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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4권 / 계묘(癸卯, 1603) / 봄 3월
○ 봄 3월〔春三月〕정사(丁巳) 초하루
○ 3월 21일 정축(丁丑)
노 참봉(盧參奉)이 병이 위중하여 나를 보기를 청하였다. 나는 저녁에 급히 개평(介坪)으로 갔는데,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병이 위독하여 말을 하기도 어려웠으니 참담하였다. 경후(景厚)와 함께 잤다.
○ 3월 29일 을유(乙酉)
노 참봉(盧參奉)의 부음(訃音)을 듣고 곧바로 달려갔으나, 이미 염습이 끝난 후였다. 아아! 이 사람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구나! 늘그막에 선행(善行)을 지향하던 뜻은 지성(至誠)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본을 보고 좇으면서 여생을 마치려 했는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혜가(蕙歌)를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저승으로 영결하려니 오래도록 비통하여 죽고만 싶었다. 그대로 머물며 호상(護喪)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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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4권 / 계묘(癸卯, 1603) / 여름 5월
○ 5월 17일 임신(壬申)
노 익산(盧益山)이 체직(遞職)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에 서울에서 공랑(工郞)으로 있을 때 잘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파직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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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4권 / 계묘(癸卯, 1603) / 여름 6월
| 盧士誨 | 1545 | 1604 | 豐川 |
○ 6월 12일 정유(丁酉)
척서정(滌暑亭)에 고을 사림 일동이 모여 원장(院長) 선출을 논의하였다. 노 익산(盧益山)을 원장으로 정하였다. ○ 강좌(江左)에서는 전혀 이앙(移秧)을 하지 못하여 가을에 추수할 희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매우 염려스럽다.
*한강집 제1권 / 만사(挽詞) / 노 익산(盧益山) 사회(士誨) 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
노 익산(盧益山)의 …… 만사 : 노사회는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일곱 아들 가운데 둘째이다. 작자보다 2년 연하인데 1604년(선조37)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來庵集 卷13 益山郡守盧君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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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4권 / 계묘(癸卯, 1603) / 가을 8월
○ 가을 8월〔秋八月〕갑신(甲申) 초하루
비가 많이 내렸다.
○ 8월 2일 을유(乙酉)
나는 개평(介坪)에 가서 원장(院長)을 병문안하고 서원으로 갔다.
○ 8월 3일 병술(丙戌)
노면재(盧勉哉)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 8월 4일 정해(丁亥)
요건원(堯乾元)이 편지를 보내어, “단목(丹木)을 갖고자 하지만, 용성(龍城) 수령이 단목(丹木)을 캐서 진상(進上)한 뒤에야 취해서 가져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 8월 5일 무자(戊子)
왜적이 점차 움직임이 있는 듯해 인심(人心)이 흉흉하고, 순찰사(巡察使)와 병사(兵使) 등이 서로 의논하여, 요충지이면서 험한 곳에 산성을 설치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산성이 비록 방책이 될 수는 있지만, 지난번 경험에 비춰볼 때 불길(不吉)하여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려고 하니, 어찌하겠는가?
○ 8월 7일 경인(庚寅)
선생의 답신을 보았다. 지난번 종기에 차도가 있으시니, 위로가 된다. 또 성원(性源)ㆍ융보(隆甫)의 편지를 보았는데, 성원(性源) 팔계(八溪) [초계(草溪)] 의 상소는 성중보(裵仲補)를 소두(疏頭)로 하여 곧바로 궁궐에 보냈다고 한다. 우리 고을의 상소는 순사(巡使)를 통해 전달했을 따름이었다.
○ 8월 9일 임진(壬辰)
종일 조금씩 비가 내렸다. 집터를 닦았는데, 몇 칸의 초가 기둥을 세웠을 따름이니, 어찌 오래 머물 계획이겠는가?
○ 8월 10일 계사(癸巳)
서원에 가서 공사를 감독하였다. 저녁에 조계수(趙季售)ㆍ노면재(盧勉哉)와 함께 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 8월 11일 갑오(甲午)
강극수(姜克修)가 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종매(從妹)를 만나보니, 병세에 차도가 있어 기뻤다. 치숙(致叔)ㆍ형언(馨彦)을 차례로 방문하고 돌아왔다.
○ 8월 12일 을미(乙未)
근래에 가을장마가 연일 이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밥 짓는 불이 끊어질까 근심하고 있다. 이제 마침내 눈부신 햇빛을 보게 되었으니, 하늘이 사람을 살려주시는 점이 많다.
○ 8월 14일 정유(丁酉)
아침에 비가 오다가 잠시 개었다. 경상 우도(慶尙右道)의 소초(疎草)와 김경원(金慶遠)ㆍ권경지(權景止) 등의 항장(抗章)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경상 우도의 상소 안에는 한가한 말이 있고 말뜻이 연약하고 자질구레해서, 전혀 눈에 차지 않으니, 인재의 부족함이 여기에 이르게 되었구나. 성상께서 보시고서 감동하기 어려우실 터인데, 양흉(梁兇 양홍주(梁弘澍))의 악을 서술한 것이 너무 소략하니, 더욱 한탄할 일이다.
○ 8월 15일 무술(戊戌)
큰비가 내렸다. 산소가 멀어서 성묘하러 갈 수 없었던 터에 날씨조차 비가 그치지 않으니 우울하고 근심됨을 어찌하리오?
○ 8월 16일 기해(己亥)
송언신(宋彦信)이 대사헌(大司憲)에서 체직(遞職)되고, 박홍로(朴弘老)로 대신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 김이옥(金而玉)이 중부(中部) 참봉(參奉)이 되었는데, 그는 자(字)가 사옥(士沃)으로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손자이다.
○ 8월 17일 경자(庚子)
조카가 가서 공간(公幹)을 만나고, 저녁에 모간동(毛看洞) 사람들과 가무(歌舞)를 하며 크게 놀았다. ○ 석성(石城)에 사는 전개(田漑)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8월 18일 신축(辛丑)
노면재(盧勉哉)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목사(牧使)인 강(姜)형 및 강극수(姜克修)를 방문하였다. 그런 다음 허중관(許仲觀)을 조문하고, 또한 여계(汝啓)를 찾아갔다.
