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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상근마티아와 칼레신부
칼레 신부
Calais, Alphonse(1833∼1884).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강(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뒤 1860년 7월 5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의 선교사로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지역에서 전교활동을 벌였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로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 속에 피신해 있다가 이해 10월 페롱(Feron, 權)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 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다. 주요 저술로는 ≪강신부 훈계≫(필사본)가 있다.
박상근마티아 1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박 마티아는 평소에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대세를 주곤 하였다. 이후 그는, 칼래(N. Calais, 姜)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그해 3월 중순경에 좁쌀을 사려고 칼래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에 갔다가 칼래 신부를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 와서 숨겨 주었다.
3일 뒤 박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으려고 다시 한실로 갔다. 이때 칼래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면서 박 마티아에게 집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되돌아와 있던 박 마티아는, 얼마 뒤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를 봉행한다.”고 명백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박 마티아는 형벌을 받고 옥으로 돌아오면 함께 있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그러한 모습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렀다. 박상근 마티아는 마침내 관장의 명에 따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하기 직전에 박상근 마티아는 성호를 긋고는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순교한 다음, 가족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가 고향에 안장하였다.
박상근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2. 박상근 마티아 [복자 124위 열전]
아전 출신으로 이웃 돕고 전교에 힘쓰다 순교의 길 걸어
- 복자 박상근 마티아.
124위 중 안동교구의 유일한 순교복자인 박상근(마티아, 1837∼1867)은 이서(吏胥), 곧 아전을 지낸 인물이었다. 지방 관아의 하급 관리인 향리였다. 당연히 남 부러울 게 없는 삶을 살았을 터다. 그런데도 그는 신앙을 선택했다. 입교가 곧 순교로 이어지는 시대라는 사실을 아전을 지낸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신앙의 길,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의 선택은 과연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는 왜 그 길을 걸었을까, 그 여정을 살펴보자.
박상근 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조 후기다. 삼정(三政), 곧 세금 징수와 관련된 전정(田政)이나 군역 업무인 군정(軍政), 춘궁기 때 농민에게 식량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돌려받는 환정(還政)의 혼란이 극심했던 시대다. 돈이나 지위 같은 가치에 마음을 뒀다면, 그는 아전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얼마든지 돈을 착복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터다.
그렇지만 그는 신앙을 받아들였고, 세속 가치를 내려놓았다. 시복자료집에는 그가 무슨 계기로 신앙을 받아들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입교 동기나 과정이 베일에 싸여 있는 셈이다. 다만 아전을 지낸 그는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과거 경력을 활용해 도움을 줬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이에 비춰볼 때 신앙의 길을 걷기로 한 그는 아전이라는 신분은 포기했지만, 그 경력을 살려 남들을 도우며 믿음살이에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들, 이웃에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며 전교에 힘썼다. 또한,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처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언제든지 어디든지 달려가 대세를 주곤 했다. 이렇게 열심히 살다 보니 1861년 4월 조선에 들어와 경상도를 주 무대로 활동하던 칼레 신부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직후 좁쌀을 사러 경북 문경의 한실 교우촌에 갔던 그는 숨어 있던 칼레 신부를 만나 자신의 집으로 모셔온다. 그러나 박해자들에게 쫓긴 두 사람은 사흘 뒤 새 은신처를 찾아 다시 한실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한실이 바라다보이는 산에 오른 칼레 신부는 박상근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가 박해자들에게 잡힐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때 박상근이 울먹이며 칼레 신부에게 했다는 말이 오늘에도 전해져온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려고요. 은신할 곳도 없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 죽겠습니다.”(1867년 2월 13일 자로 칼레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박해시대 신자들의 사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박상근은 칼레 신부의 거듭되는 강권에 순종, 집으로 돌아온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피신한 칼레 신부는 페롱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 「한어 문전」 집필을 거들고 조선에서의 박해 상황과 순교자 전기를 기록해 파리로 보냈다.
