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순교성지
■ 해미순교성지(조산리)
100년 동안 무려 3천 명의 신자들을 참혹하게 처결한 조산리 순교 현장
해미 성지는 100년 동안 무려 3천 명으로 추정되는 천주교 신자들을 참혹하게 처결한 조산리 순교 현장이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 박해 때에는 수많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던 거룩한 순교 터다. 해미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 곳이 있다. 서문 밖과 옥터, 그리고 소위 생매장지라고 전해지는 조산리다.
조산리는 해미읍에서 좀 떨어진 내 건너편 벌판에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있는 곳이었다. 바로 현재 해미 성지로 조성된 곳이다.
생매장에 관한 일은 유해를 찾을 당시 70년이나 되는 옛날 일이었으므로 확인이 어려웠으나 다행히 노인들 중에 목격자나 전해들은 증언자들을 통해서 생매장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 증언에 따라 1935년에 조산리에서 순교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에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 없이 수십 명으로 짐작되었으나 수습된 유해는 10명가량 밖에 되지 않았다.
병오년(1906년)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이 보이지 않았으나 증인의 말 을 확인한 후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하였다. 그 결과 유해를 많이 얻었을 뿐 아니라 십자고상이 썩은 형적까지 발견되었다. 발굴된 유해들은 성대한 예식을 갖추어 당시 서산 본당인 상홍리(일명 가재) 공소로 이장하였다.
해미는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 박해 때에는 수많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덮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 지역 외인들은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때 캐어 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다.
해미 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서는 1935년 서산 본당의 바로(Barraux, 范, 1903~1946, 베드로) 신부(서산 본당 재임 1932.7.~1946) 지도하에 순교자의 유해 발굴 때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유해 발굴 터인 원 위치로 다시 안장되었고, 순교자의 유해는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유해 참배 실에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유해 발굴지 인근 하천 위에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 탑이 세워져 있다.
■ 해미 순교자 묘 발굴과 바로 신부
서산 동문동 제6대 바로(Barraux, 1903~1946, 范 베드로) 신부는 1935년 해미면 조산리(현 해미순교 성지) 해미 하천변에 생매장되어 있던 병인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묵주고상과 유골을 발견하여 수습하여 상홍리 백씨 문중의 묘에 안장하였다.
1930년 6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고 1932년 8월 5일 서산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1937년에는 서산 성당을 신축하였다.
사목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바로 신부는 어느 날 봉성체 중에 병환 중에 있는 교우가 영하지 못한 채 밷어 낸 성체를 대신 영하고 결국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