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이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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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혼자서 제 자식들을 대여섯이나 키워내면서 똥오줌은 다 가려낸다.
그. 러. 나.
자식은 대여섯이나 되어도 부모 하나 똥오줌을 받아내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엄연한 현실이다. 내 자식만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암팡진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나중에 배신감을 줄이는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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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현대의학을 더 연구한다는 건 죄악이다. 생로병사에 있어서 아니, 자연의 섭리에 역행하는 일이오, 날밤을 새워가며 의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머리 검은 짐승으로서 더 이상 금기사항에 해당하는 일임을 알아야한다.
인간이라는 짐승은 그저 한 예순다섯이나 늦어도 일흔 정도 되면 자연스레 죽어야 한다. 백 살을 넘게 살더라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 힘으로 똥오줌 가릴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치는 작자에게는 아가리에 철썩 손바닥이 올라올 말이지만, 맞벌이하는 자식들이라면 손자나 손녀 유치원 다닐 적에 뒷바라지 조금 해주고 제 발로 화장실 다니며 똥오줌 가리다가 아프지 말고 죽어야한다.
졸지에 유언도 없이 비명횡사하면 자식새끼들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고 한 사나흘이나 길어도 열흘이나 보름 정도 살짝 아프면서 자식들 병수발 받고 효도했다는 핑계거리를 만들어주고 죽어주면 호상好喪이라고 하겠다. 이 생각은 내가 일흔이 되어서 깨달은 생로병사에 대한 견해다.
이 깨달음은 문득 찾아왔다. 수정하자. 문득 깨달은 게 아니라 오삼식이 몸을 눕히고 있는 무의탁노인 보호요양시설에 면회를 갔다가 오면서 느낀 점이다.
내가 오삼식을 찾아간 날은 마침 무슨 종교단체에서 목욕봉사가 있어서 오삼식을 면회하는데 꼬박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무의탁노인 요양시설은 시쳇말로 이십일 세기에 등장한 신고려장이다. 정해진 시간에 밥 먹고 정해진 자리에서 이탈하지 못하고 집에 가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노인네들을 결박까지 서슴치 않는단다. 자존심 하나만은 하늘 똥구멍을 쑤시는 오삼식은 생색내기 좋아하는 종교단체나 봉사단체들의 목욕봉사도 살갑게 여기지 않는 듯 했다. 목욕을 마치고 휠체어에 실려 온 오삼식의 얼굴에서 그 달갑잖음을 읽었다. 나는 오삼식의 손을 잡아주었고 침대에 눕히는 것을 도와주었다.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온 얼굴이야 말쑥했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여자에게 치부를 다 드러내고 목욕세례를 받는 게 아니라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잠시 상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종로백구두라 불리던, 한때는 중절모에, 빨간 넥타이, 백구두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걸치고 종로통에서 잘 나가던 오삼식이 자식이 넷이나 되는데 어떤 연유로 무의탁 요양시설에 있는지 궁금했지만 터놓고 물어볼 성질의 말이 아니었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부모 혼자서 자식 대여섯 똥오줌은 다 가려내도 자식 대여섯이 부모 하나 똥오줌을 가려내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오삼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삼식은 슬하에 사남매를 두었으나 결국 무의탁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멀리 있는 남의 일이 아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오삼식의 표정에는 그 무엇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그건 결국 사랑이 없다는 말과 상통한다. 인간이란 무엇을 사랑할 능력이 있고 그저 제 힘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죽어야지. 인간은 생로병사의 여정 중에서 병病은 살짝 뛰어넘어 생로사의 과정으로 이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날 문득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손을 잡은 종로백구두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저러나 팥죽이 다 식겠다.
출근시간대를 좀 넘긴 시간, 발품을 팔지 않고 집 앞에서 택시 잡기가 수월치 않았다.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시립병원으로 가자고 기사에게 한 마디 던져놓고 팥죽보따리를 품에 품었다. 예전이면 제법 쌀쌀하다고 느낄 날씨건만 무릎이 시리다. 아직은 따끈한 온기를 지닌 팥죽보따리를 품고 무릎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나의 며느리이자 친구 경태의 딸이 되는 희주는 당연하다는 투로 오늘 아침에도 물었다. 그건 어찌 들으면 묻는 게 아니라 팥죽 보따리를 들고 병원에 가라는 일방적인 통보인지도 모르겠다.
