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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선지자 없습니까?
2012년 5월 13일 / 대예배 / 요나서 1장 1~12절
요나 이야기를 관통하는 두 개의 갈등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회피하려는 요나와 그런 요나를 붙잡아서 기어이 명령을 수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 사이의 갈등입니다. ②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당신을 열방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시려는 하나님 사이의 갈등입니다. 이 두 개의 갈등이 교차하면서 요나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물론 ②가 근본적인 것이고, ①은 ②로 인하여 나타난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갈등이 봉합된 것처럼 보이지만, 두 번째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수면 아래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첫 번째 갈등의 형태로 불거져 나옵니다.
이기적이고 불순종한 요나의 생각과 마음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더듬어 살펴보면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내가 이제 너희를 멸망시킬 작정이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는 멸망한다!)에 대하여 외치라고는 하셨지만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 성읍을 향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품고 계셨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대국의 수도였는데,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죽인 다음 가죽을 벗겨서 니느웨 성벽에 진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용서와 긍휼의 마음으로 저주와 심판 이전에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참고 막 12:1-6).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아끼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생각과 마음을 요나서 4:11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욘 4:11 / 그렇다면 좌우를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 이상이나 있고 수많은 가축들이 있는 저 큰 도성 니느웨에 대해 어찌 내가 슬퍼하지 않겠느냐?
2. 하나님의 이런 마음은 이기적이고 불순종한 선지자 요나에게도 용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사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전할 자격이 없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요나를 선교사로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자격을 없음을 모르고 선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요나도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냉정한 인간일 뿐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로 들어 이렇게 강조합니다.
딤전 1:12-16 /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선택하셨을 뿐 아니라 충실하게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13) 과거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하며 다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며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는 내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14) 오, 우리 주님은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요. 주님은 내가 어떻게 주님을 신뢰해야 하며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16)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크나큰 관용으로 감싸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나 같은 것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 310장 /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날 알 수 없도다.
하나님의 분부를 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니느웨 대신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그대로 내 버려두시지도 않고 큰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으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고, 다시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끄집어내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으며, 싫다고 하는 그를 억지로라도 니느웨로 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에게 화를 내면서 대드는 요나를 설득시키시는 것도 너무나도 황송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자기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민족임을 내세워 다른 민족을 개 취급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요나서의 핵심이면서 결론이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다시스로 태우고 가던 이교도 뱃사람들에게도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욘 1:5 / 죽을까봐 겁이 난 뱃사공들은 제각기 자기의 신을 부르며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
각각 자기의 신들을 부르는 이교도들을 괘씸하게 여겨 바다에 몰살시켰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바다의 폭풍으로부터 보호하여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와 제사를 드리고 섬기기로 서약까지 하게 하셨습니다.
욘 1:14-16 / 마침내 그들은 요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큰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오 여호와시여, 이 사람의 죄때문에 우리를 죽이지 마시고 이 사람이 죽는 책임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그가 죽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이 폭풍을 그에게 내리셨습니다.” 15) 그러고 나서 그들은 요나를 들어 성난 바닷속으로 던졌다. 그러자 폭풍이 잠잠해졌다. 16) 그 사람들은 여호와를 몹시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호와께 제물을 바치고, 그를 섬기기로 서약하였다.
이것이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 불순종한 요나, 이교도 뱃사람들에게 품으신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2. 요나의 생각과 마음은 불만과 증오와 분노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 대해서 불만과 증오와 분노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는 일이 없던 요나는 불만을 품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까지 쳤습니다.
욘 1:3 / 그러나 요나는 그곳으로 가기가 무서워서 즉시 일어나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였다. …
요나서 4장에 보면 요나의 생각과 마음에는 마지막까지 하나님과 니느웨 성읍에 대해 불만과 증오, 분노로 가득했습니다. 니느웨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한 처사를 항의하면서 죽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욘 4:1-3 /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들을 변경시키시자 요나가 잔뜩 화가 났다. 2) 그는 주께 불평하는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주님! 제가 고향 땅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시요 노를 더디 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그 악한 백성을 멸망시키려고 세웠던 계획을 쉽게 취소하시리라는 것을 제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니 이제 주님, 제발 저를 죽이십시오! 제가 그들에게 전해 준 일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바에야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니느웨 성읍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기뻐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심히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니느웨 성읍에 대한 요나의 생각과 마음은 불만과 증오와 분노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요나의 생각과 마음에는 털끝만큼도 자비도 긍휼도 없었습니다. 물론 앗수르가 그만큼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사실이었겠지만 그래도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최소한의 자비와 긍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은 어떠합니까?
요나서가 주는 큰 교훈은 ①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분이요 ② 우리들은 다 요나와 같다는 것입니다.
