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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제출본
최종본
진실을 사랑하고 실수를 용서하라
-시간의 패턴을 깨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장강명)을 읽고 나눈 책 대화 최종 보고서
김가연, 이세린, 류인하, 장현웅 광동고 2학년 1반 gayeon0531@gmail.com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순서를 내 마음대로 바꾸어서 재구성할 수 있다면 어떨까? 미래를 알고, 내 마음대로 결말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이러한 상상은 어쩌면 너무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과거-현재-미래’의 단 한 가지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현재 우리가 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로 인해 어떤 결말을 맞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앞서 말한 비현실적인 일을 실제로 할 수 있는 남자가 나온다. 남자는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미래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두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남자는 어떻게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주알’이라는 것을 몸 안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주알’은 이 책에 등장하는 sf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작가가 이 책을 출간한 뒤에 밝힌 바로는, 우주알은 ‘개인의 관점을 벗어나 비인간적인 관점으로 내가 속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힘’이라고 한다. 남자는 우주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능력을 얻어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몸속에 우주알을 받아들인 남자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대로 서술되었기에, 다른 책들처럼 일반적인 시간 순서로 사건이 진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뒤죽박죽인 책의 순서 때문에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조원들 모두가 책의 흐름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반복적으로 읽어 소설의 내용을 점차 더 완벽하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자극은 피하고, 분위기는 살리고
이 책에는 자신을 괴롭히던 학교폭력 가해자 ‘영훈’을 살해하여 징역을 살고 나온 ‘남자’와, 그런 남자와 동창이었던 ‘여자’, 그리고 남자가 살해한 영훈의 어머니인 ‘아주머니’가 나온다. 책에서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남자와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뒤섞인 사건의 순서 때문에 책을 한 번 읽고서 전체적인 내용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과 느낀 점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책의 구성 방식과 문체, 또 책에서 사용한 표현들에 관해 느낀 점을 조원들과 함께 대화해보았다.
세린: 나는 책에 쓰인 표현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살인에 관한 얘기를 할 때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부정적인 표현이 필터 없이 쓰였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았어. 특히 살인을 묘사한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욕이 자주 나오기도 했고.
가연: 맞아. 그런데 난 책의 문체는 되게 담백하다고 느꼈어. 주인공들이 이름이 아니라 그냥 ‘남자’와 ‘여자’로 불렸고, 대화할 때 따옴표가 사용되지 않았잖아. 이런 것들이 작은 요소지만 글이 평온하게 읽히도록 하는 데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 그래서 이런 담백한 문체 덕분에, 네가 말한 것처럼 자극적인 표현이나 순화되지 않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했음에도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한 분위기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생각했어.
인하: 작품이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평온한 분위기로 읽히도록 의도한 것 같아. 그렇지만 대화할 때 따옴표가 안 쓰여서 가독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해.
현웅: 뒤죽박죽인 이야기 순서도 조금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 그래서 처음에는 소설이 어렵다고 느꼈어. 그래도 책을 계속 읽다 보니 내용의 앞뒤가 이해돼서 소설을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어. 뒤에 나올 내용을 생각하며 읽게 되니까, 전체적인 책의 내용도 기억에 더 잘 남았던 것 같아.
인하: 나도 너처럼 책을 처음에 봤을 때는 이해도 안 됐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 책을 다시 읽어보니 이야기의 갈피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아. 또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은 다시 한번 생각 해보면서 무슨 의미였는지 되짚어보기도 했는데 이 과정이 꽤 재밌었어.