○ 8월 19일 임인(壬寅)
〈제노 참봉문(祭盧參奉文)〉에, “예전에 개암(介庵) 강익(姜翼)이 미래의 학도를 일으키고, 선정(先正)을 추숭(追崇)하는데 뜻을 두었네. 많은 사람이 경탄하며 참여했지만, 그중에서도 공의 형제가 가장 두드러졌었네. 논의하는 데 있어서 거역함이 없어, 시끄러운 잡음을 배격하고서 성실한 노력으로 도우니, 옛 학교가 흥기하여 많은 선비를 배출하였는데, 저 남계서원(灆溪書院)을 바라보면 글 읽는 소리 왕성하였네.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세상이 어지럽고 사람들이 죽었네. 경적(經籍)이 비록 불탔으나 위판(位板)은 아직도 보존되었네. 참봉공(參奉公)이 중건을 창도하여 침식도 잊고 일을 하였네. 상의하여 옮기기를 도모하니, 결정하자 곧 이루어졌네. 일이 매듭지어지기도 전에 공이 병들어 누워 그것을 경영하였네. 그릇된 주장은 저절로 그치고 여염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일어나기를 바랐지만, 우리 고을 운이 없어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네. 아아! 슬프다. 효제(孝悌)가 온전하였고 호오(好惡)가 분명하였네. 개결(介潔)한 자질을 지니고 선함을 즐기는 정성이 있었네. 쇠퇴하지 않는 학식과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안목이라네. 끝났구나, 끝났구나! 이제 다시 회복할 수가 없구나. 하늘이 온전한 자질을 주고서도 어찌 운명은 그리 박하게 하였나? 살아서는 오복(五福)이 없었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말을 함에 어찌 끝이 있겠으며, 말을 한들 무슨 보탬이 되리요? 죽지 않은 혼령이 있거든, 나의 충심을 살펴주소서. 아아! 슬프다.”라고 하였다.
○ 8월 23일 병오(丙午)
두통이 심하게 나서 밤새도록 땀이 줄줄 흘렀으니, 이는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다.
○ 8월 26일 기유(己酉)
백토(栢吐)에 갔다. 이화언(李和彦)을 문병하고,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8월 27일 경술(庚戌)
노빈부(盧賓夫)ㆍ면재(勉哉)와 함께 나무를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였고, 날이 저물어 면재와 함께 서원에서 잤다.
○ 8월 28일 신해(辛亥)
조계수(趙季修)ㆍ면재(勉哉)와 함께 서원 일에 대하여 상의하고, 오후에 각자 흩어져 갔다. ○ 들으니, 향소(鄕疏)가 초여드렛날 서울에 도착하자 그날로 예조(禮曹)에 계하(啓下)하였으니, 이것은 옛날에 전례가 없던 것이다. 반드시 성상께서 양흉(梁兇)을 죄주고자 해서 그러한 것이리라. 그러나 회계(回啓)가 어떠할지는 알 수 없다.
○ 8월 29일 임자(壬子)
정여계(鄭汝啓)ㆍ하자순(河子順)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양형언(梁馨彦)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 8월 30일 계축(癸丑)
경안(景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위로는 어머니께서 계시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들이 있으니, 앞으로 무엇으로 연명하겠는가?
[주-D001] 강익(姜翼)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보(仲輔).[주-D002] 양흉(梁兇) : 양홍주(梁弘澍).
ⓒ 남명학연구원 | 박병련 설석규 신병주 정우락 한명기 (공역) | 2009
孤臺日錄(고대일록)鄭慶雲(1556 ~ 未詳)德顒(덕옹)孤臺(고대)晋陽(진양)
秋八月 甲申朔大雨○二日乙酉余往介坪問疾于院長仍向書院 三日丙戌與盧勉哉從容叙話○四日丁亥堯乾元折簡而來書云 丹木欲取而龍城倅採得進上然後可以取去云云 五日戊子聞倭賊似有動漸人心洶洶巡使及兵使等相議欲設山城 要害之處云云山城雖可設策而前驗不吉人皆欲散奈何 七日庚寅見先生答書前腫勢差歇伏慰慰又見性源隆甫書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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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之䟽以裵仲補爲䟽頭直達天閽云吾鄕之䟽巡使轉達爾 九日壬辰乍雨終日開家基立柱數間茅屋豈是久住計也 十日癸巳往書院董役夕與趙季售盧勉哉同宿晤語 一日甲午姜克修來話食後見從妹妹之病差可可喜歷訪致叔馨 彦而來○二日乙未近來秋霖連日人皆有絶火之虞今始見暉皇天 之活人多矣○四日丁酉朝雨乍晴得見右道䟽草及金慶遠權景 止等抗章但右道之䟽中有閑說話辭意軟碎殊不滿人目人才之 乏至於此哉聖上之覽難可感動而鋪叙梁兇之惡太䟽尤可恨 也○五日戊戌大雨以墓遠莫能歸拝天且雨无間㭗憫奈何 六日己亥聞宋彦信遆都憲而以朴弘老代之○金而玉爲中部參 奉字士沃乃冲庵之孫也○七日庚子猶子往見公幹夕與毛看 洞人歌舞大歡○與石城居田漑相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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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日辛丑與盧勉哉相語共訪姜兄牧使及克修歷弔許仲觀又訪 汝啓
○九日壬寅祭盧參奉文
| 盧士㑘 | 1544 | 1603 | 豐川 | 德夫 | 秋潭 |
| 盧士㑘字德夫。與兄立夫(盧士豫字立夫)。比屋而居。少喪父。奉偏母。君爲季也。母安之。隨而居。遭憂與兄立夫居廬三年。壬辰以後。受募粟之任。頗有勤幹之稱。甞以薦除孝陵參奉。不赴焉。 |
伊昔介庵 志興來學 追崇先正 象駭且格
惟公昆季 論議莫逆 力排喧豗 誠切扶植 舊塾感興 多士輩出
睠彼灆溪 絃誦洋洋 斯文不幸 世亂人亡 經籍雖燼 板位猶存 公倡重恢 寢食不諼 相議謀遷 惟斷乃成
事未就緖 公乃疾卧 而經之 邪議自止 庶幾閭閻 作我髦士 鄕運无福 竟至不淑 嗚呼哀哉
孝弟之全 好惡之明 耿介之質 樂善之誠 不衰之學 先見之卓 已矣矣 今不可復
畀何全也 命何薄也 生無五福 死不瞑目 言之何竟 言之何益 不亡者存 鑑我衷曲 嗚呼哀哉
二十三日丙午頭痛大作達夜汗出此乃感冒之致也
