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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특집] <龍蛇日記(용사일기)> 조선시대 民草가 기록한 임진왜란의 생생한 현장星州 都씨 14세손인 都世純이란 젊은이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13일부터 1595년 1월 15일까지 피란지에서 쓴 총 40쪽 분량의 참혹한 기록을 후손이 번역 출간.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한 젊은이가 피란지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龍蛇日記>가 발견됐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왜적이 대거 침입하였다. 도적의 무리가 백만이고, 도적의 배가 서로 맞닿아 바다를 뒤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우리나라는 태평성세를 누린 지 오래라, 백성들은 전쟁을 모르고 살았다. 하루아침에 적들이 들이닥치니 변방의 장수들은 능히 막아내지 못하였다. 어떤 군사는 성을 버리고 쥐 숨듯 하고, 어떤 곳에서는 모든 군사가 적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적은 부산진 등을 함락하고 동래를 에워쌌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을 견고히 하고 저항하였으나 수비가 완전치 못하여 성은 끝내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관대를 하고 단정히 앉아 서쪽을 향하여 재배를 한 후 죽음을 당하였다.
적은 연이어 여러 군을 함락하고, 바다와 뭍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향하는 곳에 막히는 것이 없다. 기세가 마치 기왓장을 깨듯 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가혹하고 무거운 노역을 일삼은 監司(감사) 김수와, 늙어서 용맹이 없는 兵使(병사) 曺大坤(조대곤)은 여러 사람에 둘러싸여 스스로만 방위할 뿐 싸움을 하지 않았다. 적은 방자하게 마치 무인지경을 쳐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때 牧使(목사) 李德設(이덕설)과 判官(판관) 高峴(고현)은 본주 기병 오천을 거느리고, 현풍1 경계에 진을 치자 병졸들이 헛되이 놀라서 흩어졌다. 이에 인민들도 모두 놀라고, 멀리서 가까이서 소요가 일어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진동하였다.
이때에 나2와 집안 종친들은 피란할 것을 논의하였지만, 의견이 분분해서 마땅히 갈 곳을 정하지 못 하였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깊은 산이라면 적은 복병이 숨어 있을 곳으로 의심하여 반드시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얕은 산이라면 어찌 모두 수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얕은 산에 쥐처럼 엎드려 있다가 형세를 살펴가며 피란을 하는 것이 안전한 방책일 것입니다”라고 하여 모두 좋다고 하고, 빌무산3으로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다.
1. 현풍(玄風) : 지명. 대구 밑.
2. 나(都世純) : 1574~1653년. 1월14일 졸. 본관 성주. 몽기(夢麒)의 2자. 자는 厚哉, 호는 巖谷. <京山本誌(星州郡誌)>를 저술하였다.
3. 빌무산(乞水山) : 784m. 성주군 벽진면과 김천시 조마면 사이에 있다.
1592년 4월 20일
집안1의 값진 것은 땅에 묻고, 옷과 식량을 싸 놓고 앉았다. 집에 막걸리가 있어서 집안의 시춘2 형님, 김로 아재3와 함께 마셨다.
김로 아재는 술잔을 들고 혀를 차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태어나서 이런 극변을 만나다니… 모르겠다만, 이렇게 다시 술을 마실 수 있을까?” 하며 처량하게 눈물을 흘렸다.
이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니 연기가 하늘에 닿고, 적놈들이 더욱 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都章(도장) 아재는 변방을 지키러 가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
내가 아재 집의 어른과 아이들을 불러서 모두 함께 응성 아재4 집으로 갔다. 이곳에 온 사정을 모두 말하니, 아재 역시 놀라서 나와 함께 문을 나왔다.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놀리며 말하였다. “적이 너의 집에 먼저 왔나? 어찌 그리 빨리 움직이려 하느냐?” 하면서 말렸으나 우리는 이에 따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개터5의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마을을 굽어보고, 조상의 무덤6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대로 내려온 집들이 장차 잿더미가 될 것이고, 조상의 무덤도 반드시 황폐한 구덩이가 될 것이다” 하니 모두 눈물을 흘리고 머뭇거리며,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저녁이 되어서 산점7에 도착하였다. 鄭淡沙(정담사)의 집을 빌려서 머물렀다.
다음날 집안이 모두 모였다. 이날 밤에 이양덕 아재가 술을 허리에 차고 오셨다. 집안 사람들이 여러 잔을 마시고 헤어졌다.
이 일 이후 며칠간은 적에 대한 소문이 없다.
1. 집의 위치 : 이 당시의 집은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개터, 은행정이라고 부르고 있는 곳이다. 지금도 600년 가량 된 은행나무 거목이 마을 앞에 있고, 이 일기를 쓴 세순의 13~15대 자손이 살고 있다.
2. 시춘(是春) : 도몽호의 아들. 세순의 6촌 형. 1564년 3월5일 생. 是仁과는 형제.
3. 아재(叔) : 웃항렬의 일가 친척을 부르는 호칭.
4. 응성(應星)아재 : 都應星. 세순의 재종숙.
5. 개터(介台) :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나복실의 앞마을 개울 옆에서 큰 은행나무가 있는 안마을 주위를 말한다.
6. 조상의 무덤 : 개터의 뒷산에는 세순의 증조 운재공(雲齋公) 균(勻)의 무덤과, 나복실 안쪽의 6대조 安, 5대조 以敬의 무덤이 보인다. 세순이 앉아 있던 자리로 보이는 언덕에는 그의 아버지 夢麒, 7대조 允吉의 무덤과 杞菊亭이 있다. ‘杞菊’이란 말은 ‘耆國’과 발음이 같으며, ‘孝, 忠’의 은유적 표현이다. 이 정자는 그의 5대손 尙郁 대에 세운 것이다.
7. 산점(山店) : 산 어귀에 있는 가게. 개터의 북쪽 1km 위에 상점복, 하점복, 산전이란 마을이 있다. 안봉의 입구에 있는 마을들로 산점은 이 근처로 추측된다.
1592년 4월 25일
소문에 적이 현풍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산점에서 산을 올라가니 이양덕 아재가 말하기를 “어찌 가벼이 움직이는가? 오늘 조금 머물렀다가 우리와 함께 갈 곳을 의논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하였지만 우리들은 그에 응하지 않고 중봉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둘러보니 강의 왼쪽에 연기가 하늘을 덮고 있다. 조금 쉬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裵協(배협)이 달려와서 함께 放目菴(방목암)1으로 갔다. 배가의 가족들은 이미 여기에 와서 기거하고 있다.
다음날(26일) 이순경과 배득보 역시 이곳으로 왔다. 이날 저녁에 득보가 송아지를 잡아서 고기를 여러 점 보내 오고, 집에서는 쑥떡을 쪄서 꿀을 발라 올렸다. 득보의 모친과 아내도 함께 왔다.
1. 방목암(放目菴) : 庵子 이름. 뒷산인 안봉사가 있는 안산과 개터 뒤편 玆山(360m) 사이에 있었던 듯. 지금은 없다.
1592년 4월 27일
배협과 더불어 방목암에서 의논하였다. “이곳은 사람이 많고 번잡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암자의 서쪽 밖에 나무를 잘라서 주위를 둘러친 임시 거처가 있으니 배협 일가와 우리 집, 아재네 집 가족이 함께 거처를 하고, 만약 급한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서 생사를 함께하기로 하자”고 하였다.
저녁에 성주성1을 바라보니 적이 이미 성을 점거하고, 불을 질러 화염이 성안에 가득하고 불빛이 하늘에 미쳤다.
1. 성주성(星州城) : 현재 성주군청이 있는 장소. 개터에서 약 5km 떨어진 곳이다.
1592년 4월 28일
아침에 흉악한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하늘에 가득하다. 대낮에도 어두워서 바로 앞을 분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다. 갈 곳을 몰라 쥐처럼 숲속에 엎드려 있었다.
잠깐 사이 왜적은 산 위까지 올라 고함을 지르며 돌을 굴리는데, 그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더욱 간이 떨리고 마음이 눌려서, 급히 일어나 깊은 골짜기로 달려 들어갔다. 아버님1은 길이 엇갈려 다른 곳으로 가셨는데, 형님2이 찾아 모시고 왔다.
바위 밑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날이 저물었다. 성주성은 가깝지 않고, 적들은 이미 돌아갔으리라 스스로들 생각하여 모두 나오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달려왔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적에게 쫓기는 터라 하였다. 되돌아 바위틈으로 다시 들어갔다. 좌우의 사람들은 갈증이 심했다. 형님이 적이 돌아가기를 기다려 물을 길어 바가지에 채워서 왔다. 마른 목을 축이고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저물어서 부막3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단지 두 명의 적이 왔다.
1. 아버님(都夢麒) : 1542~1594년 11월2일 졸. 자 仁叔.
2. 형님(都世雍) : 1569~1626년 6월13일 졸. 자 時哉, 호 杏山. 무덤은 기국정 맞은편 언덕에 있고, 그 밑에 그의 비석이 증조 운재공 균과 함께 있다.
