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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0권 / 묘갈명(墓碣銘)
통훈대부 행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편수관 제산 김공 묘갈명〔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編修官霽山金公墓碣銘〕
영조 임금은 지극히 성스럽고 신령하여, 무릇 옥사를 다스리면 사람들이 모두 억울함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오직 당인(黨人)은 제 소견만 내세우며 짧은 안개로 하늘을 가로막으려 하였다. 이에 제산(霽山) 김공(金公)과 같은 이는 억울함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10년 뒤에 성심(聖心)이 조금씩 깨닫고 완전히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금상(今上) 을묘년(1795, 정조19)에 이르러 상이 공의 죄가 아님을 통찰하고 직첩(職牒)을 내려 주었으니, 공을 불쌍히 여긴 것이 자못 지극하였다. 대개 선왕의 뜻을 계승한 것이다. 군자가 말하기를 “근심이 없는 이는 오직 영조 임금이로세.” 하였다. 비록 당인일지라도 해와 달 같은 밝음을 어찌하겠는가.
공의 휘는 성탁(聖鐸)이고, 자는 진백(振伯)이며, 호는 제산이다. 고려 때에 태자첨사(太子詹事) 용비(龍庇)라는 분이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져서 김씨가 그로 인하여 의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휘가 진(璡)이고 호가 청계(靑溪)인 분이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극일(克一)은 호가 약봉(藥峯)으로 아우 구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과 함께 모두 퇴도(退陶)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이에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사빈서원(泗濱書院)의 경덕사(景德祠)에 배향되었다.
약봉은 자식이 없어서 구봉의 아들 철(澈)을 후사로 삼았는데, 철은 성균 진사(成均進士)이며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시온(是榲)이고 호는 표은(瓢隱)이며, 숭정 병자년(1636, 인조14) 이후에는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 임금이 사헌부 집의를 증직하였다. 조부의 휘는 방렬(邦烈)이고 성균 생원(成均生員)이다. 아버지의 휘는 태중(泰重)이다. 어머니 순천 김씨(順天金氏)는 부사(府使) 김윤안(金允安)의 후손이고 처사(處士) 김여만(金如萬)의 따님이다...........................
정사년(1737)에 공조좌랑 겸 지제교로 옮겼다. 잠시 뒤에 영선(瀛選)에 들어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가 곧 교리로 옮겼다. 이때 임금의 총애가 날로 융숭하여 장차 조만간 크게 등용할 것 같았는데, 질투하는 무리가 옆에서 엿보다가 몰래 사주하였다. 이에 호남과 영남의 유생 이해로(李海老)ㆍ신헌(申𨯶) 등이 이미 공의 지난번 상소에서 “향촌에서 선비들의 습속이 바르지 못한 것” 등의 말에 대해 노기를 품었는데, 게다가 처신을 바꾸어 당로자에게 아첨하며 상소문을 올려서 무고하여 모욕이 공의 스승에까지 미쳤다.
공이 소를 올려 변론하여 아뢰기를,
“신의 스승 이현일(李玄逸)이 지금까지 이름이 죄적(罪籍)에 있는 것은 기사년(1689, 숙종15) 가을에 올린 응지소(應旨疏) 중의 한 구절 때문인데 그 소장 전문의 뜻을 가지고 본다면 실로 국모를 위해 편안히 모시는 도리를 다하고 선대왕을 위해 처변(處變)의 의리를 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기묘년(1699)의 사면과 신사년(1701)의 완전 석방과 경자년(1720, 경종 즉위년)의 복관이 비록 혹은 행해지고 혹은 중지되었으나 이미 성상께서 통촉해 주셨고 또한 상신(相臣)의 평번(平反)이 있었으니, 그 본정에 다른 것이 없었음을 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이현일은 기사년 연초에는 멀리 향읍에 있었고 사업(司業)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4월이며 걸음이 광주(廣州)에 도달했을 때 곤성(坤聖)을 위하여 소를 올렸으나 후원(喉院 승정원)에서 막혀서 정철(呈徹)하지 못하였으니, 흉론을 주장했다고 그를 평하는 것은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기사년의 일에 대해 선천(先天)에 부친 것을 알지만 신 때문에 모욕이 스승에까지 미친 것을 스스로 통탄하며 분수에 넘침을 피하지 않고 기휘를 무릅쓰고 범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의 상소가 정원에 도달하자, 승지 유엄(柳儼)이 별도로 계사(啓辭)를 작성하며 한껏 모함하여 성상의 귀를 놀라게 하는 계책으로 삼고 공의 소와 함께 성상께 올려 열람하시게 하였다. 