○六日己酉往栢吐 問病李和彦同宿夜話○七日庚戌與盧賓夫勉哉監運木之役日暮與勉哉同宿于院○八日辛亥與趙季修勉哉議事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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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各散○聞鄕䟽初八日入京啓下禮曹此無古例也必是聖上 欲罪梁兇然也未知回啓之如何○九日壬子鄭汝啓河子順來話 梁馨彦來話○三十日癸丑聞盧景安升仙上有慈親下有稚 子將何以爲命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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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4권 / 갑진(甲辰, 1604) / 겨울 10월
○ 10월 10일 병진(丙辰)
노 익산(盧益山)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됨이 화평하고 단아하며〔愷悌〕 선을 좋아하였다. 계묘년(癸卯年)에 고을 사람들이 상소를 올려 흉주(凶澍)를 주벌하길 청할 때, 익산(益山)이 스스로 허락하여 소두(䟽頭)가 되었고, 분개한 기색이 말과 얼굴에 드러났다. 선생을 위하여 탄분(歎憤)하기를 선생께 가르침을 받은 이들과 다름이 없었다. 비웃음과 욕을 피하지 않고 남의 시기와 혐오에 용감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부여해 준 자질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을에 선한 사람이 없도다. ○ 크게 우레가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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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4권 / 을사(乙巳, 1605) / 여름 4월
○ 4월 7일 신해(辛亥)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의 배 한 척이 일본으로부터 도망하여 왔고, 유정(惟政)이 왜국(倭國)의 대도(大都)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두 살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外祖父)께 의지하여 길러졌다. 아홉 살에 외왕부(外王父)께서 또 돌아가시고, 열세 살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양부모가 모두 돌아가셔서 맏형에게서 수학(受學)하였고 외왕모(外王母)에 의해 길러졌다. 열다섯에 또 외왕모를 여의었으며, 이때부터 형 보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고, 형수 보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였다. 열아홉에 또 형님을 잃었는데, 학업은 어자(魚字)와 노자(魯字)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몸과 그림자가 서로를 위로할 지경〔形影相弔〕이었다. 경오년(庚午年, 1570)부터 기묘년(己卯年, 1579)까지 형수를 우러르며 생명을 이어나가기를, 마치 한유(韓愈)가 정부인(鄭夫人)을 대한 것과 같았다. 경진년(庚辰年, 1580)에 이르러 마침내 아내를 두었다.
외롭고 곤궁한 가운데에도 오히려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알아, 집이 성시(城市)에 가까웠으나 한 번도 시리(市利)를 도모하는 잘못이 없었다. 마음으로 현인을 사모하고 되기를 바라 약간 옛 책에서 자득함이 있었고, 박공간(朴公幹)ㆍ박경실(朴景實)ㆍ노지부(盧志夫)ㆍ정현경(鄭玄卿)ㆍ강극수(姜克修) 등과 벗하였다.
신사년(辛巳年, 1581, 26세)에 마침내 스승을 찾을 줄 알아 내암(來庵)선생께 배움을 청하였다. 선생께서 못난이로 물리치지 않으셨으니, 그 후 잇따라 출입하였다. 매번 “가을달이 차가운 강물에 비치다.〔秋月照寒水〕”라는 시구(詩句)를 생각하며, 부모와 같이 우러르고 신명(神明)과 같이 믿었다.
갑오년(甲午年, 1594)에 노지부(盧志夫)와 함께 원임(院任)을 받았다. 정유재란(丁酉再亂) 이후에 지부(志夫)는 몸을 상하여 죽었고, 나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일두서원(一蠹書院)과 향현사(鄕賢祠)를 관리하였는데 만분의 보탬이 있었다.
경자년(庚子年, 1600)에 노장(盧丈)이 원장(院長)이 되어, 서원을 옮기는 논의를 나와 함께 발의하여 옮길 장소를 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노장(盧丈)이 갑자기 죽자 아무도 이 일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고, 일 년 만에 뭇 사람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노 익산(盧益山) 어른이 원장(院長)이 되어 같은 생각으로 학교를 일으켰는데, 잇달아 죽어 기약했던 바의 일을 마치지 못했고, 강극수(姜克修)에게 전임(傳任)되었다. 나는 궁향(窮鄕)의 만학(晩學)으로서 이미 입설(立雪)의 정성도 없었고, 또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공부도 모자라 끝내 담장을 쳐다보는 듯한 지경을 면하지 못해 도(道)의 영역과 서로 격리되었다. 마치 기러기가 수초 속에 내려 앉아 진흙 속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과 같았다. 노둔함을 채찍질하여 선생께 나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때로 혹 편지를 부쳐 안부를 묻고 연달아 이끌어주는 은덕을 입었다.
갑진년(甲辰年, 1604)에 아내가 세상을 버림에 예를 물어 상(喪)을 치러,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실수를 면할 수 있었다. 강위서(姜渭瑞)와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우산(牛山)의 언덕에 함께 집터를 정하였다. 정(情)이 같았고, 지(志)가 같고, 사우(師友)가 같았고, 학업(學業)이 같았고, 궤안(几案)이 같았고, 비방이 같았다. 아양(峨洋)의 사이에 비견하였고, 간담(肝膽)을 서로 내비쳤는데, 완전히 기러기가 무리지어 날아올라 멀리가려는 것 같았다.