3. 부막 : 햇빛 가리개로 친 임시거처.
1592년 4월 29일
어지럽고 무서운 불길이 사방에서 치솟는 것이 어제보다 더 심하다.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한 스님이 달려와서 말하기를 “적이 산의 북쪽 기슭에서부터 둘러싸고 수색을 하는데, 살기가 등등하다고 한다. 어찌 빨리 달아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모두들 놀라 밥 먹던 것을 멈추고, “오늘에는 죽고 말겠구나” 한다. 그래서 억지로 이순경을 만났다.
공보 이순경은 산중의 험하고, 화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잘 알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길을 안내하도록 하고 따라갔다. 어제 머물렀던 바위 위에서 멈추어 있으려고 하니, 공보가 말하기를, “어제 단지 적 두 명을 보고도 정신이 빠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는데, 오늘같이 이렇게 많은 적들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정말로 자네의 말처럼 여기서 멈추고 있으면 달아나기 어려울 것이고 큰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바지를 걷어 올리고 산을 올랐다. 내가 약속하기를, 먼저 가서 왜적이 없으면 휘파람을 불 터이니 다른 분들은 그 소리를 듣고 오라 하였다. 모두들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물고기두릅처럼 줄지어 올라가서 산봉우리에 이르렀다. 사방에 황급히 피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후에 김우곤 어른에게로 갔다. 피란 가서는 안 될 곳을 알려 드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무가 울창하고 녹음이 우거져서 밧줄에 매달려서 내려갔다. 낭떠러지 밑에 앉아서 쉬었다. 일행이 모두 다쳐서 울지 않는 사람이 없다. 조금 후에 산점에서 불길이 오르는데 그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이다. 산꼭대기에서 들으니 포성이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사람들은 모두 구부리고 엎드려 있었다. 작은 동생 예일1이가 칭얼대서 급히 젖을 물려 울음소리를 막았다.
두 사람이 앞 봉우리에서 구르듯 내려온다. 가까이 와서 보니 응진 아재2와 김로 아재였다. 우리들을 보더니 놀라면서 말하기를, “어찌 편히 앉아 있는가? 우리 역시 적에게 쫓기고 있다. 적들이 뒤쫓아서 여기까지 올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모두들 낭떠러지를 따라서 아래로 떨어지듯 내려갔다. 배협은 노모가 있고, 그의 처도 임신 중이라 모두들 잘 걷지 못하였다. 배협이 겨드랑을 부축하여 끌고 내려간다.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하고 망극하여 두 눈에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험한 고개를 넘어서 살티3로 달려 들어가서, 뒤로 나무를 병풍처럼 두르고 앉았다.
배협과 형님을 시켜서 봉우리 위4에 올라가 적의 거취를 알아보게 하였다. 오래 되지 않아 배협이 먼저 와서 말하였다. ‘적이 산으로부터 곧바로 내려와서 읍내 길로 향했다’는 것이다. 이미 불길이 산기슭에서 일어나서 공보로 하여금 가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이것은 들판에 맞불을 놓은 것이라 한다.
조금 후에 허둥지둥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보니, 적의 선봉이 여기로 오고 있는데 앉아 있으면 역시 위험하리라는 것이다. 모두 낙담하여 달아나려고 하였지만 형님이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 헤어지게 되는 것이 싫고, 또 배협은 적이 간 곳을 이미 알아냈다고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모두 믿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스스로 불안하여 앉아서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어머니5는 눈물을 글썽이며 두 동생 복일와 예일을 어루만지며 말하신다. “내가 너희와 함께 죽는다면 저승에 가서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 하시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가련해 했다.
조금 있으니 바람 소리와 새 울음이 들렸다. 적이 쳐들어 온 것으로 생각해서 모두 두려워하며 산봉우리로 달려 올라갔다. 적은 이미 갔으나 형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또 적이 어디로 물러갔는지도 알 수가 없다. 숲속에 엎드려서 사방을 둘러보고 형님을 불러도 보았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다. 부모님은 추측컨대 화를 입은 것이 아니냐며 울부짖으며 달려가서 같이 죽자고 하신다. 또 배협을 돌아보며, “자네가 내 자식과 같이 가서 망을 보았으면 마땅히 같이 돌아와야 할 일이지, 어찌 혼자 돌아오느냐? 내 아들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꾸짖었다. 배협 역시 근심과 걱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통곡을 하며 아래로 내려와서는 큰 소리로 형님을 찾아 불렀다.
한참 후에 산 위에서 문득 대답하는 소리가 있다. 먼 곳에서 점점 가까워지는데, 바로 형님이었다. 김로 아재가 고개로 올라가서 외치는데, ‘과연 네 형이냐’고 물으신다. 내가 “예, 예”라고 하니, 아재는 이를 부모님에게 아뢰었다. 부모님은 눈물을 거두고는 먼저 돌아가셨다.
나는 남아서 형님을 기다렸다. 만나 보니 더욱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헤어져서 울부짖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형제가 함께 방목암으로 갔다.
부모님이 여러 친척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은 우리를 보자 형의 등을 두드리며 말하시길, “네가 만약 불행을 당한다면 이 늙은 애비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며 늦은 까닭을 물으셨다.
형님이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하기를, “내가 산등성이를 바라보니 적이 봉우리에서 오기에 나무를 꺾어서 몸을 숨기고 나무에 의지하여 서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발자국소리가 나서 급히 돌아보니 적 한 놈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나는 몸을 가볍게 날려서 달려가 암벽에 머물렀는데, 그 아래가 몇 길 낭떠러지라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등나무줄기에 매달려서 아래로 내려가 그 밑에 숨었는데, 괴상한 고함소리가 나서 앉아서 엿보니 적 둘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사이가 다만 나무 하나 사이, 다섯 걸음 정도였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날쌔게 달려 높은 봉우리를 넘어서 겨우 붙잡히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은 모두 감탄하고,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사람을 보는 듯하였다.
밥을 먹고 네 시쯤 부막으로 돌아왔다. 감추어 두었던 옷과 재물은 노략질당하지 않았는데, 다만 말 한 필을 왜적이 끌고 갔다. 종숙의 노비 은지가 말하기를 “제가 부막 가에 엎드려서 들으니, 적이 3명 왔는데, 불을 지르려 하자, 한 왜군이 말리며 말하기를 ‘이 집주인이 밤에 반드시 올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나가 있다가 불시에 빼앗으면 얻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그러니 불을 지르지 말자’며 서로 한동안 말하고는 흩어져서 갔다”는 것이다. 왜의 말이어서 알아듣지 못하였을 텐데, 은지의 이 말은 망령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도적의 무리들이 부막에 불을 지르지 아니하고, 감추어둔 비단옷을 훔쳐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것을 정하지 못하였다.
의논 중에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두워졌다. 또 한배미6의 여러 마을을 바라보니 불길이 아직 남아 있었다. 왜적들이 그곳에 주둔해 있고 장차 이곳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모두들 얼굴빛이 하얗게 무서움에 떨었다.
배협이 말하기를, “사태가 급하다.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쥐처럼 수풀 속에 숨어있어야만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여기에 묶여서 함께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모두 옷 등을 버리고 빈 몸으로 험한 산길을 갔다. 또 비바람이 일어 허리를 굽히고 서로 붙들고 내려왔다. 점촌7 앞에서 安峰寺(안봉사)8의 스님을 만났는데, 桂崇(계숭) 스님이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스님은 임인생(1542년생, 당시 61세)으로, 나에겐 병을 고쳐준 은혜가 있다.
비가 더욱 거세진다. 그믐달이라 밤은 깊고 앞이 보이질 않는다. 따라오는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서 길을 잃었다가 서로 부르면 그 소리를 듣고 모이곤 하였다. 오직 동생 복일9이 대답이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동생이 오도록 기다렸다. 조금 지나자 종적이 적막하다. 배협은 가족을 데리고 먼저 사두곡으로 향하고, 우리는 비를 무릅쓰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창두 윤금이10가 틀림없이 동생 복일이를 업고 먼저 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다가 드디어 떠났는데, 진흙에 빠지고 미끄러져 모두 길에 넘어져 다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서원11 앞에 이르러 여기저기의 마을12을 바라보니 흉악한 불길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 개 짖는 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왜적들이 아닌가 생각되어 황급히 개터 종숙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 보니 과연 복일이 먼저 와 있었다. 복일이 달려 와서 “아버지, 어머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하며 울었다. 우리를 보자 기쁜 모습이 얼굴에 가득했다.
집안일과 왜적의 형세를 물어보니, 늙은 종 명복이 “집은 29일에 온통 잿더미가 되고, 또 종 은복은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모두 슬피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러 곳을 다닌 나머지, 기력이 없다. 조금 쉬려고 하니 종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적이 올 때라는 것이다. 조금도 지체치 못하고 배응보의 선영으로 달려서 들어갔다. 여종을 시켜 밥을 짓게 하고 그릇 하나에 담아서 함께 먹었다. 큰집이 모두 불탔다. 사당은 불길을 면하였으나, 겨울에 역시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1. 작은 동생(禮一) : 4살. 을축년 1591년 생.