반면, 박상근은 숙모 홍 마리아,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돼 상주로 끌려갔다. 그는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천주교를 봉행하고 있다”며 신앙을 증언한다. 그러고 나서 함께 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했고, 그의 말에 용기를 얻은 많은 교우도 순교에 이르렀다.
박상근 또한 1866년 1월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평생 유복한 삶이 보장된 아전의 자리를 포기하고 기쁘게 순교의 길을 걸어간 청년 박상근의 삶은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신앙적 삶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른 생애, 비록 짧지만 강렬한 필치로 풀어낸 전교와 순교의 신앙, 그것이 박상근 복자의 삶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3일, 오세택 기자]
3. 상주 옥터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배고픔에 볏짚 씹고 이 잡아먹어도 배교는 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감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실제 모습은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본 모습보다 훨씬 처절했다고 한다. 죄인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고도 온갖 노역에 동원돼 이중으로 옥살이의 고통을 느껴야 했다.
또 죄인은 물 한 모금도 자유롭게 마실 수 없었고, 식사는 하루에 한 번 조밥 한 덩어리가 고작이었다. 배고픔을 못 이긴 이들은 바닥에 깔린 볏짚을 뜯어 먹거나 기어 다니는 이를 잡아먹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해 시기도 많은 신앙 선조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고된 옥살이를 겪었다. 옥에 갇힌 교우들이 너무 많아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고, 상처에서 흐른 피와 고름으로 악취가 나고 염병이 돌아 그 자리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교우들은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상처가 곪아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나거나, 굶어 죽고 추위 속에 얼어 죽었다. 그중 신앙을 굽히지 않는 교우에게는 관장이 직접 교수형(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을 내려 포졸들이 옥중에서 그들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복자 박상근(마티아, 1837~1867)도 어떤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다 결국 교수형을 받고 경북 상주 옥에서 순교했다. 충직한 신앙으로 고통과 유혹을 이겨낸 복자를 본받고자 그의 마지막 숨이 머물렀던 상주 옥터를 찾기로 했다.
상주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상주 읍성’ 남문 밖에 감옥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순교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상주 옥의 순교자는 박상근을 비롯해 그의 숙모 홍 마리아ㆍ친척 박 막달레나 등 20명. 전문가들은 더 많은 교우가 이곳에 갇혀 고통 속에 신앙을 지켜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주 성은 물론 상주 옥도 남아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 도시화 정책에 따라 일본인들은 상업 활동하기 편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상주 성을 헐었고 상주 옥이 있던 자리에는 우시장을 만들었다.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시장이었던 상주 옥터는 과일과 채소를 파는 곳이 됐다. 상주역에서 근처 남문시장에 있는 ‘상주 남문 청과’ 자리가 바로 상주 옥터 자리다. 그리고 청과 건물과 골목을 하나 두고 떨어진 곳에 상주 옥터 성지가 있다.
성지는 초록색 살로 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울타리 밖에서 성지를 바라보니 건물과 마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당에는 계절 따라 색이 노랗게 바뀐 잔디가 겨울 볕을 머금어 성지를 더욱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작은 마당 곳곳 느껴지는 순교자 영성
성지 입구 왼편에는 투박한 돌들이 제집에 온 것을 환영하는 듯 줄지어 서 있다. 이 돌들은 상주 성의 성곽과 상주 옥을 이루던 돌이다. 상주 성이 헐리던 때와 옥터 발굴 때 신자들에 의해 어렵사리 보존된 것이다.
입구 오른편부터 마당 한 바퀴를 돌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부인들을 위로하셨던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로하는 데 앞장섰던 복자의 모습을 묵상했다. 본래 경북 문경에서 아전(하급관리)으로 일했던 박상근은 관청에서 지내며 어려운 일을 당한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하면 그곳으로 달려가 대세를 줄 정도였다고 한다.