을사년(乙巳年, 1605)에 상(喪)을 만난 후에는 인사(人事)에 뜻을 두지 않다. 다만 삼현(三賢)의 사당이 풀숲에 매몰될까 염려할 뿐이었는데, 강극수(姜克修)가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여 돌아오지 않아, 신위를 봉안(奉安)하는 것을 쉽게 기약할 수 없었다. 쇠하고 슬픈 몸을 애써 일으켜 다반으로 조처해서, 날을 택하여 이안(移安)하려고 하였다. 이때 고을 사람들은 혹 죄로 여기기도 하고 혹 소홀함을 지적하기도 하고, 혹 성례(盛禮)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써, 분을 품고 이를 갈며 비어(飛語)를 날조하며 모래를 뿜고 그림자를 엿보아〔吹沙伺影〕, 반드시 죄인의 처지에 빠뜨리고자 하였다. 위서(渭瑞)ㆍ극수(克修)와 함께 구설(口舌)을 받았는데, 그 정도가 끝이 없었다. 마치 외로운 학〔孤鶴〕은 무리가 적고 솔개와 갈가마귀〔鴟鴉〕는 많은 것 같았다. 이로부터 뜻이 인사(人事)를 사절(謝絶)하고 두문(杜門)하여 허물을 살폈다. 만약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비웃었는데, 마치 기러기가 마시지 않고 쪼지 않고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며, 구름 속에서 날개를 접고서 기색을 살피며 드물게 나와 거의 그물에 걸리는 재앙을 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詩)를 읊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七日辛亥聞被擄人一船逃自日本惟正入于倭國大都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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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二歲早孤依外祖父鞠養九歲外王父又沒十三歲慈母見背孤哀中 從伯氏受學衣食於外王母十五又失之自是視兄猶父視嫂猶母十九 又失兄學未知魚魯形影相吊自庚午至己卯仰嫂爲命猶韓愈之 於鄭夫人至庚辰始有室孤困之中猶知義利之辨家近城市亦未嘗 有折擅之失心慕希賢少有自得於黃卷而與朴公幹朴景實盧志 夫鄭玄卿姜克修等相友善辛巳始知尋師之道請見於來庵先生 生不斥之以無似厥後夤緣出入每思秋月照寒水之句仰之如父母信之如神明
甲午與盧志夫同受院任丁酉再亂後志夫以毁而滅性余獨還鄕經理一蠹書院及鄕賢祠粗有萬分之補
庚子盧丈爲山長 同起移院之議卜地創立盧丈遽殞言無聽唱無和者一歲而爲衆楚所困未幾盧益山丈爲山長志同興學而繼殞未就事無訖期
傳任於姜克修竆鄕晩學旣無立雪之苦又之切磋之益終未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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墻面與道岸相隔則如鴈之落於草澤之中沒首無所見而策勵駑鈍▩拝於先生多獲書紳之敎時或折簡以候起居而連承誘掖之賜
甲辰室人棄逝問禮治喪得免扣盆之失
與姜渭瑞定爲死生之交同卜牛山之坡情同志同師友同學業同几案同謗毁同托爲峨洋心肝相照絶如鴈之思羣奮飛志遠也
| 鄭慶雲 | 1556 | 16?? | 晉州 | 德顒 | 孤臺 |
| 강응황(姜應璜) | 1571 | 1644 | 진주(晉州) | 위서(渭瑞) | 백천(白川), 추모당(追慕堂) |
乙巳遭服之後元意人事只恐三賢之祠埋沒於草莽之間而姜克修遊泮不歸奉安未易期强起衰慷多般措畫擇日移安于時鄕人或有以愆或以遺漏或有不參於盛禮者懷憤磨牙捏造飛語吹沙伺影必欲陷之於有過之地與渭瑞克修同受口舌罔有紀極如孤鶴之寡侶而鴟鴉之衆多自是意欲謝絶人事杜門省愆若有則改之無則笑之如鴈之不飮不啄不聞不見斂翼雲霄色斯簡出則庶免罔罹之厄矣因詠以自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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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4권 / 병오(丙午, 1606) / 가을 7월
○ 가을 7월〔秋七月〕무진(戊辰) 초하루
이희준(李希凖)ㆍ평중(平仲)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7월 17일 갑신(甲申)
당곡(唐谷)에 가서 당형(堂兄)을 뵈었다. ○ 강 목사(姜牧使) 형이 찾아왔다.
○ 7월 18일 을유(乙酉)
사천(泗川)의 유생 등이 이정(李禎)을 위해서 사당을 건립하고자 하였는데, 진주(晉州)에 사는 남엽(南曄)ㆍ박민(朴敏)이 글을 내어 재물을 모았다. 그러므로 덕산 원장(德山院長)이 박민을 정거(停擧)할 것을 입의(立議)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 조임도(趙任道)ㆍ이도(履道)ㆍ위도(衛道)ㆍ단성(丹城)의 이경운(李慶雲)이 수창(首倡)했다고 하여, 대구(大丘)에서 붙잡혔다는 소문을 들었다.
○ 7월 21일 무자(戊子)
새집에 돌아왔다. ○ 선수희(宣受禧)가 대수(大樹)에 왔음을 듣고, 위서(渭瑞)와 가서 그를 만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 7월 22일 기축(己丑)
선수희(宣受禧)를 청하여 지나면서 새 집의 터〔新基〕를 보게 했다. 터는 살 만하지만 흠은 간방(艮方)이 허하다는 것이었다. 선군(宣君)은 자가 덕후(德厚)였다.
○ 7월 24일 신묘(辛卯)
고을 사람들이 대회(大會)를 열어 향현사(鄕賢祠)의 위차(位次)를 바꾸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하황(河愰)이 먼저 사악한 논의〔邪論〕를 선동하였고, 노탐(盧耽)ㆍ노일(盧佾)이 그를 따르니, 서남(西南)에는 뛰어난 사람이 없다는 말로써 겁을 주었다. 서남인(西南人) 노소(老少)가 모두 모여 나를 벌주었고, 위서(渭瑞)와 임중(任重)은 또한 그 당시에 유사(有司)를 맡았다고 해서 넉 달 동안 손도(損徒)되었다고 한다. 회문(回文)에 대략 말하기를, “일두서원(一蠹書院)의 자리는 애당초 다른 고을의 의논에서 관여되지 않았으니, 모두 고을 사람들이 정한 바에서 비롯되었다. 내암(來庵)과 한강(寒岡) 두 선생을 지척(指斥)하고, 위차(位次)의 …〈결(缺)〉… 과 포발(咆勃)하는 설을 지휘(指揮)한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유(李維)를 출정(出定)하여 원장(院長)으로 삼고, 정옥(鄭沃)을 유사(有司)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결(缺)〉… 노문(盧門)에서 장이(長貳)의 임무를 미리 정하고, 또 죄안(罪案)을 정한 연후에 글을 내었으니, 마치 여론을 수렴하여 논의한 듯하지만, …〈결(缺)〉… 장의는 바로 임제민(林濟民)ㆍ하제(河悌)이다.”라고 하였다. ○ 편견은 한 집안의 사사로움이요〔偏見一家私〕 공변된 말은 해와 달을 아우르네〔公言幷日月〕우리 진리는 동네 주장이 아니니〔斯文非巷議〕 복의 제단이 오늘에 생겨나도다〔福畤生今日〕 구름과 안개 속에 호흡하며〔呼吸雲霧中〕 숨을 내쉬니 산꼭대기가 험하도다〔吹噓山冢崒〕 가련할 손 한 사람은〔最憐一介人〕 저수(沮水)ㆍ칠수(漆水)를 건널 수 있으리〔可以渡沮漆〕. ○ 회문은 곧 노경승(盧景承)이 지은 것이다. 회의하는 날에 이유(李維)가 다시 단자(單字)를 올려 말하기를, “위차(位次)를 바꾸는 논의가 어느 사람에게서 나와 어느 사람에게서 정해졌는가? 말이 선생께 저촉되었는데, 무뢰배들이 함부로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을 업신여김이 이러한 극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했으니, 세도(世道)를 알 만하다. 사람들에게 기가 막히게 한다.”라고 하였다.
