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과정을 통해 내일을 봅니다.
유다은
[배터리가 방전됩니다.]
2022년, 청년과정 1년 차 때의 나는 예상에도 없던 중등반 보조교사로 투입되었던지라 책임감이 막중하였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매번 긴장감에 휩싸였고, 보조교사로서 어른스럽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년과정 2년 차 때부터 점점 샨티 학교에 있는 나의 모습에 회의감이 들었다. 학교에 있으면 아이들이 나한테 선 넘는 장난을 하고 예의 없이 구는 것처럼 느껴질 때 마다 점점 힘이 들었다.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내가 누군가를 돌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 나만 희생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점점 무기력해지고, 예민해져만 갔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아이들에게 적대감이 생겼고, 한계치에 도달하게 되어 아이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인 줄 알고 나를 날카롭게 갈았다. 그렇지만 내가 문제에 직면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한번 일어서게 되었다.
[좋은 습관 만들기를 하면 기분이 좋거든요]
좋은 습관 만들기 프로젝트란 내가 만들고 싶은 좋은 습관들을 체크리스트로 만들어서 매일 실천해 보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로 정한 계기는 어떤 모임에 있을 때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봤는데 버킷리스트 작성을 한 것만으로도 20년 인생 동안 무계획형 인간이었던 내가 삶의 원동력을 느끼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하루를 버킷리스트처럼 만들어서 살아보면 훨씬 더 체계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습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을 체크리스트로 만들어보았다. 양치, 세수, 샤워, 운동 등 꾸준히 하고 싶은 습관들을 체크리스트로 만들고 실천하였다. 체크리스트에 체크하고 싶어서라도 실천하다 보니 나의 꾸준함이 결실을 보아 다른 사람들도 나의 달라짐을 알아주게 되었고 더욱 동기부여가 되어 열심히 하게 되었다. 매일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게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좋은 습관을 체크리스트로 만들어서 실천하는 행위가 좋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되었다. 갓생과는 멀게만 느껴졌던 나도 체크리스트를 통해 변했기에 샨티 아이들과 나누고 싶어서 기획하게 되었다.
호기롭게 프로젝트를 기획한 뒤 샨티 대화에서 발표하였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아이들의 반응이 시큰둥하였다. 이대로 폐지의 위기에 놓인 것일지 마음을 졸였지만, 다행히도 유민이가 프로젝트에 조인하게 되었다. 할렐루야 너무나도 기뻤다. 이 자리를 빌려 유민이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비록 한 명밖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좋았다. 유민이라면 이 프로젝트를 성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프로젝트의 중요 핵심은 본인이 이 프로젝트를 장기적으로 꾸준히 하고 싶은 열의가 있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열심히 할 마음도 없으면서 들어온다면 다른 팀원들의 사기를 꺾을 것 같았다. 그렇게 팀원부터 완벽한‘좋은 습관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유민이와 했던 프로젝트에서는 실천하기 쉬운 습관부터 매달 하나씩 추가하였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하루에 한 권씩 독서하기라는 항목을 넣어버리면 꾸준히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샤워, 양치, 세수로 스타트를 끊었다.
유민이가 매달 했던 습관들은
3월: 양치, 세수, 샤워하기
4월: 이부자리 정리, 방 정리, 본인 자리 정리하기
5월: 알람 기상 소리 듣고 한 번에 일어나기
6월: 독서하기
들을 하였다. 그런 다음에 성장발표회에서는 처음엔 습관들도 제대로 이행해 오지 않아서 나에게 혼나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습관들을 열심히 하다 보니 나를 이긴 내용의 영상을 만들어서 발표하였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만든 룰이 있었다. 절대로 잘 이행하지 않는다고 화내지 않기이다. 습관을 잘 이행해서 결실을 보는 건 본인의 몫이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화내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습관 실천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경험과 깨달음을 줄 수 있기에 어떻게 하면 무기력을 이겨낼 수 있을지 방법을 생각해 보고 빨리 페이스를 찾아보는 것이 본인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절대로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화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매일 꾸준히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안다. 꾸준히 하는 건 나도 잘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알고도 뭔가 아이가 계획을 잘 지키지 않으면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쉬운 소리도 나왔지만, 나의 관리 방식을 바꾸고자 하였다. 유민의 관리를 일주일에 한 번씩 확인하였다면 매일 관리하였다. 그러니 유민이도 조금의 긴장감이 들었는지 습관을 이행하는 것이 더 많아졌다.