상이 의금부에게 명하여 영남에 있는 공을 체포하게 하였다. 고문하고 신문하는 데에 이르러 공의 숨이 간당간당하자, 형장(刑杖)을 잡은 옥졸들도 공을 가엾게 여겨 공으로 하여금 기절한 척을 하게 하였다. 대개 죄인이 기절하면 형장을 멈추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 당인이 들추어내어 죄안을 이루고 공을 사지에 빠뜨린 것은 ‘선천’ 2자에 지나지 않는데, 선천이란 오래고 멀다는 뜻이다. 공의 뜻은 기사년이 지금으로부터 반백 년이 된다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성상의 효성이 다함이 없어 그때의 일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어찌 일찍이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풍원군이 소를 올려 공을 구원하다가 죄를 입어 삭직되고 오랜 뒤에 죄에서 풀려나자 또 상소하여 변론하는 데 더욱 힘썼다. 이에 공을 정의(旌義)에 안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옥살이한 것이 모두 다섯 달이고 참혹함이 지극했는데, 능히 옥을 나와서 태연히 바다를 건너니,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외딴섬에 서책은 없었으나 《심경(心經)》 1부와 《한비문(韓碑文)》 1책을 가지고 와서 아들 낙행(樂行)과 함께 매일 강론하고 토론하는 것을 일삼았다. 다음 해 여름에 상이 공을 광양현(光陽縣)으로 양이(量移)할 것을 명하였다.
경신년(1740, 영조16) 겨울에 대부인이 세상을 버리자, 공이 모친의 유의(遺衣)로 신위(神位)를 설치한 뒤에 땅을 치고 울부짖었는데, 상이 듣고는, 돌아가 장사 지낼 것을 특별히 윤허하였다.
신유년(1741) 봄에 비로소 안동의 옛집에 달려가 곡하고 우제(虞祭)와 부제(祔祭)를 마치자마자 유배지로 돌아갔다. 상일(祥日)이 되자 제수를 진설하고 상을 마쳤다.
을축년(1745)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강진현(康津縣)의 신지도(薪智島)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듬해 봄에 다시 광양으로 이배되었다. 공은 슬픔으로 몸이 상한 이래로 건강이 더욱 훼손되었는데, 겸하여 수토(水土)와 장려(瘴癘) 때문에 병이 어찌할 수 없게 되어 정묘년(1747) 4월 30일에 현의 북쪽 용선암(龍仙菴)에서 생을 마쳤다. 공은 숙종 갑자년(1684, 숙종10)에 태어났으니, 향년 64세이다.
[주-D031] 호남과 …… 미쳤다 : 1736년에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헌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고, 이어 이인지(李麟至)의 무욕(誣辱)에 대해 변해(卞解)하고, 또 “이현일이 기사년의 흉론(凶論)을 주장하여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묘비(墓碑)를 찬술하면서 이에 감히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자손록(子孫錄)에 기재하지 않았습니다.……또 무슨 이변이 발생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英祖實錄 12年 8月 20日》[주-D032] 이현일(李玄逸) : 1627~1704.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이다. 1691년 이조 참판을 지냈고 그 뒤 이조 판서까지 올랐으나 갑술환국(1694) 때 유배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주-D033] 평번(平反) : 억울한 죄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로 처리하거나 감형해 주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준불의(雋不疑)의 모친이 아들에게 “오늘은 평번을 해서 몇 사람이나 살렸느냐?”라고 묻고는, 많은 사람을 구제했다는 대답을 들으면 기뻐서 웃곤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雋不疑傳》[주-D034] 곤성(坤聖) : 왕후를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인현왕후를 가리킨다.[주-D035] 풍원군이 …… 힘썼다 : 조현명의 상소에 “김성탁이 망언으로 장차 죽음에 이르는 것은 진실로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현일이 근본이고 김성탁은 지엽인데, 근본인 이현일은 집안에서 편안히 죽게 하고 지엽인 김성탁은 형장에 의해 죽게 한다면 본말과 경중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조정에서는 처음에 역률로써 이현일의 죄를 처단하지 않았는데, 난역을 비호했다는 것으로 김성탁을 책망한다면 거의 백성을 속이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금석(金石)의 법전은 스스로 절차와 차례가 있으니, 난역을 비호했다는 죄율을 가벼이 김성탁에게 시행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英祖實錄 13年 7月 15日》[주-D036] 한비문(韓碑文) : 한유(韓愈)의 비문을 모은 책으로 보인다.