-아버님 오늘 병원에 들르실 거죠?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마땅히 들를 거라는 짐작으로 팥죽보따리를 싸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서둘러 출근을 했다. 며느리 희주는 보건소에 근무한다. 지난 봄 인사이동에서 새로 생긴 신도시의 보건소 소장으로 발령이 나서 출근길이 좀 먼 편이다. 하여 아침마다 서두르는 편이다. 병원에서 팥죽을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안사돈인 복연씨다. 복연씨가 집에 있을 때는 설거지를 제 친정어머니에게 미루고 출근했는데 아침 시간에 헐떡거리는 걸 보니 가만히 앉아있는 시애비로서 눈치가 좀 보이긴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다. 한 보름 전이었다. 날씨가 유난히 좋다며 새벽운동을 나갔던 복연씨는 체육공원 계단에서 낙상하여 골반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고 지금 병원에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골다공증이 심한 복연씨는 몸에 좋다며 새벽운동을 즐겼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복연씨가 입원하고 나니 집이 텅 빈 것 같아 혼자 집을 지키거나 아파트 경로당에 있어도 마음이 허허롭다. 같이 살기 시작한 지가 겨우 일 년 조금 넘었는데 내 마음은 안사돈에게 그렇게 기대고, 비빌 언덕이 되어 있었던가? 그녀의 빈자리가 이렇게 커 보이고 마음이 이렇게 펄럭거리는 걸 보니.
안사돈과 바깥사돈이 한 집에 살게 된다면 얼마나 껄끄러울까?
체면을 깍듯하게 차려야하는 사돈 사이, 얼굴조차 자세히 마주 보기 껄끄러울 처지인데 한 집에서 살게 된다? 한 집이 아니라 한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뭇사람들은 지레 짐작하겠지만 우리는 전혀다.
안사돈인 복연씨도 그렇게 불편해하지 않는 눈치다. 그냥 같이 살아야하는, 여생을 한 아파트에서 보내야 하는 한식구로 생각하는 듯하다.
친구사이였다.
사돈인 경태는 친구였다. 나는 여태 사돈인 경태를 두고 평생 한 번도 사돈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경태 또한 마찬가지로 내 이름을 불렀다.
사돈인 경태는 군대 동기다. 아무리 군 동기라도 아이들 혼사를 맺어주는 날부터 ‘사돈’이라고 정중히 예를 갖추면 되겠지만 우리는 그런 격의 없이 그냥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경태는 50년 한국전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그야말로 생사를 같이 했던 전우다. 동향이요 동기라서 유별나게 가까이 지냈다. 학도병으로 만난 동기인데 한국전이 끝나고 이웃에 살게 되면서 늘 붙어살았다.
경태는 지금은 도시 변두리가 되어버린 고향의 면사무소 면서기로 출발해서 읍장으로 정년을 했고 나는 그 면소재지에서 아버지께서 하시던 정미소 기술을 익히고 그 정미소를 물려받아 곡상으로 시작해서 쉰이 넘어서 한 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조합장을 지냈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보니 내가 황혼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고 문득문득 내 인생의 노을을 되짚으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금 생각하면, 읍장이었던 경태와 조합장이었던 내가 사돈 사이 제쳐두고 오랜 친구사이로 보신탕집을 들락거릴 때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다. 이웃에 살면서 사흘이 멀다 하고 부부동반으로 저녁자리를 같이 했다. 오늘따라 그 시절이 몹시도 그립다. 경태는 개고기를 유난히 좋아했고 몸을 끔찍이 생각했지만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늘의 부름을 어기지 못하고 칠순을 넘기지 못한 채 오 년 전에 숟가락을 놓았다. 경태의 떠남으로 나는 한 팔을 잃은 것이다.