2. 응진(應震) : 도응성의 동생, 세순의 재종숙.
3. 살티(箭峴) : 금수면 후평리에 있는 마을. ‘웃살티’와 ‘아랫살티’가 있다. 이 글로 보아 세순은 웃살티로 피란 갔다. 현재는 인가가 없고 아랫살티에만 인가가 있다. 여기서 한배미(大夜)와는 1km 거리. 옆에는 김천시 조마면과 통하는 살티재가 있다.
4. 봉우리 위 : 염속봉산(650m). 성주읍의 성이 내려다보인다.
5. 어머니 : 江陽人 李良受의 여. 1593년 6월8일 졸. 강양은 합천의 옛이름이다.
6. 한배미(大夜) : 現 벽진면 봉학리.
7. 점촌(店村) : 앞의 산점과 연관이 있는 세 마을로 보인다. 안봉사 밑에 있었던 듯.
8. 안봉사(安峰寺) : 지금의 안산영당(벽진면 지산리 중리마을 뒷산)이 있는 곳. 기록에 의하면 대장경을 보관할 정도의 큰절이었으나 지금은 유적, 유물이 없고, 고려시대에 조성한 작은 미륵석불과 그 전각만 남아있다.
9. 복일(復一) : 세순의 바로 밑의 동생. 이듬해 굶주림으로 죽게 된다.
10. 윤금(閏金) : 男奴. 다음해 겨울에 병으로 합천 야로의 주학정 고개에서 쓰러지고,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죽은 듯하다.
11. 서원(書院) : 川谷書院. 1558년 迎鳳書院으로 창건하여 이후 鄭逑 등이 개칭하였는데 1868년에 훼철되었다.
12. 마을 : 명리와 선학동. 용사란 당시와 그 직후에 성주도씨, 남양홍씨, 성산배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용사일기>의 무대가 된 성주 일대의 지도. 김현철 화백이 번역자와 현지를 10여 차례 답사 끝에 제작한 것이다. |
1592년 4월 그믐
비가 더욱 세게 쏟아지고, 눅눅하여 그 피곤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배의수의 집에 가서 불을 쬐어 옷을 말렸다. 곧 점심을 먹고, 부모님은 어린 동생을 안고 배씨의 선영으로 향했다. 나는 형님과 함께 송공의 선영1으로 가서 작은 소나무 아래 앉았다. 연일 비가 내렸는데 옷은 마르질 않고 한기가 뼈에 사무쳤다. 잠을 자지 못한 지가 오래라 형님은 팔을 괴고 떨면서 졸고 있어서 내가 형님을 불러서 깨웠다.
사람들이 모두 왔다. 무덤의 옆으로 징기2쪽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사방으로 분주히 달아나고, 또 말을 쫓는 자도 있었다. 형제가 서로 울며 말하기를, “저것들은 왜적이다. 오래지 않아 이곳으로 올 텐데 어떻게 할까? 빌무산으로 돌아가려니 부모님이 피곤하여 억지로 걸을 수가 없고, 우리 둘만 가자니 사람으로 차마 할 짓이 아니다. 차라리 부모님의 곁에서 함께 죽느니만 못하지 않느냐.”
마침내 절뚝거리며 배씨의 先塋(선영)으로 가 보니, 부모님과 누이, 동생이 역시 비를 맞으며 졸고 있었다. 내가 본 바를 말씀 드리니,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다만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셨다. 과연 오늘은 왜적이 오질 않았다.
저녁에 배의수의 집으로 갔다. 아버님과 형님은 홍필봉의 집을 빌려서 잤다. 어머님과 나는 누이와 함께 배의수의 집에 머물렀다.
대부분의 촌락이 흉한 불길이 들었으나 오직 홍씨와 배씨의 우막은 보존되었다. 그래서 배응보의 모친과 그의 처자, 배득창의 처와 노비가족 모두 세 집 가족이 이곳에 모였다. 사람은 많고 집은 좁아서 제대로 누울 수가 없다. 모두 무릎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게다가 지붕이 새어 비가 물을 붓는 듯하고, 또 마주할 불조차 없어서 그 곤란한 상황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한밤에 배득창이 와서 말하기를 “왜적이 사람을 죽이는 참상이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나는 처자를 버리고 멀리 달아날 계획이다. 지금 자네는 어찌할 건가? 자네처럼 젊은 사람은 반드시 목이 잘릴 것이야. 딴 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몸 보존할 것을 생각하게”라는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놀라 떨고, 간담이 떨어지는 듯했다.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는 “오늘 극변을 당하여 서로 몸을 보존키 어렵다. 왜놈들은 젊은 남자를 죽이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너희들은 각자 멀리 달아나서 몸을 보전하였다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너희들 한 몸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부모의 행복도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멀리 달아나거라”라고 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떠나서 오래도록 산다 한들, 부모님과 함께 죽느니만 못합니다”하니, 어머님은 더욱 비통해 하셨다.
홍필봉 집으로 가서 배공이 한 말을 아버님께 모두 아뢰었다. 아버님은 “비록 도적들이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모두 죽이기야 하겠느냐.” 홍필봉 역시, “자네는 배공의 거짓말을 경험하지 않았느냐?” 하시고, “절대 현혹되지 마라. 온돌에 편히 누워서 몸에 걸친 젖은 옷이나 말리게” 하시어 두려움이 조금 누그러뜨려졌다. 과연 배공은 처음에는 멀리 숨는다고 스스로 약속하고는, 다음날 아침에는 아끼는 자식들과 모두 굴속에 들어가서는 종일토록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이 허망하고, 진실이 없음을 역시 알 것이다.
이날 배득보의 누이가 죽음을 당했다.
※ 이 글은 이후에 다시 보충한 흔적이 있다. 일기의 날짜는 4월인데, 사당이 겨울에 불탔다고 적고 있다.
1. 송공의 선영(宋公墓山) : 징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2. 징기(樹村里) : 개터의 앞마을. 마을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커다란 징개나무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상 수촌리이고, 상수촌, 중수촌, 하수촌이 있다. 상수촌은 수촌리 들판의 중동, 중평, 부흥리, 행촌이다. 고려말 橫溪 都允吉이 칠곡 동명에서 입향하여 세거한 곳으로, 성주도씨의 집성촌이다. 도윤길은 이 일기의 저자 도세순의 7대조이다.
1592년 5월 1일 맑음.
새벽에 배씨의 선영으로 들어갔다. 정오에는 읍내에 주둔한 왜적들이 금릉1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우리는 개터의 아재 집으로 왔다. 아재의 집은 다행히 불타지 않았다.
이날 헛되이 놀라서 산에 오른 것이 세 번이다. 은복 역시 도망을 갔으나 왜놈들에게 붙잡혔다가 돌아왔다. 머리를 모두 깎이고 왜옷을 입었다. 완전히 왜놈과 같다. 뜰 가운데에 엎드려서 울면서 말하기를, “처음 붙잡혔을 때 여러 왜놈들이 둘러섰습니다. 시퍼런 칼날을 내 머리에 갖다 대었을 때는, 이제는 살아서 고향 마을로 가지도 못하고, 주인님을 다시 뵙지도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비탄해 했다.
또 여종 수정은 봉명정2에 엎드려 있다가 왜에 끌려갔다. 그의 어미 애정이 그것을 보고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하늘을 보고 울부짖으며 엎어질듯 넘어질듯 왜적의 뒤를 따라갔다. 어떤 왜적은 칼을 뽑아서는 두들기기도 하였으나 칼날로 치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애정은 왜장이 書院(서원)에 앉아 있다는 말을 듣고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달려 들어가서 슬피 부르짖고, 길길이 뛰었다. 비록 왜놈이 잔악하고 포학하여 짐승 같은 성질을 가졌다고 하나, 역시 모녀의 정을 느껴서인지 곧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4월 29일의 일이다.
오늘 빌무산에 묻어 두었던 물품들을 되가져왔다. 그것은 옷과 돈, 서책이다.
1. 금릉(金陵) : 현 김천시.
2. 봉명정(鳳鳴亭) : 다징기(加樹村)에 있었다. 다징기는 징기와 伊川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동네. 벽진면 매수리.
1592년 5월 5일 아침에는 비, 낮에 맑음.
비로소 나의 관례1를 올리는 날이다.
저녁에는 모두 새 집에서 앉았다가 누웠다가 하였다. 사람을 시켜 문 밖을 보라 하니, 달려 들어와서는, “왜적 대여섯이 징기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나가 보니 과연 그러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동생을 안고는 집 뒷산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형님이 땀을 흘리며 왔다. 왜적이 길게 늘어서서 이미 개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우리는 갈마산2으로 달려 들어가서 소나무 숲 아래에 숨었다. 응진 아재도 역시 처와 자식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숨어 들어왔다.
