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집(玉川集) 조덕린(趙德鄰)생년1658년(효종 9)몰년1737년(영조 13)자택인(宅仁)호옥천(玉川), 창주(滄洲)본관한양(漢陽)특기사항권두경(權斗經), 이재(李栽) 등과 교유
玉川先生文集卷之八 / 記 / 養拙軒記
영조 | 1 | 1725 | 을사 | 雍正 | 3 | 68 | 수찬이 되다. 사직하면서 陳戒하다. ○ 5월, 필선에 제수되다. 이후 교리와 필선에 누차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가지 않다. ○ 10월, 사간이 되다. 安東에서 상소하여 明聖學, 修實德, 精選任, 正名實 등 10條를 진달하다. 당쟁의 폐해를 논하고 老論의 득세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인해 집권 노론 세력의 탄핵을 받아 仕版에서 삭제되고 鍾城에 定配되다. ○ 鍾城 配所에서 「周易」을 읽으며 지내다. |
영조 | 3 | 1727 | 정미 | 雍正 | 5 | 70 | 丁未換局으로 少論이 집권하자 풀려나, 7월에 집의에 제수되다. 돌아오는 길에 응교로, 다시 사간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사은한 뒤 즉시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다. ○ 9월, 교리가 되다. 이어서 수찬, 사간이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다. |
歲乙巳冬。余以罪責居鍾城府。是惟靺鞨舊地。其民羯羠不均。俗雜難理。國家選其守。峻其秩。往往自 經幄臺閣而出。時朴侯遠萬出牧玆土。已二年矣。與余少相識。離三十年而復見於此。白髮皤然。相對共憐之也。論道故舊。擧觴相屬。爲我掃舍宇。豐餼資以處之。往來無間。或屛騶徒。杖公門相就。約己裕民。如嗜好。敝裘羸馬。甘其俛陋。而不經於心。余嘗病其太簡。而心奇之。時口言或嘲之。則侯曰。我道蓋是也。抑余豈樂乎此哉。得爲而不爲。欲爲而不爲。非但才之疎。亦其性拙也。故以養拙。名吾軒而心安焉。子其爲我記之。余曰。拙者。人之所恥也。愚固泯泯。不能治一事者拙也。矇無見解。都不省記。不能處一身者。亦拙也。余以此。竊迹公之治邑矣。於民之利病。事之當否。至明也。慮之無遺策。行之不失先後。至纖悉也。政成而民安之。奏考而爲一道最。則孰謂侯拙也。然立朝三十年。而足不跡形勢之途。歷五邑而無田於野。無宅於都。可謂云爾乎。其視世之誇奇衒能。掩醜生姸者遠矣。孔子曰。巧言令色。鮮矣仁。又曰剛毅木訥。近仁。巧令拙之反。木訥似乎拙。聖人之所勸戒。可知已。濂溪作拙賦。揭之道院。朱夫子以拙名齋而爲之記。濂溪之爲政嚴恕。務盡道理。朱子之所至郡。擘畫廢置。毫分縷析。利及於民。而法施後世。然其自爲則修身養性。必以拙爲務。作賦作記。反復乎巧拙之勞佚。而以聞道拙修自勉。則侯之意其亦見於此耶。余晩居山中。其水曰拙川。若柳子之相得。而竊慕聖賢之意。勉學焉未至。一挂世網。踽踽於此。方齚舌之不暇。何能記公之軒耶。且侯將歸矣。歸無以爲家。得余文將安施乎。侯曰。身之著處卽家也。心之所存卽記也。何必施之屋壁㬥之外以爲夸耶。余歎曰。鳩不能爲巢。而其拙自若也。是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