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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당자료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환
자료#4. 성지순례 해설(설명) 기본자료
한국교회 약사
선교사 아닌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세운 교회 ‘자부심’
1784년 2월 이승훈(베드로)이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는 이벽(요한 세례자)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정약용(요한)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교회의 설립은 선교사가 아닌,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이승훈은 10명의 평신도를 신부로 임명하고 성사를 집전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독성(瀆聖)임을 알게 된 교회 지도자들은 윤유일(바오로)을 북경교회로 보내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윤유일이 귀국하면서 천주교가 조상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교회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이는 1791년 신해박해(진산사건)를 일으켰고, 이때 체포된 두 사람은 참수되었다. 1794년 말, 신자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교회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교리 연구 및 선교를 위하여 설립된 명도회를 통해 사목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 결과,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였을 당시 4000명이던 신자 수는 1800년에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박해가 있었다. 1795년의 을묘박해 때에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관련되어 윤유일, 최인길(마티아), 지황(사바) 등이 순교하였고, 1797년에는 충청도 지역에서 박해가 일어나 이도기(바오로), 박취득(라우렌시오)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1801년에는 조선 조정에서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강완숙(골롬바) 등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면서 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황사영(알렉시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던 「백서」가 발각됨으로써 박해는 더욱 격화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흩어져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박해가 신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교황청에서는 1831년 조선 포교지를 조선대목구로 설정하는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 마가자에서 병사했고, 그 후 1836년에 모방 신부가, 1837년에는 샤스탕 신부와 제2대 조선대목구장인 앵베르 주교가 각각 조선에 입국하였다. 선교사들은 1836년 말에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성직자로 양성하기 위해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냈다.
또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매괴회, 성의회 등 신심 단체도 조직하였다. 그러나 1839년의 기해박해로 선교사 3명과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김대건이 1845년에 사제품을 받음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1846년의 병오박해 때 현석문(가롤로), 남경문(베드로), 한이형(라우렌시오)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1849년에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전국의 교우촌 순방, 순교자 행적 조사, 한글로 된 교회 서적 편찬 등 많은 활동을 펼치다 1861년 병사하였다.
한편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많은 선교사가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선교사들은 사목 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1855년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59년쯤부터는 서울에 인쇄소를 설립하여 기도서, 신심서, 교리서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신자 수가 1857년에는 1만 5206명, 1861년에는 1만 8035명, 1865년에는 2만 3000명으로 꾸준하게 증가하였다.
이처럼 성장해 가던 한국 천주교회는 1866년의 병인박해로 다시 큰 고난을 겪게 되었다. 선교사 12명 가운데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9명이 순교하였다. 또한 남종삼(요한), 홍봉주(토마스), 최형(베드로), 전장운(요한) 등도 순교하였다.
그런 가운데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선교사들은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사목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면서 신앙의 자유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1888년 진주에서 윤봉문(요셉)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국가의 공식적인 박해령에 따른 천주교 탄압은 더 이상 없었다. [평화신문,2014년6월15일, 제공=교황방한준비위원회영성신심분과]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신유박해
1801년 1월 10일. 신유박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돼 12월 22일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박해는 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 4월 순교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됐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황사영은 체포돼 10월 참수됐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됐다. 황사영이 전한 바에 따르면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300여 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1839년 3월~10월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時)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僻)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월,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병오 박해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병인 박해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돼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다. 일반적으로 1866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됐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이 시기에 순교한 신자 수는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대략 1만명 내외로 추산된다.
