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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024년 6월 9일 / 마 9:9-13
1. 예수님을 따랐던 세리 마태
마태는 예수님의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그 이름을 잘 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그러나 마태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성경에 마태에 대한 기록이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예수님의 12제자 명단 외에 단 두 사건에만 그 이름이 나타난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세관에서 세리로 일하던 그를 제자로 부르시는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마태가 예수님과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푼 사건이다. 그래서 마태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려면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마태를 깊이 연구해 보면, 이 인물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참 귀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치 숨은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을 얻게 된다.
마태의 원래 이름은 레위였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부르실 때 그 이름을 레위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런데 바로 뒤 3장을 보면, 예수님의 12제자의 이름에는 마태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다음에 그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바꾸어주신 것 같다.
그런데 마태가 쓴 마태복음을 보면 레위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실 때도 마태를 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을 쓸 때는 이미 사도로 사역한 지 30여년이 지난 뒤였다. 아마도 마태는 레위라는 옛 이름을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레위 시절 마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레위라는 이름을 봐서는 이 사람이 레위지파였을 것으로 보이다. 그리고 부모가 이름을 레위라고 이름을 지은 것을 봐서는 제사장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는 신앙훈련을 철저하게 시킨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을 보면, 우선 구약성경을 다른 세 복음서(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인용하고 있다. 특히 구약과 직접 연관된 내용을 무려 99번이나 인용하고 있다. 그것도 구약의 거의 모든 기록들, 율법서인 토라, 예언서인 느비임 그리고 성문서인 케투빔을 망라해서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율법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전문적인 수준으로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적 훈련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 크게 쓰임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사람이 세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인 세리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지방을 지나가시다가 세금 걷는 일에 여념이 없는 한 사람을 보셨다. 그는 ‘마태’라는 세리였다. 당시 가버나움 세관은 로마를 위해 식민지 유대를 상대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곳이었고, 거기에다 식민지 통치자인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다. 한편 이곳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수리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품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에 적절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이곳 세관의 세리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세금만이 아니라, 그곳을 통과하는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해야 했기 때문에 세리 ‘마태’ 역시 업무에 눈코 뜰 새 바빴다. 그런데 이들 세리들은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거주민 모두에게 모든 종류의 세금을 강제로 부과하거나 부당하게 징수하므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마태’도 유대인으로 로마 당국에 고용된 세리로서 로마를 위해 세금을 부당하게 징수하여 유대인들로부터 매국노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당시 이들 세리는 몸을 파는 창기(娼妓)와 같은 부류의 ‘죄인들’로 불리웠다. 이들이 비록 실정법에 따라 사법적 제재를 받는 죄수(prisoner)는 아니었지만, 유대 사회의 도덕 규범과 유대인들이 오래 전부터 규정해온 전통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무시하던 의식법상의 죄인(sinner)으로 여겼다. 따라서 유대 사회에서 가장 깨끗하고 의롭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유대인들은 이들 죄인, 세리와 창기들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들과 자리를 같이 하는 행위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이었던 세리 마태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라고 하셨다.
이에 세리 마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다. 여기에서 마태는 자기라는 것조차 버리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말씀을 듣는 가운데 사도로서의 훈련을 쌓아갔다.
우선 누가복음 5:28을 보면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마태가 기록한 마태복음 9:9을 보면 그냥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되어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부분을 생략한 것이다. 자랑스러운 내용이어서 자기가 더 과장해서라도 쓸 수 있지만 아예 그 내용을 삭제한 것이다. 또한 12제자의 이름을 기록한 부분을 보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그냥 마태라고만 되어있다. 그런데 마태가 기록한 마에는 세리 마태라고 되어있다. 다른 사람들 이름은 그냥 이름만 기록하면서 자기 이름에는 세리라는 말을 덧붙여놓은 것이다. 부끄러운 내용이어서 누가 써놓아도 지우고 싶었을 텐데 애써 덧붙여 놓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마태는 레위에서 마태가 된 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높이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마태는 나서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태는 12사도 중에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당시 세리는 전문직이었다. 공무원으로서 전문적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로마를 위해 일하고 통행세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여러 언어도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다른 12사도들과 비교해 볼 때 학벌이나 지적수준 그리고 능력 면에서 남달랐다. 그러나 마태는 나서지 않았다. 세리였었기에 재정문제는 전문가였지만 회계를 가룟 유다가 맡았다. 그리고 여러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서서 말하고 행동할 때 말이 없었다. 그저 예수님께서 정하신대로 따랐고, 남들이 앞서서 결정한 대로 조용히 협력했다.
