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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周賢주현 兪玉姫유옥희 MSTR회원님 提供제공.
- #노천명 동영상 및 채널 100개 미만 https://www.youtube.com/hashtag/노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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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월의 노래 盧天命(노천명, 1911~1957) |
보리는 그 윤기 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숲 사이 철쭉이 이제 가슴을 열었다. 아름다운 전설을 찾아 사슴은 화려한 고독을 씹으며 불로초 같은 午時(오시)의 생각을 오늘도 달린다. 부르다 목은 쉬어 산에 메아리만 하는 이름······. 더불어 꽃길을 걸을 날은 언제뇨. 하늘은 푸르러서 더 넓고, 마지막 장미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라. 그리고, 폭풍이 불어 다오. 이 오월의 한낮을 그냥 갈 수는 없어라. |
- 5월의노래-노천명 https://www.youtube.com/watch?v=qf1ifMUBWKc |
- 노천명 시 ‘오월의 노래’ - 고독한 사슴의 오월 / 격동의 시대를 아프고 고독하게 살다 간 시인 노천명 / 시 낭송, 감상[힐링 문학, 사는 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PHTyQra031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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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푸른 오월 盧天命(노천명, 1911~1957) |
청자(靑瓷) 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머루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에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
- [시낭송]푸른 오월#노천명#오월의시(낭송:봉경미/음악:손방원팬플룻)오월 https://www.youtube.com/watch?v=-BQeonszBpY&t=1s |
- 푸른 오월 / 노천명 ( #낭송_정혜정 ) https://www.youtube.com/watch?v=JFejRSmj4b4 |
- [윤아의 시테라피] 76회. 푸른 오월- 노천명 시| 낭송 김윤아 Poetry Therapy by Rosa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BoJeb4u9X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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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슴의 노래 盧天命(노천명, 1911~1957) |
하늘에 불이 났다 하늘에 불이 났다 도무지 나는 울 수 없고 사자같이 사나울 수도 없고 고운 생각으로 진여 씹을 것은 더 못 되고 희랍적인 내 별을 거느리고 오직 죽음처럼 처참하다 가슴에 꽂았던 장미를 뜯어버리는 슬픔이 커 喪章같이 처량한 나를 차라리 아는 이들을 떠나 사슴처럼 뛰어다녀보다 고독이 城처럼 나를 두르고 캄캄한 어둠이 어서 밀려오고 달도 없어주 눈이 나려라 비도 퍼부어라 가슴의 장미를 뜯어버리는 날은 슬퍼 좋다 하늘에 불이 났다 하늘에 불이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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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 가슴에 장미를 盧天命(노천명, 1911~1957) |
더불어 누구와 얘기할 것인가 거리에서 나는 사슴모양 어색하다 나더러 어떻게 노래를 하라느냐 시인은 카나리아가 아니다 제멋대로 내버려두어다오 노래를 잊어버렸다고 할 것이냐 밤이면 우는 나는 두견! 내 가슴속에도 들장미를 피워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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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미 盧天命(노천명, 1911~1957) |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 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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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을 쳐다보며 -노천명 –한국서정시100선 093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wKtpM9UIEc4 |
- [시낭송]추풍에 부치는 노래/노천명(낭송:봉경미)가을시, 추풍,청춘,애송시,명시,유명시,사색,인생,황혼,ASMR https://www.youtube.com/watch?v=cviZRgMHdD0 |
- 추풍에 부치는 노래 / 노천명 | 유천 홍성례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nrw-ll5TT2A |
- 추풍에 부치는 노래-노천명 https://www.youtube.com/watch?v=SWptQy8aOfM |
- [시낭송] 고향 - 노천명 [맹기호 시인] https://www.youtube.com/watch?v=3Y_wWBY3u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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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시인 노천명(盧天命) 인명 (1912.9.2∼1957.12.10) |