[가톨릭신문, 2008년 9월 7일, 오혜민 기자]
한국 순교자들의 영성
1.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교회사 초기부터 많은 위대한 순교자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교회의 자랑거리라는 차원을 벗어나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순교자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오늘날의 우리들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하는 하나의 커다란 과제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현세대에게, 신앙생활을 단순히 취미생활로 밖에 여기지 않는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을 미개한 신화속의 인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순교자들은 아직까지도 온몸으로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간 우리가 우리의 순교자들에게 보인 관심은 실로 미흡하다. 순교자들에 관계된 역사적 사실자체 규명, 외적인 공경이나 현양의 표현양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깊이 깨달아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2. 순교영성이란
1) 순교(殉敎)
순교영성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순교'라는 단어의 명확한 의미규정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순교란 말은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행동"1), "신앙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는 일"2)을 의미하며 '증인'을 뜻하는 희랍어 'μαρτυ?'에서 유래한 말이다. 본래 '순교'와 '순교자'의 원어인 'μαρτυριον'과 'μαρτυ?'는 단순히 증언과 증거자를 의미했지만 이 단어들이 그리스도교에 수용되면서 그 의미가 본질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증거, 증언만을 뜻함이 아니라 피 흘림을 통한 신앙의 증거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순교는 엄밀히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 의하여 초래되어야 하며, 그 죽음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발적(自發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3)
그러나 이처럼 순교가 단순히 외적인 피흘림을 통한 신앙의 증거만을 뜻했던 것은 아니다. 이미 교부시대부터 광의적 의미의 순교, 다시 말해서 주의 계명과 복음적 삶을 철저히 사는 것 자체도 순교로 보았던 것이다.
비록 피흘림의 순교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사셨던 분들, 바로 교회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미 순교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성모님을 순교자들의 모후라고 칭하고 있는 것도, 그리고 무혈의 순교자, 혹은 하얀 순교자라고 부르고 있는 많은 성인성녀들, 모두 넓은 의미의 순교자들인 것이다.
결국 순교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물리적이며 협의적인 순교와 비록 피는 흘리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복음적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영적이며 광의적인 순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순교영성(순교정신)이란
그렇다면 순교영성이란 무엇인가? 순교영성에 대해 정확한 의미규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순교영성이란 말은 흔히 순교정신이란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곧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의 모든 신앙과 신념과 모범적 삶 모두를 총칭하는 것이다. 즉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생명까지도 포기하며 사는 삶,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와 닮은 삶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순교영성, 순교정신인 것이다.
a)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Ⅰ고린 10,31)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순교자 김대
건 신부에 관한 기록(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下, p.119)
b) 포기함 :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어떤 것을 포기하든지 간에 포기함 없이 순교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많은 순교자들이 자신의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심지어는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포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것을 뛰어 넘어 순교하고자 하는 자신의 원의까지도 포기했던 것이다.
"나는 순명으로 이렇게 얽매어 있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지금은 조선의 내 전교지방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천국의 빨마 가지 위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최양업신부 서간집」, 임충신/최석우 역주(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1984), p.83)
꼭 외적으로 목숨을 버리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위해 많은 자리를 비워 놓으며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신앙생활이, 그리고 그러한 신앙의 자세가 바로 순교영성의 특성인 것이다.
c) 그리스도를 닮음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 안에서 나타나는 순교의 특성 중 첫째이며 근본적인 측면은 스승이며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며 따름'이다. 즉 예수 친히 하느님의 탁월한 순교자이시며, 순교자들의 원형7)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길을 가셨는데 내가 왜 이 길을 걷기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아니, 나는 예수를 한발 한발 따라 가겠다.' 이렇게 결심하니 기운이 솟아났습니다."
(순교자 이경언의 편지(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中, pp.144-145)
d) 하느님 나라의 갈망(渴望)
우리 순교자들의 순교영성 중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다. 그리고 순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도 사실은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저는 다시 같은 모양으로 죄를 짓기 보다는 추위로 얼고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잘 참아 받음으로 저는 죽은 뒤에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순교자 장성집의 증언(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中, pp.416-417)
3) 일상에서의 순교정신
그러면 목숨 바쳐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우리 신앙의 선조(先祖)들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며 또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순교영성, 순교정신을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물론 오늘날은 예전과 같은 박해의 상황은 있지 않다. 그러나 내면적(內面的)인 박해의 상황은 항상 있어왔음을 알아야 한다. 내 욕망에 의한 박해, 내 의지에 의한 박해, 사회의 불의에 의한 박해는 끊임없이 있어왔다.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 하느님의 선과 나의 욕망, 죄에로 기울려는 경향 등은 우리의 내면속에서 끊임없이 박해의 상황을 야기 시켜왔다. 과연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왔는가? 사소한 일이라는 이유로 너무도 자주 우리의 일상에서 배교자들이 되었던 것은 아닌가?
