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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바위 성지와 순교자
충청남도 공주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린 곳이다. 후백제를 일으키기 위해 수많은 군사들이 일어나서 웅진에서 싸우다가 나당 연합군에게 쓰러져 피를 흘렸다. 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전라도에서 발호한 수만 명이 우금치 고개를 넘어 공주로 들어오다가 참패, 죽음을 당했다.
의로운 피를 수없이 흘린 공주는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전해진다.
공주는 한국 천주교 순교사 시초부터 끝까지 장엄한 신앙 고백의 피를 이어받았다. 조선 땅에서 천주교 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순교한 권상연은 공주에서 이주해 살다가 전주 땅에서 순교했고 '내포 지방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 1784년 권일신으로부터 영세 입교한 후 충청도 지방을 전교할 때 공주 지역은 중요한 선교 거점이 되었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공주 감영이 있었다. 충청도 각 지역에서 잡혀 온 천주교인들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배교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할 때에는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를 보면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보령, 진잠, 유구, 직산, 천안, 공주, 비인, 면천 등 충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의 전주, 광주, 경기도의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 출신의 유배 신자들 등 매우 다양하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붙잡힌 교우들이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왔고 이들은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바로 이곳 '황새 바위'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처형됐다.
공주 들머리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바위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져 있고 황새가 서식했다 해서 '황새바위'로 불린다. 달리 '항쇄바위' 또는 '황쇄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의 바위가 마치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인 '항쇄'의 모양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처형당했기에 '항쇄바위'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 '황쇄'에서 '쇄'가 옛말로서 '새'와 같다고 풀이해 '황쇄 바위'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5년에 발행된 공주 천주교회 연혁에 보면 분명히 '황새바위'라고 명시하고 있어 지금은 '황새바위'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교우들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만 해도 무려 248명에 이른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공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관장이 살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하라고 명하자 주저 없이 제 살을 물어뜯음으로써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한 손자선 토마스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다.
현재 공산성을 마주하고 아담하게 조성돼 있는 순교성지 공주 황새바위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공주 교동본당에서 세운 높이 13.8미터의 순교탑이 우뚝 서 있고, 공주의 순교자 248위의 명패가 새겨져 있는 돌무덤 형태의 경당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경당 앞 잔디밭에는 돌기둥 12개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이름 없이순교한 순교자들의 묘비석이자 12사도를 상징한다. 2002년 11월에는 성지 입구에 미사와 강연 등을 위한 대경당을 지어 축복식을 가졌고, 2008년 12월 22일에는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유적'이란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등록되었다. 2009년부터는 대경당을 보수해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3월 29일)]
황새바위 성지 약사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로 그 의미가 크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남북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감영이 있었다. 이곳 공주 감영에서는 각 지방에서 잡혀 숱한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기를 거절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청도 각 지방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부터 끌려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 전주,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의 교우들이 공주에 와서 순교 하였다.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학 죄인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교회사가 달레(Dallet, 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 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 둔다."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흘림이 계속되었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당시 '사학의 괴수'로 알려져 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과 10여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었고, 최연장자는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계층도 다양했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켰다. [출처 : 황새바위 순교성지 홈페이지]
황새바위와 해미 생매장지 - 남형으로 숨져 간 순교자들의 넋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순교 터가 되어 온 곳은 공주와 해미, 그리고 홍주였다. 이 중에서 해미는 병마절도사의 읍성이 있는데다가 내포 지역과 가까웠으므로 1799년에 인언민(마르티노)과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순교한 이래 박해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3구)는 1817년에 해미 포졸들이 몰려와 신자들을 해미로 끌고 가서 처형한 애환을 담고 있는 교우촌이다. 또 그 이웃에 있는 '용머리'(현 삽교읍 용동리의 주래)는 인언민의 생매장지로, 1991년 이래 삽교 본당 신자들이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조성한 사적지가 있다.
관찰사가 주재하던 공주 감영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다른 어디보다도 많았다. 지금의 공주시 반죽동 사대부고 자리에 봉황산을 뒤로하고 감영(監營)이 있었는데, 순교자들의 처형은 이곳이 아니라 교동에 있는 금강변의 '황새바위'(옛 공주 형무소 자리, 일명 항쇠(項鎖)바위)에서 행해졌다. 또 영장이 주재하던 홍주에서는 주로 관아(현 홍성읍 오관리) 인근의 형지나 옥 안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정에서 순교자들에게 내린 판결은 원칙적으로 정법(正法), 곧 참수형이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한 경우와 문초를 받다가 장형(杖刑)에 못 이겨 순교한 경우도 많았다. 교수형은 일반적으로 구멍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벽에 뚫은 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 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이 있었고, 한 번에 많은 신자들을 처형할 경우에는 두껍고 큰 널 가운데로 여러 구명을 뚫고 줄을 꿴 다음, 신자들의 목을 구멍에 넣도록 하고 양쪽에서 줄을 당겨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 1866년 11월에 홍주에서 교수형을 당한 김선양(요셉) 등 17명의 교우가 이 형벌로 순교하였다.
