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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안 무진정
[2] 함안 입곡군립공원
[3] [참고] 가야고분 7개소
유네스코 등재소식
▩ 2023.10.27. / * 85/100
지리산 뱀사골~피아골 1박2일 트레킹 첫날 첫 발길
[1] 함안 무진정
무진정은 1542년 조삼(趙參)선생 (1473~1544)이 후진 양성을 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함안 무진정
.▪️무진정은 1542년 조삼(趙參)선생 (1473~1544)이 후진양성을 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선생은 생육신 조려 선생의 손자이며 자신의 호를 따 무진정 (無盡亭)이라고 명명하였다.
▪️생육신은 누구가?
* 세조가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함에 대하여 절개가 굳은 사육신은 목숨을 잃었다.
* 죽지는 않았으나 절의가 높았던 생육신은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다.
* 사육신과 생육신 개념은 남효온의 추강집에 의거한 명칭이다.
▪️선생은 17세인 성종20년(148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1507)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성주 . 상주에서 지방관을 지냈고, 중앙에서는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독서를 좋아한 올곧은 성격으로 성균관의 생원일 때 연산군 폭정의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을 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의 손자이다.
▪️정자는 출입문인 동정문( 動靜門)과 정면 3칸, 옆면 2칸으로 이루어졌다.
정자의 중앙에는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는 뒷마루를 두었다. 마루방과 뒷마루에는 개방이 가능한 들문을 설치하여 공간 활용을 더하였다.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준다.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에 다시 지었다.
▪️우리나라 최초서원인 소수서원의 창시자 주세붕이 무진정 기문을 지었으며,
▪️무진정 정자 앞에는 함안낙화놀이가 열리는 연못(효자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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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세붕 선생이 지은 무진정 기문
[현지 안내판 채록]
▪️지리산이 동녘으로 삼백 리를 치달아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가면서 말갈기가 떨치듯 물결이 용솟음치듯 함안의 진산을 이룬 것이 여항산이다.
그 한 가닥이 가볍게 날아오다가 십 리가 채 못 되어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자주 빛 봉새가 새끼를 품은 듯한데 성이 그 위에 자리 잡은 곳이 함안 고을이다.
성산의 왼쪽 갈래가 꿈틀꿈틀 뻗다가, 서북
쪽으로 굽어서 성난 말 같은 기세로 고을의 성을 에워싸고는 동쪽으로 청천에 이르러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은 곳의 산마루에 정자를 지은 것이 무진정이다.
▪️이 정자는 읍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인데, 곧 우리 조목사 선생이 거처하시는 곳의 동쪽 언덕으로 선생이 이 언덕에 처음 집을 지으신 것이다. 큰 길가에 버려진 하나의 언덕이었고, 읍에서 사람의 왕래가 아주 잦은 곳이었다.
아라가야의 개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 않았지만은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하루에 천 사람, 만 사람이나 되는데도 이곳에 정자를 지을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음을 듣지 못했다.
오직 선생은 한번 보고 이곳을 가려 잡목을 베어내고 집을 지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 길을 옮기고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중국 한나라의 숨은 선비 장후의 정원과 같은 길을 내어 꽃나무 대나무가 엉켜 하늘을 가리고, 나는 듯한 지붕이 기와가 높이 치솟았으며, 노비의 집들이 언덕 바깥에 늘어섰으니 길 가는 사람들이 신선의 집인 양 바라보았다.
▪️선생이 내게 이르기를 자신이 무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내가 선생을 매양 뵈올 때마다 문득 나를 인도해 올랐기 때문에 그 좋은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정자의 규모는 2칸인데 서쪽은 온돌방이요, 동북은 모두 창으로 되어있고 창밖에는 단이 있어 구슬 문빗창과 같으며 그 아래는 푸른 암벽이다.
