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다락골 줄무덤 성지와 새터(희망의순례자 성지 설명)
가. 다락골
내포지방에 대한 박해의 손길은 이곳 다락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갈 때 어린 아이들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간다."라고 달래어 함께 천당으로 데리고 갔다 합니다. 그 당시에 감영은 홍주, 그러니까 지금의 홍성에 있었습니다.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들의 묘소로 추정되는 37여기 묘가 이곳 다락골에서 줄무덤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묘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다만 최양업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야음을 타 급히 옮겨다가 이 마을 뒷산인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증언을 이 마을 노인들이 전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집안들은 박해가 닥칠까봐 이 무덤이 신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이 마을을 불살랐고,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곳 줄무덤 안의 주인공들은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이로써 구전으로만 전해진 이곳 줄무덤이 순교자 1986년 3월 11일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성해 일부를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서 모셔왔다. 순교 후 147년 만에 고향에 환향하신 것이다. 줄무덤의 총수는 36기 이다.
나. 최양업 신부 출생지
청양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박해라 일컬어지는 신해박해(1791년) 직후였으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집안이었다. 그리고 그 집안이 정착한 곳이 바로 다락골이었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1805~1839, 프란치스코) 성인이 탄생한 유서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박해의 손길이 충청도 땅에도 거세게 몰아쳐 와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이때 순교한 치명자의 묘소로 추정되는 30여 기의 묘가 이곳 다락골에 줄 무덤을 이루고 있다.
이 무덤이 있는 산은 경주 최씨(최양업 신부 집안)의 문중 산으로 이 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이 있다. 다만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옮겨서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