그 이듬해에 나보다 경태를 더 좋아하고 바깥사돈이 되는 경태 말을 더 믿던 조합장댁으로 불리던 내 아내가 경태를 따라 세상을 버렸다. 나는 온전히 두 팔이 잘린 것이다. 모든 게 거북스러웠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사는 집에는 늘 허전함과 그 허전함을 달래지 못하는 몸놀림이 거북스러웠다. 사는 게 몸에 익지 않은 어설픈 광대의 연출 같았다. 누가 그랬는가? 인생은 칠십부터라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작자를 만나면 따귀부터 한 대 올리고 설명해야한다. 나이 칠십 넘어 혼자가 된 나는 온전히 두 팔을 잃은 채 밀려드는 고독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혼자 살던 빈집에는 늘 내가 뱉어낸 헛기침 소리만 허공을 떠다녔다. 어디 애착이 가거나 맘을 줄 곳이 없었다. 밥을 할 때도 헛기침 소리였고 혼자 밥을 먹으면서도 헛기침부터 시작했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조차 헛기침을 하지 않으면 용변이 나오질 않았다. 집안에는 온통 헛기침 소리가 떠다녔다. 혼자 빈 집에 사는 이 년 동안은 그랬다. 이 년을 넘게 혼자 살다가 재개발지역으로 집이 헐리고 또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안사돈이 먼저 들어앉은 아파트로 들어왔다. 세 집 살림을 한집으로 축소시킨 셈이다. 내가 못견뎌한 것은 재개발로 집이 헐리거나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를 늘리면서 살림을 합치자는 성화가 아니라 집안 곳곳에 배어있는 헛기침 소리였다. 살림을 합치고 아이들의 아파트로 들어오니 헛기침 소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말을 받아줄 대상이 생기니 단연히 헛기침 소리가 사라졌다. 헛기침 소리는 사라졌지만 한동안 행동반경에 불편을 느꼈다. 다행히 화장실이 둘이라서 화장실을 같이 쓰는 불편함은 없었지만 안사돈과 함께 거처하는 아파트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서먹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모든 게 거북스러웠다. 경태가 살아있을 때 같이 다니며 느끼던 사돈이라는 대상에 대한 서먹함과 조심스러움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내가 서먹해 한다는 눈치를 긁은 며느리 희주가 저녁마다 고스톱을 치자며 거실에다 담요를 깔았다.
똥 먹고 싸세요. 똥 싼 거 먹으세요. 피박에다가 광박썼어요. 싸긴 뭘 싸요. 공짜 바라다가 대머리 까져요.
백 원짜리 고스톱을 치면서 하는 말 중에서 서먹함을 달랠 말을 열거하자면 한정도 없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주워섬기며 고스톱 판을 벌였다. 화투놀이는 한식구가 되어 서먹함을 삭이는 방법의 한 종목이었다. 나중엔 희주가 없어도 화투를 치자며 안사돈 방문을 두드렸고 둘이서 민화투를 치는 날도 있었다. 가족으로 융화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었다.
오늘은 안사돈에게 전해줄 팥죽보따리를 품에 안고 길을 나서니 마음이 더욱 펄럭인다. 돌이키면 그렇게 질긴 인연도 없다.
기억마저 희미한 먼 옛날 얘기지만, 경태가 장가를 가던 겨울을 지나고 그 이듬해 봄이 오기 전에 나도 결혼이라는 걸 했다. 경태는 한 살 연상의 아내를 가졌고 나또한 한 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 안사돈이요, 친구부인이자 시골학교에서 외동아들인 정수 녀석의 담임을 맡았던 복연 씨의 말마따나 인연도 이렇게 질기고 견고한 연결고리를 지닌 인연이 없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뿐이 아니다. 내 아들 정수는 며느리인 희주보다 한 살 적다. 그 애들이 서너 살 적부터 나중에 사돈을 맺자고 술만 먹으면 타령을 했고 말이 씨가 된다고 이십 몇 년이 지난 뒤에 그마저도 현실로 이루어졌고 안사돈이 되는 복연씨는 초등학교에서는 나의 일 년 선배가 된다. 애들 결혼시키고 술자리에서 가끔씩 학교 선배라고 선배로 예우하라고 수줍어하면서 은근히 선배자리를 과시했다. 복연씨는 나와 같은 시골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중학은 도회로 유학을 떠나 교육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감으로 정년을 마친 동향이다. 그때만 해도 여선생으로서 교장은 언감생심이었다. 교감생활을 근 십년이 넘게 했을 것이다. 교육자지만 우리 사돈 내외가 만나면 싱거운 소리를 잘하며 분위기를 주도하던 복연씨, 너무 친하게 지내서인지 사돈사이 같지 않고 서로 격의가 없다. 나도 안사돈이라 부르지 않고 복연씨라고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때는 내 술기운의 무례함을 막아줄 경태라는 친구의 방패막이가 있을 때 일이고.
-정문에 내려드릴까요?