한참 지나자 왜적이 배의수의 집에 들어갔다. 기왓장을 두들겨 깨고, 혹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는데, 그 소리가 숲과 골짜기까지 울렸다. 그것을 바라본 우리는 모두 두려워하며 얼굴이 파래졌다. 스스로들, ‘오늘은 죽었구나’ 생각했다. 응진 아재는 흙으로 얼굴을 바르고는 잠깐 피해 갔다. 이희백과 그의 종 봉산, 춘손 등은 개터에서 왜적의 뒤를 따라와서는, 손으로 지는 해를 가리키며 그 왜적들에게, “날이 이미 저물고 길이 멀므로, 속히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왜적들은 의수의 집에서 곧바로 읍내 길로 내려갔다.
이때 이희백은 倭佩(왜패)를 가지고 있었다. 왜가 그것을 보았으나 놀라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개터에 감춰둔 비단옷 열 벌 남짓 빼앗아 가져갔다. 저녁에 개터로 돌아온 일가들은 다음날 새벽에 증산3으로 피란을 가기로 약속했다. 이때 왜적은 오직 농부만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친 옷을 입고 손에는 호미를 쥐고 다녔다.
1. 冠禮를 올리는 날 : 冠日. 만 18세의 생일.
2. 갈마산(乫麻山) : 나복실의 동쪽산. 167m. 뒷산 왼쪽. 靑龍이라 표현함.
3. 증산(甑山) : 김천시 증산면. 당시는 증산이 성주 관할이었다.
1592년 5월 9일
오늘은 할아버지1의 제삿날이다. 비록 달아나고, 숨어서 사는 세월이지만, 차마 헛되이 보낼 수가 없어서, 단술과 떡을 마련하여 제사를 드렸다.
날씨는 이제 첫더위가 시작되고, 비 또한 바야흐로 내리고 있다. 몽호 아재2는 두 아들 시춘과 시인, 아내와 딸을 데리고 제사에 오셨다가 도롱이를 갖추어 입고 가셨다. 우리는 왕골자리를 맨몸에 걸치고 따라 나섰다. 말목재3를 넘어서 곧바로 적산사4로 내려갔다. 듣기로, 이 절의 스님 찬희가 왜적과 자주 내통하였다 한다. 그래서 우리는 황급히 대원령5을 지났다. 형님은 여기서 운곡으로 돌아갔다. 아버님이 몸이 몹시 편찮아서 돌아간 것이다. 우리는 비를 무릅쓰고 진흙에 빠지면서 저녁에야 정평6의 이돈복7 집에 이르렀다. 두 다리가 몹시 시달려서 모두 부르텄다. 이곳에서 방을 빌려 머물렀다.
연 사흘간 비가 왔다.
1. 할아버지(都台輔) : 字 公佐. 1501년 생, 1558년 5월9일 졸.
2. 몽호(夢虎) : 아버지 몽기의 사촌동생. 1538년 8월15일 생, 1608년 10월16일 졸. 中城將. 세순의 할아버지는 몽호의 백부이다.
3. 말목재(馬項峴) : 금수면 명천리에 있는 고갯길.
4. 적산사(赤山寺) : 積山寺라고도 함. 금수면 어은리에 있다.
5. 대원령(大院嶺) : 말목재에서 적산사로 넘어가는 고개.
6. 정평(井坪) : 금수면 광산리 중평. 지금도 마을에서는 정평이라 부른다. 이 일기에서 주요 거점이 되는 곳이며, 증산 문예촌, 합천 해인사, 두사촌, 지례 등지로 내왕할 수 있는 길목이다.
7. 이돈복(李敦復) : 세순의 매제. 당시 그의 누이와 결혼을 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592년 5월 14일 맑음.
아침에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倭奴(왜놈)들 10여 명이 계곡을 건너서 왔다. 우리는 정평의 뒤 개고개1를 달려서 넘어갔다. 포천에 이르러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봉춘과 이득구가 물을 건너가는 것이 보인다. 우리도 역시 어머님을 업고 포천2을 건너갔다. 봉춘 등과 앞산3에 올라 골짜기 가운데에 엎드려 있었다.
날이 저물어 멀리 마을을 바라보니 연기가 자욱하다. 형님은 산 기슭으로 내려가 길을 물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평사람들은 牧伯(목백)이 싫어서 피란을 가는데, 이를 무고하여 피란 온 사람들을 도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들 돌아서 내려가는 것을 기다렸다. 저녁에 우리도 자리섬으로 가서 최망년4의 집을 빌렸다. 몽호 아재는 먼저 이곳에 와 계셨다.
1. 정평의 뒤 개고개 : 대가면 도남리에서 가천면 중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2. 포천(布川) : 성주호에서 내려오는 대가천. 가야산 북쪽, 돌목재, 형제봉에서 흘러내려오는 화죽천도 포천이라고 한 듯하다. 산속에 ‘포천계곡’이 있다.
3. 앞산 : 신흥후산의 남쪽 맞은편 시여골 쪽 산. 매우 가파른 산.
4. 최망년(崔忘年) : 정평 거주. 잘 아는 이웃인 듯. 도몽호가 그의 집에 머물렀다. 자주 만났고, 세순과 다툼이 있었다.
5월 17일 맑음.
왜적들이 정평에 도착하였다고 소문을 들었다. 몽호 아재 일가는 함께 신흥후산1으로 숨어 들어갔다. 산은 깎아지른 듯 높아서 발을 붙일 수가 없다. 바위언저리를 잡고 고갯마루까지 올라갔다. 모두가 피곤해서 그늘에 누웠다. 해는 이미 기울어 저녁이 되었다. 시춘 형님은 산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숲속으로 피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숲속으로 달려서 들어갔는데, 이것은 황급히 달아나는 자가 있어서, 왜적이 오는 줄 알고 놀라서 숨어 들어간 것이다. 조금 있다가 형님이 외치는데, “이것은 헛된 일이다. 마을사람들이 시원스레 편히 앉아 있더라. 너도 곧 돌아 내려가라”는 것이다. 과연 헛되이 놀란 것이었다. 바삐 달려가는 것은 잃어버린 소를 쫓는 것이었다.
이후 닷새 동안은 집에 있었다.
1. 신흥후산(後山) : 가천면과 금수면의 경계 봉우리 562m. 독용산성의 동편. 시여골의 북쪽에 있다.
5월 28일
忘年(망년)의 집에 있었다.
“속담에 ‘숲속에 들어간 새가 오랫동안 날지 않으면 화살촉의 환란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헛된 말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은 날지 않는 새와 같은 것이다” 하며 도호 아재와 함께 증산으로 향했다.
흙비는 그치지 않았고, 검은 안개가 자욱하였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고개를 넘었다. 고개는 갈수록 가파르고 위태롭다. 쉬었다가 다시 올라 고개 위에 이르니 숲이 하나 있는데, 천왕봉1이라 한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반드시 치성을 드리고 지난다고 한다. 종숙부의 어머니 역시 이 앞에서 기원을 했다. “여기에 계신 영험한 신령이시여! 원하옵건대, 우리 일행이 앞으로 다가올 액운을 모두 벗어나게 해 주소서.”
내가 웃으며 치성을 드리는 것을 말렸다. “만약 천왕이 있어 영험하다면 읍내에 있는 천왕당2이 어떻게 불길에 휩싸였겠습니까? 헛된 기원은 하지 마세요.”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보고는 “영명한 신 앞에서 모름지기 그런 번잡한 사설은 늘어놓아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저녁이 거의 다 되어서 증산 문예촌3에 도착하였다. 오직 몇 채의 집이 있었지만 이미 피란 온 사람으로 가득 찼고, 처마 밑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나무에 기대어 노숙을 하는 사람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나도 잘 곳을 얻지 못하여서 방황하고 있는데, 이득구4가 梁年(양년)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찾아가서, “날도 이미 어스레하고 비도 부슬부슬 내리니 부탁인데, 하룻밤만 빌려서 지내자”고 청하였으나 득구는 처음에는 집이 협소하다는 것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내가 “절친한 사이에 어찌 이렇게 야박한가? 이렇게 비까지 오는 날에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란 말인가?”라고 꾸짖으니 득구는 마지못해 들어오게 하고 저녁도 차려 주었다.
송원탁 아재5와 그의 형제들 역시 모친을 모시고 왔다. 양설경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내가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이날 밤은 우리 형제는 아버님, 송씨 어른과 함께 양설경의 방앗간에서 잤다.
1. 천왕봉(天王峰) :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서 돌목재 혹은 石項嶺이 있는 능선을 타고 올라가서 서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는 봉우리(1078m)로 추정된다.
2. 천왕당(天王堂) : 성주성 남쪽에 서낭당마을이 있었음. 이곳에 천왕당이 있었으나 현재 없어지고 커다란 홰나무가 있다. 1568년 목사 김운재가 淫祠라 하여 불태워 버렸다가 염병이 만연하여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3. 문예촌(文禮村) : 위치는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에 있다. 증산면사무소에서 가야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해발 550~600m의 산간마을이다. 이 글에서는 원문에서 적은 대로 ‘문예촌’으로 그대로 번역하였다. 세순은 그의 가족, 이웃 40여 명과 이곳에서 번갈아 가며 수년간 피란하였다.