복사https://blog.naver.com/kwank99/30020461671 |
여류시인. 아명 기선(基善). 황해도 장연(長淵) 생. 계일(啓一)의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20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이주, 진명여고보,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과 졸업(1934년). 재학 중인 1932년 [신동아]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 같은 해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를 시작으로 [조선일보] [매일신보] 기자를 지냈고, 1935년 [시원(詩苑)] 창간호에 시 <내 청춘의 배는>를 발표, 이후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1938년 [극예술연구회]에 가입, 출연하기도 하였으나,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적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어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 해방 후 [서울신문] [부녀신문]에 근무, 6ㆍ25 전쟁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서울에 남아 있다가 [문학가동맹]에 협조, 부역 혐의 죄목으로 투옥되었다가 1951년 봄 석방운동으로 출옥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때인 32년에 시 <밤의 찬미(讚美)> <포구(浦口)의 밤> 등을 발표하였고, 그 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望鄕)>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남치마, 흰 저고리를 즐겨 입고 골동 취미도 있어 고전적 미를 추구하며 산 시인이었다. 1951년 4월 가톨릭 영세를 받고 독신으로 일생을 보냈다. <이화70년사> 집필로 쇠약해져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뇌빈혈로 사망하였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사슴의 시인’으로 애칭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가톨릭 묘역에 묘지와 문학비.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직지문화공원과 경남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죽전근린공원에 <사슴시비>가, 전남 진도군 임해면 남성리 동령개공원에 <져버릴 수 없어 시비>가 세워졌다. |
【작품세계】 그는 여성적이면서도 지적인 시풍으로 생의 고뇌와 현실의 차가움을 주로 노래하였다. 감상을 절제한 이지적인 시인으로 모윤숙과 더불어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 여류시인이다. 초기 시는 넘치는 감상(感傷)을 절제한, 애수적이면서도 청순한 정서와 예리한 감각에 빛나는 영롱한 서정시로 일관되어 있다. 이것은 곧 우리 시사(詩史) 위에 던져진, 여성으로선 쓰기 힘든, 그러나 여성이 아니면 못 쓸, 최초의 ‘여성의 시’를 쓰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기 시엔 초기에 비해 한결 부드럽고 소박한 회구적(懷舊的) 정서로 기울어진 면도 엿보이나, 그의 대쪽같은 기질과 고독벽은 현실에의 적응을 몰랐고, 섬세하고 연약한 영혼은 현실을 버티어 낼 기력과 여유를 지니지 못했다. 후기 시에선 현실의 냉시(冷視), 옥중(獄中)의 고뇌, 인정의 번민을 노래하여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울렸으나, 임종 직전에 가톨릭으로 귀의해 비로소 따뜻한 사랑과 종교적 참회의 경지에 도달했다. 옥돌같이 차던 그의 시에 따뜻한 사랑의 입김이 서리기 시작할 무렵, ‘천명’(天命)은 갔다. 노천명(盧天命)은 1913년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태어나 이화여전(梨花女專) 재학시절부터 시작을 발표했다. 졸업 후는 중앙일보와 여성잡지의 기자를 지내면서 [시원(詩苑)]의 동인으로 모윤숙과 더불어 시단에 나와 1930년대 규수시인(閨秀詩人)의 쌍벽을 이루었다. 노천명의 꿈의 절제는 작품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일치된 생애의 길이기도 했다. 끝까지 현실과 운명에 타협하지 않고 결혼(結婚)마저 물리친 채 고독(孤獨)과 자학(自虐)의 길 위에서 오직 시작(詩作)에만 전념했다. 이러한 절망감과 상실감이 암담한 상황을 노래하면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가 민족적인 반항으로 시적 정황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늘진 사명감이란 패러독스가 있다. 1945년 제2시집 <창변(窓邊)>을 냈는데, 여기서는 초기의 여성적인 예리한 감각과 정순(貞純)한 면이 한결 부드럽고 소박한 회구적(懷舊的) 정서로 기울어진 면이 엿보인다. 그의 서정적인 방황은 그 하나만의 미로(迷路)가 아니라 그 당시 우리 겨레의 민족적인 방황을 의미한다. |
<사슴> 노천명(盧天命)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민족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제3시집 <노천명시집>(1949)에 이어 제4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 제5시집 <사슴의 노래>(1958.유고시집)이 나왔다. 여기서는 서정과ㅓ 자학이 교차되면서 현실을 냉시하고 옥중의 고뇌, 인정의 연민을 살필 수 있다.
작품 <사슴>은 이러한 고의 심상을 거울에 비치듯 담아놓고 있어 차디찬 그의 시에 따뜻한 사랑의 그림자가 고요히 깃들어 있다.