지난 시절, 아련한 꿈같은 기억을 더듬는 동안 택시는 시립병원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병원화단을 가로질러 정형외과 병동으로 들어갈 동안에도 추위는 뼈를 파고들었다. 아침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했다. 복연씨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은 2인실이다. 같은 병실을 쓰는 젊은 여자는 삼십대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젊은이다. 아마도 팥죽을 가져가면 같이 나누어 먹을 것이다. 복연씨는 그래도 현대감각에 트인 여자라서 젊은 사람과 같은 병실을 사용해도 젊은 사람이 불편해하지 않을 만큼의 에티켓을 지닌 노인이다. 서너 번 들러보았지만 동병상련, 말마따나 서로 도와주며 따분한 병실 생활을 하고 있었다.
복연씨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은 802호실이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팔층에 내린다는 것이 잘못 내려 칠층에 내렸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런 실수를 가끔 한다. 비상계단으로 한 층을 더 올라가 802호에 들어서니 생각지도 않은 복연씨의 질타가 낮은 목소리로 날아왔다.
-팥죽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요.
며느리 희주가 아침에 복연씨에게 팥죽을 가져갈 거라고 전화를 한 것이고 짐작컨대 아침을 먹지 않고 팥죽을 기다린 모양이다. 복연씨의 힐책이 밉지 않고 투정을 부리는 아이의 목소리 같이 들렸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모양이구려. 나를 기다린 게 아니구? 팥죽을 기다렸다는 말인 게지?
-다 늙은 영감, 뭐 볼 게 있다고 기다려요? 팥죽 먹읍시다.
내 말에는 시큰둥하게 이죽거려놓고 옆자리에 누운 새댁에게 말꼬리를 돌리며 침대에 붙은 식탁을 올리고 팥죽 보자기를 풀었다. 팥죽을 푸는 동안 나는 냉장고에서 김치와 수저를 챙겨 식탁에 올려주었다. 팥죽은 아직 온기가 남아 따끈했다. 옆자리의 새댁이 목발을 짚고 복연씨의 침대로 건너왔다. 마주 앉아 팥죽을 먹는 복연씨의 뒷모습을 보니 애처롭기 그지없다. 가만히 뜯어보니 참 많이 늙었다. 새댁과 마주 않아 있으니 더욱 늙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쇠잔해 보이는 뒷모습, 너무 가련해서 뒷목덜미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잠시 느꼈다. 그런 충동을 느끼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사돈 뒷덜미를 쓰다듬다니,
-숟가락을 놓으면 후딱 챙겨서 또 갈려고 그러시는 게죠?
복연씨가 숟가락을 든 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여기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말끝을 사리는데 새댁이 한 마디 거들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적적하신데 말벗이나 하고 데이트도 하시고 노시다가 가세요.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저 오늘 퇴원하니까 할아버지 오늘 여기 주무셔도 되겠네요.
병실을 같이 쓰는 새댁마저도 우리가 사돈 사이가 아니라 부부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노인회관의 다른 노인들도 우리를 부부사이로 알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노인네들이 거동이 불편한 영감을 흉보고 집안 사정으로 수다를 떨어도 복연씨는 나에 관해선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른 노인네들은 한 집에 사니 마땅히 우리가 부부인 줄로 알고 있다. 언젠가 109동 어느 노인네가 지나가는 말로 이죽거렸다. 부부 사이에 늙어가면서 그렇게 깍듯하게 예를 차릴 게 뭐 있냐고, 우리는 허물없이 지낸다고 생각하지만 남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질 않는 모양이다. 그때도 복연 씨나 나나 부부사이가 아니라 사돈이 되는 사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남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어느 모로 보나 몸놀림이 편하다. 시골바닥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익명을 편리함은 도시 곳곳에 숨어있다.
팥죽은 저녁까지 먹어도 남을 양이다. 새댁이 지나가는 말로 같이 좀 먹자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복연 씨는 남은 팥죽은 저녁에 먹자며 냉장고에 넣어 두라고 하면서 수저를 거두었다. 새댁이 목발을 짚고 숟가락을 거두어 병실에 딸린 세면대에서 씻어서 서랍에 넣었다. 그동안 나는 팥죽을 가져간 냄비를 챙겨서 냉장고에 넣었다.
-식은 팥죽에 김치를 얹어서 먹으면 맛이 그만이죠. 식은 팥죽을 생각하니 옛날 생각나네.