한편 홍주와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한국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형(濫刑)이 자행되었다.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형구돌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사람의 머리를 누인 뒤에 대들보 형틀을 내리쳐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것은 해미와 홍주에서 있었던 생매장이었다.
혹독했던 병인박해와 관련된 순교 터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적지로 조성된 곳은 해미로, 대전교구에서는 1975년 10월 24일 이 곳에 순교 탑을 건립하였으며, 1983년 12월에는 생매장지를 확보하여 본격적으로 사적지 조성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황새바위 순교자
1) 성 손자선(孫~) 토마스(1844-1866년) : 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덕산군 홍주면 신리 마을 거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열심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과 아버지는 1868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 니콜라우스(Nicolaus)도 순교하였다. 본래 부지런하면서도 성품이 침착한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신심이 두텁고 명성이 높았으며, 자기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전교했고, 순교 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모든 공소 예절을 하였다.
1866년 드디어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손 토마스가 살고 있는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용감한 손 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 때 원님이 그에게 천주교인인지 묻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관가에서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그때마다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손 토마스가 “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이때 손 토마스는 “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했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 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었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해서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덕산 원님은 손 토마스를 해미로 압송하였고 해미에서는 더 심한 형벌이 가해졌다. 두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양쪽에서 틀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이 참혹한 형벌에도 태연히 버티는 그의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공주로 압송하였다. 공주에서 원님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관헌은 배교한다는 고백을 받기 위해 세 번씩이나 곤장을 쳤으나 그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성 손자선은 1866년 부활 전날인 3월 31일 공주 감영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2)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1759-1801년) : 충청도 아산지방으로부터 태안반도에 이르는 일대의 평야를 내포평야라고 한다. 이 내포평야의 접경에 천안군 '여사울'이란 곳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 여사울에서 이존창 루도비코(1759-1801년)는 농가의 양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비록 양민 신세이나 가세가 넉넉하여 집안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였고 성장하면서 변혁의 열의가 깊어져. 마침내 학문에 대한 불타는 열망으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삼남지방에 그 이름이 자자하던 권일신의 형제들을 알게 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젊고 총명한 농민 출신의 학자인 이존창의 자질과 품성에 이끌려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스승은 이 신앙의 은혜로움을 제자인 이존창에게 전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특히 천주교에서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 아니라 천주교인의 본질과 그 실천방법까지 철저히 전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존창이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 스승 권일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일깨워주었다.
이존창은 그가 얻은 신앙을 혈족과 고향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열의에 찬 마음으로 여사울로 돌아왔다. 그는 사도적 열의에 불타 가족과 친척, 그리고 벗과 이웃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였고, 얼마 뒤에 그의 지식과 덕행을 보고 그를 따르는 신자수가 삼백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외의 기초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존창에 의해 이루어진 내포 천주교회는 한국 복음선교의 효시가 되는 명례방 집회 다음의 시자 공동체로서, 그뒤에 생긴 다른 어느 공동체보다 열심했다. 그리고 이후 백년 동안의 박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굳건한 토대가 있었다. 이렇게 내포지방에 널리 복음을 전한 그를 우리는 '내포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더욱 열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이 창설된 한국 초대교회의 평신도의 임시 성사 집행기에 이승훈, 권일신, 유항검과 함께 평신도 임시 성직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내포교회를 이끌었다. 그후 북경 주교로부터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채 성사와 전례를 집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연락을 받고 곧 중단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평신도 지도자로 여전치 열성적으로 전교활동을 하면서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을 도와 사제 영입운동을 전개하며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의 놀라운 전교활동에 대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위대한 재능에다 사람의 마음을 잡는 특별한 재주까지 겸하고 있어서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그에게 이끌려왔다. 그의 전교에 저항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천주교 신자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집안이 이제는 선비들의 집안뿐만 아니라 농부, 노동자, 서민, 빈민들까지 확대되었고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 멀리서 무리를 지어왔고, 종종 다른 신자들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존창의 헌신적인 전교활동으로 예산, 아산, 면천, 당진, 해산, 서산, 덕산, 태안 등 내포지방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놀라운 활동은 결국 조정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791년 제사문제로 '잔산사건'이 일어나 윤지충, 권상연이 순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전국각지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도 체포되어 충청감영에서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에게는 최대의 시련이었다. 극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마음이 흔들리고 생각은 착잡하게 엇갈렸다. 그러다 쇠약해진 몸과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비록 한때나마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약속하여 석방되었다.