모윤숙과 함께 당시로서는 몇 안 되는 여류 시인의 한 사람이었고 점차 명시인으로 부각받게 된다. 그의 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자기중심적인 정서 특히 고독에 대한 심도 있는 표현. 둘째, 시인 자신의 농촌 생활로부터 그려낸 향토적인 정경의 객관적 묘사. 셋째, 역사적 국가적 인식의 반영이 바로 그것이다.
<사슴>, <자화상> 같은 그의 대다수 걸작에서 자유분방한 정서의 면모를 첫 번째 특징의 본보기로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창조성은 고독이나 슬픔의 단순한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그러한 감정 표현을 통하여 더욱 더 심오한 자신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우수적인 시인은 실존론적 뿐만 아니라 본체론적 의미도 묘사하였다.
농촌생활에서 나온 그의 시는 주목할 만하다. 전통 문화와 민속에서 일궈낸 이러한 작품은 대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의 향수를 결합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학교 교과서에 게재된 "장날"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어려웠던 농촌 시절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나이 또래 한국인들은 대부분 전원생활을 겪었기에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친숙할 뿐만 아니라 공감하기에도 쉽다. 지금도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향수는 널리 호감을 사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는 판이하지만 일제 말 그의 활동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면이다. 그는 친일 신문인 매일신보 기자로 일하였다. 또 공식적인 일본 대표단 자격으로 일본군 점령하에 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하였다. 더욱이 일본의 점령을 찬양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표방하는 수많은 친일 시를 출간하였다. 해방 이후 매국노로 낙인찍혔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 머무르던 그는 [조선문학예술동맹]에 참여하였다. 후에 체포되어 이적죄(利敵罪)로 2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여러 시인들의 노력으로 6개월 후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국가적 인식은 이러한 경험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고 다소 인위적인 경향이 보인다. 이러한 시는 그가 생존해 있을 때 발표되었고 이전의 작품과는 상당한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일본에 협조하게 된 경위와 감옥 생활을 시로 썼다. 또 공산주의자와 함께 이적죄로 체포되었고 옥중 생활을 하였으므로 반공, 애국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노천명의 초기 시는 영롱한 서정시로서 예리한 감각과 청순한 정서로, 애수적이면서도 넘치는 감상을 절제(節制)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시사(詩史) 위에 여성이 아니면 못 쓸 여성의 시를 최초로 기여한 시인이다.
그의 중기 시는 초기의 것에 비하여 한결 부드럽고 소박한 희구적(希求的) 정서로 기울어진 면도 엿보이나, 그의 생태적(生態的)인 단순한 성격과 고독벽(孤獨癖)은 현시에의 적응을 몰랐고, 현실을 버티어낼 마음의 여유를 지니지 못하였다. 그의 시의 바탕인 꿈의 절제는 곧 그대로 그의 생애의 길이기도 하였으니, 결혼조차 물리친 채 고독과 자학(自虐)의 길 위에서 오로지 시작(詩作)에 정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이 빚어낸 불행한 운명은 그 후기 작품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현실의 냉시(冷視), 옥중(獄中)의 고뇌, 인정의 연민을 노래하여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울리었다. 그가 비로소 따스한 사랑과 종교적 참회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죽음의 직전에서였다. 그는 병석에 눕기 전에 카톨릭에 귀의하였던 것이다. 옥돌 같이 차던 그의 시에 따뜻한 사랑의 입김이 어리기 시작할 무렵에 그는 간 것이다. 그의 시의 이러한 변천은 그의 시집을 차례로 읽으면 쉽사리 느낄 수 있다.
1940년대 암흑기 직전의 문학은 [문장]과 [인문평론] 두 문예지의 활동으로 집약시킬 수 있다. [인문평론]은 평론가 최재서(崔載瑞)의 주재로 1939년 7월에 창간되어 1941년 4월까지 발행되다가 폐간되었으며, 1941년 11월부터 [국민문학]으로 간행되어 친일문학(親日文學)의 선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노천명은 이러한 [인문평론]의 이론가 최재서의 이론을 시로써 실현시키려 한 시인으로서 평가되는 독특한 시인이다.