십자가의 길 기도가 끝나는 곳에 높이 2m 정도 되는 십자가 모양 비석이 서 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라고 새겨진 비문을 읽으니 순교하기 직전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라고 외친 박상근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자들 정성 깃든 성지
성수를 찍어 십자성호를 긋고 상주 옥터 성지 경당 안으로 들어갔다. 경당은 순례객 30명 남짓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하얗게 페인트칠 된 벽에는 오래돼 보이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예물 봉헌함도 의자도 모두 새것이 아닌 듯했다.
“모두 이 지역 공소 신자들이 봉헌한 귀한 물건입니다. 신자들 정성으로 성지를 꾸린 것이나 마찬가지죠.” 동행한 신동철(안동교구 상주 남성동본당 주임) 신부가 설명했다.
신 신부는 “마당을 둘러싼 울타리와 성모 동산, 십자가 비석 등 모두 신자들이 봉헌하고 직접 설치한 것”이라며 “신자들이 한마음이 돼 성지를 조성하는데 힘썼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상주 옥터가 전대사 순례지로 지정되자 상주 지역 본당 신자 12명은 자발적으로 ‘상주 옥터 성지 해설사’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전문가에게 순교 역사 교육을 받고, 옥터와 교우촌을 탐방하며 해설사로 거듭난 이들은 순례 기간인 5~10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순례객을 맞이하고 신앙 문화유산을 해설했다. 이들은 지금도 남성동본당으로 문의하는 순례객에 한해 해설을 해오고 있다.
온화하고 강직했던 순교자
경당 벽에는 십자가와 함께 박상근의 복자화가 걸려 있다. 교구의 첫 복자를 아끼는 신자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복자화 속 그는 웃고 있지 않았지만 온화해 보였고, 까만 눈은 날카롭지 않았지만 강직해 보였다.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그의 온화한 성품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겠다’는 당찬 의지가 느껴졌다.
복자화를 보고 있자니 그와 칼레(N.Calais) 강 신부의 깊은 우정 이야기가 떠올랐다. 병인박해가 일어났던 해(1866년) 봄, 강 신부의 은신처를 찾기 위해 함께 길을 나섰던 박상근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신부의 명을 듣고 울며 말했다.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 중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죽어가는 이웃에게 대세를 주기 위해 달려갈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십자가를 품에 꼭 쥔 그림 속 복자의 모습이 나 자신부터 돌아보게 했다.
[평화신문, 2015년 1월 18일,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4. 마원성지 박상근(마티아) 순교자를 찾아서 [성지에 가다]
“신부님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기쁘게 죽겠습니다.”
빠르게 발달된 IT산업에 힘입어 문명의 이기를 실감할 수 있다. 특히나 내비게이션의 안내 멘트를 하는 예쁜 목소리의 아가씨의 말을 잘 들으면 참 편하다.
마원성지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마원 1리에 소재하고 있다. 문경 읍내에서 20분가량 문경세재 방향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백화산 중턱에 못 미쳐 있는데 지금은 박상근(마티아) 순교자 묘소를 가운데 두고 바로 앞 도로는 점촌에서 충주방향으로 산업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고 뒤편 서쪽으로는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져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도로들이 너무나 잘 되어 있는 것이 가는 길을 서두르지 않아도 좋을 만큼 도로 사정이 나아진 것을 실감할 수 있다.
2월의 마지막 주일 미사를 마치고 본당신자 몇 분과 함께 구미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가 계획도 없이 마원성지로 향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아침부터 서둘러 서너 시간 걸려서 가야할 길을 구미에서 한 시간 가량 걸려 오후 4시쯤 성지에 도착하였다. 우수가 지난 터라 낮 시간이 좀 길어지긴 했지만 서쪽 벽화산에 서녘 해가 가리워져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여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자그마하게 묘지만 조성된 옛 모습과는 달리 현재에는 묘지 앞 아래쪽으로 100여 명의 순례객이 미사나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잔디를 깔아서 정원을 잘 만들어 놓았으며 머리를 숙이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14처 조형물들이 나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묘지 뒤쪽 가운데에는 부활하신 십자가상과 양쪽으로 칼래 신부님과 마티아 순교자의 이별장면을 묘사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에서 묘지로 올라가는 길 왼편에는 500여 년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붉은 소나무(홍송) 몇 그루가 순교자 묘지를 안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묘지를 지키는 호위 병사처럼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것 같기도 했다.