큰 냇물이 남쪽에서 굽이쳐 흘러오는데 맑은 거울과 같고, 돌아 흐르는 것이 구슬 띠와 같아 부딪칠 때는 패옥소리 같으며, 암벽을 돌아 풍탄으로 흘러간다. 시내 밖에는 천 여 그루되는. 벽오동이 있고 동으로 바라보이는 모든 산봉우리는 노송들이 십 리까지 뻗어 울칭하다.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죽어 돌아갈
곳" 이라 하셨다. 남쪽을 바라보면 산이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치듯 하는데 정자와 마주하는 산이 파산이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눈에 천리나 보이는 들에는 보리가 자라며 푸른 물결이 하늘을 흔들고 곡식이 익으면 황금빛 구름처럼 땅을 덮는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햇볕을 쪼일 수 있고 여름에 창문을 열면 더위가 가까이 하지 못하니 신선이
사는 곳의 자주빚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의 노을빛보다 낫다고 했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선생은 다섯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시다가 일찌기 귀거래사를 읊으시고는 이 정자의 높은 곳에 누워 푸른 산, 흰 구름으로 풍류의 병풍을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로 안내자를 삼아 증점의 영이귀(*답사자주 ; 안내문에 '중점' 은 오타, '증점' 이다. 논어에서, 증자의 부 증점이 공자에게 대답한' '詠而歸' '즉 노래하며 돌아올 것'이라 한 것.) 같은 풍류를 누리고 도연명의 글과 같은 시흥을 펴시면서 고요한 가운데 그윽하고, 쓸쓸한 가운데 편안하고,유유한 가운데 스스로 즐기시면서 화락하게 지내셨다. 그 즐거움이야말로 많은 녹봉을 받는 높은 벼슬자리와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잠시 이 고을 일로서 말한다면 이방실 장군은 세상을 뒤엎을만한 충성으로 서울을 회복하여 우리나라를 참혹한 변란으로부터 구제하여 그 공적이 막대하였지만 살아서 횡액을 면치 못하였고 어세겸 정승 같은 분은 온 나라를 빛내는 문장으로 임금의 정사를 도와 많은 선비들의 기둥이 되어 그 명망이 더없이 높았지만 죽은 후에 또한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선생의 낙과 비교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선생은 이런 일들에서 보는 바가 있었음인가? 그리고 선생은 눈앞에 있는 산을 가리켜 죽은 후에 갈 곳으로 삼았으니 이 또한 천명을 아신 것이다. 천명을 알았기 때문에 능히 용퇴할 수 있었고, 용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능히 이 즐거움
을 누릴 수 있었으니 정자의 경치도 무진하고 선생의 즐거움 또한 무진한 것이다. 무진한 선생의 즐거움과 무진한 정자 이 경치가 모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선생의 이름과 더불어 무진할 것이 분명하다. 선생의 휘는 삼(參)이요 자는 노숙으로 함안이 본관이며 같은 고을사람으로서 진실로 덕이 높은 훌륭한 어른으로 벼슬길에서는 청렴하고 근신한 것
으로 명성이 드러났고 형제가 일곱 분인데 세 분은 문과에 급제하고 한 분은 진사시에 뽑혔으며 동기간에 우애로 서로 빛났으니 고을과 나라에서 이를 영화로운 명예로 여겼다.
▪️내가 이 정자에 이름을 남기게 됨은 얼마나 다행이랴!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오늘날 큰 문장가들이 위 아래로 어깨를 견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무진정의 의의를 남김없이 기록할 사람이 있을 것인데 나의 우매함을 무릅쓰고 기문을 짓는 것이 또한 외람되지 않겠는가? 사양하여도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니 우선 그 시말을 적어 드리는 바이다.
🖐 주세붕 ; 풍기 군수를 재내며 영주에 소수서원(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문화를 열게했다.
무진정 정문 동정문 밖에서
무진정 정문 동정문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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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홀로 전원에서 즐기기만 했겠는가.
한서에 말하는 관리의 치적이 있었다네.
어려운 시기에 처세에 지혜로웠고
칠형제 입신양명하여 술잔을 올리네.
육경을 공부하다 먹는것도 잊으니,
(육경 ; 시경,서경, 역경, 춘추, 예기 = 오경 + 악기)
위아래 구름 그림자 하늘 빛 띄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보내고 맞이하니,
오히려 백성과 나라를 먼저 걱정하네.
거북 혹은 물개 모양 동물을 닮음. 무진정 추녀 아래
높은 곳에 위치한 무진정은 아래로 효자담이라는 연못을 내려다 본다.
효자담
효자담
효자담
두 다리가 만나는 가운데 큰 버드나무는 가지가 많고 둥치가 매우 크다. 초대손남 한 분 모실게요 ↑ ↓
효자담은 낙화놀이가 열리는 곳이다.
효자담 가운데 정자 하나 영송루
손님을 정중하게 맞이하는 곳이며, 또 떠날 때 이별을 애석해 하며 전송하는 곳이다.
쌍절각
조삼 선생의 증손자 조준남의 효행과 그 아들 조계선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 두 분이므로 쌍절각이라고 한다.
숙종의 왕명으로 세워짐.(1706)
쌍절각
무진정 주차장에서 산으로 올라가면 아라가야 시대부터 있었다는 성산산성이 있다.
발굴시에 약 7백 년 전후의 연꽃씨가 나왔다. 잘 발아하여 아라홍연으로 번식시켰다. 산성 연못은 복원할 계획이다.
↑성산산성 둘래길, 가운데 연못 터
↓무진정 우측 아래에 함안조씨 집의공파 종중재실, 괴산재가 있다.