남자가 저지른 살인이 이야기를 이끄는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이 자극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잔잔한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조원 모두가 공감했다. 살인과 학교폭력 등의 소재 탓에 욕설이 섞인 대화가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는데, 그런 묘사들도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해치지 않았다. 나는 책이 폭력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야기가 담백하게 읽히도록 해주는 문체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눈 이후에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인물들이 어떤 관계로 얽혀있는지, 사건의 전후 순서는 어떻게 되는지 놓쳤던 것이 있다면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목숨을 바쳐서 하는 속죄
아주머니는 자신의 아들은 학교폭력 가해자가 아니었으므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남자를 계속 쫓아다닌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의 아들이 살해당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남자를 죽인다. 남자는 우주알의 힘으로 자신이 죽는 미래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 결말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또한 죽기 하루 전에 ‘영훈이는 사실 학교폭력 가해자가 아니었으며, 가해자였다는 것은 내가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 거짓 진술을 한 것이었다’는 내용이 담긴 영상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남자가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을 고백하는 영상을 찍어 올린 것엔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었을까? 조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남자의 속내를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현웅: 남자는 자신과 다툼이 있던 학생을 죽여 교도소에 갔다가, 우주알이 몸에 들어오면서 미래를 볼 수 있게 됐어.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 자신이 미래에 아주머니에게 살해당할 것도 알았겠지? 그런데도 죽음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을 보면,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죄는 전부 다 청산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
가연: 내 생각도 비슷한데 조금 더 덧붙이자면, 영훈이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모두 남자의 거짓말이었다는 내용의 영상을 올린 걸 봤을 때 남자는 자신이 죽고 난 뒤 남겨질 사람, 즉 아주머니를 위한 선택을 한 것 같아. 자신의 거짓말을 자백한 것은 남자가 하는 속죄였을 거야. 소설 마지막 부분에 아주머니가 ‘이렇게라도 억울함이 풀어져서 마음이 편하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걸 보면 남자는 아주머니의 억울함과 분함을 풀어주려고 한 것 같아.
세린: 근데 만약에 남자가 자신만 아는 이 진실을 밝히지 않고, 아주머니로부터 살인을 당하기 전 영상 촬영을 하지 않은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우선 아주머니가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교도소 살이를 하게 된 것부터가 문제가 되겠지. 아주머니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남자를 살인하게 된 거잖아.
인하: 나는 남자가 학교폭력 피해자였다고 거짓말을 하며 살인이 정당방위 성격이 있었다고 판결을 받은 그 시점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실 그대로 진술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웠어. 영훈을 추모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면 아주머니가 남자를 미행하며 쫓아다닐 일도 없었을 것 같고, 이 소설의 결말도 해피엔딩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봤어.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남자가 자신이 죽는 미래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점이 매우 의아했다. 남자는 오히려 칼을 쥔 채 망설이는 아주머니를 향해 “찌르세요. 찌르시라니까요.”라고 하며 자신을 죽이기를 부추겼다. 조원들과 남자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함께 얘기해본 결과, 남자는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청산함과 동시에, 그동안 누구보다 가장 억울했을 아주머니에게 속죄한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자는 아주머니가 아들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죗값을 모두 치렀다고 여겼을 것이다. 나 또한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아주머니에게,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썼던 영훈에게 사죄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목숨까지 바쳐가며 사죄한 남자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지만, 어쩌면 남자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지였을지도 모른다.
꼬리를 물고 무는 가정
남자는 결말이 아름답지 않다고 하더라도 과정이 아름답다면 전체적인 이야기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불행한 결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는 자신이 죽는 미래 또한 피하지 않았다. 남자가 죽음으로써 여자와 남자는 최악의 결말을 맞았지만,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고로 남자가 생각함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결말에 상관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만약 남자가 아닌 다른 인물이 그 상황에 놓였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예를 들어서,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이런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해보자. 결말보다는 과정이 더 아름다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결말까지의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더라도 결말이 불행하다면 전체적인 이야기가 마냥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는 여자가 남자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남자와는 다른 선택을 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결말을 중시하는 여자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남자와의 관계가 끝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알의 힘으로 자신이 죽는 미래를 본 여자는 남자와 다르게 그 미래를 피했을 것이다.
이런 것처럼,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상황을 맞닥뜨린 인물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저마다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가지각색으로 다를 수 있다. 또한 무슨 가정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의 흐름이 완전히 정반대로 바뀔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생각하며 소설의 관점이나 설정이 다르게 바뀌면 어떨지에 관해 함께 생각해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가연: 나는 이 소설의 관점이 여자로 바뀌면 어떨지 생각해봤어. 지금 이 소설은 남자의 관점으로 사건이 진행되고 있잖아. 만약 이 이야기가 여자의 시선으로 쓰인다면 우주 알이라는 게 조금 더 신비하고 생소하게 비치지 않을까? 남자의 관점에서는 우주알이 무엇인지, 남자가 언제 우주알을 몸속에 받아들였는지 서술할 수 있지만 여자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가 없잖아. 그래서 여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알이 소설 속에 더 깊게 스며들게 되고, 우주알이 가진 신비로움은 극대화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
세린: 나는 여자가 크고 자란 환경이 달랐다면 어땠을지 궁금해. 여자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잖아. 만약 여자가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면 남자의 살인을 지금처럼 담담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상황을 보면 남자와 여자 모두 정상적이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는데, 만약 여자의 환경이 달랐다면 남자는 여자에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또 남자가 지금과는 달리 여자에게 마음을 트고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해.