“박상근 마티아 순교자”는 문경 토박이로 벼슬은 아전으로 중년에 입교하여 교회 교리를 잘 알고 법을 잘 지키고 어려운 교우들을 많이 돌보아 주고 집안사람들을 입교시키고 외인, 어린 아이들의 임종대세에 힘쓰다가 병인년(1866년) 박해 때 잡혀 상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문초를 당할 때 배교를 권유 받았으나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음을 명백히 말하여 치명하였으니 그의 나이 30세요 때는 병인년 12월이라고 경산 모과골 박주헌이 증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상도 지방 사목을 담당하셨던 칼래 강 신부님의 편지에는 박상근 순교자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쓰셨다.
<그의 집에서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그의 목숨이 달려있는 문제였기에 밤 11시경 집을 나섰다. 희미한 어두움 덕분에 길가에 있는 외교인 마을 4~5곳을 무사히 지났으며, 새벽 2시쯤 문경 읍내로 들어와 마티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마티아와 그의 매형은 양반이 아니라서 조선의 풍습에 따라 그들 집에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저는 행여 누군가가 제 방문을 열지 않을까 두려워 줄곧 방문을 잠궈 두어야 했습니다. 매우 추운 때임에도 군불을 넣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온갖 제약 속에서 둘째 날 밤을 보내던 중 저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방문을 잠그는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밤 10시경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낯선 사람 하나가 제 방문을 열고는 3~4분 정도 저를 응시하였습니다.
자정 무렵 마티아를 불러 떠나려 하니 봇짐을 챙겨 달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님, 어디로 가시려고요? 이곳과 인근 사방 수십 리 안에는 신부님께서 피신할 곳이 없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보게,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첫 닭이 울 무렵 마티아는 황급히 돌아와 포졸이 오늘 중으로 저를 붙잡으러 올 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한실로 돌아갑시다. 날이 밝기 전에 절반도 못갈 터이니 차라리 산꼭대기로 가로질러 갑시다. 그렇게 돌아가면 길가에 있는 모든 마을들을 피해 갈 수 있고 저녁이면 한실에 도착할 거요”
우리가 문경을 떠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붙잡으러 왔을 때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동이 틀 무렵 마티아와 저는 숲이 우거진 산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거라곤 과일(곶감인 듯)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정오쯤 깊은 골짜기에 다다랐고, 산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는 개울가에 앉았습니다. 저의 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으며, 둘다 허기와 갈증이 차올랐고 피곤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자네는 너무 지쳤으니 자네가 알고 있는 이 근처 마을을 찾아가요.” 그러나 마티아는 “신부님, 제가 어찌 초행길인 신부님을 홀로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께서 피신할 곳이 없을 터인데, 신부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저도 갈 겁니다. 저는 참으로 기쁘게 신부님과 함께 죽을 겁니다.”
“마티아, 내 말대로 할 것을 명(命)하겠네, 자네가 가져온 마른 과일 절반을 챙기고 나머지 절반은 내게 주게. 그리고 자네 신부(神父)인 내 말을 따르게.” 이 말에 그는 저를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고, 저는 고함을 쳤습니다. 사실 제 마음도 비수에 찔린 듯 아팠고, 저 또한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저희 둘은 함께 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눈물겨운 생이별의 신부님과 신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박해시대의 가슴 아픈 장면을 보면 나 자신은 신부님을 위해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지, 이 사순절 기간에 더욱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며 복자로 선포되신 박상근 순교자에게 저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시도록 전구를 청해본다.
“박상근 마티아 복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고 저희에게 강한 믿음을 심도록 저희의 기도를 전구해 주소서! 아멘.”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4년 4월호, 박철수 보니파시오(경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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