● 요나가 탄 배가 깨어지게 될 정도로 큰 폭풍이 몰아쳤을 때에 목숨이 위태롭게 된 상황에서 그들은 무역을 위해 싣고 가던 값진 물건들까지 바다에 내던졌습니다. 물건을 내던진다고 하여 될 상황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과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자 사람들은 자기의 신들을 부르며 구원을 부르짖었습니다.
배 위에서는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자기들의 신을 부르고 물건을 바다에 던지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배 밑층에서는 요나가 세상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배가 깨지고 뒤집어질 지경에 이른 것이 요나의 책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배를 구하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인데, 정작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요나는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곧게 서지 못하면 그 결과로 사회가 고통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세계의 관리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무고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3:17).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빛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빛을 잃어버린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나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는 것을 선장이 발견하고 깨웁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다들 자기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너도 일어나서 너의 신에게 기도하라.” 그 중에 어떤 신이 진짜로 능력이 있어서 자기들을 구원할지 모르니 신을 하나 더 보태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폭풍은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 재앙을 당하게 되었는지 찾아내자고 합니다. 범인을 찾아내서 그에게 책임을 물으면 재앙이 멈추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습니다.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혔습니다. 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 너는 어디서 왔고 생업이 무엇이냐?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요나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그렇다면 이 재앙을 가져오신 분도 또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결론입니다. 그 여호와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이 재앙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서 그 모든 뱃사람들은 이 사람이 섬기는 여호와가 진짜 신이고, 자기들이 각자 섬기며 살려달라고 기도했던 신들은 다 가짜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히 두려워하면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고 묻습니다.
비록 요나는 이 재앙을 가져온 범인이기는 했지만, 그 배에서 최고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신은 다 가짜이고, 자기가 믿는 신이 진짜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승리자 아닙니까? 얼마나 통쾌합니까?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자기들만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우월감과 자존심이 그들의 목숨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께서 악독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켜 구원을 베푸시려고 하니, 요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셨으면 됐지, 왜 다른 민족들까지 그것도 원수 니느웨에 신경을 쓰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이것이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실패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왜 자기들을 선택하셨는지, 그 목적을 대단히 오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시초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12:3).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마치 저수지와 같은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것을 다른 모든 민족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혈통으로 메시야를 보내셔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하심으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거기까지가 이스라엘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자기들만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민의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셨고, 다른 민족도 보살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사상이 구체적이고 강하게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요나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나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도 몰라주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먼저 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책임을 동반합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마치 배 밑층에서 세상모르고 잠에 빠진 요나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 하는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이웃으로 시작해서 멀리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눈을 멀리 돌려 선교사역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복음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도 이 지구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거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지만,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는 것은 먼저 믿는 사람의 책임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처럼 흥분되고 감사한 일이 없습니다. 하늘에서도 큰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눅 15:7). 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12:3). 그만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영혼 구원하는 일에 애쓰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 되는 일에 앞장서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우리 모두는 요나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인데 있어서 요나와 같고, 불순종하는데 있어서 요나와 같고, 무정하고 냉정한데 있어서 요나와 같고, 그리고 증오하고 분노하는데 있어서도 요나와 같습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는 자비도 긍휼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5:44-45은 우리에게도 명령하시는 말씀입니다.
마 5:44-45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 요나서 강해를 저술한 미국의 저명한 설교가인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요나의 불순종과 반항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2차 대전 때에 독일의 베를린에 사는 나치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뉴욕에 사는 한 유대인에게 임했다고 가정하면 요나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갔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그를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비웃기 전에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들이 영적으로 요나의 후손들이 아닌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니느웨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은 일은 없으므로 다시스로 도망가야 할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은 요나가 받은 것 이상으로 요긴한 것이다. 때로 우리가 그것을 피하려는 시도가 요나가 도망치려 했던 것 못지않게 의도적인 것일 수가 있다.”
저는 이 말을 바꿔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라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하나님이 쓰시는 선지자가 되십시다.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를 타이르면서 호소 섞인 책망의 말씀을 읽으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하나님의 호소 섞인 책망의 말씀에 침묵만 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라면 박 넝쿨 하나도 아끼며 귀중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 느낌, 동정, 사랑도 품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라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십시다.
욘 4:10-11 / 그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수고도 하지 않았고 네가 키우지도 않았고 그저 하룻밤 사이에 나타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저 박넝쿨 한 포기에 대하여서도 슬퍼하고 있다. 11) 그렇다면 좌우를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 이상이나 있고 수많은 가축들이 있는 저 큰 도성 니느웨에 대해 어찌 내가 슬퍼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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