노천명은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며, 1917년 5세 때 홍역으로 사경(死境)을 넘겼다 하여 본명인 기선(基善)을 천명(天命)으로 고친 채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남장(男裝)으로 자랐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이화여전 영문과를 1934년 졸업하여 조선중앙일보 학에부 기자로 근무했다. 1938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해서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 해 1월에는 처녀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출간했으며, 여기에 그의 대표작 <사슴>이 실려있다. 1945년 2월 제2시집 <창변(窓邊)>을 간행했고, <남사당(男寺堂)>, <춘향> <푸른 5월> 등을 싣고 있다. 부산 중앙성당에서 가톨릭에 입교했다.
1953년 제3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간행하며 옥중시(獄中詩) 20여 편을 수록했다. 1956년 <이화 70년사>를 편찬한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57년 3월 뇌빈혈로 입원했다가 6월 6월 사망했다. 그 후 유시집(遺詩集) <사슴의 노래>(1958) <노천명전집>(1960) <노천명 시집>(1972),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1973) 등이 계속하여 간행되었다.
그의 세 개의 시집은 그의 전기적 사실과 대응되고 있다.
제1시집 <산호림>이 그의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의 한 표현이라면, 제2 시집 <창변>은 연애사건 및 친일문학 행위와 관련된다. 제3 시집 <별을 쳐다보며>는 6ㆍ25로 인한 비도강파(非渡江派) 문인의 부역사건(附逆事件)의 실형과 연결되고 있다. 제3 시집이 자조(自嘲)와 항변(抗辯)의 설익음으로 차 있으므로 논외로 친다면, 제1, 제2 시집은 [인문평론]의 변질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최재서의 모더니즘은 조이스의 심리주의적 수법에로 귀결되는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다. 그것은 유토피아에의 신념이 아니라 서구문명의 몰락에의 공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근대 부정의 태도는 천황제 중심의 신화적 세계관과 반근대의 감각적 표상에의 함몰 중의 한 선택으로 연결된다. 노천명은 바로 이러한 반근대의 한 표상으로서 풍물을 사상으로서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재서의 감정 배제의 이론과 연결되는 것은 노천명의 절제(節制)에 의해서이다. 즉 ‘흔히 보는 공소(空疎)한 감정의 유희(遊戱)와 허영(虛榮)된 언어의 과장(誇張)은 발견할 수 없다’는 최재서의 찬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노천명이 매개어로서 순수한 시골의 것을 택한 것, 즉 장미와 산나물의 대응은 서양문학을 아는 멋쟁이 식민지 인텔리 여성의 장식적 화려함과 이에 대한 강한 허영심과 식민지의 가장 전근대적 한국 풍물의 대비로서 그녀의 시의 한 방법적 트릭이 될 뿐이라는 것, 즉 모더니티 혹은 박애적 사상이나 이미지를 한층 생생히 한 것이란 것을 최재서는 간과하고 있다.
모던 여성이 시골 풍물을 들추는 행위는 하나의 멋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은 고독 속에서 형서오딘 것이기에 단순한 멋에 머물지 않는다. 유년시절의 공포의 하나였던 남장(男裝)의 강요가 인간보다 풍물에 향수를 집중하게 했고, 이 내성화의 고독이 분노를 동반한다. 즉 분노를 동반한 고독이 강요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천명의 고독은 향수에로 치닫고 있었다. ‘아버지가 손수 심으신 아라사버들이 개울가에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서 있고’에서 그의 향수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절제된 언어는 방법론의 자각에서 온 집착이 아니었고 기질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을 한 평론가는 ‘수필적발상의 시’이며 ‘평범한 감수성’의 시에 불과하다고 평한 것이며, 예술의 근본적인 의도성이 몰각된 것으로서 최재서의 기대와는 부응하지 않는다.
- 김윤식 : <한국현대문학명작사전>(일지사.1982) -
【연보】
▶1912년 황해도 장연 출생
▶1926년 진명보통학교 졸업
▶1930년 진명 여고보 졸업
▶1932년 이화여전 재학 중 <밤의 찬미> <단상> 등을 [신동아]에 발표, 등단.
▶1934년 이화 여자 전문학교 영문과 졸업.
▶1934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
▶1935년 [시원] 동인. 창간호에 시 <내 청춘의 배는> 발표.