○ 7월 26일 계사(癸巳)
임극신(林克新)ㆍ강경정(姜景靜)이 왔기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D001] 조임도(趙任道) : 1585~1664. 본관은 함안. 자는 덕용, 호는 간송. 1611년(광해군3)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의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규탄하였다.[주-D002] 손도(損徒) :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학령(學令)을 위반할 때에 동료들이 배척하여 멀리하는 일.[주-D003] 포발(咆勃) : 성을 내어 으르렁대다.[주-D004] 저수(沮水)ㆍ칠수(漆水) : 沮漆은 《시경(詩經)》〈대아(大雅) 면(綿)〉 참조. 태왕(太王)이 처음에 저수(沮水)와 칠수(漆水) 유역의 빈(豳)에 도읍하여 왕업(王業)을 창시하니, 후손이 점차 강대해져 문왕(文王)에 이르러 천명(天命)을 받게 되었음을 읊은 것.
ⓒ 남명학연구원 | 박병련 설석규 신병주 정우락 한명기 (공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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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湖先生文集[重刊本](용호선생문집[중간본])朴文楧(1570 ~ 1623)龍湖先生文集目錄[目錄][龍湖先生文集目錄]...盧參奉文 祭金孝錫文 祭吳翼承文 再祭文 祭盧睡隱文 告先府...
| 朴文楧 | 1570 | 1623 | 潘南 | 君秀 | 龍湖 |
祭秋潭盧參奉文
| 盧士㑘 | 1544 | 1603 | 豐川 | 德夫 | 秋潭 |
公名士㑘 於先生爲表從叔 先生嘗受業
嗚呼哀哉 地下人間 已隔一年 來拜虛筵 有淚如泉
昔公居憂 小子摳衣 觀公執喪 古禮是依 不怠不懈
兄及弟而 推而友于 壎唱篪吹 人無間言 物莫招疑
克孝克弟 餘事何稱
嗚呼哀哉 才命成冤 韞玉無徵 百歲堪悲 後事零丁 悠悠變故 不忍瞻聆 吾知泉裏 目應不暝
嗚呼哀哉 曰余無狀 夙承提誨 勤勤警責 辭意懇剴 得辨焉馬 公義所逮 恩猶骨肉 報無毫末
環顧平生 有靦面目 然猶一心 終始不罔 靈若有記 想恕謬讜
嗚呼哀哉 庶幾來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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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원장(盧院長) : 노사예(盧士豫, 1538~1594)를 의미한다. 남계서원 《경임안(經任案)》에 의하면
1584년에 노사예가 남계서원의 원장이 되며,
1594년에 노사상이 원장이 된다. 정경운은 1594년에 서원의 유사를 맡는다. 이후 남계서원의 원장은
1600년에는 노사개, *노덕부(盧德夫) : 노사개(盧士㑘)의 자(字). 본관은 풍천(豊川).*
1603년에는 노사회,
| 노 익산(盧益山) 사회(士誨) 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 | 노사회는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일곱 아들 가운데 둘째이다. 작자보다 2년 연하인데 1604년(선조37)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來庵集 卷13 益山郡守盧君墓誌銘》 |
| 盧士誨 | 1545 | 1604 | 豐川 |
1606년에는 이유와 하응도,
1610년에는 이대일 등이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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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堂先生文集卷之十三 / 墓碣銘 / 孝陵參奉秋潭盧公墓碣銘 並序
| 盧士㑘 | 1544 | 1603 | 豐川 | 德夫 | 秋潭 |
公諱士㑘字德夫號秋潭。盧氏系出豐川。高麗國子進士諱裕爲鼻祖。高祖松齋諱叔仝禮曹參判藝文提學選淸白。曾祖諱昐藝文校理贈都承旨。祖信古堂諱友明。己卯名賢。官寢郞贈吏曹判書。考敬庵諱禧進士。與成聽松爲道義交。妣南原梁氏處士應麒女。嘉靖甲辰公生。七歲遭外艱。祖妣悶幼弱。啖以肉泣辭。母夫人沈痾㞃。公身恒湯罏畔泣禱瘳。辛巳丁內憂。幾隕絶。與仲兄弘窩公廬墓泣拜。風雨不廢。啜粥朞不食菜果。以畢喪氣猶全。慮仲兄毁。勸魚肉味。已爲兄暫勉。䨓震以母氏驚。雖夜衰絰伏墓泣。少遭伯公參判喪老冞痛。敬仲兄居間日夜對。有故曠。簡訊續。早孤爲至慟。以事父事仲父玉溪先生。先生敎方嚴。學遂通。其學究性理微奧。晩來敎授奬拔甚多。朴龍湖文楧,吳思湖長其尤也。甲申與弘兄倣呂氏鄕約幷鄕飮酒禮。月朔講行。一鄕賴之。龍蛇難。同兄倡義。義聲大振。難已不自伐。愛泉石。卜築灆溪上。講學棲息於其中。朝廷以遺逸徵爲孝陵參奉不就。癸卯四月二十日考終。壽六十七。葬郡北黃澗亥坐原。公稟高氣峻。潛心自修。於世間得喪泊如也。養志事親。禮法刑家。守己簡而重。接人和而嚴。於鄕恂恂不苟同。於族由由不睽乘。爲學奮發超悟。精思力踐。嘗警學者曰學貴自得。非此易差。事在勉強。非此難成。詔子姪曰世之學者。不知事親敬兄爲實工夫。遽向上探天道之妙。說性命之原。此何學也。公與寒岡鄭先生同庚同志。講學又同。祭公文有交義膠漆語。卽其家世淵源朋友麗澤。而可以得公之所存矣。噫。以公之德之學。卒竆落以終身。不得一施於用惜哉。娶星州呂氏。士人忠女。著壼宜。祔公墓。二男膉,肜。伯男亨遂,亨會。季男亨吉,亨福。曾玄以下不盡錄。今其八代孫光逸奉公狀北來四百里。屬余以墓道之銘。不佞嘗讀豐川十世淵源錄。敬重盧氏世德。今於公圖堅之辭。何敢辭。按狀至公警學者詔子姪數語。輒作而歎曰此正是敬內義外之實事。如今人欲學。盍於是爲實下手處。是爲銘。銘曰。
猗嗟世懿有是哲。言出行成總是實。灆水秋月千古澈。不朽者在我銘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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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 광해군 7년 을묘 > 윤 8월 11일 > 최종정보
광해군 7년 을묘(1615) 윤 8월 11일(을묘)
07-윤08-11[02] 생원 민정이 상소하여 진사 정옥을 국문하기를 청하다
| 정여계(鄭汝啓) : 정옥(鄭沃)의 자(字). 본관은 서산(瑞山). |
생원 민정(閔瀞)이 상소하여 진사 정옥(鄭沃) 등이 말한 ‘강상을 부지한 외로운 충신[扶綱常孤忠]’이라는 다섯 자의 뜻을 가지고 국문하여 정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의논하여 처리하겠다고 답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금부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소동 (역)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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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 광해군 12년 경신 > 1월 26일 > 최종정보