아이가 방향을 못 찾고 방황하면 멘토가 잡아줘야 한다는 것을 많이 깨달은 프로젝트였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좀 더 많은 것을 더 할 수 있었지 않았을지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그건 그거고 최선을 다한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두 명이 잘 마무리하였다.
[고진감래 기타수업기]
샨티 학교는 학생들이 1학기마다 개인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은찬이는 기타로 ‘자우림-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치겠다고 하였다. 멘토가 제발 내가 아니기를 바랐다. 재학생 때 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누군가를 가르칠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기타리스트였다면 기꺼이 가르치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은찬이를 가르치는 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아뿔싸 은찬이가 나한테 가르쳐달라고 제안하였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학교에서 기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앞에 좋은 습관 만들기 프로젝트 단원에서도 말했지만 배울 때 열의가 없는 학생은 가르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였다. 근데 내가 지금까지 본 은찬이는 게으름 피우기를 좋아하고 해야 할 과제를 제대로 하지 않은 모습이 강했기 때문에 가르치기 전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르치기로 한 이상 은찬이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가야 하는 건 내 몫이었다. 은찬이와 기타 수업이 시작되자 내 예상과 같이 은찬이는 개인 연습을 잘 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타를 배워도 복습하지 않으니, 실력이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성장발표회에도 보여주지 못할 실력이 될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톱니바퀴 돌아가듯 순탄히 학생이 따라와 주길 바랐지만, 그것은 나의 엄청난 욕심이었다. 어떻게 하면 은찬이의 귀차니즘을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남쌤께서 한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원래는 며칠 간격으로 수업했다면 매일 기타 수업을 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게 좋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은찬이와 점심을 먹고 30분간 매일 기타 수업을 하였다. 은찬이도 귀찮아했지만, 솔직히 나도 매일 봐주는 게 귀찮았다. 하지만 매일 수업하다 보니 기타가 느는 실력이 더 빨리 향상되는 게 느껴졌다. 본인의 실력이 부족하지만, 충분한 연습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확인 기한을 짧게 설정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타 수업을 하면서 은찬이의 긍정적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은찬이가 귀차니즘이 심하고 하기 싫다고 투덜거려도 한다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쉬운 길로 가자고 해도 본인이 더 어려운 길로 가고 싶어 하였다. 그렇게 은찬이가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금방 사기가 꺾기는 은찬이에게 원동력을 불어넣어 준 것 같다. 또한 은찬이가 70퍼센트의 노력을 하고 싶으면 90퍼센트의 노력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하였다. 은찬이는 똑똑하기 때문에 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귀찮음으로 그 역량이 가려질 때가 있다. 사람은 자기의 수준에 안주하다 보면 성장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조금만 더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하였다.