복연씨 눈길은 아득한 옛날을 더듬고 있었다. 그동안 새댁은 할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목발을 짚고 병실을 빠져 나갔다. 이상하게도 새댁이 빠지고 나니 말을 걸기가 더 어색해졌다. 무슨 말인가를 해서 이 어색한 침묵을 깨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술이 더욱 무거워졌다. 나는 간병인의 의자를 끌어당겨 복연씨 옆으로 다가 않았다.
-화투라도 한몫을 가져올 걸 그랬나? 병실이 이렇게 따분하누?
복연씨 들으라는 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옳게 앉지도 못하는 사람보고 앉아서 화투치자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릴하고 그러셔요?
-그럼 이 병실에서 내가 할 게 뭐가 있다고?
-거기 앉아서 지나간 얘기나 하면서 무료함을 달래주면 되는 거죠.
-옛이야기라? 뭐 평생을 붙어살아서 딱히 할 말이 뭐 있남?
-그럼 거기 가만히 앉아서 내 얼굴이나 보고 있어요.
-안사돈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있는 것도 사돈으로서 예가 아니지.
-말씀하시는 거 하고는....... 그러니까 구식이라고 따돌림을 받아요.
-우리가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걸 경태가 본다면 뭐라고 할까요?
-그 양반 저 세상에서 인혜씨와 노느라 정신이 없을 걸요.
복연씨의 대답은 정곡을 찔렀다. 인혜라면 아내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경태도 저승에서 마땅한 친구가 없을 것이다. 늘 아내와 꽃밭을 거닐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복연씨 옆에 있어도 흉이 되거나 허물될 일도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등 기댈 곳이 있어야 한다. 그것마저도 없다면 밀려드는 고독을 감당할 수가 없고 우울을 달랠 수가 없는 것이다.
복연씨는 마주보고 끌어안아야할 대상은 못 되더라도 등 돌려 서로의 등을 기댈 상대는 되는 것이다. 물론 심리적인 면이지만, 애인이 아니라 친구요 말동무가 되는 것이다. 서로의 고독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다. 늙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 즉 생의 황혼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지나가는 젊고 예쁜 여자를 보아도 치마속이 궁금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돈이 되는 복연씨도 마찬가지다. 그냥 안사돈이나 여자가 아니라 한 생을 살아온 황혼의 인격체로 여겨져 대하기에 부담이 없다. 늘 오래된 친구를 대하는 기분이다. 오늘 따라 누운 복연씨가 애처롭기 그지없다. 저녁까지 같이 있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여기서 말동무나 할까요?
-그러시면 나야 좋지, 저녁에 애들 오면 그 차를 타고 들어가시면 좋죠.
-그럽시다. 오늘 내가 하루를 복연씨에게 시주를 하지요.
-그러나 저러나 간병인이 오늘 따라 왜 이리 늦지? 미안하지만 침대 밑에 용변기를 좀 꺼내 주시구랴.
엇, 뜨거라! 싶었다. 골반에 금이 갔으니 용변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한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새댁마저 나가고 없으니........
-저어....... 간호사를 부를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용변기만 꺼내 주면 돼요.
담담한 말에 나는 좀 주저하다가 간병인 간이침대를 밀치고 침대 밑에 있는 여자용 용변기를 꺼내 담요 위에 올려주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눈치 없기는....... 좀 나가 있어요.
그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한 오 분 정도 복도를 서성이다가 병실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가 떨어지고 병실로 들어섰다.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침대에 달린 식탁 위에 용변기가 고스란히 얹혀있다.
-선배 용변을 좀 버려주는 것도 후배로서 못마땅할 거야 없겠지?
참으로 편리한 해석이다. 난감한 일에는 선배고 체면을 차려야할 자리에서는 안사돈으로 운을 떼는 것이다. 그것이 복연씨만이 지닌 무기이다. 나는 최대한 눈을 지그시 감고 외면하면서 용변기를 들고 병실에 딸린 화장실 변기에다가 오물을 버리고 세면기의 물을 틀어서 용변기를 헹구어서 간이침대 밑에 넣었다.
-간병이 뭐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네.
할 일을 깔끔히 마쳤다는 투로 손바닥을 털고 간이 의자를 꺼내 앉았다.
-뭐요? 간병이 간단한 일이라구? 이리 와서 팔 다리 좀 주물러요. 안사돈이라 생각지 말고 선배라는 일념으로.......