광해군 12년 경신(1620) 1월 26일(을사)
12-01-26[03] 장령 채겸길이 이대기의 역적성토 상소에 대해 공박한 사건을 인혐하다
장령 채겸길(蔡謙吉)이 아뢰기를,
“신은 성품이 질박하고 솔직하며 또 지식이 없는데도 청현직을 두루 거쳤고 〈지금 다시 풍헌(風憲)의 직에 있으나 공효가 털끝만큼도 없으므로〉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삼가 들으니, 〈이번에〉 전 군수 이대기(李大期)가 통문(通文)을 만들어 온 도에 전파하여 정결(鄭潔) 등이 역적을 성토한 상소에 대해 신랄하게 공박하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 당시의 대론(臺論)을 본말이 전도되고 진실을 상실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매(魑魅)와 귀역(鬼蜮)으로 정결 등을 비교하고는 또 사림 제현들의 백세의 공의(公議)로 자칭하고 있다고 하니, 신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프고 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정결 등이 상소할 때에 신은 장의(掌議)로서 〈장보(章甫)의 끝자리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그때의 곡절을 〈상세히 알고 있으니,〉 바라건대 한두 마디 말을 진달하겠습니다. 무신년 이후로 적자(賊子)가 한둘이 아니나 흉참하고 패악스러운 것이 계축년에 있던 모란(謀亂)보다도 더 심한 것이 없고 반측(反側)하고 음특(陰慝)한 것이 정온(鄭蘊)이 역적을 비호한 것보다도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정온은 이미 이의(李㼁)를 죄주자고 청하는 데 참여했으면서도 또 의를 구원하는 소를 올렸는데, 장황한 사설(辭說)이 망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 ‘전하께서 사나운 무부(武夫)에게 손을 빌렸다.’ 하고, 또 ‘전하께서 선왕의 묘정에 들어갈 면목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는가 하면 역적 의(㼁)를 제왕(濟王)에 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전하의 신자된 자로서 어찌 차마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호남의 요적(妖賊) 송흥주(宋興周)는 바로 악독한 정철(鄭澈)의 여얼(餘孼)로서 정온을 뒤따라 일어나 정항(鄭沆)을 참하고 정온을 용서하라고 정소(呈疏)하자, 삼사가 기운을 잃고 대신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정결(鄭潔)ㆍ한회(韓會) 등은 정인홍의 족질(族姪)로서 반궁(泮宮)에 와 있으면서 의를 들어 역적을 토죄했습니다. 문경호(文景虎)는 영남에 있는 몸으로 한갓 잘못 전하는 말만을 들어 사리와 의리에 밝지도 못하면서 ‘정결 등이 정온을 죽이라고 청했으니 그 누가 장자(長者)에게 미쳤다.’는 내용으로 온 고을에 통문하여 정거(停擧)하고자 하였는데, 정인홍에게 저지당해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이성(李𢜫)이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문경호를 탄핵하여 사판에서 깎아버리자, 정인홍은 일찍이 ‘경호가 본래 배사(背師)의 마음이 없었는데 잘못 불측한 죄에 빠진 것이다.’고 원통하게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그가 이성과 박재(朴梓)에게 준 글에 다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제문(祭文)과 만시(輓詩)에도 포원(抱冤)의 뜻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대기(李大期)는 본시 간사하고 아첨스러우며 절조가 없는 사람으로 지난번 역적 혁(奕)의 옥사 때에 그의 첩은 일찍이 요사스런 여승으로 있다가 환속하여 영생(英生)과 동거하면서 가정 안에서 음란을 가르치고 추행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대기(李大期)도 〈사람들의 논의를〉 입고 체포 수금된 〈일이 있었으므로〉 결국 오래 전에 사류에게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완론(緩論)에 붙어 분심과 원한을 풀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경호가 죽자 그를 신구(伸救)한다고 하며 현사(賢師)를 기만하고 향생(鄕生)을 꾀고 협박하여 스스로 통문을 지었는데, 그 주된 의도는 오로지 정온을 구제하는 데 두어서 장차 온 고을과 온 도를 불측한 죄에 빠뜨리려 하였습니다. 정인홍이 그 통문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대기에게 매도당한 것을 알고 크게 놀랐고, 문하인으로 〈지식이 있는 자들은〉 분한 마음으로 욕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당초 관유(館儒) 민결(閔潔) 등의 상소에 ‘영남의 버릇없는 무리들은 정온이 임금을 욕보인 것을 직언이라 하고, 정온이 역적을 비호한 것을 충절이라 하여, 혹은 그를 충신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그의 말을 당론(讜論)이라 하기도 하면서 백이(伯夷)에 비교하기까지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관학 유생 90여 인이 의리에 분발하여 항장(抗章)을 올려서 역적 정온과 송흥주(宋興周)의 임금을 업신여긴 부도한 죄를 극도로 논핵했는데, 그 말이 엄하고 의리가 발라서 임금을 감동시켰으므로, 성상의 비답이 자상하시어 ‘조양(朝陽)에서 봉황이 울었다.’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간사한 논의가 시행되지 못하여 국시(國是)가 절로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대기와 문경호가 스승을 배반하는 것을 달게 여기고 간사한 논의에 부회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삼아, 정결 등을 ‘망령되게 흉소를 진달하고 사사로이 정거(停擧)하였다.’