[주-D037] 낙행(樂行) : 김낙행(金樂行, 1708~1766)으로, 본관은 의성, 초명은 진행(晉行), 자는 퇴보(退甫)ㆍ간부(艮夫), 호는 구사당(九思堂)이다. 김성탁의 아들이고, 밀암 이재의 문인이다.[주-D038] 경신년 …… 돌아갔다 : 《제산집(霽山集)》 〈제산선생연보(霽山先生年譜)〉에 “경신년……12월에 어머니 김씨 상을 당하였다.……신유년 2월에 분상하며 집에 도착하였다.”라고 하였다. 《영조실록》 17년 1월 3일 기사에 “광양현에서 육지로 내보낸 죄인 김성탁에게 특별히 말미를 허락하여 돌아가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김성탁의 아들이 울면서 호소한 것 때문에 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주-D039] 대계(臺啓)로 …… 이배(移配)되었다 : 《제산집》 〈제산선생연보〉에 “선생 나이 62세 10월에 아들 낙행이 두 어버이께서 천 리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을 애통히 여겨 박 부인을 모시고 갔다. 이는 대개 유미암(柳眉巖)이 북쪽으로 귀양 갈 때 부인이 따라갔던 일에 의거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사간원의 계사가 나와서 이배의 명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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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 영조 12년 병진 > 3월 12일 > 최종정보
영조 12년 병진(1736) 3월 12일(병오)
12-03-12[02] 경상도 생원 이인지가 송시열ㆍ송준길의 문묘 종사 의논을 비방하니 귀양보내다
慶尙道生員李麟至等四千餘人上疏, 詆斥兩先正從享之議 疏頭李麟至遠配
경상도 생원(生員) 이인지(李麟至) 등 4천여 인이 상소하여 두 선정(先正)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케 하려는 의논을 비방하며 배척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그 소(疏)를 물리치니, 이인지 등이 또 옹폐(壅蔽)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자, 이날 승지(承旨) 정우량(鄭羽良)이 등대(等對)하여 아뢰기를,
“영남 유생[嶺儒]의 소가 올라왔는데, 갑인년과 기사년의 남은 논의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소를 들여오게 하여 보고 나서 특별히 되돌려주도록 명하고 인해서 유시하기를,
“옛날의 처분은 그 분명하기가 일성(日星)과 같았으니, 선대(先代)의 사업을 계승하는 도리로서는 선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간사한 말을 배척하고 종향[從祀]의 윤허를 아끼는 것은 바로 그 일이 중대해서이다. 영남의 유생이 아무리 불만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예론(禮論)을 제기하고 선정(先正)을 무함해 욕하면서 감히 지난날의 처분을 현혹시키고 어지럽혀서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려는 나의 본뜻을 손상시키려고 하니, 뒷날의 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소두(疏頭) 이인지(李麟至)를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그 상소에 또 예천 현감(醴泉縣監) 민통수(閔通洙)가 상소한 유생을 채찍으로 때렸다고 말하자, 임금이 엄히 신칙하여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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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집(夷峯集) 황후간(黃後榦)생년1700년(숙종 26)몰년1773년(영조 49)자이직(爾直)호이봉(夷峯)본관창원(昌原)특기사항이재(李栽), 김성탁(金聖鐸)의 문인. 유승현(柳升鉉), 권만(權萬), 김상정(金尙鼎), 이상정(李象靖), 김낙행(金樂行) 등과 교유
영조 | 11 | 1735 | 을묘 | 雍正 | 13 | 36 | 宋時烈과 宋浚吉의 문묘 배향을 청하는 상소를 연명으로 올리다. |
영조 11 1735 을묘 雍正 13 36 宋時烈과 宋浚吉의 문묘 배향을 청하는 상소를 연명으로 올리다.->태학생 홍봉한 등이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문묘에 올려 배향할 것을 청한 데 대한 경상도 생원 이인지 등의 우암동춘 배척 연명 상소에 동참하다.
*황후간은 노론과 정반대 남인 갈암 아들 밀암 이재의 제자이고 갈암 제자 강경파 제산 김성탁의 제자이니 우암동춘 제향의 극렬 반대파이지 찬성파가 아님. 다른 배향청구상소에 연명된 이름은 동영이인일 것임. 영조12년으로 옮기어 서술할 것.