환자의 주문이 들어온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의자를 뒤로 밀어버리고 엉거주춤 일어서서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나이가 들어서 탄력 없는 팔과 앙상한 종아리, 허벅지 감촉이 손바닥을 훑고 지나간다. 피해갈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다. 순간, 표현하기 힘든 연민이 저릿하게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생각하니 죽은 아내의 팔다리를 주물러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죽은 마누라가 우리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걸 보면 뭐라고 할까요?
허벅지를 주무르며 지나가는 소리를 한마디 던졌다.
-인혜씨는 저승에서 우리 영감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럴까요?
-병실에만 한 보름 갇혀있으니 답답하네요. 바깥 날씨가 추워요?
-바람 쐬고 싶어서?
복연씨의 속내를 읽은 나는 병실을 나와 복도 귀퉁이에 있는 휠체어를 병실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복연씨 골반에 무리가 가지 않게 어깨와 다리를 조심스레 끌어안고 휠체어에 앉히고는 담요를 접어서 복연씨의 목덜미까지 덮었다. 그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죽은 영감보다 훨씬 좋군요.
나는 들은 척도 않고 휠체어를 천천히 밀고 긴 복도를 지나서 간호사실 앞을 지나칠 때 카운터 뒤에서 일을 하던 삼십대쯤으로 보이는 키가 훤칠한 간호사가 한마디 던졌다.
-교감 선생님! 오늘 데이트하시는 날이군요. 무리하지 마시고 조심하셔요.
-오냐! 부럽지 않니?
-부러운 건 아니고 보기가 좋아서요. 호호호
짐작컨대, 그 간호사는 복연씨의 제자인 모양이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도 불편한 일이지........
내가 한마디 던지니 복연씨의 힐책이 날아왔다.
-저 애가 그래도 제자라고 매일 들여다보고 얼마나 신경을 써 주는데.......
복연씨의 기분이 한껏 좋은 모양이다. 일층으로 내려와 병원 로비를 두어 바퀴 돌고 나니 복연씨가 밖으로 나가자고 졸랐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데, 감기까지 얻어걸리려고?
-마음이 따뜻하면 감기 안 걸려요.
나이 들면 애가 된다더니 복연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자고 조르는 모양새가 꼭 어린애 같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복연씨 무릎에 덮고 있는 담요를 목까지 여며주고 병원 현관의 자동문 밖으로 휠체어를 밀었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했지만 햇빛이 비치는 곳은 견딜 만 했다. 병원 마당을 가로질러 옆문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니 조그만 공원이 있었다. 놀이터도 있었지만 날씨 탓인지 그곳에서 노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고 인근 주택의 노인 두엇이 앉아서 잡담을 나누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복연씨의 휠체어를 볕이 잘 드는 벤치 앞에 밀어두고 마주 앉았다.
-나 없으니 집안이 텅 빈 거 같죠?
복연씨가 말문을 열었다.
-아니 혼자 있는 것이 편해요.
-말 같지 않은 소리!
복연씨는 내 속내를 읽고 있었다.
밖으로 나왔지만 할 말이 별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이웃 주택가에서 빠져나온 하얀 털을 뒤집어 쓴 치와와 한 마리가 휠체어 앞에 와서 알짱거리며 냄새를 끙끙 맡고 있었다.
-참 예쁘다. 이리와라!
복연씨가 담요 속에 들어있던 손을 꺼내 애완견을 불렀다.
-저거 한 냄비나 될까?
내 농담에 복연씨의 곱지 않은 눈길이 날아왔다.
-빨리 나아서 언제 산소에 한번 다녀와야 되는데........
개고기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자 복연씨는 경태를 떠올린 듯 말머리를 돌렸다.
-누구 산소? 경태? 아니 남의 집 새댁산소가 될 뻔 했던 묘지에 말이우?
-개고기 무지 좋아했죠....... 한번 가보고 싶어요.
언제 시간이 되면 같이 가보자는 말이었다.