가연: 맞아. 여자는 남자에게 전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견을 가지고 남자를 바라보기는커녕, 오히려 남자를 이해하고 사랑하잖아. 지금은 남자와 여자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여겨져. 가족이 없는 남자와, 없으니만 못한 가족을 둔 여자는 서로의 비슷한 모습에 많이 공감했을 거야. 그런데 만약 너의 말대로 여자가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전과가 있는 남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아.
현웅: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이야 남자의 감정에 여자가 자기도 비슷한 처지라고 공감하지만, 남자와 여자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여자가 일방적으로 남자에게 무서운 감정을 가져서 나중에 일을 통해 만날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남자를 피했을 것 같아.
사람들은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에, 새로 나눈 대화 한 번에,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소문에 타인에 대하여 너무 쉽게 편견을 갖는다. 이렇게 본능처럼 자리 잡는 편견을 버리는 건 모든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살인 전과가 있는 남자에게 아무런 편견을 가지지 않고, 그를 무덤덤하게 대하는 여자를 보며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움을 느꼈다. 전과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남자는 사회에서도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여자만은 유일하게 남자를 제한하지 않는다. 그를 편견 속에 가두기보다는 오히려 이해하려고 한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행복한 가정에 결핍을 가지고 있다. 여자는 가족이 없다고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여 그에게 공감했을 것이다. 나는 둘 사이에 형성된 이 공감대로 인해 여자가 남자에게 편견을 갖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여자에게 남자와 같은 결핍이 있지 않았더라면, 여자는 남자의 아픔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화를 하면서 나온 의견처럼, 나도 여자의 상황이 바뀌었다면 남자의 상황에 공감할 수 없게 된 여자가 남자를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속죄는 발전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죽음이 다가오자 남자는 그때까지 앞을 가리고 있던 시공간 연속체의 장애물 너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비가 오고 시간이 지나도 이 골목에서 아주머니의 발자국이 사라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주머니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남자를 죽인 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살인을 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남자의 속죄가 꼭 아주머니에게 살해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속죄를 하는 과정에서 재등장하는 살인에 아쉬움을 느껴 함께 대화를 나눠보았다.
세린: 남자도 살인을 했고, 결국엔 아주머니까지도 살인을 한 거잖아. 이 소설 속에서 살인이라는 소재가 너무 가볍게 쓰인 것 같아서 아쉬워. 게다가 담백하고 잔잔한 책의 문체로 인해서 폭력적인 언어나 행동이 조금 묻혔다고 생각하거든.
가연: 맞아. 살인은 무겁고 진중하게 다뤄져야 하는 사회 문제잖아. 나는 특히 아주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 남자를 살해하는 부분이 아쉬웠어. 남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주머니에게 죽는 것이 속죄였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아주머니는 살인자가 된 것뿐이잖아. 살인이 되풀이되는 모습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아.
인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심지어 보복 살인을 제외하고도 아주머니의 스토킹, 개인정보 침해 같은 게 가벼운 소재인 것처럼 사용됐는데, 이런 것들은 현실에서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여겨지고 있잖아.
현웅: 맞아.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살인과 스토킹 같은 비도덕적인 소재들이 너무 빈번하게 나왔던 것 같아.
‘그러나 속죄를 꼭 고통 속에서 할 필요는 없다. 발전적인 방법으로 속죄할 수도 있다. 실수를 교정하는 것은 긍정적인 행동이자 성숙시키는 행동이다.’
바바라 홀이 한 말을 인용하였다. 남자의 속죄는 과연 제대로 된 속죄일까? 아주머니와 남자는 죄와 속죄, 반성과 용서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이다. 앞서 말했듯 남자는 자신의 죽음으로 아주머니와 영훈에게 속죄했다. 남자의 속죄는 아주머니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지만, 결국 아주머니 또한 남자와 같이 전과자가 되었다. 나는 남자의 속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속죄가 곧 아주머니의 보복 살인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바라 홀의 말을 떠올려 보았을 때, 나는 남자가 한 속죄는 결코 발전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당방위, 무죄선고, 과연 가능할까?