완전 기타 초보인 은찬이와 수업을 하면서 한 단계씩 성장할 때마다 나도 참 뿌듯하고 기뻐하였다. 처음엔 F코드를 어려워해서 소리도 잘 나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성공하는 것을 보니 내가 성공한 것처럼 기뻤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은찬이를 통해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은찬이가 성장할 때마다 더 많은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그렇게 천방지축이었던 은찬이 기타로 성장발표회 무대 오르기에 성공하였다. 성장발표회가 끝난 후 은찬이 어머니께서 정말 수고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을 때가 정말 하늘로 나는 기분이었다. ‘이런 맛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힘들어도 버티는구나’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절에서의 낮잠이 꿀맛]
1학기 때 청년과정이 처음으로 주도하는 주제별 캠프라는 것을 진행하였다. 주제별 캠프는 네 가지의 주제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 주제에 맞는 캠프를 기획하여 진행하는 것이다. 나는 극기를 선택하였다. 극기는 자기의 감정이나 욕심, 충동 따위를 이성적 의지로 눌러 이긴다는 뜻이다. 이런 취지와 맞는 프로그램은 템플스테이 같았기에 템플스테이로 결정하였다. 템플스테이는 극기라는 주제에 맞게 채식도 하고, 밤 10시에 취침해서 새벽 3시에 일어나는 등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108배를 하고, 참선한다. 평소에는 경험해 보지 못하는 절에서의 절제되고 현대사회의 속세에서 벗어나고 건강한 습관을 만드는 것을 해봄으로써 본인의 한계를 돌파해 보기 위해서 골랐다.
그 당시에 좋은 습관 만드는 것에 대한 뽕이 가득 찼기 때문에 아이들도 템플스테이에 많은 구미가 당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다른 팀보다는 인원수가 저조했지만 다들 잘 참여할 것 같은 아이들이 선택해 줘서 만족스러웠다. 이번 캠프에서는 정교사들도 캠프에 참여하지만, 정교사들의 역할은 교통 지원, 안전 확인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청년과정들이 해야 했다. 항상 메인 교사의 그늘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통솔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예산안 짜기와 캠프 기획안을 다 내가 짜고, 캠프에서의 모든 결정을 내가 하였다. 왠지 한순간에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것 같아 어깨가 무거웠다.
아이들이 과연 내가 말하면 잘 들을지, 정교사가 없어도 잘 돌아갈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들은 프로그램에 잘 참여해 줬고, 새벽 3시 30분에 하는 새벽예불도 잘 참여해 줬다. 아주 부끄러운 얘기지만 자느라 2일 차 새벽예불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고기반찬이 없고 죄다 채식이었지만 불평하지 않고 맛있게 먹어줬다. 영상 촬영 인터뷰에도 잘 참여해 줘서 너무 다 고마움을 느꼈던 캠프였다. 아이들의 근성을 내가 많이 배웠던 캠프였던 것 같다.
[여름방학에 누가 캠프를 가니? 저희가 갑니다.]
여름방학 때 청년과정 2년 차들은 한 명씩 캠프를 만들어서 아이들과 3박 4일 캠프를 떠나야 했다. 여름방학 때는 마음 편하게 쉬고 싶었는데 진짜 여름방학 때 캠프를 가게 하는 건 누구 아이디어인지 참 머리털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뭐 남쌤에게 길들어졌으면 그 말에 따라야지 어쩌겠나 싶었다. 1학기 때는 템플스테이를 기획했으니까, 이번에는 번화가에서 도시 분위기를 느꼈으면 하였다. 서울은 여러 명이 가기에는 복잡할 것 같아서 서울보다는 덜 복잡한 수원으로 캠프 장소를 잡았다. 수원에는 수원화성도 있고, 행궁동에 가서 감성 소품샵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 캠프에서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직접 홍보해서 인원을 충원해야 하는 거라 아이들의 참여도가 더욱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순탄히 5명이 채워졌지만 방학하고 나서 2명이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근데 또 1명이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해서 2명밖에 남지 않았다. 부모님들께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의 예산을 짜고 싶었는데 인원이 줄면 한 분이 부담하는 예산 선이 높아지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게 되었다. 하필 그 얘기를 교사 연수하는 날에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는데 선생님들 앞에서 울게 되었다. 진짜 최악의 순간이었다. 이렇게 연속으로 사람들이 캠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니 그 당시에는 내 멘탈이 많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닐지 하는 생각으로까지 있어졌다. 정말 많이 무기력해졌다. 모래성이 무너진 것처럼 멘탈이 무너져있을 때 남쌤이 한 명을 붙잡아주시는데 도움을 주셨다. 남쌤이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아마 잠적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도와주셔서 좀 더 힘을 내서 새로운 한 명을 내 힘으로 섭외하였다. 그렇게 나, 재원쌤, 채윤, 윤민,준수 이렇게 5명이 캠프를 가게 되었다.