4. 이득구(李得龜) : 衡의 손자사위인 이각훈의 자. 세순의 재종고모의 아들.
5. 송원탁(宋遠度) : 여러 형제들이 함께 피란 옴. 세순의 증조부의 외손자. 僉知를 지냈다. 세순의 아버지 夢麒의 고종사촌
5월 그믐 맑음.
송씨 아재가 양설경의 집에서 나와서 초막동1으로 돌아가시고, 이경춘은 양년의 집에서 설경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양년의 집이 조금 넓어져서 붙어 지낼 만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봉춘2과 이득구가 함께 양년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한 마을의 사람들이 거의 모두 이곳에 모이게 되고, 우리 집도 친가 외가 모두 모였다. 산과 골짜기가 깊고 멀어서 왜적의 통행 길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안도하였다. 해가 뜨면 모였다가 어둠이 깔리면 흩어졌다. 황폐한 구릉에 길이 생기고, 마침내 큰 길이 이루어지더니, 하나의 번성한 촌락이 되었다.
유월 초순 사이에는 왜적이 지례3에 머물고 있었다. 왜적들은 빈 굴을 파기도 하고 증산과의 경계4를 침범하기도 하였다. 인심이 흉흉하여 모두들 거창으로 넘어 들어가고 남은 사람은 오직 김씨 어른5, 도호 아재, 이봉춘과 이득구 등 몇 명뿐이다.
이때 동생 복일6은 이질에 걸렸다. 동생은 병술생으로 올해 일곱 살이다. 이질에 걸려서 낯빛이 파리하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바싹 말랐다. 약을 구하기가 힘들어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민물고기가 몸에 좋다고 한다. 득구에게 그물을 빌리려 하였더니, 그의 어머니와 자식은 선친이 쓰던 물건이라 하여 쉽게 빌려주려 하지 않고, 끝내 허락지 않는다. ‘우리같이 돈독한 사이에 그렇게 박절할 수 있느냐’며 꾸짖자 찢어진 그물을 빌려주었다. 봉춘, 돈복과 함께 용추계곡7으로 가서 그물을 펼치려 하는데 왜적이 부항고개8를 넘었다는 것이다. 황급히 그물을 걷어 말아서 달려왔다.
이때 몽장 아재가 변방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며칠을 묵었다.
1. 초막동(草項) : 문예촌 바로 밑에 있는 마을.
2. 이봉춘(逢春) : 이경춘과는 형제인 듯. 이득구와 항상 함께 지낸다.
3. 지례(知禮) : 현재 김천시 지례면.
4. 증산(甑山)과의 경계 : 증산과 지례의 경계는 864m의 삼방산이 가로막혀 있고, 부항고개나 그 남서쪽에 있는 가릇재를 넘어야 갈 수 있는 곳으로 쉽게 접근 할 수가 없다.
5. 김씨어른 : 김윤곤 아재의 형.
6. 복일(復一) : 세순의 큰동생. 다음해 7월 13일 오랜 굶주림 끝에 보리밥을 먹고 죽음.
7. 용추(龍湫)계곡 :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의 용소. 문예촌의 서쪽 고개 넘어 약 4km 거리. 이 골짜기의 바로 위에는 修道庵이 있다.
8. 부항고개(釜項峴) : 왜적은 지례에 있고,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문예촌이나 용추계곡 쪽으로 들어올 수 있다.
6월 18일
한밤중에 김씨 어른이 크게 외치며 말하기를, “지례의 왜적이 오늘 틀림없이 이곳을 침범할 것이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나는 거창1으로 갈 것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놀라 봉춘 등과 바삐 식사를 하고 함께 출발하였다. 날씨는 아직 덥진 않으나 길이 아주 어두웠다.
어머님이 복례를 업고 가셨다. 계곡 가운데에 이르자 이끼 낀 징검다리가 몹시 미끄럽다. 실족하여 넘어져 왼쪽 정강이를 다친 것도 알지 못하고 다친 팔을 살펴보지도 않으시고는, “내 팔을 들려 해도 들 수가 없는데 어찌된 일인가?” 하신다. 나는 깜짝 놀라 팔을 주무르면서, 이미 다쳤다고 하자 그때야 낯빛이 하얗게 놀라며, “내게 웬 재난인가, 재난인가?” 하신다. 버들가지의 끝을 꺾어 엮어서 다친 팔을 싸고 버드나무 껍질로 묶었다.
어머님을 부축하여 천천히 걸어서 산중턱 봉우리2에 이르렀다. ‘몸을 움직여서 걸어가면 상처가 더욱 아플 것이니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님은 한숨을 쉬며, “내가 여기에 남게 되면 너희들도 나를 따를 것이고,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한다면, 나야 여한이 없겠지만 너희들은 어찌 되겠느냐?”라고 하신다. 우리는 억지로 걸어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쓰러졌다. 서로 마주 보며 통곡하였다.
김로 아재와 나는 함께 갔다. 아재의 가족들은 다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 형님은 운곡에 가셨다.
낮에는 어머님이 갈증이 심하여 마실 것을 찾았다. 봉춘이 이곳에 찬물샘3이 있다고 하여, 찾아가서 물을 떠와 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올렸다.
날이 저물어서 양년의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은 다친 팔 때문에 아파서 옆으로 누울 수가 없었다. 몸을 기울여서 침대에 기대어 밤을 보냈다.
1. 거창(居昌) : 문예촌에서 남쪽 달음재를 넘으면 바로 거창군 가북면 개금이 나온다.
2. 산중턱봉우리(中峰) : 문예촌 남쪽 목통령(달음재)쪽 찬물샘 아래의 봉우리로 추측된다.
3. 찬물샘(冷泉) : 문예촌 남동쪽 산꼭대기 1030m 봉우리 바로 밑. 지금도 물이 난다.
6월 19일
아침에 뒷산에 올랐다.
낮에는 형님이 운곡에서 오셨다. 어머님의 부상 소식을 듣고는 달려 와서 통곡을 한다. 서로 얘기를 나눌 즈음에 김택이라는 자가 산중턱에서 왜의 소리를 질러댔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서 황급히 일어나서 누군지 탐문하였는데, 소리를 지른 사람이 김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어머니도 나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함께 놀랐으니 그 어리석은 짓이 심하지 않은가.
저녁에 돌아오면서 우리 형제가 어머님을 좌우에서 모셨다. 어머님은 탄식하여 말하시기를 “내가 오늘에야 자식들이 귀한 줄을 알았다”고 하신다. 복례를 불러서 안아 무릎 위에 앉히며, “내가 만약 불행히 죽게 되면 장차 너를 누가 돌봐줄꼬?” 하시며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복일이는 또 이질에 걸려서 벌써 열흘이나 되었다. 숨소리가 곧 끊일 듯하고 스스로 걷지도 못한다. 내가 늘 업고서 다녔다.
지금 사방에 숨은 왜적들이 안개처럼 모여들고, 주성의 수산1에서는 도륙질이 전보다 더 심하다. 민심은 더욱 불안하여 모두들 깊은 산에 숨어 들어갔다. 우리는 어머님의 병환 때문에 멀리 가지 못했다.
이곳에 머물면서 새벽에는 산으로 올라가고, 저녁이 되면 돌아오는 일과가 열흘이 넘었다. 근력이 쇠약해지고 손발이 모두 부르텄다. 가히 난리의 고통을 알겠다.
1. 주성의 수산(州城의 蒐山) : 성주 읍 주위의 성곽. 고려초 성주지역이 경산부로 승격할 때 토성이 있었는데, 중종 15년(1520년) 석축으로 크게 개축하였고, 용사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선조 24년에 다시 개축함. 둘레 2046m 높이 2.72m.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짐.
7월 1일
어머님이 또 가슴과 배가 편찮아 아주 위태로웠지만, 조금 후에는 나았다.
종형 시춘이 거창에서 와서 어머님을 뵙고는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또 헛되이 놀라서 거의 날마다 산에 올랐다.
동생 복일은 이질이 아직 낫지 않았다. 입이 써서 꿀을 구하려 하였으나 주인이 인색하여 주지 않는다. 안타까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내가 스스로 벌통에서 꿀을 따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오히려 벌침에 쏘였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거리가 되었다. 주인은 그 뜻이 간곡함을 알고는 질 좋은 흰 꿀 몇 잔을 주었다.
이날 또 송아지를 잡아서 배 협 가족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때 배 협은 거창에 있었다.
7월 21일
형님이 운곡으로 가셨다. 다음날 노비 어둔을 시켜서 타다 남은 잡책 20여권과 농기구1를 가져오게 하였다.
다음날 형님이 돌아올 무렵 의병대장이 지례의 왜적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여, 죽고 부상을 당한 군사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왜적 또한 지치고, 그 수가 모자라서 이곳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퇴각하여 개령2의 왜적들과 합류하였다. 증산은 점차 조금씩 편안해져서 산을 오르는 수고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1. 농기구 : 원문에는 鐵物이라 적혀 있음.
2. 개령(開寧) : 지금의 지례 동쪽인 김천시 개령면, 농소면, 남면 일대.