그리고 주님의 명을 받고 순교할 때까지 여러 곳에서 충성스럽게 사역을 했다. 그러나 자신이 했던 사역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거 어디서 무엇을 했고, 그 열매가 무엇인지 거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마태의 모습을 보면서 찬 323장 가사가 생각이 났다. 이 찬송은 이호운 목사님이 작사하고 이유선 장로님이 작곡한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이다. 특히 3절 가사가 생각이 났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특히 마태를 생각할 때 이 마지막 부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가 떠올랐다.
성령이 충만하여진 마태는 천국복음을 전하며 스스로 겸손해져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었다. 그 후 마태는 예루살렘, 이디오피아, 페르시아, 메디아등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니다가 에디오피아에서 박해받았으며 A.D. 60년 나다바에서 미늘창(도끼창)으로 살해당하여 순교하였다.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 <마태복음>을 기록하여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사랑의 빚을 갚는 헌신된 삶을 살았다.
2.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따른 마태와 따르지 못했던 사람들
마태처럼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셔서 곧장 따르게 된 제자들도 있었지만,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마 8:14-22).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소경이 보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뛰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수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눈꼴 사나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꼼짝 못하게 하시는 권세있는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몇몇 사람이 저 정도이면 자신의 인생을 한번쯤 맡겨도 되겠다 생각해서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의중을 꿰뚫어 보시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 말씀은 ‘네가 나를 따른다 해서 네게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다. 네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장사가 잘 된다거나, 이름을 날리게 된다거나, 높은 자리에 앉게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너 예수 믿더니 집안 꼴딱 망해버리고,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결국 병까지 걸렸구나 하는 소리를 들어도 좋으냐?’라는 말씀정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으려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다 버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의 자리까지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의 자리이다.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네 가진 것 모두 다 없는 사람들에게 퍼주고, 심지어 네 생명까지도 나눠주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믿고 축복받는 비결이나 성공하는 비결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는 사도 바울의 삶의 비결을 배우라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애굽 궁전에서 호의호식하며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지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히 11:24-26).
▶ 예수님께서 또 다른 사람에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좇으라.’ 그 사람은 단호한 결심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예!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라고 하셨다.
■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선교사가 평상시 친분이 있는 신앙심 깊고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터키 청년에게 영국 유학을 권했다. 원한다면 모든 학비며 생활비 등을 다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터키 청년은 ‘나는 우선 나의 아버지를 장사해야 한다.’ 라고 대답했다. 그 때 선교사는 그 청년의 아버지가 죽은 줄로 알고 심심한 동정을 표시했더니 이 청년은 자기 아버지가 아직 나이도 젊고 건강하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우선 나의 아버지를 장사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유학을 떠나기 전에 부모양친과 친척에 대한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모가 죽지 않으면 집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모 양친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지만, 일단 부모가 돌아가시고 자유롭게 되면 당신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긴 한데, 예수 믿는 것을 부모 사망 이후로 미루겠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람의 이러한 생각을 예리하게 통찰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 2:22), ‘하나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 너는 복음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1-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라는 말씀은, 회개에 필요한 반성이나 회고를 금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에 미련을 두고 애착하는 마음으로 뒤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에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다. 애굽에서의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들을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죽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반면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길, 신앙의 길은 머리 둘 곳 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길이지만, 그 길은 가시밭 십자가의 길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과 영생의 길이다.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끝까지 따라가는 신앙생활로 넉넉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기 바란다.
계 14:1-5 / [14만 4천 명이 부른 노래] 그런 뒤에 나는 예루살렘 시온산 꼭대기에 서 계시는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어린양 곁에는 이마에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새긴 사람들이 14만 4천 명이나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폭포 소리 같기도 하고 굉장한 천둥 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습니다. 또한 거문고에 맞추어 부르는 대합창 같은 소리도 들렸습니다. 3) 이 엄청난 대합창은 14만 4천 명이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들이 있는 앞에서 아름다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합창은 땅 위에서 속량함을 받은 이 14만 4천 명외에는 아무도 부를 수 없는 노래입니다. 4)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숫총각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드리는 첫 열매로서 땅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을 수가 없고 아무에게서도 비난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마음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끊임없는 기도와 전도는 무서운 죄인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 플로리다 국립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 잭 머피의 이야기이다. 그가 독방에 갇혀 있었을 때에 맥스 존스 목사가 그를 찾아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고 싶다.’라고 했다. 그는 ‘당장 꺼져버려, 그런 것을 가지고 와서 나를 성가시게 하지 말라.’ 대꾸했다. 그럼에도 존스 목사는 ‘나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라며 복음을 전했다. 존스 목사의 전도를 받은 후 어느 날 잭 머피는 범죄하던 시절에 형제처럼 지냈던 프랭크가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바로 자기가 있는 교도소에서 간증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랭크의 간증을 듣던 그는 예배를 마칠 때쯤 자기야말로 예수님의 용서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통감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감옥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는 출옥한 이후 죄의 권세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목회자가 되었다. 전혀 뜻밖에도 탁월한 복음전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된 잭 머피 목사는 자기가 바로 그 죄수였다면서 복음의 능력과 인간의 변화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였다.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복음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마다 제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3. 잔치까지 베푼 세리 마태와 이것을 비난하는 무리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
세리 마태는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을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다. 마태는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음식을 함께 나눈 것으로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마태가 자신을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하고 있다(눅 5:29).