이번 수원 캠프는 여느 캠프와 다르게 정교사가 아무도 붙지 않았다.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어서 너무 불안하였다. 만약에 실수하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덕분에 캠프를 통해 메인 교사의 머리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리더로서 모든 기획과 결정을 하고 실행해야 하므로 아주 복잡하고 부담감이 컸다. 그중에서도 기획서 쓰는 단계가 제일 머리 아팠다. 나는 보통 여행을 가면 계획 같은 건 짜지 않는 사람이기에 돈이 얼마나 들지 어디에 갈지 대강만 생각하고 가는 편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는 캠프는 정확해야 했다. 수원의 어디를 갈 건지, 그 이유가 뭔지, 계획에 맞는 세세한 예산은 얼마를 책정해야 할지를 세세히 짜야 했다. 템플스테이 캠프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다 짜져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계획이나 예산을 내가 짜지 않아도 됐지만 이번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기에 눈앞이 깜깜하였다. 또 부모님들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예산을 조율하는 게 어려웠다. 그리고 다른 청년과정 사람들은 1학기 캠프 때 한번 해본 경험이라 더 수월하게 하는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지는 느낌이라 더 촉박했던 것 같다. 남쌤께 확인받고, 조언을 구하고, 빠꾸도 맞으면서 꾸역꾸역 다 완성하였다.
기획서만 쓰면 고생 끝일 줄 알았는데 다른 복병이 있었다. 캠프를 시작하니 기획서를 작성했던 때가 좋았던 때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아이들의 눈치가 보였다. 내가 짠 캠프를 아이들이 좋아해 줬으면 하는데 아이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나의 자존감이 마이너스 10씩 내려갔다. 그렇지만 내가 힘들다고 티를 내버리면 나 때문에 팀 분위기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힘들어도 티를 낼 수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계셨으면 상담이라도 했을 텐데 여기서는 내가 리더이기 때문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다 내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었다. 리더가 참 외롭고 고독한 위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50일 동안 많은 아이를 데리고 이동학습 가시는 메인 교사들이 다시 한번 존경스러워졌다. 다음에 캠프를 짤 때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장소를 짜고, 할 수 있는 것과 갈 수 있는 것들을 많이 계획한 다음에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을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음식 메뉴도 기왕이면 미리 정해서 그 예산을 맞추는 게 좋을 듯하다.
[동유럽 여행- 나~ 다시~ 돌아갈래~]
많은 샨티 사람들이 궁금해할 것 같다. 청년과정 사람 중에서 왜 나만 이동학습을 따라가지 않았는지 말이다. 원래 청년과정 1년 차만 이동학습 보조교사를 하는 커리큘럼이 있었기에 나는 이번 기회에 나만의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하였다. 그렇지만 효래와 예준이오빠는 산티아고 이동학습에 가고 싶어 하였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청년과정 2년 차 때의 나는 샨티 학교에 있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예민해지고 모든 언행이 나에게 비수가 꽂히고, 유다은의 21살의 자아는 점점 없어져만 갔다. 정말 나의 자아가 없어진 상태로 유다은의 육체만 살아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정말 또래가 고팠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헷갈려갈 때쯤 10월에 동유럽으로 떠나게 되었다.