▶1938년 조선일보 출판부 [여성]지 편집
▶1938년 [극예술연구회] 참가
▶1941년 대동아전쟁 찬양하는 친일적 작품 발표(∼1944)
▶1943년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
▶1946년 서울신문 문화부 근무
▶1946년 [부녀신문사] 편집차장
▶1950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관여한 혐의로 9ㆍ28 수복 후 투옥
▶1951년 출감
▶1951년 가톨릭 영세
▶1951년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 촉탁
▶1955년 서라벌 예술대학 출강. 이화 여자 대학교 출판부 근무
▶1956년 <이화 70년사> 집필.
▶1957년 12월 10일 뇌빈혈로 사망
【시】<밤의 찬미(讚美)>(신동아.1932.6) <단상(斷想)>(신동아.1932.7) <포구의 밤>(신동아.1932.10) <제석(除夕)>(신가정.1934.2) <내 청춘의 배는>(시원.1935.2) <단상(斷想)>(조선문단.1935.5) <청동 화로가에>(삼천리.1936.1) <호외(號外)>(조광.1936.9) <낯선 거리>(조광.1937.6) <황마차(幌馬車), 슬픈 그림>(삼천리문학.1938.1) <사슴>(시집 ‘산호림’.1938) <사슴처럼>(인문평론.1940.1) <춘분(春分)>(인문평론.1940.4) <망향(望鄕)>(인문평론.1940.6) <남사당(南寺黨)>(삼천리.1940.9) <겨울밤 이야기>(조광.1941.3) <강변>(신세기.1941.6) <하일산중(夏日山中)>(춘추.1941.7) <정(靜)의 소식>(삼천리.1941.7) <저녁별>(삼천리.1941.9) <산사(山寺)의 밤>(삼천리.1941.11) <노래하자 이날을>(춘추.1942.3) <향수(鄕愁)>(춘추.1942.8) <천인금십(千人金十)>(춘추.1944.10) <오월(五月)>(독립신문.1946.5) <약속된 날이 있거니>(백민.1946.10) <신년송(新年頌)>(婦人.1949.1) <적적(寂寂)한 거리>(신세기.1949.1) <유관순(柳寬順) 누나>(어린이나라.1949.3) <한매(寒梅)>(신여원.1949.3) <단상(斷想)>(新苑.1949.4) <검정나비>(문예.1950.1) <달빛>(문학.1950.6) <불덩어리 되어>(자유예술.1952.11) <유월(六月)>(소년세계.1953.6) <둘씩 둘씩>(학원.1953.8) <삼월의 노래>(소년세계.1954.3) <경례를 보내노라>(학원.1954.5) <감추어 놓고>(현대공론.1954.6) <새벽>(새벽.1955.1) <어머니>(사상계.1955.2) <여원부(女苑賦)>(여원.1955.10) <해변>(전망.1955.11) <네 가슴에 꽃을 피워라>(학원.1956.1) <독백>(사상계.1956.2) <오월의 노래>(여원.1956.5) <가난한 사람들>(사상계.1957.5) <나에게 레몬을>(자유문학.1957.7) <자화상>(자유문학.1957.8) <사슴>(자유문학.1957.8) <고별(告別)>(자유문학.1957.8) <흰 오후>(여원.1962.2) <장미>(자유문학.1963.6) <사슴>(자유문학.1967.12)
【소설】<닭 쫓던 개>(신동아.1932.8) <결혼전후(結婚前後)>(중앙.1934.12) <하숙>(신가정.1935.10) <사월이>(여성.1937.6∼7.중편) <우장(雨葬)>(여성.1940.4)
【수필】<일편단심(一片丹心)>(이화 3.1931) <신록(新綠)>(신동아.1932.6) <꼭 다문 입술과 괴로움>(삼천리.1936.6) <야자수 그늘과 청춘의 휴식>(삼천리.1938.5) <어머님전 상서>(여성.1938.7) <눈오는 밤>(박문.1939.2) <선경(仙境) 묘향산>(삼천리.1940.7) <강변>(신세기.1941.6) <아스파라커스의 조난>(춘추.1941.6) <남행>(백민.1947.5) <집 이야기>(민성.1947.11) <진달래>(민성.1949.6) <여인소극장>(신천지.1949.7) <수상(隨想)>(신천지.1949.9) <서울에 와서>(문예.1953.10) <오월의 구상(構想)>(신천지.1954.5) <노변야화(路邊夜話)>(새벽.1956.1) <나비>(자유문학.1957.8) <최정희씨에게>(사상계.1963.6) <나의 30대>(여원.1967.11)
【평론】<익명비평(匿名批評)의 유행에 대하야>(조선중앙일보.1935.10.16) <인간 박종화(朴鍾和)>(문예.1949.9) <최정희론>(주간서울.1949.12) <김상용평전>(자유문학.1956.7) <시의 소재에 대하여>(한국일보.1956.12)
