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 (Blessings on the poor in Spirit !)
한주간 편안하셨습니까 어제는 하루종일 폭우가 내려 퇴근길에 보통 한시간이면 집으로 갈 수 있는 길을 2시간이 넘게 걸려 겨우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길 가에는 침수된 차량이 즐비하고 차량으로 그리고 물이 넘쳐 빙빙돌아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혹 가정에 침수피해는 없으신지요. 오늘은 니고데모와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그리고 복을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멋진 집과 좋은 차를 가지게 되면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요 하지만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에 ‘아멘’입니다. 그분은 성전에만 계신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내재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를 흙으로 빚으시고 그분의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우리의 마음도 흙으로 지은 우리의 몸도 영적입니다.
본문말씀 : 누가복음10:38-42 (하나님나라 신약성경)
그들이 여행하는 중에 예수님께서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다. 거기서 마르다라는 여성이 예수님이 맞이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가르침을 들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온갖 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르다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와 말했다. “주여 제 동생이 저 혼자 모든 일을 하게 하는데도 아무렇지 않으십니까? 제 동생에게 저를 거들라고 말씀해 주세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너무 많은 일로 노심초사 호들갑을 떠는구나.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제일 좋은 부분을 선택했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말씀선포 : 믿음 : 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 (Blessings on the poor in Spirit !)
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 에수님이 말씀하셨던 팔복의 첫마디입니다. 이 말에는 영적인 실재를 인정하며 영적 현실이 모든 인생에 중요함에 대한 예수님의 강조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서 ‘영’이라는 말 자체는 매우 힘이 없는 공허한 단어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영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허무맹랑하다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영적인 일을 허튼 소리로 여기는 사람들은 허상이 가미된 신화로 여기며 허심을 걷어내고 그 안에서 참된 인간 실존의 의미만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문학 열풍이 적절한 예시입니다. 영적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은 모든 행사나 상황속에서 그저 자신의 재미를 충족하는 데만 열중합니다. 할로윈에 열광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에 대한 확실한 예시입니다.
많은 어른과 어린이가 할로인데이라고 해서 분장을 하고 사탕을 나누어 먹고 재미있게 노는 것으로 축제로 하루를 보냅니다.
안좋은 존재로 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영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이고 덫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영적인 것이 허무맹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은 영적 현실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지만 어느 시대에 살던 성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적 존재의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인정이 자신이 하나님 자녀됨으로서 가지는 행복한 인생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때부터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백성은 일관되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산 존재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며 영적 현실을 모든 사람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유대인들은 에스겔서 37장을 통해서 사람을 참으로 산 존재가 되게 하셨던 하나님의 생기, 즉 그분의 영이 다시 사람들에게 귀환하심으로써 자신들을 참된 실재를 가진 존재로 회복하실 것을 알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고대 유대인들은 성령 하나님이 다시 그분의 백성에게로 돌아오시는 것을 건물 성전에 귀환하심으로서 그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다시 제대로 산 존재로 만드신다 생각했었습니다. 이 배경으로 인하여 고대 유대인들은 초대 교회가 야웨의 영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신앙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임하셔서 이제 그들이 걸어다니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증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 세력을 꺽으시고 참된 복된 존재로 살아간다는 개념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을 받을 것인가 받았다면 왜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인가 이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내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에서 멀리가 있는 모습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여기에서 니고데모와 죽었다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와 마르다가 소개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인물로 니고데모를 교회에 소개했습니다.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사람이 한번 태어나고 죽으면 끝인데, 어찌 다시 여성의 태중을 통해 태어날 수 있나고 질문한 것은 윤회라는 식의 개념이 전혀 없었던 하나님 백성으로서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직접 사람에게 임재하여 그를 성전되게 하실 것이라는 에스겔서37장의 말씀을 예루살렘 건물 성전과 관련해서 우회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유대인이었기에 니고데모는 더욱 하나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결국 예수님 시신을 챙길 정도로 예수님을 참되게 믿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으로서 동족이 돌파하지 못한 성령님이 사람에게 직접 임하신다는 영적현실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한밤중에 찾아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자신이 하나님 백성이 되길 바라는 진정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영적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했으며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참 살아있는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누가 복음서는 니고데모와 같이 영적 현실을 진지하게 대하며 참된 하나님 자녀가 되었던 한 여성을 소개합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그녀가 함께 사는 오빠 나사로의 집에 방문했을 때 예수님의 남성 제자들과 함께 그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고대 유대교에서 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 문화권 안에서 로마 제국보다는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것이 비 차별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사는 랍비문화에서 어느 누구도 여성을 말씀을 가르치는 스승이나 배우는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여성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식의 말도 랍비 문헌 안에 있었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몸에 있는 갈비뼈를 통해 창조되었기에 영적으로 보기 힘들다는 편견이 몇몇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다른 남성 제자들과 한 방에서 예수님 말씀을 듣는다는 자체가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마르다가 직접 예수님께 와서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겠습니까? 마르다가 예수님 일행의 식사를 준비함에 있어 바쁜 것도 있었겠지만 여동생이 유대인 사회에서 흠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기에 예수님께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마음을 잘 이해하셨고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자신의 일행을 환대하느랴 바쁜 것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가 영적 현실을 진지하게 대하며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듣는 그녀의 욕망을 진지하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여성도 충분히 영적 존재임을 인정하셨고 참된 영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바라는 마리아의 열심을 칭찬하셨습니다.
니고데모나 마리아처럼 오늘도 영적 현실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삼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영이 가난한 그들은 이미 복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영 즉 마음을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영적인 존재인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큰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그것이 행복한 순간이고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복된 존재가 아니라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신이 영적존재라는 것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에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기고 무의식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나 마리아처럼 오늘도 영적 현실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우리 모두를 삼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영이 가난한 우리들은 이미 복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