낯선 땅에 온지 첫날부터 나는 호스텔 부엌에서 외국인들을 만나서 같이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나는 영어도 잘 못하고, 영어 울렁증이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내게 먼저 말을 계속 걸어주다 보니 신나서 내 안에 있던 영어를 다 꺼내 말을 이어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그들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같이 먹게 되었다. 그러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같이 루마니아 시내를 돌아다니고, 벤치에 앉아서 수다도 떨었다. 그리고 어제 만들어준 저녁의 답례로 나도 짜파게티를 만들어서 대접하였다. 또 호스텔에 온 다른 사람들과도 얘기하면서 어쩌다 보니 나포함 6명이 클럽에 가게 되었다. 클럽에 처음 가본 나는 어색하지만, 같이 갔던 일행들이 하나같이 눈치 보지 않고 춤을 춰서 나도 긴장이 풀려서 춤을 추게 되었다. 이때의 기분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신남이었던 것 같다. 너무 심플하다고 생각할 순 있겠지만 아이들이 처음 가본 삐까뻔쩍한 놀이공원에 가면 이것도 타보고 싶고 저것도 타보고 싶은 그 신남의 느낌이었다. 정말 이런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다. 지금껏 또래들과의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갈망이 컸던 내게는 정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과 같은 도파민을 얻었다.
여행을 오기까지의 내게는 자아가 없었다. 하지만 여행을 와서 또래들을 만나고 나로서 존중받는 느낌이 들다 보니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자아를 마주 보게 되었다. 내가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기도 하였다. 내가 지금껏 무기력했던 이유가 내가 나처럼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의 경험으로 이제부터 ‘나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나다운 것은 아직은 철없고, 터무니없는 농담을 좋아하고, 약간은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은근히 생각이 깊고, 아직은 누군가를 돌보는 것보다는 나를 알아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동학습이 끝난 이후 아이들을 만났을 때 무게감이 있어야 하고, 어른처럼 보여야 하며,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놓고 생활하였다. 아이들에게 사람 대 사람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보니 나의 자아를 지키고 슬기롭게 학교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지내면 아이들과의 관계가 더 안 좋아지지 않을까 걱정하긴 했지만,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 전보다 예민함이 낮아져서 아이들을 대하는 것도 편해지고 아이들과의 관계에도 웃음이 더 많아졌다. 이번 여행을 가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동유럽 여행- 나락의 순간]
한 2주간은 정말 꿀같이 달콤한 시간을 보내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뭔가 진정한 나를 찾은 것 같은 해방감에 정말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왔다. 하지만 불행은 머지않아 나를 찾아왔다. 바로 핸드폰과 비자카드 두 개를 몽땅 잃어버린 것이다. 자고 일어나서 핸드폰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절망스러웠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고, 찾으면 나오려니 했지만,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와주지 않았다. 체크아웃 시간은 다가왔고, 시중에 뽑아둔 현금이 없었기에 나는 재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호스텔 직원에게 CCTV 영상 확인을 부탁하고 핸드폰도 빌려서 내 인스타에 연락을 시도하고 호스텔 전화기로 엄마한테 전화도 해봤지만 닿지 않았다. 또 인스타 로그인을 시도해 봤지만 잘못된 아이디였고, 나의 아이폰 찾기를 해봤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잠겨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이 하필 헝가리 공휴일이라 대사관이 휴무 날이었다. 정말 세상이 나를 몰래카메라 찍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겐 절망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엄마와 연락이 닿을 수 있을지 생각하였다. 부다페스트 시내에 있는 한국인에게 카톡을 빌려서 엄마에게 연락을 해보자고 생각이 들었다. 빨리 한국인이 있는지 둘러보며 찾아봤다. 하지만 좀처럼 쉽게 한국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핸드폰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봤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카톡을 빌린 뒤 엄마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렸다. 그 한국분들이 나의 상황이 딱했는지 현금 40유로를 주셨다. 그 돈 덕분에 노숙자 신세를 면하였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엄마에게 빨리 연락하지 못했을 테고 돈이 없어서 길바닥에 나가 자야 했을 수도 있다. 그 뒤로 대사관을 통해 해외 긴급송금으로 돈을 받고, 체코로 넘어가서 비행기표를 앞당기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렇게 글로 적어서 어쩌면 핸드폰하고 카드 잃어버린 거 취곤 되게 쉽게 왔을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매일 해결책과 계획을 세우느라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굶어보기도 하고, 정말 돈에 쪼들려 살기도 하고, 스트레스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장염 때문에 배도 시도 때도 없이 아파서 그냥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한 적 있다. 매일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가도 정신을 붙잡으며 그래도 잘살아 보자 하는 마인드로 현실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싸워나갔다.
