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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수 12획 부수 疒(병질, 5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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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집 별집 제5권 / 경연일기(經筵日記) 을사년(1665, 현종4) 5월부터 무신년(1668, 현종9) 12월까지
6월 4일
《심경》의 ‘순우수수(舜禹授受)’부터 ‘사아천군(事我天君)’까지 진강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인심(人心)에는 생(生)을 말하고 도심(道心)에는 근(根)을 말하였는데, 이 두 글자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고 부양억음(扶陽抑陰)의 뜻도 있습니다. ‘반드시 정하게 살펴서 흑백을 분변하듯이 하라.〔察之必精 如卞白黑〕’라는 것은 학자들로 하여금 인심과 도심 두 가지 사이를 정밀하게 분변하게 하고자 한 말입니다. 인심을 도심으로 여기는 것은 비유하자면 철(鐵)을 은(銀)으로 부르고 도적을 자식으로 아는 것과 같은 유(類)입니다.”
하니, 성상이 이르기를,
“비유가 참으로 적절하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만약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가 없다면 끝내 성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계구(戒懼)’는 도심의 공부이고 ‘근독(謹獨)’은 인심의 공부이니, 문자는 비록 위아래에 호언(互言)하였으나 대체로 인심과 도심을 나누어 말한 것입니다. 옛사람의 궁실 제도(宮室制度)에서 서남쪽 모퉁이를 ‘오(奧)’라 하고, 동남쪽 모퉁이를 ‘돌(突)’이라 하며, 동북쪽 모퉁이를 ‘이(宧)’라 하고, 서북쪽 모퉁이를 ‘옥루(屋漏)’라 한 것은 일광(日光)이 새어 들어와 먼저 비추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옥루는 방의 깊숙한 곳이니 이 또한 근독의 뜻입니다. 옛날 채원정(蔡元定)의 말에 ‘혼자 잘 때에도 이불에 부끄러움이 없고, 혼자 걸을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깊숙한 구중궁궐에 거처하니 한적하게 홀로 있을 때에 하는 일을 외인(外人)들이 알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조금이라도 삼가지 않음이 있으면 그 증거가 일을 행하는 사이에 바로 드러나 은폐할 수 없으니, 이것이 《중용》의 이른바 ‘은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게 없고, 미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게 없다.〔莫見乎隱 莫顯乎微〕’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이미 드러났다.〔四端旣發〕’라는 것은 도심을 말하였고, ‘의와 필이 싹텄다.〔意必之萌〕’라는 것은 인심을 말한 것인데, 의(意)는 사의(私意)이고, 필(必)은 기필(期必)의 뜻입니다. 사의와 기필은 항상 사전(事前)에 있고, 고(固)와 아(我)는 항상 사후에 있는 것으로, 고는 굳게 지켜 점차 아에 이르는 것이고 아는 사사로움이니, 비유하자면 땅에 뿌린 오곡(五穀)의 씨앗이 흙을 뚫고 올라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편(篇)의 ‘계구’ 이하는 인심ㆍ도심을 아울러 말하였고, ‘유차도심(惟此道心)’ 이하는 인심ㆍ도심을 합쳐서 존심양성(存心養性)하는 공부를 말하였으나, 오로지 도심을 주(主)로 삼은 것입니다. 이목구비(耳目口鼻)를 천관(天官)이라 하고, 마음을 군(君)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대체로 이목구비는 각각 듣고 보고 먹고 냄새를 맡는 임무가 있기 때문에 ‘천관’이라 하고, 마음은 호령을 내어 이목구비를 부리기 때문에 ‘천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정무를 보시는 여가에 옛글을 열람하시어 성학(聖學)에 마음을 두신다면 성체(聖體)를 조양(調養)하는 데 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도움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주자의 잠(箴)에
북창 아래서 신음하노라니 / 呻吟北窓
마음 울적해 풀리지 않다가 / 氣鬱不降
내 일어나 내 글을 읽으니 / 我讀我書
병에서 깨어나는 듯하네 / 如病得穌
빈객이 이 글 속에 / 客問此書
어떤 맛이 있기에 / 中作何味
당신의 즐김이 / 君乃嗜之
이처럼 지극하냐고 묻기에 / 如此其至
그대에게 말하겠네 / 趣爲子語
맛이 없어 그런 것이지 / 無味乃然
이것이 맛이 있는 것이라면 / 是有味者
내 악취처럼 싫어했으리 / 乃㾞乃羶
라고 하였으니, 옛사람은 독서를 병을 치료하는 좋은 약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성상의 병환이 나아지고 계시니, 입시한 신하들이 감히 성상의 옥음(玉音)을 듣고 물러가고자 합니다만 혹시라도 조섭에 방해가 되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성상이 이르기를,
“큰 소리로 글을 읽으면 상기(上氣)되는 증상이 있으므로 읽을 수가 없다.”