【시집】<산호림(珊瑚林)>(자가본.1938) <창변(窓邊)>(매일신보사출판부.1945) <노천명 시집>(동지사.1949.제3시집) <현대시집>(공저.정음사.1950) <별을 쳐다보며>(희망출판사.1953) <사슴의 노래>(한림사.1958.유고시집) <노천명전집(시편)>(천명사.1960) <산호림>(천명사.1961) <꽃길을 걸어서>(전위문학사.1967) <노천명시집>(서문당.1972)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은>(지문당.1981) <사슴과 별과 고독과>(마당.1983) <사슴의 노래>(태성출판사.1984) <꽃사슴>(춘추각.1984) <별을 쳐다보며>(혜원출판사.1985) <슬픈 사슴의 노래>(헤원출판사.1985) <아름다운 새벽을>(융성출판사.1986)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문학과비평사.1989) <가을은 깨끗한 새악시처럼>(열음사.1989) <지금은 홀로 있게 하소서>(열음사.1989) <사슴>(미래사.1991) <사슴>(상아.1995) <사슴>(솔.1997) <나비>(솔.1997) <사슴>(미래사.2002)
【수필집】<집 이야기>(민성.1947.11) <산딸기>(정음사.1948)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대조사.1954) <겨울밤>(서문당.1972) <노천명수필집>(서문당.1972) <사슴과 고독의 대화>(서문당.1973) <꽃길을 걸어서>(전위문화사.1978) <노천명(盧天命)의 시와 수필>(글방문고.1986) <아름다운 새벽을>(융성출판사.1986)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한국해일출판사.1990) <나비>(자유문학사.1997)
【전집】<노천명 전집>(천명사.1960)
【저서】<여성 서간문 독본>(박문출판사.1949), <이화70년사>(이화여대출판부.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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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사슴의 여인 노천명
【타협을 몰라서 더욱 고독했던 여인】
노천명의 원래 이름은 기선(基善)이었다. 그러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자 그의 부모님은 하늘이 준 목숨이라는 뜻의 ‘天命’이란 이름을 다시 지어 주었다.
자연과 벗하여 살던 이 어린 시절, 부모의 따스한 사랑 속에서 보낸 이 시절이야말로 노천명에겐 평생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천명은 자존심이 강하고, 결벽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결코 세상과 타협하며 살지 못하는 자신을 높은 족속, 외로운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데가 있다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가한다 대처럼 꺾어는질지언정 구리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 <자화상>에서 -
【그리움을 숨쉬며 살다간 여인】
노천명에게도 뜨거운 첫사랑이 있었다. 천명이 조선일보 편집부에서 [여성]지 편집일을 하던 중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하는 안톤 체홉의 <앵화원>이란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었을 때 연극 관람을 왔던 보성전문 경제학 교수 김광진이란 사람이 바로 천명과 사랑을 나눈 첫사람이었다.
김광진은 아내가 있는 몸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래 그런지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원래 자존심 강하고, 고독 속에서 살던 사람이 더욱 고독과 친해진 것이다. 그의 시를 보면 곳곳에서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시집 <창변>에는 고독의 감정과 함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담은 시들이 많이 담겨있다.
서리 내린
지붕 지붕엔 밤이 안고
그 안엔 꽃다운 꿈이 뒹굴고
뉘집인가 창이 불빛을 한 입 물었다.
- <창변>에서 -
【그러나 현실을 초극하지 못했던 여인, 노천명의 친일 활동】
노천명은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기관으로 1942년 1월에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朝鮮臨戰報國團 婦人隊)]에서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직(幹事職)을 맡았으며, [조선문인보국회]에서 개최한 ‘해군을 찬(讚)하는 시 낭독회’(1943년 5월) 등에도 참가하면서 몇 편의 친일 작품을 남겼다.
