 반대하는 귀족과 의회에서 네덜란드 오렌지 공 윌리엄과 메리 부처에게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도록 초청장을 보냈다. 윌리엄 3세는 영국 왕 찰스 1세의 외손자이고 그의 부인 메리는 영국 왕 제임스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1688년 11월 윌리엄·메리 부처는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해 런던으로 진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 곧, 명예혁명이 이루어졌다. 1689년 윌리엄·메리 둘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윌리엄을 따라 유대인 8천 여 명이 영국으로 옮겨갔다. 이후에도 유대금융가들이 대거 이동하여 네덜란드를 부흥시켰던 현대적인 ‘사업방식’이 고스란히 영국으로 건너감으로써 영국은 짧은 시간에 선진적인 금융 산업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윌리엄이 영국 왕위 계승 이후 처음 부닥친 난제가 재정적자 문제였다. 오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또 프랑스로 망명한 전임 제임스 2세의 왕위 탈환 움직임을 공공연히 지원하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왕실의 재정적자문제에 대해 유대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주축이 된 금융가들은 돈을 모아 빌려 주는 대가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는 민간은행 설립 허가를 요구한 것이다.
윌리엄 3세는 군비조달을 위해 자금을 영구히 빌리는 대가로 유대인들에게 화폐 발행 독점권을 주는 칙허장을 교부했다. 화폐 주조권을 손에 넣은 유대인들은 은행을 설립했고, 1694년 의회 입법을 통해 민간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 (BOE, Bank of England) 곧 영란은행의 창립을 허가했다. 세계 최초의 ‘민간 소유’ 중앙은행이 탄생한 것이다.
4) 유대인, 면직물산업의 태동과 산업혁명의 토양이 되다
상인들이 농민들에게 양모와 대마, 면 같은 원재료를 나누어 주고 나중에 완성품을 수거하는 직물 가내수공업 방식을 ‘선대제(先貸制, putting-out system)’라고 한다. 선대제 덕분에 과거 가공되지 않은 양모를 그대로 수출하던 영국은 16세기 중반부터 원단 형태로 가공해 수출했다.
최초의 면직물산업은 16세기 말에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유대인 이민자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들은 동방무역에 종사하며 주로 레반트 지역(소아시아와 고대 시리아 지방의 지중해 연안)은 유대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원면은 유대인 상인들만 취급할 수 있었다.
17세기 유대인 상인에 의해 들여온 레반트 지역의 수입 원면으로 국내에서 면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주로 선대제를 통한 일손이 많은 농촌에서 생산했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도 길드의 규제를 피해 유대인들이 직접 선대제에 가세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레반트로부터 수입하는 원면만으로는 선대제 가내수공업에 쓰일 물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18세기에 유대인들은 영국령 카리브 지역이나 브라질 등 여러 곳으로 수입처를 확대했다.
그러던 1757년, 인도에서 벌어진 플라시 전투로 원면 확보에 돌파구가 열렸다. 이 전투로 동인도회사가 원면의 주 생산지인 벵골 지방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무역보다는 여러 가지 세금을 만들어 인도에서 돈과 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인도에 식민지 체제를 수립한 동인도회사는 벵골에서 거둔 세금으로 원면을 사서 영국으로 보냈다.
이제 영국의 면직물산업은 본격적인 수출산업이 되었다. 그러나 면화에서 실을 뽑는 느린 수작업으로는 실 공급이 너무나 부족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목수인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1767년 면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인 ‘방적기’를 발명했다. 이것이 그의 딸 이름을 딴 제니방적기다. 이 제니방적기가 산업혁명에 시동을 걸었다. 이어 1769년 이발사이자 가발 제조업자였던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제니방적기를 개량해 수력방적기를 발명했다. 이로써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는 물 있는 계곡에 공장이 들어섰다. 1779년에는 새뮤얼 크롬프턴이 수력방적기와 제니방적기의 장점을 합친 뮬(mule)방적기를 만들었다.
이제 품질 좋은 실이 남아돌자 이번에는 옷감을 짜는 직조기가 개발되었다. 1784년 옥스퍼드대학교 출신인 목사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옷감 짜는 직조기를 발명했다.
영국 정부는 국내 면직물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모든 조치를 다했다. 그 뒤 면직물산업은 대량생산 시대로 돌입해 1789년부터 1860년 사이 영국 총 생산액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이제 인도산 원면으로는 부족하여 1790년대에는 이집트에서, 그리고 1800년대에 들어서는 미국에서 수입해 왔다. 당시 미국은 흑인 노예를 이용하여 면화 생산을 하여 1820년부터 인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국이 되었고, 1830년이 되자 영국 원면 수요량의 4분의 3을 미국이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학자들은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꼽는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길드(수공업자조합)를 붕괴시켜 억압적인 제도의 틀을 부순 것이다. 이로써 창조적인 발명 및 기술 개량이 사회적 신분상승과 부의 획득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 유대인 자본이 영국에 건너옴으로써 저렴한 자본을 쉽게 구할 수 있어 산업혁명 기술이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을 통해 암스테르담의 부와 금융기술을 받아들인 런던은 세계 최대의 금융도시로 부상되었고 이러한 세계 시장을 경영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18세기에 영국이 유럽 제1의 무역대국이 되었다.

첫댓글 만촌의 縮約 솜씨는 가히 달인 급이오~
해평!
소생, 우둔한 둔재라 많이 답답하지요?
겸손이 지나치면 소생처럼 잡기분분해 지지요ㅡㅎ ㅎ
달인=月人=moon's man=문빠=촟불
태극기 대장을 촟불이라니요!
늦을 晩, 둔할 鈍, 답답할 鬱,
태극기들의 분노 섞인 한숨이지요.
그러나 해평!
鈍刀로 연필은 못 깎아도,
통나무 장작 쪼갤 날도
언젠가 오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達人도 한글로 쓰니 한자.영어 풀이가 여러 질이군요~
대장도 달인급이 하는것이지요,
장작 쫙 쪼개질 그날까지!
요즘도 박 근혜는 죄가없으니 석방하라고 태극기 흔드는 사람이 있다니
세상에는 곰 보다 둔한 사람도 있는것 같네요,
꼴통 이란 병은 죽기전에는 못 고치는 병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