남자의 살인과 아주머니의 살인, 그리고 영훈과 남자를 둘러싼 학교폭력에 관한 의혹은 이 책의 주된 소재가 되어 이야기를 이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책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간접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살인에 대해서, 그리고 학교폭력에 대해서 그동안 보고 들었던 것들을 생각하며 책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각자 책의 어떤 내용을 보고 익숙함을 느꼈는지, 자신이 한 간접 경험과 책의 내용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생각해본 뒤에, 자신이 한 간접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서로에게 얘기해보았다.
세린: 나는 최근에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라는 제목의 영화를 봤어. 이 영화 속 부모들은 자식의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은폐하려고 지속적인 거짓말을 해. 이 소설 속의 남자는 학창시절 영훈으로부터 괴롭힘을 받아왔다고 거짓말을 하여 감형을 받았지만, 후에 거짓임을 고백하는 영상을 촬영해서 결국은 모두에게 진실을 알렸잖아. 영화 속 부모들은 자식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거짓을 말하지만, 소설 속의 남자는 결국 진실을 밝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
가연: 나는 남자가 영훈을 살해한 것과 똑같이 학교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했다는 사건을 다룬 뉴스를 읽었어. 이 사건은 미국에서 일어났는데, 판사가 이 사건에 대해 정당방위 판결을 내려서 학교폭력 피해자는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 선고를 받았다고 해. 그렇지만 소설 속 남자는 무죄 선고를 받지 못했어. 너희들은 이런 경우 정당방위를 인정해서 무죄를 선고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인하: 나는 아니라고 봐. 정당방위 성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살인은 명백한 죄잖아. 그러니까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렇지만 감형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에 나온 남자의 경우처럼 말이야.
가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무죄 선고를 받기에는 살인은 너무 큰 죄인 것 같아.
현웅: 나도 뉴스를 찾아봤거든? 최근에 가평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가해자는 피해자를 계획적으로 죽이고 사고였다고 거짓말을 했어. 이 소설에서도 남자가 영훈을 죽인 다음, 그는 학교폭력 가해자였고 자신은 피해자였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잖아. 나는 이 두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비슷한 거짓말을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느꼈어.
학교폭력 피해자가 살인을 저질러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기사를 얘기하면서, 조원들은 대부분 정당방위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살인에 대하여 무죄 선고를 내리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살인은 명백한 죄이므로 무죄 선고를 내리면 안 된다는 것이 조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나도 살인이라는 죄목에 섣불리 무죄선고를 내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당방위의 성격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살인은 한 생명을 빼앗은 악독한 범죄인 만큼, 죗값에 맞는 엄중한 처벌이 내려졌으면 한다. 학교폭력을 당해왔던 피해자가 한순간에 살인자가 되어버린 각박한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살인이라는 죄가 가지는 무게가 있으므로 살인에 무죄선고를 내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 마음대로 다시 쓰는 소설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되지 않고, 인과 관계에 상관없이 사건의 앞뒤가 마구 섞인 것은 이 책만의 독특한 구성 방식이다. 당연히 소설의 결말 또한 예외 없이 순서가 뒤섞였다. 위치상으로는 책의 가장 마지막 장이 맞지만, 시간상으로는 가장 마지막이 아닌 결말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이야기의 끝에 의문이 남는다. 이렇게 의문을 남기는 결말에 관해서, 다른 소설 속에 사용된 매개체를 예시로 들어 조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눠보았다. 우리는 책을 마지막까지 읽으면서 추가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는지 생각해보고, 책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소설이 끝난 뒤에는 어떤 내용이 이어질지 예측해 보기로 하였다.
인하: 나는 섞인 순서 때문에 결말을 읽고서도 책이 마무리가 덜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래서 뒤죽박죽인 순서를 알기 쉽게 도움을 주는 매개체를 넣으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어. 우아한 거짓말 속 나오는 실타래와 같은 매개체를 이용하였다면 더욱 가독성을 높이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세린: 실타래는 우아한 거짓말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데?