[네? 제가 밴드를 이끈다고요?]
남쌤으로부터 중2 아이들과 밴드를 해보자는 얘기를 하였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이때의 나는 아이들과 무언가를 하는 것에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던 시기였기에 더더욱 하기 싫었고 두려웠다. 하지만 효래도 도움을 주기에 한번 시도는 해보자는는 생각으로 시작하였다. 내가 밴드의 리더가 되어 아이들을 조율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밴드 곡은 ‘브라보마이라이프’,‘잊었니’ 두 곡을 하기로 하였다. 학교 시작하자마자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밴드 곡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처음에 3곡이나 하게 되었다고 들었을 때 되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뭐 그때 아프게 된 내 탓이지 싶어 시작하였다. 일단 효래와 담당을 나누었다. 나는 베이스를 맡은 태양이와 기타를 맡은 은찬이를 케어하였고, 효래는 드럼을 맡은 동건이, 건반을 맡은 민규를 맡아서 가르쳤다.
시작 전에 큰 고민이 하나 있었다면 시간은 3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2곡이나 해야 하고 심지어 악기를 처음 다뤄보는 아이들도 있고, 중2 아이들인데 잘 따라올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컸다. 또한 1학기 때 은찬이를 가르치는 게 쉽진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잘 따라와 줬으면 하는 바람이 매우 컸다. 그렇게 큰 고민으로 꼬꼬마밴드를 시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은찬이는 은찬이었다. 하기 싫다고 투덜대기도 하고 맨날 은찬이가 기타를 개인적으로 연습할지 걱정하기도 하고, 개인 연습해 오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지만 1학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랄까? 1학기 때는 F코드 잡기 어려워서 전전긍긍했지만, 이제는 F코드는 껌이었다. 또 모르는 것이 있으면 본인이 찾아와서 알려달라고 하고, 편곡해 줄 수 있냐고 본인이 직접 물어보고는 능동적인 태도에 은찬이도 많이 발전하였다고 느껴졌다. 이 꼬꼬마밴드에서 나를 제일 머리 아프게 한 장본인이지만 그만큼 매일 은찬이와 지지고 볶고 연습하면서 많이 정도 들고, 은찬이가 성장하면 그만큼 많이 벅찬 느낌이 들었다.
태양이는 악기도 처음 다뤄보고 나도 어려워하는 악기 치면서 노래 부르기를 해야 하는 아이였다. 태양이와 수업하면서 느낀 점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태양이는 뭘 해도 추진력이 강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기를 연주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는 안되는 부분이 있으면 그 구간을 계속 연습해서 자연스럽게 연주가 가능할 때까지 연습하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원리가 처음부터 몸에 배서 하루하루 발전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태양이를 봐줄 때마다 힐링이 되었다. 태양이의 끈기와 책임감과 열정을 나도 배우고 싶다.
한명 한명 악기는 어느 정도 잘하지만 처음 합주가 제일 난관이라고 생각하였다. 각자 악기 발표회면 못해도 GO이지만 합주에서 제일 중요한 건 합인데 다들 밴드를 처음 해보는 아이들인데 과연 합이 잘 맞겠느냐는 생각이 있었다. 근데 나의 고민이 정말 머쓱할 정도로 아이들은 합주를 정말 잘하였다. 더 큰 감동이었던 것은 아이들 스스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본인들끼리 합주를 맞춰보는 등 다들 밴드에 진심으로 임하였다. 밴드를 하기 전에 아이들이 열의 있게 임할까라는 걱정과 달리 진지하게 임해줘서 고마웠다.