하였다.
[주-D001] 호언(互言) : 같은 뜻을 가진 글자를 섞어 써서 글자의 중복을 피하는 수사법으로, 이를테면 도심이란 글자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대신 ‘계구’로 쓰고, 인심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근독’으로 쓴 따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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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定古今圖書集成經濟彙編考工典
第八十七卷目錄
齋部彙考
許慎說文〈齋〉
清齋位置〈序 坐几 坐具 椅榻屏架 懸畫 置罏 置缾 小室 臥室
亭榭 敞室 佛室〉
考槃餘事〈山齋 藥室 佛堂 茶寮〉
畿輔通志〈順天府 真定府 大名府〉
山東通志〈青州府〉
河南通志〈河南府〉
江南通志〈蘇州府 安慶府〉
江西通志〈饒州府 撫州府 瑞州府〉
湖廣通志〈長沙府〉
福建通志〈興化府 漳州府〉
廣東通志〈廣州府 惠州府〉
廣西通志〈桂林府〉
齋部藝文一
盧郎中齋居記 唐李華
畫舫齋記 宋歐陽修
東齋記 前人
君子齋記 王安石
遺老齋記 蘇轍
計過齋記 鄒浩
求仁齋記 楊時
反求齋記 謝逸
克齋記 朱熹
復齋記 前人
存齋記 前人
拙齋記 前人
牧齋記 前人
芸齋記 前人
敬齋箴 前人
志道齋銘 前人
據德齋銘 前人
依仁齋銘 前人
游藝齋銘 前人
至樂齋銘 前人
崇德齋銘 前人
廣業齋銘 前人
居仁齋銘 前人
由義齋銘 前人
學古齋銘 前人
尊德性齋銘 前人
敬恕齋銘 前人
求放心齋銘 前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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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집 제3권 / 시(詩)
세 칸 띳집을 짓고 그 한 칸을 서재로 삼아 ‘소’라고 편액을 붙였으니, 그것은 곧 주 부자께서 이른바 “내가 내 글을 읽으니 병든 몸이 소생하는 것 같다.”라고 한 말씀에 근본한 것이다〔營茅三間取一爲齋輒扁曰穌蓋本朱夫子所謂我讀我書如病得穌云爾〕
주자는 성인의 버금가는 분이었건만 / 朱子生知亞
열심히 스스로 글 읽기를 좋아했는데 / 區區自嗜書
노생은 타고난 자질이 몹시 낮아서 / 盧生天稟下
애써 읽어도 구슬은 다 돌려보내네 / 兀兀儘還珠
망녕되이 우뚝한 경지를 엿보고 싶지만 / 妄欲窺孤駕
누가 오거서를 다 독파할 수 있으랴 / 誰能盡五車
즐겨 노닐 때도 맘속에 놓지 않으니 / 游焉志不舍
다행히도 병든 몸이 소생된 것 같구려 / 幸耳病如穌
[주-D001] 내가 …… 같다 : 이 말은 《회암집(晦庵集)》 권85 〈지락재명(至樂齋銘)〉에 나온다. 다만 《회암집》에는 소(穌)가 소(甦)로 되어 있으나, 뜻은 같다.[주-D002] 애써 …… 돌려보내네 : 《한비자(韓非子)》 〈외저설 좌상(外儲說左上)〉에 “초나라 사람으로 정나라에 구슬을 파는 자가 있어, 목란의 궤를 만든 다음, 계수와 산초의 향을 입히고, 주옥을 엮어 장식하고, 붉은 옥으로 꾸미고, 비취의 깃을 엮어 장식하여 주었더니, 정나라 사람은 그 궤만 사 가고 그 구슬은 돌려주었다.[楚人有賣其珠於鄭者, 爲木蘭之櫃, 薰以桂椒, 綴以珠玉, 飾以玫瑰, 輯以羽翠, 鄭人買其櫝而還其珠.]”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세인(世人)들이 흔히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을 좇아 취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여기서는 저자 자신의 학문이 참되지 못하다는 겸사로 한 말이다.[주-D003] 오거서(五車書) : 다섯 수레에 쌓을 정도로 많은 서책을 말한다. 《장자(莊子)》 〈천하(天下)〉에 “혜시의 학문은 다방면이어서 그 서책이 다섯 수레에 쌓을 정도이다.