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실루바 성모발현 성지
개요
실루바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가톨릭을 받아들인 리투아니아의 성모님 발현 성지이다. 리투아니아에서 가톨릭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루터교와 칼뱅주의가 들어와 가톨릭이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에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리투아니아는 북쪽에 있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발트 3국으로 불린다. 이 세 나라는 매우 유사하여 마치 하나의 운명 공동체처럼 보이는데, 이런 유사함 속에 확실히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종교이다. 발트 3국은 오랫동안 개신교의 지배를 받아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주된 종교는 지금도 루터교인 반면에, 리투아니아는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신자들이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가톨릭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성모님의 발현
1608년 어느 여름날, 작고 가난한 마을인 실루바의 외곽에서 양 떼를 치던 4명의 목동 앞에 성모님이 나타나셨다. 성모님은 큰 바위에 맨발로 서 계셨는데 슬픔에 잠겨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며 성자를 품에 안은 채 그저 눈물을 흘리셨고, 그 많은 눈물이 바위 위로 떨어졌다, 성모님은 푸른 망토를 걸치고 계셨고, 길고 밝은 갈색 머리가 목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밝은 빛이 성모님과 성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성모님은 곧 사라지셨고 첫 번째 발현은 그렇게 짧게 끝났다. 성모님이 발현하실 때 서 계셨던 큰 바위는 바로 홀룹카 신부가 76년 전 성모화와 중요 문서들을 파묻은 곳이었다.
목동 중 한 명이 달려가서 칼뱅교 목사에게 성모님의 발현을 전하였지만, 그는 비웃으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발현을 목격한다는 목동들이 부모와 이웃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발현하신 성모님에 관해 말하였다. 다음 날 아침, 목동들의 이야기를 듣고 성모님을 보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바위 앞에 모여들기 시작하자 이를 저지하려고 목사도 따라나섰다.
칼뱅교 목사는 이 사건을 가볼릭의 음모로 간주하고 여전히 로마의 미신을 믿는다며 사람들을 질타했다. 그런데 사탄의 소행이라 경고하며 그곳을 떠나려는 순간, 가슴 저리게 우는 소리를 그도 듣게 되었다. 목동들이 전한 모습처럼 성모님이 다시 발현하시어 그 목사 역시 목격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성모님의 발현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잠시 마음을 진정한 후 용기를 내어 성모님께 물었다, “당신께서는 왜 울고 계십니까?” 이에 성모님은 슬픈 목소리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 바로 이 땅에서 경배받았다. 그러나 이제 이 신성한 땅이 그저 농사짓고 가축을 놓아 기르는 곳으로 전락하였다”라고 답하며 사라지셨다. 성모님은 이후 1612년까지 여러 차례 발현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진 바 없다.
성모님이 성자와 함께 실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자, 그동안 가톨릭 신앙을 거의 잊고 살아온 사람들은 성모님의 메시지에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성모님의 발현은 강력한 영향을 미쳐 칼뱅교를 신봉하던 마을 주민 전체가 회심했고, 인근 주민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회개하여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1629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는 1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실루바에 모여 성체를 영하는 감동적인 사건도 벌려졌다.
발현 장소
성모님은 실루바 성당이 파괴되기 전에 홀룹카 신부가 궤짝을 묻어 둔 바위 위에 발현하셨다. 성모님이 그 바위 위에 발현하셨다는 것은 궤짝 속에 있는 성모화와 각종 문서와 성물 등의 진정성을 일깨우는 동시에 가톨릭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으로 볼 수 있다.