이미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교회는 교부시대부터 이미 무혈의 순교, 일상에서의 순교를 높이 평가해왔다. 즉 주의 계명과 복음적 삶을 철저히 사는 것 또한 순교로 보았던 것이다.
순교영성의 중심은 목숨을 바치는 것 자체가 아닌 것이다. 목숨을 바치는 행위가 없더라도 하느님을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사는 삶이 바로 순교영성의 핵심인 것이다.
<한국 순교자 영성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성지와 순례지
1. 성지란?
성지(聖地, Holy Land)는 원래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땅을 통틀어 일컫는 표현입니다.
이 땅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기도 합니다.
이 땅을 교회에서는 라틴말로 '팔레스티나'라고 불러왔는데,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 '거룩한 땅'인 성지(聖地)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활동 무대인 팔레스티나 전체를 가리키지만 좀더 좁은 의미에서 거룩한 장소(터)를 가리키는 성지(聖址, Holy Place)도 있습니다.
이것은 팔레스티나 전체가 아니라 팔레스티나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관련되는 특정한 장소나 지역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베들레헴 동굴, 나자렛, 타볼산, 갈릴래아 호수, 베타니아, 겟세마니 등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의미의 성지는 세월이 점차 흐르면서 예수님과 관련되는 곳만이 아니라 성모님 발현지, 사도들의 활동지, 순교자나 성인들 순교지나 묘소, 하느님 은총으로 이적(異蹟)이 일어난 곳, 유서 깊은 성당 등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는 성지(Holy Land, terra sancta 聖地)든, 아니면 거룩한 장소를 가리키는 성지(Holy Places, loci sancti, 聖址)든 영어나 한자어로는 명확하게 구별이 되지만 우리말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가톨릭대사전」에서는 거룩한 장소를 나타내는 두 번째 의미의 '성지'(聖址)를 '성역'(聖域)으로 바꿔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별은 아무래도 복잡합니다.
그래선지 천주교 용어위원회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성지(terra sancta)'는 본래 예수님과 관련된 이스라엘 땅을 말하지만, 성모님이나 성인 또는 순교자 관련 사적지나 순례지(sanctuaria)를 일반적으로 '성지'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문제 삼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본래 성지는 예수님과 관련되는 땅 팔레스티나를 가리키지만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팔레스티나 곧 이스라엘 땅뿐 아니라 성모님과 성인들, 순교자들과 관련된 사적지나 순례지까지 다 포함해서 '성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2. 순례지
순례지란 "많은 신자들이 교구 직권자의 승인 아래 특별한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성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를 뜻 한다"고 교회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성인이나 순교자 무덤이나 순교지가 아니더라도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 성모님의 발현이 일어난 곳, 성체 기적 같은 특별한 기적이 일어난 곳 등에는 많은 신자들이 찾아가 성인 유해를 참배하며 특별한 공경을 바치거나 그 일이 일어난 의미를 되새기며 신앙을 키우곤 합니다. 이런 곳들에 대해서 교회가 공식으로 순례지로 인정할 경우에 순례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순례 지는 교구가 인정하면 교구 순례지로, 그 나라 주교회의가 인정하면 국가 순례지가 됩니다. 국제 순례지가 되려면 교황청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국제 순례 지와 국가 순례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대희년 때에 각 교구들이 주교좌성당을 비롯해 교구 내 주요 성지들을 순례지로 한시적으로 지정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200곳이 넘는 성지가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순교자들 순교 지나 무덤과 관련된 곳이지만 사적지에 해당하는 곳들도 더러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교회 사적지와 성지, 순례 지와 성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성지는 성인이나 순교자들의 무덤이나 순교지에 국한하자는 것입니다.
모두가 교회의 값진 유산이기는 하지만 구별할 때에 성지의 고유한 의미를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교 지나 무덤이 아닌 곳들은 사적지로, 필요하다면 순례지로 지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견이 잘 반영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알아둡시다.