9월 1일
개터로 와서 종숙과 삼촌이 이곳에 함께 머물고, 노복들도 모였다. 이날 해인에 있는 논의 도지1를 받았다. 이것은 아재 네와 함께 지은 것이다. 이때 아재 중에는 다친 아들이 여럿 있었다. 한밤중에 그 도지 받은 곡식을 수레에 싣고 안원이에 이르러서 큰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시골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서 우리를 의심하여 아래로 돌을 던졌다. 내가 사람을 시켜서 우리들의 사는 곳과 성명을 말하고, 도지를 받아 가는 내력을 알렸다.
후리실2 뒷 고개에 이르러 형님은 운곡으로 돌아가셨다. 그곳의 추수를 할 계획이다. 나는 노비 윤금과 은복을 거느리고 가는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종일토록 그치지 않고, 짐이 모두 젖어서 후리실로 되돌아왔다. 다음날 형님도 돌아오셨다.
5월에 증산에 들어온 이후 부모님을 모시고 늘 여기에 있었다. 형님은 노복들을 시켜서 운곡에 왔다 갔다 하면서 왜적들의 동향을 엿보았다. 때로는 숨어 지내고, 때로는 땅을 일구어 씨를 뿌렸다. 곡물을 수확하여 땅에 묻기도 하고 옮겨와서 고기반찬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또 서로 번갈아 사람을 보내 왜적의 동태를 살펴보게 하였다. 비록 난리 중이지만 식량을 쌓아두어 오히려 여유가 있다. 우리 집안이 이렇게 보존된 것은 형님의 공력이 아닐 수 없다.
1. 도지(租) : 경작지를 빌려주고 그 소출의 일부를 받는 지세.
2. 후리실(候里村) : 원문에는 候里村이라 적혀있는데, 지금의 금수면 厚平里를 말함.
9월 10일
초계로 가려고 남노 봉산과 여비 실금을 거느리고 나섰다. 달음재1에 잠복해 있는 군사를 피해 길이 아닌 곳을 넘어서 해인사2에 이르렀다. 진사 아재가 지족암3에 기거하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뵈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해인사에서 잤다.
다음날 용담4에 계신 김대부 어른 집에서 잤다.
다음날 초계에서 외가 친척을 만났다. 마치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을 본 듯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9월에는 증산에서 초계 외가로 가서 할머니5를 모시며 그곳에 머물렀다.
10월이 되어서는 노비 연금이의 집이 깨끗지 못하여 수대와 연화6 두 여비가 연이어 서로 아파하는데,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병이 옮길까 염려되어 쪽의 문을 막고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했다.
구차하게 며칠을 머물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연로한 어른을 병이 나도는 곳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빨리 이곳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이달 18일에 할머니를 모시고 병을 피해 진양7의 집으로 갔다.
아침 식사 후에 담걸을 거느리고 초계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에 있는 잡물과 나락 20여 석을 다락에 넣고 잠갔다. 그 나머지 옷가지와 곡물은 모아 항아리 속에 넣어서 마루 아래 묻었다. 연금이를 불러서 잘 지키라고 이르고 진양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이곳에 있는 것이 지루하고, 또 병자의 집 가까이 있다 보니 거처를 옮기고 싶어졌다. 늙은 여비 돌금을 시켜서 웃매실8에서 집을 빌리라고 하였으나 허락하는 사람이 없다. 저녁이 되어서야 할머니를 모시고 어린 여비 선금과 옥대 등을 거느리고 두사촌9의 이인수10집을 빌려서 들어갔다.
인수는 외가의 孼族(얼족)이다. 성품이 매우 넓고 후덕하여 우리가 도착하자 기쁜 마음으로 맞이한다. 그는 안방을 비워서 우리에게 내주고, 그의 식구는 흙집으로 된 별채에 거처하였다. 그가 우리에게 후대하는 정성이란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인수는 全成君(전성군)의 후예이다. 생활이 곤궁하여 편히 살진 못하지만 선조의 神主(신주)를 모두 신주함에 넣어서 벽에 걸어둔다. 명절이나 기일이 닥치면 반드시 신주함을 열어서 천위11한다. 비록 난리의 곤궁함 중에 있어도 선조를 모시는 예를 다하고 있으니, 그 근본을 좇는 깊은 정성을 가히 알 수 있겠다.
1. 달음재 : 문예촌에서 거창군 개금으로 넘어가는 고개. 거창군 가북면 개금에서는 ‘목통령’이라 부르고, 문예, 성주 쪽에서는 ‘달음재’라고 부른다.
2. 해인사(海印寺) : 경남 합천 가야산 남쪽에 있는 절.
3. 지족암(知足庵) : 해인사 내의 암자.
4. 용담(用淡) : 고령군 쌍림면 백산의 강가를 용담들이라 함. 현 학골마을.
5. 할머니 : 원문에는 繼祖母.
6. 윤금, 수대, 연화(連金伊, 守代, 年化) : 노비 가족.
7. 진양(晉陽) : 합천군 대목면 정양리. 합천버스정류장 남쪽 3km 지점.
8. 웃매실(毛也上村) : 합천군 율곡면 낙민리 매실마을. 웃마을 아랫마을이 있고, 현재는 20여 호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는 ‘毛汝谷’라 씌었다. 이 마을은 충무공도 1597년 6월4일부터 7월18일까지 머문 곳이다.
9. 두사촌(豆士村) : 합천군 율곡면 두사리. 현재는 杜泗里라고 쓰고 있다. 웃매실의 옆 마을.
10. 이인수(李仁受) : 외가의 얼족. 강양이씨.
11. 천위(遷位) : 제사를 지낼 때 위패를 옮겨 모시는 일.
12월 11일
새벽에 절을 나오니 숲과 골짜기가 어둑어둑하다. 호랑이가 나오지 않을까 하여 칼을 빼들고 걸었다. 무릉교1에 이르니 해가 너덧 길 올라있고 이때부터 배고픔과 피로가 더욱 심하게 느껴진다. 몇 걸음 걷다가 쉬고, 혹은 눈덩이를 움켜쥐고 먹으면서 겨우 해인사에 이르렀다. 문이 닫혀 있다. 한 스님을 불러서 들어갈 것을 청하였으나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린다. 마침내 담을 넘어서 들어갔다. 송진사2와 가족들이 거처하는 곳을 듣고는, 바로 종고모님을 찾아뵈었다. 문안을 드릴 겨를도 없이,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한 끼도 못 먹어서 몹시 배가 고프고 피곤한 것을 먼저 아뢰었다. 곧 아침밥을 먹고, 또 김갑령 아재 내외분이 모두 이곳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가서 인사를 드렸다.
곧바로 사현3 마을정4을 넘어서 달음재에 다다르니 눈이 한 자나 쌓여 있고 호랑이의 발자국이 길 여기저기에 나 있다. 심히 무섭고 넘어가기가 힘이 들었다. 素峴(소현)에 이르러서 주인 양설경5을 만났다. 집안이 아주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이곳으로 가는 길가에 우희섭의 여비 복개가 염병으로 죽어서 내버렸기 때문에 그곳으로는 곧바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길을 버리고 문예령6을 넘어서 문예촌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서쪽에 남아 있었다.
나는 9월부터 초계에 가 있다가 넉 달 만에 처음 오는 것이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사람을 보듯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신다. “이런 지독한 변란을 만나서 일가가 무사하고,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너는 먼 곳에 있고 서로 만나지 못하니, 너를 그리워하는 이 애비의 마음이 어떠하였겠느냐. 이렇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은 병이 되어 날마다 더했는데, 이제야 만나보게 되니 기쁜 마음 이길 수가 없구나.”
이때 김씨 어른은 처자를 데리고 양설경의 집에 거처하고 있었다. 염병 기운이 바야흐로 더욱 심하고 나의 거처는 양설경의 집과는 단지 울타리 하나 사이라 염병이 전염될까 두려웠다. 문을 막고 출입을 삼가고, 말 또한 감히 높게 하지 못했다. 다만 도율과 도중정 아재7는 여막을 엮어서 서로 가까이 하고 있으나 모두 별 탈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였다.
형님은, 병자가 있는 집과 가까이 하면 병이 옮을까 늘 걱정이 된다며 나를 빨리 돌아가라고 하지만, 나는 억지로 청해서 머물기로 하였다. 저녁이 되자 어머니께서 손수 저녁을 지어서 먹여주셨다. “너는 오늘 내가 지은 밥을 오늘 배불리 먹어라. 다음날 서로 만날 것을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느냐.”
1. 무릉교(武陵橋) : 가야면 무릉동에서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 해방 전에 만든 계곡 위의 큰 길이 생기고부터는 통행이 거의 없고, 2002년 홍수로 다리마저 떠내려갔다. 지금은 교각의 흔적만 남아있다.
2. 송진사(宋進士) : 송원탁(宋遠度). 세순의 종고모부.
3. 사현(寺峴) : 절고개. 해인사에서 거창군 개금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추측된다.
4. 마을정(馬乙丁) : 절고개(寺峴)와 동일한 지명인 듯. 당시에는 개금 마을이 없었는지, 여러 번 지나다녔는데도 지명 언급이 없다.
