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학 유학생(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조선조 헌종 2년(1836년) 섣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열 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그 일행 가운데는 15세 전후의 세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때 조선엔 잡입하여 활동하던 프랑스인 모방(Maubant) 신부한테 뽑혀 머나먼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중이었으니, 그들 세 명이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음으로 모방 신부 자신이 숨어다녀야 하는 처지였고, 따라서 어떠한 교육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신부들과 상의한 끝에 어린 소년들을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최양업 소년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살이었으며,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어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1836.4월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 생 후보로 선발)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이 낳은 최초의 성직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삶은 25년이란 짧은 기간이었고, 더욱이 사제로서 생활한 시간은 겨우 1년 남짓하였으므로 그의 생애는 오히려 최초의 신학 유학생으로서, 그리고 쇄국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로서 설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최양업은 1836년 12월 3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해 6월 7일에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처음 여행한 조선의 한양에서 중국의 남단 마카오까지는 9천리 남짓,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만이 국경 통과가 허용되던 조선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먼 여행이었으나 조선을 떠난 소년 김대건은 동료들과 함께 중국인 신자들의 인도로 1837년 6월 7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는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게다가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조차 좋지 않았으니, 1839년에는 기해박해가 일어나 교회 지도자들과 많은 신자들이 죽었고, 모방신부도 새남터(현 용산 전철역 부근)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됩니다. 한국과의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으로.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한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을 기대하고 최양업과 김대건을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후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양업과 김대건은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는데, 한국으로의 입국 로 탐색을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최양업은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로부터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은 1844년 12월 10일경, 동료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 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경향잡지, 1996년 7월호, 차기진 루카(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자료실]
유학길 일정
▲ 서울에서 마카오까지 유학 경로
유학 길 일정
-.1836.4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
를 받은 뒤 신학생 후보로 선발.
-.1836.12.3 앞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12.28 조선입국을 위해 요동에 머루르고 있던 샤스탕(Chast ant,鄭)신부 댁에 도착.
-.1837.6.7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대표부(대표;Libois신부)에서 칼레리(M.C allery)신부 등에게서 수학.
* 11월 27일 : 동료 신학생 최방제(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
* 1838년 8월 14일 : 페레올(Ferreol, 高)신부가 계승권을 가진 조선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됨(1843년초에 가서야 교황의 칙서를 전달받음).
-. 1839년 4월 6일 | 마카오의 민란으로 인해 칼레리,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다시 마닐라로 피신한 뒤, 도미니코수도회의 원장 초청으로 롤롬베이(Lolombey) 농장에서 수학.
-.1837.8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1838년 겨울 귀환)
-.1841.11.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다시 마닐라로 피신(11월에 귀환)
-.1841.11. 최양업과 함께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