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자: 2023.05.12 주일 낮 예배
* 말씀: 욥20:1/ 갈 2:20,24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 제목: 주 안에서 사는 길
*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
- 들어가는 말씀
오늘의 본문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잘 소화하고 기억하고 지키시는 저와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한결같이 가슴에 담고 세상 끝날까지 가슴에 새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 할렐루야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교리를 형성해 주신 로마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그 핵심 구절이 바로 오늘 강론할 갈라디아서 제2장 20절입니다. 이 한 구절이 성경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쓴 동기는 저들이 갈 1:6 절 말씀에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갈 1:6). 초대교회부터 벌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고,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다른 복음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내가 신학원 시절에 다른 동기님에게 학위논문을 지도해 준 논제였습니다.
사도시절에 참으로 많은 영지주의자들(주로 서양철학 찌끄레기를 주어 모아서 지꺼리는 송충이들)이 교회 내에 침투하여 주님의 성령의 빛을 철학의 빛으로 물들이는 바이러스들이었습니다. - 이때는 노~멘입니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성서에서 저주라는 말은 참으로 안쓰는 말입니다.
이제 은혜의 찬양을 한 곡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함께 은혜받습니다.
(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by Anvely - YouTube
- 본문 설교
1. 우리가 죽고 사는 것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 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이는 그리스도 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바울은 롬5장 21절에서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하여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된 복음을 선포한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6장에서, 생명에 이르는 구원은 반드시 ‘예수와 합하여’ 내 옛 죄인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 올라오는 연합 세례로 이루어짐을 제시한다. 예수그리스도와 합하여 함께 죽음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단번에 흘린 피로 “영원한 제사”, 즉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모든 죄가 완전히 철저히 도말되어 ‘영원히 온전케 하여 주셨으므로’(히 10:14) 죄와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선포이다
율법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 수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의롭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여기에도 죽음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죽었습니다. 이에 대한 말씀은 로마서 6장에서 전개된 신비주의와 같은 맥락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는 한 가지 주된 방법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이다. 이 관념은, 궁극적으로 정확한 논리적 정의에 이르렀을 때, 필연적으로 은유의 어떤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 엄밀하게 조사된 의식은, 가장 고귀한 영혼들 안에서조차도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것의 실재적 연합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위로부터의 영향력이 너무나 꿰뚫고 강력해서 마치 연합이라는 형상만으로도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정되어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보다 일반적인 마음의 질서는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 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함께 찬송드리겠습니다.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youtube.com)
[찬송가, 성령 강림]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 4성부 파트 연습(목소리) | 챕터기능 |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youtube.com)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이 개념은 단순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 이상의 것, 즉 영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방하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통하여, 십자가와 십자가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속삭임을 절제할 수 있게 되고, 그것들을 죽음과 같은 수동적인 상태로 전락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다.죄에 대한 이 죽음, 내 본성의 한 쪽에 있는 죽음은 내가 다른 쪽에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의미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그러나 살아 있는 것은 더 이상 내 안에 있는 옛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간 인격의 일부가 아니라, "땅에서 나온, 흙 같은" 부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재형성된 부분이다.
2. 저주받고 사는 것- 율법주의의 폐해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구약에서 가장 많은 시련과 핍박을 받았던 욥기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장1절에 보면;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욥20:1).
여기서 우리는 소발의 분노를 만나게 됩니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욥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보다는 고집스럽게 무죄를 주장하고 오히려 그것을 입증해 줄 수 있는 대속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발은 율법주의 관점에서 악인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소발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2절).
소발은 빨리 욥의 잘못을 말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욥의 발언들은 소발에 대한 도전이기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인과응보의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우리는 욥을 공격하는 일에 있어서 신속한 소발을 보며 구약의 한 성경구절이 떠오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시기를;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사 59:7).
그 발이 악에 물드는 것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보수의 하나님(신35:32)이라고 에드워드 목사님은 설교하였습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는 일에 신속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에 통달하고 있는 그들의 눈에는 타인의 모든 행동이 율법을 위반하는 일들뿐입니다. -응보형주의 형법의 폐단.
율법주의를 쉬운 말로하면 책망을 통해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교정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책망을 통해 공동체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리더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리더십 아래에 있는 팔로워에게 최선책은 책망을 받지 않는 것이 됩니다. 즉 책망을 받지 않으면 잘한 것이 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공동체가 향상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더 강하게 책망하면 되겠지요. 또는 더 세부적인 측면에서 책망을 하여(다른 말로 세부적인 율법조항을 만들어) 공동체의 향상을 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생각처럼 잘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책망은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파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맹점(盲點)입니다. 율법주의는 수많은 규례들을 제정하여 그것을 지킴으로 이상적인 사람이나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조항을 많이 만들수록 인간은 율법준수에 한계를 느끼게 되고 무력감만 가중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3.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 -주님과 함께 사는 삻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9-10).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몽학선생님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많은 율법의 조항들은 그것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오히려 인간을 구원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소발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악인에게는 이긴다는 자랑도 잠깐이요, 즐거움도 잠깐이라고 말합니다(5절). 또는 그가 한때 존귀한 자였다 할지라도 똥-변(dung)처럼 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6~7절). 또 그의 삶은 꿈처럼 지나가는 것이요, 환상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8절). 악한 자들은 자녀들도 잘못될 것이고 건강도 다 잃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0~11절). 악인이 심판을 받는다는 소발의 말은 일부만 맞습니다. 그러면 잘못된 나머지 일부는 무엇일까요?
첫째, 악인이라 할지라도 현세에서 평안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하게 산다고 이 땅에서 무조건 저주받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불신자 중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잘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게 됩니까?
둘째로 소발은 부활의 때에 임할 심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욥은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때가 되면 악한 자와 선한 자의 운명이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욥의 말대로 억울한 사람의 누명도 최종적으로 벗게 되겠지요. 이것이 진정한 인과응보입니다. 진짜 심판은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때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최종적인 심판의 결과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집행될 것입니다.
셋째로 이 땅에 있는 동안은 모든 사람이 아직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모두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결론 -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탐심은 성적충동 뿐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중한것 외에는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것 외에는 다 탐심입니다. 탐심을 눌르고 싸워야합니다. 못된 옛자아를 말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15a).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많은 기회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냄비처럼 쉽게 끊고 쉽게 식는 사람들을 우리는 소갈머리 없다고 합니다. 벤댕이라고도 함니다. 오랜 신앙생활과 기도의 삶을 살아오시는 연세드신 권사님들의 모습을 보면 나는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얼굴은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인자라는 표현은 시골 초등학교 연세드신 할머니 할아버지 교장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유대의 응보주의 사상은 율법을 통해 정죄를 선포하고 응징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죄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보수하실 그날까지 용서하고 또 인내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만나인 여러분.
어린 자녀에게 손을 씻을 것을 요구하는 부모는 좋은 것을 그 손에 쥐어 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코로나19 때 처럼 단지 손을 씻는 것, 그 자체를 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회개의 촉구는 은혜를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우리 만나인은 냄비가 되지 않는 것을 오늘 우리는 믿고 회개하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값없는 피값으로 얻어진 은혜입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서로 네가 잘했다. 내가 잘했다. 나는 잘못이 1도 없다. 이렇게 뻑뻑 우기면서 서로 갈등하는 것은 이제 보성 율포 앞바다에 날려버리고 주와 함께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