5. 양설경(梁雪京) : 문예촌에 있는 집주인. 세순의 부모 형제가 봄부터 이 집에 거처하였다.
6. 문예령(文芮嶺) : 문예촌과 좌일곡령 사이에 ‘무내미’가 있고, 서쪽에는 ‘문에미골’이 있다. 이 골짜기의 남쪽 고개인 좌일곡령을 문예령이라고 부른 듯하다.
7. 도중정(都仲丁) : 도응규(應奎)의 子. 도응(都膺)의 후예. 도응의 부 길부(吉敷)는 이성계와 함께 왜구 토벌의 공을 세우고, 응은 이성계의 절친한 친구로 수차례 교지를 내렸으나 거절하고 은거하였다.
12월 14일
김씨 어른이 먼저 돌아가신다. 나도 뒤를 따라서 주학정 위에 이르니, 윤금이가 지난번의 병이 아직 낫지 않지 않은 채로 천천히 위로 올라와서는 우리들을 보고 땅에 엎드려서 통곡을 한다. 그 까닭을 물어보니, 오랫동안 목 놓아 운 후에 답한다. “가지고 있는 식량은 곧바로 잃어버렸습니다. 병을 안고 시골 민가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모두 막대기로 쫓아내고, 길가에 엎어져서 눈서리를 맞은 지가 며칠이 되었습니다. 병들고 또 허기가 져서 도무지 집으로 돌아갈 기운이 없으니, 만약 내가 이 골짜기에서 죽게 되면 누가 나를 위해서 내 뼈를 덮어주겠습니까?” 하며 목이 메도록 통곡을 한다.
나는 측은한 마음을 스스로 억제를 할 수가 없어 바위 위에 앉았다. 명복으로 하여금 가지고 간 찰밥을 떼어서 윤금이에게 먹이도록 하였다. 명복은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고, 또 병이 든 사람과 이처럼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여 다시 윤금을 달래 보내면서 몸을 보전하는 것에 만전을 다하여 집으로 돌아오도록 일러주었다.
곧바로 박씨 어른의 집에 가서 잤다.
12월 15일
명복을 증산으로 보내서 지난날 감춰두었던 어염을 보내오도록 하였다. 나는 홀로 두사촌의 이인수의 집으로 갔다. 할머니1는 늘 평안하시다.
대청 아래 묻어 두었던 벼 서른 말은 동짓달 2일에 잃었다. 24일에는 찹쌀 열 말과 바지 두 벌, 이불 한 벌, 옷 한 벌, 마 여섯 속, 나락 열 말을 잃었다.
또 12월 6일에는 올벼 24말을 잃고 23일에는 벼 13말, 삼베치마 한 벌, 깨 한 말을 도둑맞았다. 信伊(신이)가 훔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추궁하였으나 승복하지 않는다. 어찌할 방법이 없다.
1. 할머니 : 조모 밀양박씨는 1560년 12월 8일 사망으로 되어 있다. 앞의 계조모를 말하는지, 외할머니를 말하는지 분명치 않다.
12월 25일
새벽에 金吾乙未(김올미)가 와서는, 도적맞은 물건을 찾을 수 있겠다는 것이다. 자세히 물어보니 姜于音石(강움석)이라는 사람이 훔쳐갔다는 것이다. 나와 올미가 함께 연금의 집으로 갔는데,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연금이의 식구들은 염병이 다 나아서 이웃사람들이 서로 통하고 내왕한다. 먼저 움석이와 함께 도둑질을 한 아이를 붙잡고 추궁을 하니 내력을 순순히 자백을 한다. 都將(도장) 이두성을 불러서 움석의 집을 기습하였으나 놓쳤다. 그의 아비와 한막손이란 사람을 체포하고, 막손을 옥에 가두었다. 막손은 움석이의 동서이다. 다음날 관가에 고소를 하고, 잃은 물품들을 추징하려고 관가에 갔으나 태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 그 후에 수소 한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를 추징 받았다.
그날 저녁에 식사를 받아서 먹으려고 하는데, 기운이 매우 고르지 못하고 하품이 자주 나오며 한기가 온몸에 퍼져서 눕게 되었다. 이것은 전날 연금의 집에 갔다가 옮은 전염병이다.
12월 28일
병세가 점점 깊어진다. 그래서 할머님을 내 스스로는 더 모실 수가 없다. 나는 본가로 들어가서 열흘이나 더 앓은 뒤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할머님과 어린 노비가 번갈아 전염이 되어 이로부터 전염병이 다시 치열해졌다.
1593년 3월 3일
선비 이윤거가 왔다. 대청 남쪽 처마 밑에 앉아서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날이 저물어 돌아갈 즈음에 시 한 수를 읊었다.
幽人醉起堆窓望 (취한 몸 일으켜 창을 열고 바라본다)
寂寂江沙十里烟 (적적한 강가엔 십리 길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更愛風邊紅艶在 (문득, 바람결에 실려 온 붉고 고운 향기 사랑스러워)
一枝村杏帶春姸 (시골마을 살구 가지에도 봄기운이 걸렸구나)
이윤거의 삼형제는 그의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우리 집과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거처한다. 나와 날마다 함께 지내면서 정이 매우 두터워진 사이이다.
5월 1일
감년이 星山(성산)에서 왔다.
5일에 식량을 가지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달아났다. 심히 애통하다.
9일에는 연금1이 명나라 군대2에 지원하기 위해서 기마군3을 따라 상주4로 갔다.
25일에는 종숙부 도장 아재가 왔다. 아버님이 병환이 들었는데 무슨 병인지 이름조차 모르다가 10여 일이 지난 후에 일어나셨고, 이제는 형님이 번갈아 누워서 병환중이라고 전한다.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정신이 종잡을 수 없이 어지럽다.
이 무렵 강물5이 불어서 넘실거리고, 건너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부모 형제들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서 다만 스스로 속을 썩일 뿐이다.
1. 연금이(年金) : 男奴. 명군에 지원함. 連金, 連金伊와 동일인. 연금은 마지막까지 세순과 함께 지낸다.
2. 明나라 軍隊 : 원문에는 天兵이라 표기하였다.
3. 마군(馬軍) : 기마부대
4. 상주(尙州) : 경북 상주. 벽진에서 서북쪽 30km 도시. 김천의 북쪽에 접해 있음.
5. 강물 : 지금의 황강. 강이 굽어 흐르는 안쪽에는 매실, 두사촌, 안천마을이 있고, 바깥쪽에는 웃기, 정골 마을이 있다. 上巳江이라 적고 있으나, 지금은 웃기라고 부른다.
6월 1일
도장 아재1가 비로소 돌아오셨다. 옥수수가루 닷 되를 광원에 보냈다.
7일에는 연금이가 상주에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광대원에 들렀는데, 전염병이 돌고 있고, 어머님2은 이미 병환으로 누웠다는 것이다.
11일 명복3이 광대원에서 왔다. 세상이 끝나고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비로소 전한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세상천지가 망망하여 그간 예를 갖추지 못하고 장례를 치른 일들은 차마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1. 도장(都章) : 세순의 종숙부.
2. 어머님 : 淑夫人 江陽李氏 良受의 女.
3. 명복(命卜) : 奴婢.
9월 6일
새벽에 담걸의 아내가 달려와서 아뢰기를, 합천 사람들이 무리를 이뤄서 금대의 집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놀라 일어나서 그곳을 가 보니 정말 그러하다. 금대를 묶어서 끌고 가는 것이다. 副將(부장) 이명세에게 청하여 마을 사람들을 모으게 하고 강가1까지 따라가서 금대를 빼앗아 왔다. 그 무리들이 흩어졌는데 한 사람을 잡았다. 그를 묶어서는 곤장을 쳤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 사람들은 금대의 남편 집안 사람으로, 소를 한 마리 끌고 가서 금대의 집에서 사사로이 도살하였다는 것이다. 江陽(강양)2 사람 유덕명이 소를 잃어버려서, 그 소가 아닌가 하여 이같이 밤을 틈타 잡으러 왔다는 것이다.
1. 강가 : 江滸. 上己江 가.
2. 강양(江陽) : 지금의 정양. 합천군 대목면 정양리. 합천호 옆의 마을이다.
11월 13일
문정자에게 판 은값을 받으려고 샘실1로 갔다. 문씨 아재가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하였다. 다만 이강산과 더불어 서로 얘기하다가 저녁이 되어서 돌아왔더니 배복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고양에서 나를 찾아와 학수고대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서로 만나니 너무도 기쁘다. 저녁을 먹고 연금의 작은 방에서 함께 잤다. 마른 대나무를 태워서 콩을 구워 먹고, 밤이 새도록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이런 난리 중에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날 아침에 연금이 밥을 지어서 그가 가는 길에 올렸다. 그와 함께 손을 잡고 두사강 위에까지 갔다. 강둑을 배회하면서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다. 헤어지고 나니 마음이 아득하여 온종일 무료하였다.