* 영조실록 > 영조 12년 병진 > 3월 12일 > 최종정보
영조 12년 병진(1736) 3월 12일(병오)
12-03-12[02] 경상도 생원 이인지가 송시열ㆍ송준길의 문묘 종사 의논을 비방하니 귀양보내다
慶尙道生員李麟至等四千餘人上疏, 詆斥兩先正從享之議 疏頭李麟至遠配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2년 병진 > 3월 12일 > 최종정보
영조 12년 병진(1736) 3월 12일(병오) 맑음
12-03-12[25] 태학생 홍봉한 등이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문묘에 올려 배향할 것을 청한 데 대한 경상도 생원 이인지 등의 연명 상소
경상도 생원 이인지(李麟至)ㆍ신진귀(申震龜), 진사 이정신(李廷藎), ...... 박순(朴洵)ㆍ황후간(黃後榦)ㆍ안국태(安國台)..... 유필후(柳必後)ㆍ황후간(黃後榦)ㆍ주전(朱壂)...... 최경귀(崔慶龜)ㆍ황후간(黃後榦)ㆍ최필기(崔弼基)..... 김경흠(金景欽)ㆍ김상중(金尙重)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보건대 태학생 홍봉한(洪鳳漢) 등이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을 함부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부자(夫子)에 비견하여 감히 문묘(文廟)에 올려 배향하기를 청하였으니, 어찌 이리도 심히 거리낌이 없단 말입니까. 竊見大學生洪鳳漢等, 肆然以宋時烈·宋浚吉等, 擬之於程·朱夫子, 而敢請聖廡之躋享, 何其無忌憚之甚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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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2년 병진 > 3월 12일 > 최종정보
영조 12년 병진(1736) 3월 12일(병오) 맑음
12-03-12[25] 태학생 홍봉한 등이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문묘에 올려 배향할 것을 청한 데 대한 경상도 생원 이인지 등의 연명 상소
경상도 생원 이인지(李麟至)ㆍ신진귀(申震龜), 진사 이정신(李廷藎), ...... 박순(朴洵)ㆍ황후간(黃後榦)ㆍ안국태(安國台)..... 유필후(柳必後)ㆍ황후간(黃後榦)ㆍ주전(朱壂)...... 최경귀(崔慶龜)ㆍ황후간(黃後榦)ㆍ최필기(崔弼基)..... 김경흠(金景欽)ㆍ김상중(金尙重)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보건대 태학생 홍봉한(洪鳳漢) 등이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을 함부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부자(夫子)에 비견하여 감히 문묘(文廟)에 올려 배향하기를 청하였으니, 어찌 이리도 심히 거리낌이 없단 말입니까. 竊見大學生洪鳳漢等, 肆然以宋時烈·宋浚吉等, 擬之於程·朱夫子, 而敢請聖廡之躋享, 何其無忌憚之甚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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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 정조 즉위년 병신 > 7월 27일 > 최종정보
정조 즉위년 병신(1776) 7월 27일(병신)
00-07-27[10] 재궁(梓宮)을 현궁(玄宮)에 내렸다.
영남의 유생 이인지(李麟至)가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배척하였다. 이에 왕이 하교하기를, ‘아, 슬프다. 선왕께서 이들 두 분 선정(先正)을 표장(表章)하신 것은 그 밝기가 마치 저 일월과 같으니, 나 소자의 계술(繼述)하는 도리로는 당연히 선지(先志)를 따라서 사설(邪說)을 배척할 뿐이다. 지금 이인지가 뒤미처 예설(禮說)을 진달해서 있는 힘을 다해 선정을 무함하고 모욕하였으니, 이는 곧 선정을 무욕(誣辱)할 뿐만이 아니라 선왕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왕조(王朝)를 현혹하려는 것이므로, 통렬히 응징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그를 먼 변방으로 내쫓아 버렸다.
안동(安東)의 유생들이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사당을 허물었다. 이에 왕이 하교하기를, ‘옛날 청(淸) 나라 병사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였을 때 문정공이 의리로써 다투었으며, 임경업(林慶業)이 중국의 금주(錦州)에 들어갔을 때는 문정공이 봉사(封事)를 올렸으니, 그 정충(精忠)과 대절(大節)은 우주간에 찬란하게 빛난다. 지금 제생(諸生)들이 나라의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서원을 훼철하였으니, 난민(亂民)이라 하겠다.’ 하고는, 엄히 처벌해서 멀리 찬배(竄配)하라고 명하였으니, 정도(正道)를 지키려는 엄중함과 사설(邪說)을 배척하는 당당함이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