예전에는 순교자 성월이 되면 신자들이 순교성지들로 성지순례를 많이 갔습니다만 요즘에는 성지순례를 하는 신자들 발걸음이 성지마다 일 년 내 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지를 찾아 순교성인들의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 신앙을 굳게 하는 것은 대단히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성지를 가든지, 어느 순례 지를 가든지 간에 성지순례의 최종 목적은 그 성지와 관련되는 성인, 관련되는 신심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중심이요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지마다 다른 성지와 구별되는 영성적 또는 신심적 특징이 있고, 해당 성지에서는 그런 특징들을 부각시키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지순례를 통한 신심 행위가 자칫 달을 향하기보다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향할 우려가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열린 성지순례사목 아시아대회에서도 이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고 합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신자들뿐 아니라 성지나 순례 지사목을 담당하는 사목자 들도 이를 좀 더 유념해서 성지순례 신심이 올바로 고양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신문, 제887호(2006-09-10), 이창훈 기자]
성지순례의 목적과 태도
1. 성지 순례의 목적
누구든지 일상에 파묻혀 숨가쁘게 살다 보면 자기 개인의 신앙 생활은 물론,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도 꾸준히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하느님과 나의 관계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형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느님과 자신의 멀어진 관계를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내적인 삶을 하느님 안에서 다시 살펴보는 가운데 흐트러진 신앙을 바로잡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또는 일을 새로 시작할 때, 잠시 복잡한 일상을 떠나 조용히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관계된 성스러운 땅, 순교 성인들의 발자취가 생생히 남아 있는 성지를 찾아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반성할 때, 좀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 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순례를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 하느님을 자기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지혜를 순교자를 비롯한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성지 순례에 임하는 태도
언뜻 성지 순례라 하면, 성지를 찾아가 참배하고 해당 성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전부라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순례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신앙인의 삶이란 결국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있다면, 이와 같은 신심 행위는 나의 삶이 변화되어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지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선조들의 삶은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마음의 눈을 뜨고 침묵 속에 조용히 귀 기울이면 얼마든지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 마침내 목숨마저 바친 순교 성인들의 삶을 배우며, 본받으려는 결심을 세우고, 그분들의 도움을 빌며 돌아올 수 있다면 순례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3. 성지순례 사전준비와 순례지침
-.먼저 고해성사를 본다. 새로운 삶의 여정을 떠난다는 각오와 하느님과 화해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다음은 찾아가고자 하는 성지 또는 사적지의 역사, 그리고 그곳과 관련된 순교자들
의 삶에 대해 알아본다. 그리고 성지 순례를 하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를 생각하고 준비 한다. 예컨대, 성지를 찾아 이동할 때 어떤 기도를 바칠 것이며
기도와 묵상 중에 떠오르 는 생각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기록할 것인지 까지도 구체
적으로 구상하고 떠난다면 보다 효과적인 성지순례가 될 것이다.
-.성지 순례는 관광으로 여겨서는 안되며 복장을 단정히 하고 기도서, 성가집, 묵주
등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물론 성지 순례 일정 동안 기도만 할 수는 없겠지만
주류와 각종 악기등 오락 기구 등은 피하고 음식도 간소하게 하며 호화로운 복장,
식사 등은 절제해야한다.
-.한편, 전국의 많은 성지와 사적지들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각자 정성껏 성지 운영을 위한 성금 봉헌에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순례지에서의 몸가짐은 우선주님과 함께 걷는 자세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참회와 회개의 태도를 갖춰야 하고 극기
와 보속의 정신으로 참된 순례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
-.종종 순례지에서 화초나 돌, 나무 등을 훼손하거나 가져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자세로 오히려 잡초 하나라도 뽑고 쓰레기를 줍고 각종 공공 시설물을 내
것처럼 아끼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지에서는 박해와 순교 당시의 사건들을 실제로 느낄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고 순례 도중에 떠오른 기도와 묵상의 내용을 글로 적어 남겨
두는 것이 바람 직하다.
<박영호 기자>young@catholictimes.org
4. 도보 순례의 의미.