1. 샘실(泉谷) : 합천군 율곡면 본천리에 있다.
11월 19일
형님은 이의득을 보러 용담으로 가셨다. 의득은 우후1이다. 수군을 순시하는데, 장정들을 징집하여 군에 보내는 일을 맡고 있다. 주달문이 청하기를 이 장수에게 연통하여 징집을 면제해 주면 후하게 보답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님은 박씨 어른을 들이대며 주달문의 징집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의득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날 나는 연금을 거느리고 강양 시장2에 가서 나무를 팔아 쌀을 사려고 했으나 이득이 되지 않아서 돌아왔다.
1. 우후(虞候) : 節度使 밑에 있는 副職으로 병사를 징집하는 募兵官.
2. 강양시장(江陽市場) : 합천시장. 현재의 正陽池 근처.
11월 25일
형님이 연금을 거느리고 초계1사람들과 함께 팔거2의 유 총병3에게로 대나무를 옮겼다. 도중에 돌아왔는데, 대나무를 옮기는 군사는 많이 있었지만 군사들이 그곳으로 가질 않았고, 홀로 갈 수가 없어서 돌아온 것이다.
27일에는 형님이 다시 명나라 장수의 진지에 갔다.
1. 초계(草溪) : 현재 합천군 초계면 초계리.
2. 팔거 : 대구의 서쪽 칠곡군. 지금은 칠곡의 일부가 대구시 서구에 속해 있다. 이전에는 성주가 팔거의 속현이었다.
3. 총병(摠兵) : 병력을 총괄하는 임시직.
11월 그믐
낮에 아버님이 어린 동생을 거느리고 홀로 작은 방에 앉아 계셨다. 나는 할머니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과실을 소매 속에 넣어 와서는 아버님께 드렸다.
윤11월 3일
문정자 아재가 종사관1으로 군에 온다는 말을 듣고 아버님과 함께 모두 가서 뵈었다. 이날 양림2의 밭을 팔고 거친 나락 아홉 섬을 받았다. 다음날 문씨 아재가 군수에게 청하여 좁쌀 다섯 되를 받아서 주었다. 저녁에 아버님을 모시고 돌아왔다.
6일에는 찰방3이 시골 마을에 곡식을 수색한다는 말을 들었다. 누구라도 10말 이상을 쌓아두면 징발해 간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황급히 곡식을 감추는 모습이 도적이 쳐들어온 것과 다를 바 없더라는 것이다.
1. 종사관(從事官) : 군영(軍營) 등에 소속된 무관 종6품직으로, 주장(主將)을 보좌하는 일을 함.
2. 양림(楊林) : 합천군 적중면. 초계의 남쪽에 있다.
3. 찰방(察訪) :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
윤11월 15일
주달문이 와서 말하기를, 자신이 사사로이 쌓아둔 곡식이 많음을 찰방이 알고는 그대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만약 종사관 문정자에게 청하여 징발해 가는 곡식을 반으로 감해준다면 그 감해준 것의 절반을 우리 집에 바치겠다는 것이다. 형님은 문정자 아재를 보기 위해 담걸을 거느리고 삼가1로 달려갔으나 아재는 멀리 외출 중이어서 보지 못하고 왔다.
1. 삼가(三嘉) :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종사관 문정자가 근무하는 곳.
갑오년 1594년 정월
비축해둔 식량이 점점 다해 가지만 달리 조치할 방도가 없다. 늘 죽을 끓여 먹으며 연명하고 있다. 굶주림이 날로 극에 달해가지만 나올 만한 계획도 없다. 아버님은 복례와 함께 연금의 집에 머물고, 연금은 신역이 면제되어 봄 석 달간의 식량을 충당키로 하였다. 형님은 누이, 복례와 星山(성산) 옛터1로 돌아갔다. 나물을 뜯어서 연명할 계획이다.
1. 성산(星山) 옛터 : 벽진 개터. 세순의 본가. 2년 전 4월에 왜적이 불태웠다.
3월 14일
할머니가 방을 나가시자 나는 방에 들어가서 찹쌀 한 되와 과일 약간을 몰래 가지고 나왔다. 종이에 싸서 다락 아래 기왓장 사이에 묻어 두었다. 또 金別坐(김별좌)에게 애공1을 빌려서 대나무 통 속에 넣고 나무로 입구를 막고 벽 사이에 감추어 두었다. 모두 형님과 누이에게 보내려는 것이다. 형님과 누이는 한번 가신 후에 내왕하는 사람이 없어서 소식이 막연하고, 아버님은 날이 갈수록 더욱 생각이 간절하여 눈물을 흘리며 염려하신다.
1. 애공(哀公) : 미확인. 여행을 떠나면서 갖춘 것이고, 대나무통 속에 잘 보관한 것으로 보아 달걀이 아닌가 추측된다.
3월 17일
장차 형님과 누이를 보러 갈려고 기장가루를 여행식량으로 장만했다.
소금과 조, 애공, 나락 약간을 내가 짊어지고 떠났다. 달리1 마을 앞에 이르니 해가 져서 박이립의 집을 빌려서 잤다. 이곳에서는 쑥으로 죽을 끓여서 먹었다.
1. 달리(達里) : 성주 수륜면 성리에 있다. 두사촌에서 고령을 거쳐, 해인사와 벽진 개터로 갈라지는 길목에 있다. 서쪽으로 가야산이 보이고 앞으로는 대가천이 흐른다.
3월 18일
운곡에 이르니 형님과 누이는 겨우겨우 명줄을 보전하고는 있으나, 굶주린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다. 서로 마주보며 말을 잊고 있다가, 노복들의 안부를 물어보니 명복, 애정, 수정은 이미 굶어서 죽었다는 것이다. 운곡에 머무르고 있을 때는 병화가 지나간 나머지, 사람 사는 집이라고는 남아있는 것이 없고, 쑥대밭이 되어서 땅에 묻혀있다. 오직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김경철의 폐허가 된 집뿐이다. 이곳에 김준 어른의 오남매가 돌아와서 살고 있다. 배응보는 우박곡1에 옮겨서 살고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서로 만나서 얘기해보지 못하였다. 그 외롭고 옹색한 참상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1. 우박곡(于朴村) : 고령군 쌍책면 상신리.
3월 25일
도별감 아재에게 쌀 몇 홉을 빌려서 可信(가신)의 어미에게 죽을 끓이게 하여 먹었다.
용담 박씨 어른 집에 가서 자고, 다음날 매실로 돌아와 보니 아버님은 별 탈 없이 겨우 지내신다. 형님과 누이가 근근이 명을 보전하고 있다고 아뢰니 불쌍한 마음에 온종일 눈물이 그치질 않으셨다.
4월이 되자 연금은 양식이 떨어져서 아버님을 잘 봉양할 수 없다고 하고, 또 기한이 이미 다 되었다며 얼굴색이 다분히 좋지 않은 모습이다.
5월이 되자 아버님은 동생 복례를 데리고 연금의 집에서 나와서 외가의 다락집 위로 거처를 옮겼다.
금옥으로 하여금 밥을 짓게 하여 드셨다. 나는 금옥을 데리고, 아는 사람들에게 보리1를 빌리고, 또 밭이랑에서 이삭을 주워서 죽을 끓여 끼니를 이었다. 김시거와 윤회중이 아버님을 여러 번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였다.
그 두터운 정은 잊을 수가 없다. 김시거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다. 그래서 이같이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때는 형님과 누이의 생사를 듣지 못해서 막막하다.
1. 보리(眞麥) : 타작한 보리.
6월 8일
새벽에 虛位(허위)를 진설하고 어머님의 제사를 올렸다. 이날 배응보의 아내가 우박촌에서 왔다. 제사떡을 음복하고는 깊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정이야말로 귀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이 시절에 떡을 만들어서 제사를 올리다니… 기특하고 기특하도다.”
배응보는 移轉穀食(이전곡식)을 받으러 옥천에 갔다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때는 기근이 극에 달하여 굶어죽은 사람들이 들판에 널려 있다. 시체들은 살쾡이와 이리의 밥이 되고, 까마귀와 솔개가 쪼아대니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시절의 참혹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는가.
형님은 보리 일 때문에 팔계에 가셨다. 나는 누이와 동생 복일과 옛 집터에 남아 있으나 식량이 다 떨어졌다. 나무열매를 따고 푸성귀를 뜯어서 먹으며 겨우 죽지 않고 연명하고는 있지만 동생 복일이는 더욱 쇠약하여 기력이 다해가고 있었다.
6월 22일
이여한 어른이 와서 나와 형제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았다.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애통해하며 동생 복일을 데리고 갔다. 저녁에 징기 사람이 와서 급히 나를 찾는다. 정신없이 달려가서 동생을 보니 목숨이 목구멍에 걸려 있고, 숨쉬기가 곧 멎을 것 같다. 이씨 어른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니, 처음 와서 보리밥을 먹었는데, 먹고 나니 숨이 막혔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제 동생은 영원히 떠나 버렸다.
아아, 슬프고 괴롭다.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동생을 업고 돌아왔다.
다음날 임시로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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