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철불좌상은 충주시 성남동 마하사 앞뜰에 있었다.
1770년(영조 46) 무렵에 지은 〈약전원수기〉를 보면,
633년에 절을 창건한 후
높이 3척 2촌 5푼의 철조석가좌상을 조성하여,
염해평 서쪽, 곧 충주공고와 성남초등학교 부지 일대로서
충주 시내의 중심부에서 마지막 재로 향하는 안림로의 오른쪽 길가에,
서쪽을 향하게 봉안하고
그 뒤로 수 백 년을 내려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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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간 불상이 노천에 방치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누군가가 건물을 짓고 봉안하면 당우가 소실되거나,
또는 향화(香火)로 공축하면 반드시 악병이 유행하므로
이 철불의 명칭을
광불(狂佛)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래서 본래는
완전했던 두 손을 무뢰배가 부숴 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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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22년에 옛 중원군청,
곧 지금의 관아공원 구내의 석가산으로 옮겼고,
다시 1937년 마하사로 옮겼다가
1959년에 지금의 대원사로 다시 옮겨져 봉안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1959년 중원군 교육청에서 발간한 《예성춘추》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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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나온 지명인 염해평은
‘염밭’ 또는 ‘염바다’라고도 한다.
그 지명에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기록이
《예성춘추》와 《중원향토기》(1977년)에 나와 있어 소개해본다.
예로부터 현 성남동 마하사 앞뜰에 철불이
서향해서 앉아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이곳을 ‘광불거리’라고 한다.
곧 계족산(鷄足山) 아래의 어림리 앞과
금봉산(남산) 서쪽의 넓은 들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부터 어림리에 고도(古都)가 있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때인 930년(경순왕 4)에 견훤(甄萱)은
이 곳에 후백제의 도읍을 정하려 했는데,
지렁이의 후신인 견훤은
이 일대가 염바다라 하므로 질겁을 하고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도읍을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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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기록 또는 전해 오는 전설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염해평은 지금의 충주공고 북쪽의 들판이다.
이 곳에 철불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므로
광불거리로 불렀다.
염해평에서 동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대원고등학교가 위치해 있으며,
위의 인용문에서 나온 어림리는 대원고와 약 200여m 떨어져 있다.
어림리는 이궁지(離宮址)·대궐터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곳에 절이 있었다 하여 어림동사지로 칭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