일본군은 1942년 2월 15일, 말레이 반도 남단 싱가폴을 공략했는데,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일본 전역을 열광케 하면서 제1차 승전 축하회가 전국에서 개최되었는데, 그녀의 시 <싱가폴 함락>은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것이다.
‘부인대’라는 이름으로 군복 수리에 동원된 부인을 통해서 임전 태세의 확립과 애국의 지성(至誠)을 노래한 <부인 근로대>도 있으며, 김상용의 시와 마찬가지로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 주간(宣揚週間)에 발표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도 같은 맥락이다.
- [대중실화](1989. 1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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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여인 노천명
비운의 역사를 겪은 뒤 해방과 6ㆍ25를 겪으며 노천명은 민족의 수난 못지않게 개인적 고난을 겪어야 했다. 6ㆍ25가 일어났을 때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문학가 동맹에 나가야 했고 이 일로 9ㆍ28 수복 뒤에는 적에 부역했다 하여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동료 시인들의 석방 운동으로 다음해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지만, 자존심 강하고 고고했던 시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고초를 받는 것이냐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
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
새빨가니 뒤집어쓰고
감옥에까지 들어왔다.
어처구니없어라 이는 꿈일 게다
-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에서 -
이 시는 감옥 속에서 쓴 시다. 어찌 보면, 천명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일제하에서는 친일 운동을 했는가 하면, 해방 이후에는 또 인민군 치하에서 그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한 행동은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오점(汚點)이었다. 그래선지 천명은 더욱 자신의 운명을 고독으로 휘몰아갔는지도 모른다.
임종이 가까울 무렵, 천명은 결국 가톨릭에 귀의하여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을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된다. 그의 말기에 속하는 1953년 발표한 그의 제3시집에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시들이 많이 담겨 있다. 무슨 의미일까. 현실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간절한 소망 같은 것을 내세에서나마 이루고 싶어 했던 마음속의 고독한 ‘외침’은 아니었을까.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좋은 사람과 살고 싶다던 그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시들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에 지금도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 주고 있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 <이름 없는 여인 되어>에서 -
【외로움 속에 살다간 처녀】
노천명은 현실의 운명에 타협하지 못하고 결혼까지 물리친 채, 고독과 빈궁 속에서 일생을 마친 애처로운 시인이다.
초기에는 여류시인의 일반적 특징인 서정시를 쓰다가 후기에 카톨릭에 귀의하면서부터 독자적인 경지를 열어, 감상(感傷)을 억누르고 스스로의 불행을 초극하여 사랑과 종교적 참회를 그린 극기적(克己的)인 시를 썼다. 그의 사람됨과 시의 특징을 이헌구(李軒求)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게 외롭고 박행(薄幸)했던,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잠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미로,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하던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슬픔보다 더 화사(華奢)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꿈이 5월의 푸르름처럼 번지고 터지어 이 땅 위에 오래오래 빛나게 하는 시혼(詩魂)을 가졌던 여인이었습니다.
치렁치렁 삼단 같은 머리에 갑사댕기를 드리고, 칠보단장으로 고궁을 거니는 단아하고 청초한, 맑고 높은 한국 고유의 전형적 여성의 기품에, 사무치는 순수한 처녀로서의 서글픈 사랑에 황홀했던 한 여인을 보내는 이 자리입니다.”
- ‘고(故) 노천명 여사 추도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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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작품 목록>
1941. 7. 8 시국과 소하법(매일신보)
1942. 2. 3 나의 신생활계획(매일신보)
1942. 2. 19 싱가폴 함락(시)(매일신보)
1942. 2. 28 진혼가(시)(매일신보)
1942. 3. 4 부인근로대(시)(매일신보)
1942. 3 노래하자 이날을(시)(춘추)
1942. 3 전승의 날(시)(조광)
1942. 12. 8 흰 비둘기를 날려라(시)(매일신보)
1942. 12 만주문학대표 오여사에게(춘추)
1943. 3 직업여성과 취미(신시대)
1943. 6 여인연성(국민문학)
1943. 8. 5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시)(매일신보)
1943. 11. 10 출정하는 동생에게(매일신보)
[출처] 여류시인 노천명(盧天命)|작성자 틀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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