고 지목하였으니, 그렇다면 대기는 바로 죽지 않은 경호입니다. 대기가 이미 경호와 함께 관학 유생들에게 배척을 당했으니 대기와 경호는 두 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곧 옛날의 종적을 감추고 죄가 없는 자처럼 아무렇지 않게 다만 경호를 구제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주관하고 있는데, 그가 경호를 구제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를 구제하는 것입니다. 정결이 상소를 끝맺는 말에서는 다만 ‘송흥주(宋興周)의 소장을 불에 태우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결정하라.’고 청한 것일 뿐인데, 문경호와 이대기의 통문에서는 모두 정결이 〈소를 올려〉 정온을 죽이라고 청한 것으로 죄안을 삼고 근거없는 말을 날조해 꾸며서 온 도의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가 더욱 어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역적 정온이 갇혀 있을 때 이대기는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었는데, 신구하는 상소를 스스로 지어 단성(丹城)에 사는 이유열(李惟說)을 소두(疏頭)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유열이 서울에 와서 상소하지 않고 돌아가자 이대기가 크게 성을 내고는 군유(郡儒) 정옥(鄭沃) 등으로 하여금 유열이 소를 올리지 않은 죄를 공격하게 하고, 또 도내에 통문하였는데, 그 내용에 ‘사직(司直) 정온(鄭蘊)은 삼대(三代) 이후의 유직(遺直)으로 강상을 붙들고 시비를 밝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민정(閔瀞)이 그 말을 듣고 상소하여 정옥 등을 공격하면서 병기를 잡지 않은 역적이라고 논박하였는데, 상께서 그 소를 〈대신에게〉 내려서 수의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대신 정인홍이 좌상으로서 마침 서울에 와 있었는데, 의논드리기를 ‘군부 외에 무슨 강상이 있으며 조정 외에 또한 무슨 시비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소두를 잡아다 문초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지방관이 이와 같이 역적 무리를 비호했으니 치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이대기를 준열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기의 악한 짓이 이 지경에 이르렀고 인홍의 악을 미워함이 또한 이와 같은데, 대기가 경호의 죄과를 엄폐하고자 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려고 하기까지 하면서 옛날의 향 선생(鄕先生)에 비교하였습니다. 문경호에게 무슨 숭상할 만한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이 있기에 또한 음사(淫祠)를 세워 사문(斯文)의 욕이 되게 한단 말입니까. 그의 공론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기의 논의를 함부로 행하는 것이 너무나도 심합니다. 대기는 심술이 간특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르기를 ‘지금 이 통문도 사장(師長)에게 고했다.’ 하고, 또 그 통문에 이르기를 ‘정온이 비록 죄가 있더라도 선생이 어찌 그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선생이 정온을 죽이고자 하지 않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선생의 손자와 조카, 그리고 약간의 문도가 서로 일제히 분개하여 이런 거조가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더욱 사리에 가깝지 않은 말입니다.
인홍은 역적 정온이 죄를 입던 날에 한 통의 차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정온은 부도한 말을 많이 하였다. 만약 의(㼁)를 위하여 절의를 다한 것이라면 정온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정온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근일에 정인홍의 손자 정적(鄭積)이 남의 글에 답하기를 ‘지금 이 이대기의 통문은 조어가 이치에 닿지 않아 정온을 구제하는 내용에 관계된 것인데, 대부(大父)께서 이와 같은 내용을 과연 아셨다면 어찌 그가 하는 대로 놔두고 금지하지 않으셨겠는가.’ 하였으니, 과연 인홍이 통문의 조어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손자와 조카가 서로 더불어 일제히 분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대기가 군부를 배반하고, 사장(師長)을 배반하며, 향리를 속이고, 온 도민을 속이며, 나라 사람들을 속인 죄는 이에 이르러 더욱 극에 달했다 하겠습니다. 대기는 이미 여승을 데리고 살며 음탕한 짓을 한 죄에서 벗어나서는 또 송흥주가 역적을 비호한 논의를 조금도 꺼리는 점이 없이 계승해서 더욱 흉측한 심술을 부리고 있습니다. 〈만약 감옥에 구속하여 가두었을 때에 이상(彝常)을 더럽히고 어지럽힌 율로 바로잡았다면 어찌 오늘날에 괴귀(怪鬼)가 되어 기복(起復)하는 흉계를 꾸밀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 대의가 밝지 못하고 왕법이 행해지지 않아서 은혜를 온전히 하라는 주장이 앞에서 나오고 절충해서 완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뒤에서 싹터 간흉의 우두머리가 그 영수가 되고 뭇소인들이 우익이 되어, 안과 밖이 서로 응하고 형상과 그림자가 서로 따르듯이 하여 역적 이의를 위하여 우단(右袒)을 하고 역적 정온을 위하여 기를 세웠습니다. 