괴산재
🟦 괴산재
생육신의 한 사람인 정절공 조려" 선생의 손자인 무진경 조삼을 기리는 집의공파 종중의 재실로 괴항마을 서편 산기슭에 1670년 창건되어 300여 년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조삼 선생의 후손과 인근 청소년들의 교육전당으로 사용되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초가로 된 서당이 노후화 되어 불편을 겪었는데. 구한말 동헌의 목재가 매각되자 이 자재를 구입한 후 원래의 자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 터를 잡아 1899년 8월 27일(음력) 상량식을 했다.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고, 걸출한 인재들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학동들이 중심이 되어 격년제로 무진정에서 낙화놀이를 한 것이 경남도무형문화재 제33호 함안낙화 놀이의 시초이다.
차츰 신교육제도에 밀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문중의 모임 장소와 시제를 모시는 공간으로 위축됐다.
건물이 산 중턱에 있어 이용하는데 여러 가지로 불편하여 옛것은 그 자리에 보존하기로 하고. 현재의 위치에 새 보금자리를 지은 후 1992년 5월 31일 괴산재라는 이름은 그대로 가져와 낙성식을 했다.
2020년 12월
함안조씨 집의공파 종중
함안은 축제분위기다. 아라가야 고분이, 다른 가야 고분군과 함께 최근에 유네스코에 등록되었다.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
아라가야 고분(홍보자료)
무진정 앞 가을 들판에 익어가는 벼(10/2 촬영)
[2] 함안 입곡 군립공원
사진을 찍을 때는 머리위 부분은 여유,여백이있어야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함안 입곡 군립공원의 가을
추장로 촬영
추장로 촬영
왜가리 생업중
[참고자료]
[3] 문화소식_가야고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경남공감>>, 10월호에 의거함
▪️가야고분 7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됨. 경남이 5곳으로 가장 많이 포함됐다. 전남1곳, 경북 1곳
경남의 ▪️대성동고분군(김해) ▪️말이산고분군(함안) ▪️옥전고분군(합천), ▪️송학동고분군(고성),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창녕)과 ▪️경북의 지산동고분군(고령), ▪️전북의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남원)이다.
▪️이번 등재로 가야고분군은 우리나라
의 16번째 세계유산이 되었다.
▪️가야는 고대 1~6세기 영남과 호남동부 지역에 있었던 여러 정치세력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이다.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등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약 600년간 존재했던 고대국가였지만 통일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던 가야는 금관가야를 시작으로 차례차례 신라에 흡수되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대가야가 흡수(562년)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졌다.
▪️신라는 가야 유민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왕족은 귀족으로 대접했다. 삼국 통일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유신도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12대손이며,
▪️가야금을 전한 우륵도 가야 출신이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가야가 신라문화에큰 영항을 끼쳤음을 알 수있다.
*️⃣ 1. 김해 대성동 고분(금관가야)
1.김해 대성동고분군
*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대성동 고분군은 1~5세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중국 일본에서 수입된 교역품이 금관가야가 동북아시아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 532년 산라 진흥왕 때 신라에 항복 병합됐다.
*️⃣ 2. 함안말이산고분(아라가야)
2. 함안 말이산 고분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말산리에 위치한 말이산 고분군은 1~ 6세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아라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으로 신청유산 중 가장 오랜 기간 조성됐다. 고분군은 남북으로 약 2km 정도 이어진 구릉에 조성되어 있다.
*️⃣ 3.합천 옥전고분(다라가야)
3.합천 옥전고분
합진군 쌍책면 성산리에 위치하는 옥전고분군은 4~6세기 쌍책지역 일대의 가야 정치체를 대표하는 고분군이다.
용과 봉황으로 장식년 대도와 칠제부기뷰, 금은 장신구등이 출토되어 가야 금속공에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 4. 고성 송학동 고분(소가야)
4. 고성 송학동고분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에 있는 송학동 고분군은 5~6세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소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이다. 해안가의 고성분지에 조성되어 있는 고분군은 당시 소가야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 5. 창녕 교동고분(비화가야)
5.창녕교동고분
창녕군 창녕읍 교리와 송현리에 걸쳐 있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5~ 6세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비화가야를 대교하는 고분군이다. 묘제와 부장품을 통해 신라와 자율적으로 교섭했던 가야 정치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 6.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 가야고분 형태로 아직 발굴 정비중이다.
* 어떤 가야 정치 세력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 7.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대가야)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400년 신라를 도와 금관가야를 친 전쟁 이후 김해 금관가야(가락국)는 가야전기 맹주 지위는 약화되었고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 자리는 고령 대가야가 차지했다.
* 대가야는 가장 늦게 망한(신라 진흥왕 때, 562년) 가야연맹왕국중 가장 늦게 강력했던 연맹왕국이다.
고분 규모도 고령의 구릉 비탈 산지에 가장 웅대하게 많이 남아있다.
* 가락국과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한 연대는 확실하나. 그 밖에는 그 숫자가 몇 개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가야연맹의 여러나라 흥망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내지 못한다.
기록이 없고 유적과 유물로만 연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