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과 시간
"무의식"(Unbewusstes)이란 무엇인가? 무의식은
서양철학에서 강력한 혁명적 사건으로서
의식철학의 붕괴를 가져왔다. 무의식의 혁명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나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 존재한다”라고 하는 라캉의 명제로
바꾸어 놓았다. 이 혁명적 사건의 맨 앞에 니체가
서 있고 다음에 프로이트가 서 있다. 라캉은 니체와
프로이트의 사유를 소쉬르의 언어철학을 통해
철저화하고 철학과 문학의 다양한 문서들을 자신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신분석학회에서는
아웃사이더가 되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했다. 이점에서 라캉은
임상실험에 몰두하는 정신과의사라기보다는
차라리 문화해석자이자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제자인 지젝 역시 그렇게 불리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심리학은 정신분석학보다 한수 아래이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문헌학자이면서 동시에
계보학자이다. 문화의 무의식과 의식의 무의식을
다루는 문제는 주석학과 해석학의 과제에 속한다.
그러나 무의식은 표면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특수한 문헌학의 기술을
요구한다. 이미 수차례 씌어진 텍스트가 지워지고
그 위에 새로운 텍스트가 씌어진 낡아빠진 양피지
문서를 다루는 작업이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계보학이다. 텍스트의 의미가 어떤 지점에서
왜곡되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의미의
왜곡은 서로 다른 힘들의 충돌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모순과 갈등을 일으킨 그 기원을 찾아내서
밝혀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계보학이다. 그러나
왜곡된 지점으로서 무의식의 기원은 역사의
연대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가치들이
발생한 시점을 가리킨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도덕의 계보학>과 <종교의 기원>에서 역사적
발전단계를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시간상의
기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계보학의
과제는 종교와 도덕의 가치들과 개인사의 가치들이
생겨나오는 힘의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텅 비어있는 장소와 시간을 찾는 것이다.
문화의 무의식과 개인의 무의식을 가리켜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부르고 프로이트는
"리비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양자는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의지의 힘이든 욕망의 힘이든
모두 인간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힘들의
충돌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하여 >에서
무의식이 Cathexis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경제학"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카덱시스는 무의식
안에 집중되어 있는 욕망과 충동의 에너지를
의미하고 경제학은 이 에너지를 측정하는 학문적
방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의식은 인간의 본능적
충동으로부터 나온 힘들의 집성체를 의미하며
정신분석학은 이 숨겨진 힘을 측정하는 경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의지는 오성의
판단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욕망의 힘이 덧붙여져야 한다. 이점에서 거세된
내시의 이성을 구상한 데카르트와 칸트는 틀렸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와 칸트의 "얌전하고
예의바른 이성"에 카사노바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폭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뉘앙스는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과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무의식에는 시간이 없고 공간만이
있을까? 원초적 욕망은 시간 안으로 들어와
의식이 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루지 못한
욕망, 억압된 상처, 양가감정, 열등감, 잃어버린
낙원, 배제의 흔적, 폭력의 비밀, 금기의 기호,
불안의 기운, 해석되지 않은 기호, 신비의 허상!
이 모든 욕망은 밤의 열기를 나타내는 인간의
본능충동으로서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금기가
된 억압의 흔적이다. 이 흔적은 상징이자 단어의
파편이다. 단어에는 시간이 없다. 문장이 되어야
비로소 시간이 생긴다. 따라서 문장이 되면 이미
의식의 단계로 들어온 것이다. 해석이 가능한
단계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이미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다. 생각의
배후에서 생각의 의미를 자기도 모르게 왜곡하는
부재한 단어가 바로 무의식의 기표이다. 단어의
상징과 욕망의 힘으로 구성된 이 괴기한 사물성이
우리의 의식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된 어떤 남자가 "검정고무신"만
보면 강박적 반응을 일으켰다. 정신분석의
결과 그것은 친구들의 조롱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 사이의 모순감정 때문에 일어난 상처의
흔적이었다. 어렸을 때 그는 언제나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지만 같은 동네에 사는 모든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친구들은 만날 때면 언제나
그의 검정고무신을 손가락질하며 놀려댔고 이
타자성은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었다.
운동화를 사달라고 할 때마다 집에 돈이 없어서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얘야!
다음 달에 고추 팔아서 돈 받으면 꼭 운동화
사줄께!" 하지만 다음 달이 되어서도 그는 또다시
운동화를 신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언제나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그는 그 후 차마 운동화를
사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가 검정고무신을
억압한 진짜 이유는 친구들의 놀림이 싫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조롱 속에서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이 파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성인이 되어 검정고무신은 그의 여자 친구의
명품가방으로 변해있었다. 압축과 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검정고무신이란 상징에 시간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