[惠施多方, 其書五車.]”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수많은 서책이나 박식함을 뜻한다.[주-D004] 즐겨 …… 않으니 :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가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는,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며, 휴식할 때도 잊지를 않고, 즐겨 놀 때도 잊지를 않는다.[君子之於學也, 藏焉, 修焉, 息焉, 遊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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穌齋先生文集 / 穌齋先生年譜
명종 | 7 | 1552 | 임자 | 嘉靖 | 31 | 38 | 珍島의 유배지에서 草屋을 짓고 朱子의 ‘我讀我書如病得穌’라는 글을 인용하여 穌齋라 편액을 하다. |
三十一年壬子。先生三十八歲。在島。扁齋曰穌。有詩一首。題曰營茅三間。取一爲齋。輙扁曰穌。蓋本朱夫子所謂我讀我書。如病得穌云爾。日危坐。讀書其中。
1552(명종7) 38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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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의 〈지락재명(至樂齋銘)〉에서 “북창 아래에서 신음하면서, 기가 막혀 펴지지 않았는데. 내가 나의 책을 읽으니, 병에서 깨어나는 듯하네.[呻吟北窓, 氣鬱不舒. 我讀我書, 如病得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朱子全書 卷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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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집(石門集) 오이익(吳以翼)생년1618년(광해군 10)몰년1666년(현종 7)자자서(子舒)호석문거사(石門居士)본관나주(羅州)특기사항정홍명(鄭弘溟), 임위(林㙔), 최온(崔薀)의 문인. 정한(鄭漢), 고두강(高斗綱) 등과 교유
石門集卷之四 / 雜著 / 至樂堂記
物之悅人心者不一。而人之樂之之道不同。夫僚之於丸。秋之於奕。師曠之於聲音。離朱之於采色。易牙之於滋味。樂而不厭。載之末年。後世無二焉。此皆其盛者也。然丸也奕也聲音也采色也滋味也。或樂於手。或樂於耳。或樂於目。或樂於口。皆所謂外而非內也。是未得爲眞樂也。
昔晦庵朱先生爲葉學古。作至樂堂銘。盛稱讀書之樂。而其歸以講學修己爲要。此則樂之在於內者也。若然者方可謂之眞樂矣。余賦性迂拙。於物無所嗜。端居屛處。無以自樂。日取古人書。讀而玩之。當其靜室棐几。對案咿唔。沉潛乎義理。反覆乎趣味。尋墜緖於茫茫。理餘韻於旣絶。日勉勉而不怠。其於理有得有不得者。而吾之樂之也無竆。非丸非奕非聲音非采色非滋味。而其所以悅我之心者。若張樂咸池之會而觀鳥獸之蹌蹌。若揭豐蔀出無垠而覩白日之淸明。休休乎得得乎。不知天地之間何樂可以代此也。余於石門洞。旣作精舍。以爲讀書藏脩之所而扁以至樂。又書晦庵壁所爲銘于壁上。將以日觀而益樂焉。余於是又有感焉。余少孤失學。年十歲。不知讀書之爲何事。其後學於隣老朴廣文及吾兄。始知挾篋績文之道。而唯其懶習之已痼。不能大肆力於文字間。是以雖或有得於爭名之場。而謂之知樂則未也。中年又因喪亡悲哀。托於麯糱以自寬。首尾八九年。日醉無何。其於書策。不至束閣。而亦固無暇及此也。晩因諸友所敦勉。遂復用力於文字上。盖始而心與氣勞悴。而戛戛乎其難入也。中而適終而好。好而至於樂矣。噫。余一人之身而數十年之間。凡三變而爲此。則安知異日不移易其心耶。牛馬羊齒。今三十有二。使得六十。今強半矣。自此以往。又將樂於奕乎。抑聲音乎采色乎。其滋味乎。是不可期者。因幷記之。以爲他日考閱之地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