인하: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이 죽는데, 이때 실타래를 남겨. 이 실타래는 남은 사람들에게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해줘. 사람들은 여자 주인공이 왜 죽었는지 모르는 상황인데, 이런 실타래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독자와 작중 주인공들에게 여자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어.
가연: 실타래 같은 매개체가 이 소설에도 등장했다면 결말도 그렇고 사건의 순서를 조금 더 쉽게 알 수 있었겠네. 난 책을 읽으면서 아주머니의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 심리가 궁금했어.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이 학교폭력 가해자가 아닌데도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주머니의 남편은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까? 짐작해보자면, 아주머니의 남편은 아들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자신이라도 마음을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 소설에서 남편은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니지만, 남편이 아주머니의 기행을 말린다는 설정이 있으면, 아주머니와 남편의 갈등까지도 더해져서 소설이 더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싶어.
현웅: 그럼 이 책이 끝난 뒤 어떤 내용이 더 이어질 거라고 생각해? 나는 아주머니가 남자와 비슷한 결말을 맞게 될 것 같아.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 남자처럼 아주머니의 몸속에도 우주알이 들어가게 되잖아. 아주머니도 미래를 볼 수 있게 됐으니까 자기가 죽는 미래를 보게 되겠지. 남자와 비슷하게, 아주머니도 죽음이 다가왔을 때 도망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남자를 죽인 것을 속죄하지 않을까 싶어.
세린: 나도 비슷하게 생각해. 나는 아주머니가 자신도 남자와 똑같이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해 트라우마를 얻어서 결국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어쩌면 자살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결말에 아쉬움을 느꼈다. 대화에 언급된 것처럼 사건의 순서를 알려주는 매개체가 소설에 등장하였다면, 결말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이 책에는 아주머니의 남편이 아주 잠깐 다뤄지는데, 나는 그가 아주머니와 같은 입장으로서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했다. 남편도 처음에는 아들의 죽음이 억울했을 것 같은데, 남자를 스토킹하는 등 시간이 지나도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며 억지로라도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소설이 끝난 뒤에 남자 다음으로 우주알을 몸속에 받아들인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추가된다면, 아주머니는 스스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들이 죽은 방법과 똑같이 남자를 죽였으므로, 아주머니는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남자를 죽였단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아주머니는 죄책감을 심하게 느낄 것 같다.
패턴, 시간, 속죄, 그리고 용서
시간은 미래로 가는 단 한 가지의 방향으로만 흐른다. 이러한 방향성은 시간이 가지고 있는 패턴이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또 저마다의 크고 작은 패턴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패턴으로 존재하는 인간들 가운데, 남자는 유일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패턴을 깨는 인물이다. 남자는 시간의 패턴에서 벗어나 미래를 볼 수 있었음에도, 자신이 죽는 미래를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컨택트>라는 영화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영화에 등장하는 ‘루이스’라는 인물은 ‘이안’에게 고백을 받는다. 그러나 환영 속에 들어간 루이스는 남편이 된 이안이 루이스의 곁을 떠나고 둘이 낳은 딸은 희귀병으로 죽는 참담한 미래를 알게 된다. 이런 비극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현실로 돌아온 루이스는 이안의 고백을 받아들인다. 루이스는 왜 이런 비극을 수용했을까. 그리고 이 소설 속의 남자는 왜 죽음을 마주했을까. 만약 내가 두 인물처럼 내 앞에 나타날 비극적인 미래를 알게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든 그 미래를 피하려고 발버둥 쳤을 것 같다. 미래에 내가 모조리 감당해야 할 비극을 알아버린 데에서 오는 두려움이 클 텐데, 나는 남자와는 달리 그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볼테르가 한 말 중 이런 말이 있다. 진실을 사랑하고 실수를 용서하라. 남자가 사랑하지 못했던 진실은 결국 그가 스스로 실수를 용서했을 때에야 밝혀질 수 있었다. 남자는 거짓말을 밝힘과 동시에 그의 잘못을 목숨 바쳐 사죄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남자의 속죄가 아쉬웠다. 결국 살인이 되풀이되는 모양새를 남겼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주머니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속죄하고 아주머니는 남자를 살인함으로써 용서하는, 둘 사이 반성과 용서의 관계에서 나는 기이함을 느꼈다. 남자뿐 아니라 아주머니도 스스로 실수를 용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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