성지순례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어떻게 신앙을 지키셨고, 우리는 어떠한 신앙인이 되어야하는지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묵상하고,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는 성지순례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도보성지 순례는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묵묵히 하느님만을 믿고 따른 우리순교자들이 겪었던 고난의 길을 몸소 체험 하므로 순교 영성을 더 깊이 있게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도보 순례 길은 자신과의 싸움이며, 자신과 대화의 장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주저앉고 다시 서기를 반복하며 기쁨과 슬픔을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하여 더 많은 것에 감사 할 수 있고 인생의 참다움과 자아를 찾아 낼 수 있는 인생 여정입니다.
도보 순례를 하면서 함께 나누는 순교자 이야기 중, 옥중에서 젖먹이 어린자식이 굶어죽는 고통 속에서 신성과 인성의 갈등을 넘나들던 최양업 사제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의 순교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의 눈물을 흘리는 순례자들 속에서, 묵상과 함께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누리는 행복의 고마움을 깨닫는 경우를 종종 보며 나눔의 소중함도 맛보게 됩니다.
막상 걸어보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다리가 아파 중도에 포기하고 싶지만, 순교자들이 이런 경우에 포기 했다면 배교로 이어 졌을 거라는 생각과,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중도에 포기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도보순례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도보순례 순례 후기 속에서, 조금만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목이 마르면 언제든 배낭에서 꺼내 마실 수 있으며, 종점에 가면 태워줄 차량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 속에 있는 자신이, 순교자 분들께 크나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 속에서 순례의 은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지 순례에 임하는 태도
성지를 찾아가 참배하고 해당 성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외적인 행사만으로 순례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신앙인의 삶이 결국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있다면, 성지순례와 같은 신심 행위는 나의 삶이 변화되어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성지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마음의 눈을 뜨고, 침묵 속에 조용히 귀 기울이면 선조들의 삶을 그려볼 수 있으며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 끝내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의 삶을 배우고 본받으려는 결심과, 순교자들의 삶에 나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성찰과 반성의 태도로 순례에 임한다면 그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성지 순례를 관광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호화로운 복장과 식사 등은 간소하게 절제하고, 대부분 성지와 사적지들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각자 정성껏 순교자 터전에 봉헌하자.
순례자가 순례에 임하는 태도를 요약하다보면, 성지에 가서 순교성인들과 인격 적으로 만나, 그분들은 어떠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무슨 생각으로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었는지? 궁금한 점을 그 시대, 그 환경, 그 조건 하에서 대화를 나눠야 답이 나올 것 같다.
그분들은 어느 브랜드 옷을 입으시고, 무궁화 몇 개짜리 호텔에 묵으셨으며, 하루 세끼 식사는 무슨 메뉴로 하셨을까?, 그리고 커피는 뜨거운 커피인지 냉 거피를 드셨는지? 마음의 문을 열고 150년 전, 그분들과 같은 시대적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 여쭈어 보자.
그러면 지금 우리가 차를 타고, 먹고, 입고, 자고, 마시는 현실이 그 분들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지순례 중, 먹고, 자고, 타는 일에 불평과 불만이 생기거든 일단 성지순례를 잠시 미루고 마음의 준비부터 다시 하자 그게 최소한의 도리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영성 중에 포르치운쿨라 행진이 있다. 이 도보순례는 탁발 순례로 신부님 수사님, 수녀님, 그리고 재속회원들이 매년 약 열흘 정도 그것도 한 여름에 걷는다.
일정 중 식당이나 숙소 예약은 아예 없다. 배낭 속에는 얻어먹을 때 사용할 식기와 수저는 필수로 지참해야하며, 제일 고급숙소가 그 동네 마을회관, 남자들은 아예 다리 밑에서 주무셔야 할 각오를 하고 참여해야 한다.
먹을 것도 그 근처 공동체에서 밥이라도 해 주면 감사하고 그것도 없으면 빵 한 조각으로 때운다.
우리도 배울 건 배우자, 우선 배낭 속에 순례 중 얻어먹을 식기와 수저부터 챙긴 후, 처마 밑에서라도 잘려면 비닐 한 장쯤 챙겨 넣고 순례 길에 나서보자, 자세를 바로 잡으면 마음도 바로 잡힐 것이다.
성지순례 후원회. 김창환(바르톨로메오)
*** 1회 한도 초과로 나누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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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당자료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