사실 처음에 조금 부담스러웠던 건 우리 밴드가 아닌 다른 밴드부원들이 다 지켜보는 상황에서 내가 평정심을 가지고 아이들 합주를 봐 줄 수 있을까였다. 당연히 처음 딱 합주해 보자 하고 시작해 봤을 때 합이 맞지 않아서 당황스러웠지만 한 3번정도 맞춰봤을 때 정말 아이들이 처음 합주를 해보는 게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합주를 기가 막히게 잘 마무리하였다. 아이들의 합주를 봐주면서 내가 평정심을 지키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짜증 내면서 이끈다면 아이들은 아마 더 긴장해서 더 불협화음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리더가 평정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그치지 않고,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면서 이끄는 것이 아이들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밴드를 처음 해봐서 못 하는 게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주눅이 들 것 같아서 내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이들 잘 한다고 호응을 유도하거나 아이들에게 더 리액션 크게 잘한다고 칭찬해 주며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또 내가 아이들한테 “얘들아, 나는 너희가 못하는 거는 상관없어. 밴드를 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라고 말했는데 옆에서 들으셨던 교장선생님께서 “잘해야지~”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내가 아이들을 이끄는 모토는 잘하는 것이 아닌 이렇게 아이들끼리 단합을 하고 밴드라는 것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 같이 해보는 것이었기에 아이들한테 “누군가가 너희한테 못한다고 해도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마!. 너네는 그냥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항상 단톡방에다가 아이들에게 피드백을 해주었고, 보완해야 할 점을 제시해 주었다.
항상 아이들에게 기대하진 않지만, 아이들을 응원해 주고, 리드해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아이들에게 기대하고 실망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남쌤과 대화 후에 평정심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화보다는 이성적으로 해결책을 주는 리더가 된 것 같다. 칭찬을 해주고 이성적으로 아이들을 대하며 리드를 해주니 아이들이 잘 따라와 준 듯하다.
[이때만을 기다려왔지만 허전한 이 마음은 뭘까?]
아이들이 이동학습을 갔다 온 후 다시 학교생활이 시작하기 전까지도 아이들에 대한 적대심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만나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영원히 내 인생에서 풀지 못할 숙제라고 생각하였다. 풀고 싶지만 풀지 못해 답답하였다. 하지만 풀려고 다가가기엔 두려웠다. 그러던 중 남쌤의 권유로 학교에 나가서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밴드를 이끌게 되었다. 자연스레 오자마자 할 일이 생겼고, 아이들도 나를 이전과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줘서 빨리 학교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의 밴드에서 가르치고 샨티 학교 아이들과 유대감을 쌓으며 이전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해서 그런지 학교가 마무리되기 전에 유종의 미를 거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샨티에서의 마지막 샨티 대화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내가 정말 기다리던 마지막 성장발표회였다. 이제는 마음 편히 방학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얼른 오기만을 기다려왔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내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 전교생 모두가 밴드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울컥하였다. 내가 이렇게 기다리던 날인데 기쁘지 않다는 게 이상하였다.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도 슬프고 이제는 완전히 샨티 소속에서 졸업이라는 것에도 슬펐다. 이런 내 마음이 모순덩어리 같았다. 시원섭섭하였다. 아이들의 미래가 궁금해지고, 아이들이 행복하고 잘 컸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 참 이상한 감정이었다.
청년과정을 하면서 내가 과연 성장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였다. 다른 사람들 보다 뒤처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글쓰기 실력, 동생들과의 인간관계 형성 실력, 리더로써 팀을 이끌어가는 능력,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능력 등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청년과정을 하면서 성장은 어떤 것이라도 시작 하는 사람에게 온다는 것을 배웠다. 청년과정을 졸업하더라도 여기서 배웠던 것처럼 추진력 있게 살아가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