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경계)
욕망과 버림
신근식
중학교 물상 시간에 배웠던 “표면장력”이 생각난다. 그릇에 물을 가득 부으면 그 결과가 바로 그릇 전에 일직선상 평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은 물이 인력(引力)을 발생하여 가운데가 볼록하고, 가장자리는 그릇 전과 일치한다. 마치 인간의 욕망도 이 표면장력처럼 인력이 작용하여 넘쳐도 가운데를 볼록하게 만들려는 근본 욕구기재가 있다. 한 방울의 물도 흘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다. 스스로도 모두 그렇지 아니 하다면서도 그렇게 욕망이 가득차고 현실로 요구하는 것이다. 모두가 욕망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버려야 가질 수 있고, 가진 것은 언젠가 버리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또한 적게 버리면 적게 얻고,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과도한 욕망은 탐심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차가 있으면 집을 사고 싶어 하고, 돈이 생기면 권력을 갖고 싶어 한다. 항상 모든 것 소유하고 싶어 하기에 원래 건전했던 열정조차 부당한 욕망과 끝을 모르는 탐욕으로 변하게 된다.
인생 120년 고령화사회, 이제 인간은 쉽사리 죽을 수도 없다!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도래한 초고령사회, 우리나라도 2025년이 되면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100세 시대라고 하다가 이제는 120세 시대로 변화되었다. 나이 듦의 경계가 그어져 20년을 덤으로 살게 되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기나긴 시간은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생명이 길어지는 만큼 경제적 문제를 비롯해 뇌사, 고독사, 안락사 등을 헤아려 가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충실히 꾸려 나가야 한다.
얼마 전에 시골에 계신 양모 생신에 가족과 함께 다녀왔다. 양모는 올해 백수(白壽) 즉 아흔아홉살을 뜻한다. 여기서 ‘백(白)’은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것으로, 100-1=99가 되기 때문에 백수(白壽)는 100세에서 한 살이 모자라는 99세라는 것이다. 생신을 가족과 함께 야외 식당에서 하려고 하였는데 당신이 직접 찰밥과 미역국, 생선, 나물 등을 만들어서 상을 차렸다. 집에서 잡체와 불고기를 해온 것을 추가하여 식사를 하였다. 백수가 되신 양모는 거동이 불편하지만 아직까지 혼자서 생활하고 있으니 너무 안쓰럽다. 몇 번이고 요양원을 권유했으나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모두 텃밭에 나와 따스한 봄볕을 쬐면서 꼬손자의 재롱을 부리는 모습 보는 순간 잠시 늙은 얼굴에 회한이 깃든다. 삶의 욕망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다.
지금은 내 삶은 내가 디자인하는 다원주의 사회가 되었다.. 밀레니얼세대에게 ‘다중 정체성’은 흔한 일이다. 홍대 앞 유명한 인디 뮤지션이었던 가수 요조(본명 신수진)는 가수, 배우, 영화감독, 작가, 책방 주인으로 변신해 왔으며 현재도 다중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생명이 길어지는 만큼 유지해야 될 것이 ‘건강’과 ‘돈’이다. 부족한 돈과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다시일을 한다. 이제 한 가지 일로는 답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할 일이 많아진다. 지금은 협회 안전교육지도 강사와 요양원 심리상담사, 작은도서관 운영 등 프리랜스로 일한 지 벌써 5년이 흘렸다. 나도 다중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중의 삶이 욕망의 그늘에 가리어져 단순한 삶과 경계를 긋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심지어는 학교에서 하기 싫은 수학책 밑에 소설책을 깔아 놓고 볼 정도로 많이 읽었다. 우여곡절 끝에 직업도 도서관 사서였다. 30년을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퇴직 후에도 책과 같이 놀았다. 집에는 온통 책이 쌓여있다. 책을 모두 읽지 않아도 책만 보면 마음이 푸근하고 배가 불렀다. 어느 날은 이 책 보다가, 저 책 보다가 하는 어린애 장난감과 같았다. 책을 사기 위해서 술 한잔 덜 마시고 용돈 아껴서 책을 사 모았다. 아내는 제발 집에 책을 가져오지 말라고 한다. 나의 욕심은 끝이 없다. 책 탐심도 남이 볼 때는 중독에 가깝다. 하지만, 나를 괴롭히는 바로 그 욕망은 나를 살아있게 한다. 욕망의 경계선에 와있다.
삶은 본디 단순하지만 욕망 때문에 복잡해진다. 욕망이 꿈틀댈 때 마음을 가다듬고 과도한 탐욕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스스로를 꾸짖으면서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
이제 작은 소용돌이 만들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 하고 싶었던 욕망을 내리는 것이다. 아예 밑바닥으로 가져다가 다른 사람들의 발목에 채이도록 버리는 것이다. 지극히 무섭도록 그 욕망을 모두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다. 내가 바란 욕망은 만신창이가 되어 그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열망하고 욕심부렸던 것을 하루아침에 버린 나의 못된 소갈머리가 그리도 쉽게 허물어지는 마지노선은 무엇이었든가?
내가 버린 것이 설령 버리고 난 뒤뒤 그 아까움은 또 무엇인가? 마치 내가 씹던 껌이 아까워 벽에다 붙여 두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그곳에 파리가 앉아 파리똥이 새까맣다. 붙여 둔 그 껌이 아까워 다시 입속으로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하고 많은 명제 중에 욕망만큼 욕심 많은 것이 없을 것이다.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만 가지 고생이라 하였다. 일백 년 삶을 주신 조물주님의 고마움은 모르고 내 살기 어렵다하여 뻔질나게 욕만 해댈 것인가? 인간은 주어진 삶을 성찰하고 남이 버린 알맹이를 건져 값진 내 인생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욕망을 해탈하고 인생의 마지막 장을 다시 얻을 것이다. 왜 진작 이러한 방법은 몰랐을까? 누가 그랬다. 가장 늦었다고 아는 그 순간이 가장 빠른 혜안의 판단이라 하였다.
나는 다시 욕망과 버림의 가운데에 섰다. 이제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하듯 신선하고 아무도 생각지 못하던 건전한 방법을 실천할 일뿐이다. 속담에 “늦게 배운 도둑이 질 난다.”했듯 인생의 글쓰기 작업이야말로 욕망을 버리는 제2인생의 마지노선에서 가장 심판을 잘하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20230308)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카페지기.
한비수필학교장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글을 수정하여 다시 올렸습니다.
부그럽습니다. 글쓰기의 오묘한 맛을 언제 느낄수 있을가?
잘 하셨습니다. 그 때가 곧 다가올 것입니다.
카페지기.
글쓰기에 푹 빠져 늘 즐거운 기분으로 살아가시는 모습 보기 참 좋습니다.
참으로 철 들지 않는 인생은 즐거운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살아오신 삶의 언저리가.....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해주시고, 고마우면서도 괜시리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댓글이 수필작이네요 윤영남 원우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