1612년 카자케비추스 신부는 발란시우스 주교의 지시로 성모님의 발현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 소식은 한 눈먼 노인에게도 전해졌다. 100세가 넘은 그 노인은 약 80년 전 홀룹카 신부와 함께 큰 바위 옆에 궤짝을 묻었던 밤을 기억해 냈다. 카자케비추스 신부와 마을 주민들은 그가 궤짝이 묻혀 있는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발현 장소로 데려갔다. 그러다 바위에 가까이 다다르자 그가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 노인은 기쁨과 감사로 무릎을 꿇으며 궤짝이 묻혀 있는 자리를 가리켰고, 사람들은 궤짝을 땅에서 파내어 열었다. 그 속에는 완벽히 보존된 성모화와 여러 개의 황금 성물, 예복, 교회 증서, 기타문서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1663년 사피에가 주교는 성모님이 발현하신 성스러운 바위 위에 작은 경당과 제단을 만들었다. 1770년에는 런던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성모상을 가져와 바위 위의 제단에 봉헌하였는데, 그 앞에서 기도한 신자들이 영육 간의 건강을 회복하여 성모상은 ‘병자들의 건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그 성모상은 현재 대성당 제단의 오른쪽에 있는 경당에 모셔져 있다.
1908년 성모님 발현 3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경당을 성스러운 바위 위에 세우기로 계획하였고, 1924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4401 높이의 흰색 경당이 봉헌되었다. 경당의 동서남북 4면에는 1979년부터 2년 동안 3명의 화가에 의해 성모님 발현을 표현한 벽화가 프레스코 화법으로 그려졌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바위는 경당 중앙에 있는 제단 아래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 가까이 가서 직접 만져 볼 수 있고 입맞춤할 수도 있다.
시현자
시현자를 목동 4명과 칼뱅교 목사로 한정하고 있지만, 발현 경당에서 있는 벽화를 보면 마을 사람들도 발현을 목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집단으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아일랜드 노크(1879)에서도 있었는데, 노크의 경우 다수의 시현자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는 반면에 시간이 많이 지난 실루바의 경우에는 자료가 거의 없어 시현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성지 소개
실루바는 마을은 작지만, 성지는 제법 큰 규모로 조성되어 있다.
우선 중앙에는 장방형의 대규모 성지 광장이 있는데 이 광장의 양끝단에 성모 탄생 대성당과 발현 기념 경당이 위치한다. 이 광장은 1937년에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2008년 성모님 발현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재조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장에는 두 개의 중요한 성상이 서 있는데 하나는 성모상이고 다른 하나는 1993년 성지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성상이다.
2003년 9월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 기념관이 완공되어, 사제들의 피정 장소나 회의실,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광장 옆에는 실루바 순례자 센터가 있다. 이곳에는 바위 옆에 묻혔던 궤짝, 성모님이 발현하실 때의 모습을 그린 성화 등 발현과 관련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관련 책자들도 많이 소장되어 있다. 광장 가장자리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1624년 카자케비추스 신부는 원래의 실루바 성당이 있던 자리에 작은 목조 성당을 세웠는데 이 성당은 여러 번 증축되었고, 성당 제단에는 땅에 묻혀 있다 발견된 성모화를 모시게 되었다. 1786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는 성모화 속 성모님과 성자에게 금으로 된 왕관을 봉헌하는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이를 축하하는 행사가 3일 동안 열렸다. I2명의 주교와 3만 명의 신자가 참석했으며 행사 마지막 날에는 지금의 벽돌로 건축된 성모 탄생 대성당이 봉헌되었다. 대성당 제단에 모신 성모화의 양쪽에는 성모님의 배필인 성 요셉과 아버지인 성 요아킴의 성상이 서 있다.
1886년 열린 대관식 100주년 기념식에는 러시아제국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40명의 사제와 4만 명의 신자가 참석하였다. 1993년 대성당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로 칭하였다. 2004년 성모화에 봉헌된 왕관이 도난당하자 2006년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로마를 방문한 리투아니아 주교에게 새로이 제작된 왕관을 축복하여 전달하였다. 성모님 발현 400주년을 맞이한 2008년에는 15만 명의 순례자가 성지를 방문하였고,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파견한 독일 쾰른 교구의 추기경 요아힘 마이스너 특사도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자료: 세계의 성모발현 성지를 찾아서. 분도출판사. 최하경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