지금 이 통문은 격서를 전한 것과 같은 점이 있어서 서울에 사는 재앙을 좋아하는 무리들은 갓의 먼지를 털면서 서로 경사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사방에서 상을 원망하는 무리들은 귀를 기울이며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등 사태가 막 일어나려고 하여 그 형상이 아주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성상께서 임어하시어 국시가 이미 결정된 지금 개와 쥐 같은 보잘것없는 미물들이 감히 날뛰면서 남몰래 도모하여 악을 영글게 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신은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매우 더러운 욕을 입었으니,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신을 파직하라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주-D001] 무신년 : 1608 광해군 즉위년.[주-D002] 계축년 : 1613 광해군 5년.[주-D003] 모란(謀亂) : 광해군 5년에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이 소북파(小北派)인 유영경(柳永慶)을 죽이고 김제남(金悌男)과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역모로 무함해 죽인 사실을 말한다.[주-D004] 이의(李㼁) : 영창 대군.[주-D005] 사장(師長) : 정인홍을 가리킴.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93
○掌令蔡謙吉啓曰: "臣賦性樸直, 且無知識, 歷敭淸顯, (復拈風憲, 效蔑絲毫,) 常切兢惕。 伏聞(今者)前郡守李大期, 作爲通文, 傳布一道, 深攻鄭潔等討逆之疏, 至以其時臺論, 爲顚倒失實, 以魑魅、鬼蜮, 比潔等, 又以士林諸賢百世公議, 自稱云, 臣聞來, (不勝痛惋,) 肝膽欲裂。 當潔等之上疏, 臣乃 亦以疏掌議, (得參章甫之末, 故)其時曲折, (所能詳知,) 請陳一二言。 戊申以後, 賊子非一, 而兇慘悖惡, 莫甚於癸丑之謀亂, 反側陰慝, 莫甚於鄭蘊之護逆。 蓋蘊旣參罪㼁之請, 又上救㼁之疏, 張皇辭說, 無非罔極, 而其中謂: ‘殿下假手於麤悍武夫。’ 謂: ‘殿下無面目入先王之廟庭。’ 至以逆㼁比濟王。 爲殿下臣子者, 其忍耳聞而口言哉? 湖南妖賊宋興周, 卽毒澈餘孽, 踵蘊而起, 以斬沆宥蘊呈疏, 三司喪氣, 大臣噤口。 鄭潔、韓會等, 以鄭仁弘族姪, 來在泮宮, 擧義討賊。 文景虎身在嶺南, 徒聞誤傳, 不明理義, 以‘潔等請殺鄭蘊, 累及長者。’ 通文一鄕, 欲爲停擧, 而爲鄭仁弘所止, 不果焉。 其時李𢜫爲臺長, 劾景虎削去仕版, 鄭仁弘嘗以景虎本無背師之心, 而誤陷不測爲冤。 故其與李𢜫、朴榟書, 皆以不背老物爲言, 祭文、挽詩, 亦以抱冤之意及之耳。 大期本是邪媚無行之人, 往在賊奕之獄, 渠妾曾以妖尼還俗, 與英生同居, 而家庭之內, 誨淫播醜。 大期亦被(人議, 終有)逮囚(之事), 遂見棄於士類(久矣)。 渠乃附托緩論, 欲售憤恨。 及其景虎之死, 稱爲伸救之擧, 欺罔賢師, 誘脅鄕生, 自作通文, 其主意, 專在救蘊, 而將陷一鄕、一道於不測。 鄭仁弘 及見其通文, 然後始知爲大期所賣, 而大駭之, 門下之人, (凡有知識者,) 莫不憤罵。 (矣臣伏見)當初館儒閔潔等之疏曰:‘嶺南間不逞之輩, 以蘊之辱君爲直言, 以蘊之護逆爲盡節, 或謂之忠臣, 或謂之讜論, 至比於伯夷。’ 而館學儒生九十餘人, 奮義抗章, 極論賊蘊、興周無君不道之罪, 辭嚴義正, 感動天聽, 聖批丁寧, 以鳳鳴朝陽爲敎。 邪論不行, 國是自定, 而不料大期、景虎, 甘心背師, 附會邪議, 自爲得計, 乃以潔等, 目之以妄陳兇疏, 私自停擧云, 然則大期, 卽未死之景虎也。 大期旣與景虎, 同被館儒之斥絶, 則大期與景虎非二身, 而今乃祕其昔日蹤迹, 自若無罪者然, 只作救景虎之目, 而自主之, 其所以救景虎者, 乃所以救己也。 鄭潔之疏結語, 只以焚興周之疏, 定護逆之罪爲請, 而景虎、大期之通文, 皆以潔 疏請殺蘊, 爲之 潔罪案, 構捏無據, 熒惑一道, 其心叵測, 益可見矣。 賊蘊在囚時, 大期爲咸陽倅, 自製伸救之疏, 使丹城居李惟說爲疏頭。 及惟說至京不呈而歸, 則大期大怒, 乃使郡儒鄭沃等, 攻惟說不呈疏之罪, 又通文于道內, 其辭曰: ‘司直臣鄭蘊, 三代後遺直, 扶綱常、明是非云云。 閔瀞聞之, 上疏攻鄭沃等, 論以不兵之逆, 自上下其疏於大臣, 而收議大臣。 鄭仁弘爲左相, 適在都下, 其議曰: ‘君父之外, 更有何綱常; 朝廷之外, 亦有何是非? 請拿問狀頭人’云云。 又以爲: ‘守土之官, 如此護逆輩, 不可不治’, (峻責於大期云,) 然則大期之爲惡至此, 而仁弘之嫉惡討逆, 又如此矣, 大期欲掩景虎之罪過, 至欲立祠而祭之, 比之於古之鄕先生。 景虎有何嘉言善行之足尙, 而亦立淫祠, 爲斯文之僇辱乎? 其不畏公論, 恣行己議, 吁亦甚矣。 大期心術奸慝, 反謂: ‘今此通文, 亦告於師長爲之。’ 且其通文曰: ‘蘊雖有罪, 先生其有欲殺之心者乎?’ 又曰: ‘先生之不欲殺蘊, 國人所知。’ 又曰: ‘先生孫與姪, 曁若干門徒, 相與齊憤, 有此擧措。’ 是則尤不近似。 仁弘當賊蘊被罪之日, 上一箚, 有: ‘鄭蘊多有不道之說。 若爲㼁盡節, 蘊之罪萬死無惜’等語, 此果有救蘊之心乎? 近日仁弘之孫稜答人書曰: ‘今此大期通文, 措語無理, 涉於救蘊, 大父果知如此, 豈可任其所爲而不之禁乎?’ 此果仁弘與知於通文之措語, 而孫與姪相與齊憤者乎? 大期之背君父、背師長、欺鄕里、欺一道、欺國人之罪, 至此而尤極矣。 大期旣脫畜尼朋淫之罪, 又續興周護逆之論, 略無顧忌, 益肆兇臆。 (若於囹圄囚繫之時, 克正穢亂彝常之律, 則豈作今日之怪鬼, 得起復之兇計乎?) 噫! 大義不明, 王法不行, 全恩之說, 作俑於前, 中緩之論, 孽牙於後, 奸魁爲其領袖, 群小爲其羽翼, 內外相應, 形影相隨, 爲逆㼁而右袒, 爲賊蘊而立幟。 今此通文, 有同傳檄, 都下樂禍之輩, 彈冠相慶, 四裔怨上之徒, 側耳喜聞, 機栝將發, 爻象正慘。 豈知聖明臨御, 國是已定, 狗鼠微物, 乃敢跳踉潛謀稔惡, 一至於此乎? 臣忝在言地, 厚被詬辱, (不可苟冒)。 請命罷斥臣職。答曰: "勿辭。 退待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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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鄭沃)
[진사] 광해군(光海君) 2년(1610) 경술(庚戌)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8위(48/100)
[인물요약]
| UCI | G002+AKS-KHF_12C815C625FFFFB1561X0 |
| 자(字) | 여계(汝啓) |
| 생년 | 신유(辛酉) 1561년 (명종 16) |
| 합격연령 | 50세 |
| 본인본관 | 서산(瑞山) |
| 거주지 | 함양(咸陽) |
[관련정보]
[이력사항]
| 선발인원 |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
| 전력 | 유학(幼學) |
| 부모구존 | 영감하(永感下)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심언(鄭審言)
증직 : 증통정대부 호조참의(贈通政大夫戶曹參議)
[출전]
『만력38년경술윤3월초6일식년사마방목(萬曆三十八年庚戌閏三月初六日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1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