마태는 유대인으로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받았던 자신을, 그 거룩하시고 권세 있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도록 제자로 부르신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큰 잔치’를 아낌없이 베풀었다. 마태는 이렇게 큰 잔치를 베풀며 많은 동료 세리들과 죄인 취급받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초청했다. 이는 예수께 대한 큰 감사의 표시만이 아니라, 그 잔치를 통해 일종의 송별회를 갖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당당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레위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의 삶을 살게 된 것이 너무도 기뻐서 크게 잔치를 벌이게 된 것이다. 레위에서 마태가 된 뒤 그는 상상했던 그 이상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 것이다. 레위시절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 수 없었던 영적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며 살아오면서 그리고 세상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오면서 그를 짓누르던 마음의 짐을 벗어버린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됐다는 차원이 다른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잔치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잔치가 세리 마태의 집에서 베풀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달려왔다. 바리새인들은 마태의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고 또한 초청할지라도 결코 응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온 목적은 그간 주시해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은 없는지, 율법을 파괴하는 듯한 언행은 없는지, 그 여부를 관찰하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마침 마태라는 세리의 집에서 여러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앉아 만찬을 즐기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 잠시 재미있는 문제를 풀고 가자.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심으로 예수님이 더러워졌을까? 아니면 세리와 죄인들이 깨끗해졌을까? 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함으로 저들이 더러워졌을까? 아니면 세리와 죄인들이 깨끗해졌을까? 현실로 돌아가서 우리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심으로 우리가 더러워질까? 아니면 세리와 죄인들이 깨끗해질까? 솔직히 나의 바람 아니 우리 모두의 바람은 우리 자신이 더러워지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이 깨끗해졌으면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 자신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이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단코 이들 죄인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간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교훈에 짓눌려 왔던 바리새인들이 감히 예수님께는 말하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비난하였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권위가 있는 귀한 말씀이셨다(마 9:12-13).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라는 말씀은 당시 흔히 통용되던 속담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이러한 속담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정확하고 명쾌한 답변을 하셨다.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란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그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눅 10:30-37).
여기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저들의 핑개거리는 레위기 2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들도 피해를 입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율법의 가장 중요한 뜻은 이웃 사랑이다.
어느 율법사가 예수미께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큽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2:35-40 / 그들 가운데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선생님, 모세의 율법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3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5).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다. 39) 그러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가는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레 19:18). 40) 모든 다른 계명과 예언자들의 요구는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가서...배우라’라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부하며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율법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외면하거나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책망하셨다.
마 23:23-28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라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하고 있다. 물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24) 눈먼 지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 25)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그 속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26)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으라. 그래야 잔 안팎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27)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아름답게 장식한 무덤 같아서 겉은 좋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위선과 죄가 가득 차 있다.
바리새인들 스스로 하나님과 율법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섬긴다고 하지만 그것은 외식과 위선에 지나지 않고 사실상 그들은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죄인들이라고 질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율법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처하지만 그 율법에 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아주 건강하다고 자부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 심각한 ‘중환자’였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처하지만 위선과 외식, 불법이 가득한 중대한 ‘죄인들’이었다.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교만한 <의인>을 부르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지체없이 돌본 선한 사마리아인을 보고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배워야만 했다. 바리새인들은 가인처럼 사랑과 긍휼이 없는 제사는 그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교이며, 영육간에 불행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임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고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였다(삼상 15:22).
▶ 참고로 할 대목이 있다. 정작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높혀야 상황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비겁한 인간을 본다. 모세가 보낸 열 명의 가나안 땅 정탐꾼들은 왜곡된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민 13:33)라고 했다. 물론 가나안 사람들의 키가 매우 클 뿐 아니라 그곳에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가리켜 ‘메뚜기와 같다’라고 표현한 것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항시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보는 것이 믿음이다.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앞에 있는 현실, 막고 있는 장벽까지도 믿음을 가지고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낮추어야 할 상황에서는 교만하고 자신을 높혀야 할 상황에서는 스스로 비천해지는 신앙이 없는 자가 되어서 안 된다.
