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는 세종대왕릉인 영릉에 관한 이야기다.
인문학자인 강명관님은 다른 학문(풍수)의 가장 치명적인 부분을 콕 집어,
마치 요절이라도 낼 듯이 세종대왕릉을 예를 들어 풍수와 풍수인을 비판하고 있다.
사실 제대로 알고 하는 비판이라면 정곡을 찌르는 정반합의 토론이 바람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풍수의 문외한이 제대로 인과 관계의 진상을 굽어살펴보지도 않고
제 마음 따라 비판의 핑곗거리를 찾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풍수에 문외한인 강명관님은 조선시대 대표적 음택인 영릉을 통해 풍수 무용론을 주장하였다.
영릉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영릉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
학자라면 비판을 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본적인 예를 갖추고 충분한 자료를 통한 이해를 토대로
최소한의 배려심과 겸양한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세상사는 만인 만물이 무한 관계하며 살아 꿈틀거리며 변화한다.
제눈에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현상에 빠져 적대시하는 부분도
결코 자신과 무관하지 않는 순환관계 속에 유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겸허해야 한다.
이쯤에서 강명관님의 영릉에 대한 설명에 오류를 풍수인의 입장에서 점검해보고자 한다.
원래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헌릉 근처*에 묻히고 싶어
먼저 세상을 뜬 소헌왕후**를 그곳에 장사지냈고 본인이 죽은 후에는 그곳에 합장되었다.
소헌왕후가 죽어 자리를 잡아 능을 조성할 때 합장으로 세종의 자리 즉 수릉(壽陵)***을 함께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풍수인 최양선이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정인지 등이 이를 비판하였고
결국 세종은 ‘부모님(태종) 묘 근처보다 더 좋은 명당이 없다’라며 그 자리에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강명관님이 언급한 것처럼, 세종 사후 불과 2년 후 문종이 죽고,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왕이 된 세조는 13년 동안 피부병에 시달렸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는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떠난다.
세조의 둘째 해양대군이 예종에 즉위했으나 1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고 예종의 아들도 어린 나이에 죽었다.
이러한 일련의 우여곡절과 비명횡사에 정치적 요인*****까지 더해져
결국 예종 즉위 원년에 세종의 능을 지금의 자리(여주)로 천장(이장) 하게 되었다.******
소헌왕후와 세종이 묻힌 초장 릉의 광중은 석곽을 하였다.
1만 5천의 백성이 동원되었고 공사 중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또 특이하게도 소헌왕후와 세종은 조선 왕릉 중에 최초로 합장까지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천장을 위해 시신을 수습할 당시 수의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고 한다.
광중에 물이 침입하였다는 것이다.
이장 후 예종은 갑자기 사망하였다.
어릴적부터 가진 지병이 있었지만 그렇게 갑자기 갈 정도는 아니였다고 하는데
독살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지만 어떠한 증거도 실제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예종이 죽고 즉위한 성종은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25년간 통치하게 된다.
결과는 강명관님이 비판한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가 묻힌 영릉은 풍수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최고의 과학적 사고를 가진 세종이 판단하고 고집하여 선택한 곳이었다.
오히려 당시 풍수사인 최양선은 그곳이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반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강명관님은 영릉을 예시하며 풍수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풍수사의 조언을 따라 여주로 천장까지 하게 되고 그 후 성종 대에는 국운이 안정되게 되었다.
실학자의 한 사람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여주의 영릉은 장헌대왕(세종)이 묻힌 곳인데, 용이 몸을 돌려 자룡으로 입수하고,
신방에서 물을 얻어 진방으로 빠지니, 모든 능중에서 으뜸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내용은 중도의 마음을 가지고 조금만 살펴보아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데
강명관님은 최소한의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서
어찌 그토록 혹독하게 영릉과 풍수를 엮어 풍수를 매도할 수 있는지?
역사적 사실까지도 제대로 검토하여 파악하지 않고
제 기분에 취해 풍수를 비판하고 풍수인을 미개인으로 몰아갈 수 있는지?
조선 후기, 풍수를 팔아서라도 살기 위해 몸부림친 사이비 풍수인!
그리고 허울 좋은 학자라는 유명세를 업고 멋모르는 풍수를 비판하는 강명관님!
누가 더 호모사피엔스다운 것일까?
*『세종실록』 권112, 세종 28년(1446) 6월 壬寅.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및 강남구 개포동, 일원동의 대모산 일대로 추정.
**세종 28년(1446) 4월 19일 사망.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정해놓은 무덤
****『세종실록』 권105, 세종 26년(1444) 윤7월 乙酉.
*****이시애의 난(1467년)으로 한명회 등의 기존세력과 남이 등 신진세력이 대립하고, 결국 남이의 옥사로 신진세력의 대규모 숙청을 초래하면서 경색된 정국을 타개할 정치적 필요성도 천장을 감행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참조 신재훈, 『조선 전기 천능의 과정과 정치적 성격』.
******당시 영릉 자리에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이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무덤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예종의 청을 받아들인 이인손의 후손들이 묘를 파자 '이 자리에서 연을 높이 날린 다음 줄을 끊어 연이 떨어지는 자리로 이장하라.'는 지석이 나왔고 후손들이 이를 따르자 연이 떨어진 자리도 명당이어서 가문이 계속 번창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