이 한때의 나약함은 그에게 크나큰 아픔이었다. 이존창은 베드로 사도처럼 뉘우치며 배교에 대한 가책과 고통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교차한 이곳에서 다시 전교활동을 펴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형이 나서서 그를 방해했다. 어쩔 수 없이 이존창은 자신의 땀이 어린 내포교회를 떠나 새로운 땅으로 사시로 결심하고 홍산을 거쳐 금산에 이르러 회개의 새 삶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날의 배교를 깊이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계명을 지켰고 전교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홍산과 금산 지방에서도 박해 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는데 김대선 신부님의 할머니가 그의 조카딸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이며, 12년 동안의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큰 기여를 한 최양업 신부님은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된다. 이처럼 그가 전교한 친인척 가운데에서 사제가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교로 입교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었다고 할만큼 그의 활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우의 상당수가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한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공헌이 지대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785년, 한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최인길 회장의 집을 급습하여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고 했던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 신자 색출소동이 벌어졌다. 주문모 신부에게 충직하게 협력했던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충청감영으로 연행되었고, 신문을 받고 천안으로 이송되어 이번에는 연금생활을 겪게 되었다. 6년 동안의 연금 생활은 큰 시련이었지만 그는 감사라는 마음으로 기도와 명상을 통해 주님께 향한 신심을 더욱 깊게 하였다.
그러던 중 정조가 제위 24년만에 승하하고 순조가 열한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벽파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 정치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신유박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고 서울에서 체포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대질하기 위해 서울로 끌려가 국청에서 거듭 신문을 당하였다. 이미 한차례 뼈아픈 실수를 경험했던 이존창은 이제 순교의 열의에 불타올랐다. 스스로 충청도 지방 천주교 신자들의 지도자임을 시인하고 모진 곤장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굴하지 않았다.
그는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과 초대교회 지도자 최창현 등이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다음날인 4월 9일에 여섯 번이나 내리친 칼날 아래 치명하였다. 며칠 뒤 친지와 동료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는데 이존창의 목에는 칼자국만이 흉터로 남았을 뿐 잘리 목이 단단히 붙어 있어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그의 일생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탔고, 전교업적은 교회사의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약점을 멍에처럼 지니고 있어 한차례 배교의 아픔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약점 때문에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그의 삶은 잘못을 참회하는 깊이만큼 짙고 치열하였다. 이 뉘우침과 회개의 새 삶이 그를 영원한 '내포의 사도'가 되게 하고 있다. 역사는 내포를 열심한 순교자들의 못자리로 기억하게 될 것이며, 그때마다 이존창은 그곳의 사도로 함께 기억될 것이다. [출처 : 김길수,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경향잡지, 1999년 11월호(내용 일부 수정)]
3) 복자 이국승 바오로(1772-1801년): ‘성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국승(李國昇) 바오로는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호는 ‘미암’(靡庵)이다.
장성한 뒤 충주 지역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된 이 바오로는, 이 새로운 종교를 철저히 배우려고 경기도 양근 땅에서 살던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는 은총으로 마음이 움직여 즉시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이 바오로의 스승은, 그를 불러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순교에 이를 만큼 신앙이 굳건하지는 않았다. 1795년의 을묘박해가 일어난 뒤, 충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형벌을 받던 도중에 석방된 사실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온 이 바오로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죄를 보속하려고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또 부모가 혼인을 시키려고 하자, 가족 때문에 본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혼인을 거부하고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럼에도 부모들의 재촉은 계속되었고, 그는 이를 피하고자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이 바오로는 훈장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하였다. 또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등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교리를 익혔으며,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도 받았다.
이제 이 바오로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은 체포된 신자들에게서 그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포졸들은 이 바오로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으며, 곧 그를 체포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되면서도 이 바오로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바오로가 옥에 이르렀을 때, 마침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이에 이국승 바오로는 그에게 “배교한 것은 제가 아니고, 마귀가 저를 속여 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라고 관장 앞에 나가 말하도록 권면하였으며, 고광성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바오로 또한 형벌과 문초를 받는 동안 여러 차례 고광성과 같은 일을 겪어야만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 바오로의 진심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가 여러 차례 유감을 느끼도록 한 뒤에야 신앙을 굳게 증언하고, 사형 선고를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한 힘을 내려 주셨다. 이때 그는 형조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이미 고질병같이 되었으니,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충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혹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서 ‘마음을 바꾸겠다.’는 뜻으로 말하고 석방되었지만, 이는 저의 본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국승 바오로는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며칠 후에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순교 후, 그의 조카들이 시신을 거두어 공주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국승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4) 복자 이도기 바오로(1743-1798년) :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李道起) 바오로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본디 그는 글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에 이 바오로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또 천주교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로 위협을 받게 되자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 청양을 떠나 산 너머에 있는 정산으로 이주한 뒤에, 그곳 옹기점에 터전을 잡았다.