죄는 한 마디로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며 높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뱀으로 가장한 사탄이 와서, ‘선악과를 먹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며 유혹하였다.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리라는 유혹이었다. 이 유혹에 넘어가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피조물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높아진다는 말에 넘어가 그만 죄를 짓고 말았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높이려는 교만이 바로 죄이다. 교만이 바로 죄의 뿌리이다.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은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은 남과의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며 무엇이 죄인가를 깨닫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참된 의인이 되었으면 한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죄인의 모습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오히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섬기는 하나님의 겸손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겸손의 완성이요 극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는데 반해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면서 자기를 높이려 하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고 그 자리에 자신을 세우려 한다. 그리고 세계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세계 중심이 되고자 한다.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 판단이 옳고, 자기 행동만이 옳다고 한다.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 더 이상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이웃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과 죽을 죄인을 위해서 사셨다. 오직 인간을 섬기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이 길이 좁은 길로서 성도들이 걸어야 길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은 정작 자신이 죄인이면서도 의인인 체하였고, 의인이신 오히려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자신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고, 얼마나 큰가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눈을 들어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스스로 그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
주일날 예배드리려 교회에 가는데 길가에 굶주려 허덕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불쌍해서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정성껏 대접하느라 예배시간을 어겼다면 안식일을 규례를 범한 죄일까? 그래서 그 사람의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을까? 아니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그 굶주린 사람을 그냥 모른 채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교회에 와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드렸다면 그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겠는가? 이에 대한 확실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마 12:1-8 / [막 2:23-28, 눅 6:1-5] 그 무렵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날은 마침 안식일이었지만 배가 몹시 고팠던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따졌다. `당신 제자들이 율법을 어기고 있소.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다니 될 말이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다윗왕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한 일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4) 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만 먹게 되어 있는 제단의 떡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모세의 율법에 보면 비록 안식일이라도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당번 일 하는 것은 허용되어 있다. 6) 진정으로 말한다. 성전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호 6:6)라는 성경 구절의 뜻을 너희가 제대로 알았더라면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인자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구약시대 다윗과 그 무리들이 너무 배가 고파 성전 안에 들어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들어가 제사떡 진설병을 먹었다. 이는 분명히 안식일 율법을 범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배가 고파 길가에 밀 이삭을 좀 잘라 먹었기로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바로 인애(仁愛)를 원하신다는 확실한 말씀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며 ‘따로 서서’ 스스로 깨끗한 체하며 회개할 줄 모르는 바리새인의 예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신다. ‘성전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며 회개할 줄 아는 죄인의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예수께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시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리새인과 같이 스스로 의롭다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할 줄 아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예배만 참석하기를 배우기 전에 먼저 긍휼을 배었으면 한다. 도둑질, 강도짓, 살인한 것 전혀 없고, 뇌물 먹은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일 날 예배에 빠진 것이 전혀 없고, 십일조, 감사헌금 꼬박꼬박 바쳤고, 일년에 성경 한 번 정도는 꼭 읽었고, 금식기도도 했다고 하여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라고 자처해서는 안 된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으며, 겸손과 온유를 배워 하나님 앞에 의인들이 되기를 바란다.
죄인으로 가득찬 교회보다는 두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 하나님만을 높이고,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교회, 병든 자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해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인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용서에 대한 내용은 레위 마태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강조한 것 같다. 우리도 이러한 간증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마 5:21-26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마 6:14-15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18:15-35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에 대한 예화로 결론을 맺는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들은 동물 희생으로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정작 원하시는 긍휼이 없었다. 반면에 세리와 죄인에게는 개선의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세리 마태가 보여준 대로 개선의 여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회개가 있으며 하나님을 위한 사랑과 이웃을 위한 긍휼이 있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개선의 여지가 있는 사람을 부르셔서 형식적인 예배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고 기뻐하신다.
■ 프로 복서 에반더 홀리필드(1962.10.19.~ )의 이야기이다. 자손에게 가난을 물려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는 마침내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그런데 심장병으로 방어전에 패배한 그는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은퇴를 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기도하던 그는 패배 후 가장 절실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 34세 때 그는 당시 30세의 핵주먹 챔피언 마이클 타이슨에게 도전했다. 전문가들이 본 승률은 25대 1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뒤엎고 11회전에 통쾌하게 TKO 승리를 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내 곁에 함께 해주셔서 나는 승리할 수 있다’(With God on my side, I cam do.)라고 고백했다. 사실 그는 시합 전 링에 오를 때 그가 입었던 위·아래 옷에 반짝거리는 은색실로 빌립보서 4:13을 약자(Phil.4:13)로 새겨 놓았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신앙고백이다. 1996년 재대결 도전자가 된 타이슨은 3회전 때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었다. 홀리필드는 너무 화가 났다. 타이슨의 가랑이 사이를 뻥 치고 싶었다. 그때 그는 심호흡을 하고 침착하게 경기를 하면서 하나님께 ‘제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를 용서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분했지만 결국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삶은 용서의 연속이다.’라고 고백했다. 방어전에 성공한 그는 2010년 세계 최초로 개인 통산 5차례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그때 나이는 48세로 역대 최고령 헤비급 챔피언 기록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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