경태 산소는 사실 남의 새댁 묘지가 될 뻔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안치실을 담당하는 장의사들의 실수였다. 관이 바뀐 것이었다. 발인하는 날 아침이었다, 그날 아침에 삼십 분 간격으로 발인하는 두 집안의 관이 바뀐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호하다. 관은 흰 천으로 된 관포에 덮여 있었으니 발인식을 끝내고 영구차에 운구할 동안은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자궁경부암으로 죽은 남의 새댁 관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날 아침에 교대를 한 장의사들의 시간 착각으로 벌어진 일이었으리라. 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맨 먼저 알아차린 건 나였다. 경태의 선산에는 우리가 운구해서 당도하자 포클레인이 광중을 파놓고 석관까지 좌향에 맞춰 뚜껑만 열린 채 묻힐 시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관을 위해 관포를 벗기고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했다. ‘처사해주황공지구’라고 심혈을 기울여 명정에 쓴 내 글씨가 아니었다. 그건 분명 내 글씨가 아니라 붉은 천에 쓰인 ‘유인경주이씨’ 뭐라고 쓰여 있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시간은 정지 되었다. 나는 정지된 순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관이 바뀌었다. 관이 바뀌었어.
정지된 시간 속에서 둘러선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다. 내가 안절부절 하는 동안 영구차 운전수가 영안실로 전화를 하고 또 저쪽 영구차 운전수와 통화를 했다.
다행히 경태의 시신을 운구한 차는 시립화장터에서 순번 대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영구차 운전수들끼리 전화를 주고받고 관포를 덮어 영구차에 싣는 모습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흐르는 영화의 자막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낼 수도 누가 영안실로 전화를 해서 따질 수도 없었다. 전문장례식장이라 뭐가 달라도 달랐다. 새로 생긴 전문장례식장의 평범하지 않은 실수였다. 경태의 관이 화장터 아가리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전갈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졌다. 영구차 운전수들끼리 사인이 떨어지자 그 쪽 차는 이쪽을 향해 달리고 이쪽 차는 화장터를 향해 달렸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다린 시간은 꼬박 두 시간이었다. 할 일이 갑자기 없어진 인부들은 음식과 술을 꺼내 그 희한한 사건을 안주삼아 씹고 있었지만 그 두 시간은 학도병시절 총탄이 날아오는 참호 속에서 매복을 서는 것보다 길고 초조했다. 두 시간 후, 죽은 경태가 제가 영면할 자리로 돌아왔다.
-장난기 심한 양반이 가는 길에도 마지막으로 장난 한 번치고 가는구먼!
그날, 장례집행위원장 격이 되어버린, 내 옆에 서 있던 복연씨가 하관하는 걸 보면서 죽은 경태에게 던진 마지막 한마디였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남편을 잃은 설움의 눈물인지 죽은 남편을 찾았다는 안도의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지난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치와와 강아지는 복연씨의 담요 위에 올라와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곧이어 이웃에 사는 주부로 보이는 새댁이 나와서, 해피가 여기있었구나 하면서 강아지를 안고 복연씨에게 고개만 까딱하고는 종종걸음으로 골목으로 사라졌다.
-춥지 않수?
-견딜만한데요.
아직은 병실에 들어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나는 복연씨의 담요를 목까지 여며주고는 공원 귀퉁이에 있는 포장마차로 가서 붕어빵을 몇 개 샀다. 방금 구워낸 붕어빵 따끈한 봉지를 들고 공원으로 들어와 보니 브레이크를 잠그지 않은 휠체어가 비스듬한 공원산책로를 따라 저절로 미끄러져 내려가 잔디밭 턱에 걸려 있었다.
-이 양반이 간호하러 와서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
복연씨의 힐책이 날아왔다. 잔디밭 턱에 걸리지 않았다면 차도로 굴러갈 들어갈 뻔했다.
-그러네요. 미필적 고의로 황천길로 보낼 뻔 했군.
나는 붕어빵 봉지를 복연씨의 무릎에 얹어두고 휠체어를 볕이 좋은 곳으로 밀고 갔다. 그리고는 휠체어 브레이크를 단단히 잠그고 벤치에 마주 앉았다.
-남의 영감이라도 옆에 있으니 좋지 않수?
-남의 영감이 아니라 내 집에 같이 사는 후배라고 해야 맞죠.
-그 말도 맞고, 하여튼 좋으냐 안 좋으냐를 묻고 있는 거요.
-내가 없는 집안이 어지간히 썰렁했던 모양이지?
대답을 헛기침으로 때우고 담요로 복연씨의 복까지 다시 여며주고 무릎에 얹힌 봉지에서 붕어빵을 꺼내 그녀의 입으로 향해 내밀었다.
-나도 손이 있어요. 손목뼈가 부러진 게 아니에요.
-거 참 좋으면서, 내숭 떨지 말고 입이나 벌려요.