1797년, 이 바오로의 나이 54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발생하였다. 그때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한 비신자가 와서 ‘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고발하겠다.’며 그를 위협하였다. 이에 겁이 난 그의 아내가 도망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고, 신입 교우들이 자신의 행동에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해 6월 8일, 이 바오로가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에, 한 떼의 포졸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하였다. 이내 포졸들은 십자고상과 교회 서적 몇 권을 찾아낸 뒤, 그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면서 매질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산 관아로 끌려간 바오로는 자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때때로 포졸들은 그를 장터로 끌고 나가 모욕을 주거나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바오로는 자주 굶주렸고, 혹독한 추위로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앉거나 눕거나 끊임없이 천주를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천사의 말을 전해 주는 목소리를 듣고는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럭저럭 1797년이 지나고, 1798년 새해가 밝았다. 이 바오로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루는 관장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옥으로 찾아오는 아내와 교우들이 물리쳤다.
6월 10일 아침, 포졸들이 와서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고 알려 주자, 이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을 몰라하였다. 이윽고 그는 포졸들에게 이끌려 정산 형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주변에 모인 비신자들까지 이 형벌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 마리아님, 하례하나이다.”라고 외쳤다. 이 바오로는 여러 차례 실신하였고,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았다. 그리고 버려진 채로 있게 되었다. 이틀 후 저녁 무렵, 관장은 그의 죽음이 궁금하였는지 ‘가서 살펴보고 죽지 않았으면 아주 죽여 버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포졸들은 이 명령에 따라 그의 몸을 잔인하게 짓이겨 버렸다.
이제 이도기 바오로의 몸은 더 이상 사람 꼴이 아니었으니, 그때가 1798년 7월 24일(음력 6월 12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관장의 명에 따라 묻혔는데, 7-8일 뒤에 정산에서 조금 떨어져 사는 교우들이 그 시신을 비밀리에 찾아다가 그들의 마을에 안장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도기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5) 복자 김원중 스테파노(?-1866년) :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본디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그의 열심과 신덕은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웃에는 사촌인 김선화 베드로가 살고 있었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이미 발래기 신자들에 대해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전갈을 보내와 “다시는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서 다짐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전갈을 받은 발래기 신자들은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대부분 관청으로 서적을 갖다 바치고, 관장 앞에 가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때 김 스테파노만은 “내가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서적도 갖다 바치지 않고, 관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외교인들은 물론, 발래기의 신자들까지도 그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 김 스테파노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신앙을 위해 모든 원망을 감수하였다.
1866년 11월 10일(음력 10월 4일), 관아에서는 다시 전갈을 보내와 “발래기 사람들은 모두 관아에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전해 들은 김 스테파노는 교우들에게 “이제 들어가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관아로 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달게 받을 정도로 신덕이 깊은 사람만 관아로 가자.”고 말하였다.
이튿날 진천 관아에서 포졸들이 왔을 때, 발래기 신자들 중에서 김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10명만이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들 일행이 관아로 들어가자 관장은 “일전에 갖다 바친 책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었다. 김 스테파노는 책을 갖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저의 책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관아에서는 곧바로 그를 가두어 버렸고, 이때 신성순 회장과 2명의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겁에 질려 배교를 다짐하였다.
진천 관아에서는 25일 동안 이들을 가두었다가, 모두 12월 6일(음력 10월 30일)에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로 압송하였다. 이때 김 스테파노는 공주로 압송되기에 앞서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주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너도 아무쪼록 주님을 위해 열심히 수계하여 훗날 천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라고 당부하였다. 아울러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전하였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오.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죽으나 사나 주님의 명에 순종하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나는 공덕이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천당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다시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시오.”
김원중 스테파노 일행을 인도받은 공주 관아에서는 이들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어떠한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김원중 스테파노의 아우가 공주로 와서 이들 네 명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내 주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원중 스테파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6) 남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1783-1866년) :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성인 남종삼(南鍾三)의 아버지. 충청북도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忠北 堤川郡 白雲面 花堂里) 출신.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충청목사(忠淸牧使), 돈령부사(敦寧府使)를 역임한 그의 입교시기는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는 않으나 일찍부터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을 지켜온 것 같다. 그의 아들 남종삼이 이른바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大院君)에 진언한 사실을 말했을 때, “너는 충성스러운 국민의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네 사형선고 서명을 요구하면 천주교에 욕된 표현을 일체 지우도록 명심하라”고 하며 천주교 신앙에 대한 굳은 신념을 보였다. 아들이 서소문 네거리에서 순교하자 그는 고향에서 잡혀 공주(公州)감옥에 수감되었다가 84세의 고령으로 아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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