복연씨는 내미는 붕어빵을 향해 입을 벌렸다. 오! 입을 벌리니 속이 뵈는구먼, 농담을 하며 조금씩 붕어빵을 먹여 주었다. 착한 아이처럼 복연씨는 붕어빵을 조금씩 베어 먹었다.
-오늘 동짓날이라 해도 팥죽을 안 먹어도 될 뻔 했어요. 붕어빵 속에 팥이 이렇게 많이 들어 있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팥죽 기다리다 목 빠진다고 난리를 부릴 때는 언제고.......
그렇게 말벗이 되어 지나간 이야기도 하며 근 두 시간을 공원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가 복연씨는 같은 방을 쓰는 새댁이 오늘 퇴원이라며 인사라도 해야 한다고 병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조심스레 휠체어를 밀고 횡단보도를 건너 병실에 도착하니 퇴원수속을 마친 새댁은 ‘애가 아빠가 곧 태우러 올 거’라며 짐을 꾸리고 있었고 아들 녀석인 정수가 와서 빈 침대를 지키고 있었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질곡아재가 쌀을 보냈는데 택배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찾아오는 중입니다.
-직원 하나를 보내서 찾으면 되지. 밤낮없이 바쁘다는 네가 왔냐?
-마침 택배회사가 이 근처라서....... 장모님 병원에 들러본 지도 오래 되었고,
집은 이미 헐리고 없지만 고향에는 내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는 논 열댓 마지기가 남아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사를 붙이는 삼종동생이 얼마간을 쌀을 보내온다. 나는 아직까지 아들 녀석에게 그 논을 유산으로 물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까딱하다가 요양병원에 가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팔아서 시설이 좀 괜찮은 병원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녀석은 그것이 제 몫 인 양 그걸 벌써 근저당으로 설정해서 얼마간의 대출로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녀석은 직원들 스무 명 정도 거느리고 전자회사에 들어가는 부품 하청공장을 하고 있는데 요금은 경기가 꽤나 괜찮은 모양인지 늘 바쁘단다.
제 장모의 침대 옆에 붙어 앉아 병세에 대해서 꼬치꼬치 녀석이 가고 짐을 다 꾸린 새댁의 신랑이 와서 목발을 짚고 깁스를 한 새댁을 데리고 퇴원을 했다. 한참 술렁대던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녀석은 병실을 나가면서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병실에 장모님 혼자 계시면 적적할 텐데....... 아버지! 웬만하시면 저 침대에 환자가 들어올 때까지 여기서 주무시죠?
-네 장모님은 내가 있으면 더 불편해 하실 거다.
그건 내 짐작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가고 나니 복연씨가 그 말을 물고 늘어졌다.
-같이 있으면 내가 더 불편할 거라고? 왜 그렇게 짐작하시죠?
-그것이야, 바깥사돈하고 안사돈하고 한방에서 잔다는 게 말이 되우?
-일체유심조라고 했어요. 맘먹기에 달린 거지. 후배가 선배 병실 지킨다고 생각하면 흉 될 일도 아니잖수?
-그럼 오늘 밤 여기서 잘까요? 팥죽 같이 나눠먹고?
-내 밥은 병원에서 나오니까? 팥죽은 그쪽이 자시고 오늘 밤은 저쪽 침대에서 주무시구랴. 동짓날 기나긴 밤 만리장성을 쌓아봅시다.
-정말 그래도 될까?
뭔가 껄끄러운 기분은 들었지만 오늘 밤은 아무래도 저쪽 빈 침대에서 자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나중에 그쪽이 똥오줌 못 가리면 내가 수발하는 걸로 갚아드리지.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정말 그럴 수 있겠소?
-직장 나가는 딸애 대신에 못할 것도 없지. 뭐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듣고 나니 왈칵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고마운 말이다.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나는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고는 한쪽 팔을 복연씨 목덜미 밑으로 넣어 머리통을 살짝 들고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다정하게 손빗으로 쓸어 넘기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였지만 입맞춤은 뜨거웠다. 뜨겁고 끈끈한 무엇이 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릴 때 복연씨의 두 팔이 올라와 내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다. 싫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갈증을 해소하는 모양새였다. 우리는 등을 기대고 살아야하는 사이다. 기어이 내 눈에선 눈물이 방울로 맺혀 그녀의 머리에 떨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푸근한 동짓날 짧은 햇살이 병실 창으로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