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목 관련 정의의 이론은 정확한 '정의의 틀'(frames of Justice)이 선제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인간이라는 집단은 사회적 헌신을 목표로 하지만, 궁극에는 소속집단의 개인적 이익 또는 사회적 이익집단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정의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기재를 가지고 있다. 나는 나 나름대로 법철학을 공부하면서 정의론을 연구했다. 그것은 사회적 정
의에 대한 연구(인천법학, 사회적법치주의에 있어서의 정의에 관한 연구-분배적 정의를 중심으로, 이덕휴법학석사학위 청구논문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 정보검색 > 소장정보 검색 > 사회적 법치주의에 있어서의 정의에 관한 연구 : 분배적 정의를 중심으로/ 李德休 )그러나 정의론의 연구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제이다. 그래서 나는 신학을 택하였다. 이른바 하나님의 정의 만이 인간의 정의관을 일깨울수 있기 때분이었다. 인간의 정의는 영원한 북극성의 빛나는 과제이며 그 빛은 요원하다. 참조: 통합기독공보 법학과 신학이 만나야 한다:통합기독공보
| 법학과 신학이 만나야 한다- 이덕휴목사 |
| 하나님의 정의는 법과 신학의 만남에서 해결 |
| 신학과 신앙 칼럼 |
법학적 정의는 요원한 북극성이다 결국 나는 법철학에서 법신학의 문을 두드리고 다음과 같은 논문을 집필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 담임 이덕휴목사의 신학카페 | 법신학이란 무엇인가 - Daum 카페
| 이하의 글은 기독공보지에 게재된 나의 법학과 신학의 만남이라는 글이다. |
| 인간과 인간사이의 절대적인 가치개념인 정의의 문제가 아무리 제도적 장치인 법에 의존한다고 할지라도, 정의의 추구가 영원한 수수께끼로 신기루처럼 남아있는 한 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인간은 얼마나 피흘려야 했던가? 그러나 그것은 권력자의 자의에 그치는 것이 인간의 역사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여기서 우리는 법인간학이라는 초유의 대안을 제시하면서계몽주의 시대 이후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러나 양차대전을 치루면서 법적 인간의 정의에는 한계가 있음을 통감하면서 다시 신에게로 향한 정의의 추구를 염원하게 된다. 중세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 시대를 거치는 인간정신의 발달사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정의가 인간세계에 뿌리내릴 때, 우리는 종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종말의 시대는 도둑놈처럼 온다고 하였다.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한다. 그것은 법학과 신학의 만남이라는 장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 이덕휴의 법학관이자 신관이다. 필자는 십 수년 간을 법의 정의에 매달려 왔다(인천대학교 대학원에서 법철학을 전공하고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함; "사회적 법치주의에 있어서의 정의에 관한 연구" 1996) 그러나 정의에의 열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의의 여신은 저 멀리서 손짓만 하였다. 법학 박사의 과정을 포기하고 신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배우고(그리스도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바울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 2000) 드디어 작은 깨달음으로 "법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신학과 법학의 만남이라는 교두보에 불과하다.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자세 하나로 이 글을 진술하였다. 많은 형제들이 이 글을 읽고 법학에서 못다한 정의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의 방법에 대해서 함께 논의하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그것으로 필자는 만족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아래의 법과 정의에 관한 논의는 나의 뜻과 같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정의란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좋은 것은 서로 자기가 이익이 되는 쪽으로 아전인수(내 밭에 불대기)격이다. 심지어 정의론의 가장 거창한 표현은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했지 않은가?"정의는 강자의 이익"은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가 주장한, 정의가 권력자의 이익을 반영한다는 정치철학적 명제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는 플라톤의 《국가》 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논쟁하며, 정의란 보편적 도덕이 아니라 강자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든 규범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각 사회의 법과 제도는 지배 계층의 편익을 실현하는 수단이며, 정의를 따르는 것이 항상 개인에게 유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부정의한 자가 더 많은 권력과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나는 참으로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승자는 바로 강한 힘을 쟁취한 집단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 이덕휴 식 |
있는 부정6dhlee@의(tolerable injustice)의 범주는? 법과 정의 …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tolerable injustice)의 범주는? - 대학지성 In&Out
법과 정의
현대 정치철학에서 “법을 준수할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정치적 의무(political obligation)’와 정의의 관계를 정돈하기 위해, 우선 많은 이론가들이 그러하듯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특히 롤스가 “행위자의 자발적 행위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주목한 정의의 ‘자연적 의무’에 시선을 돌려, 비록 『정의론』 내에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 편이지만”, 그 같은 “정의의 자연적 의무를 부정의의 상황에 적용해서 이론화”하는 “롤스주의 정치철학자이자 미국의 인종 부정의”를 연구하는 토미 쉘비(Tommie Shelby)의 논의에 초점을 둔다. 결과적으로 물음은 “부정의한 제도의 규칙을 준수할 의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모아지는데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범주와 그 규범적 함의를 식별함에 있어서, 사회 내 부정의가 누구에게 어떤 부담을 지우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이어서 다시 쉘비의 이야기를 빌려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임계점”으로 “적어도 헌정적 요체(constitutional essentials)가 확립되어 지켜지는 것”과 함께 “공정한 기회 균등까지 보장하지 못하더라도, 모두에게 ‘시장성’ 있는 기술을 개발할 충분한 기회(adequate opportunity to develop marketable skills)까지는”, 즉 호혜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한다.
1. 법을 준수할 도덕적 의무
현대 정치철학에서는 법을 준수할 도덕적 의무를 ‘정치적 의무(political obligation)’라고 부른다. ‘법적 의무(legal obligation)’라는 일견 더 자연스러운 표현을 두고 ‘정치적 의무’를 사용하는 것은, 기술적(descriptive)ㆍ사회학적 차원에서 법적 의무가 존재하더라도 해당 행위를 수행할 도덕적 의무는 없다는 개념적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어서이다. 개념적 가능성이 일단 열려야 가능해지는 여러 규범적 입장이 있다.
현대 담론은 정치적 의무의 규범적 근거에 관해 광범위한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한 상황이다. 많은 이론가는 정치적 의무가 행위의 프로 탄토 이유(pro tanto reason)를 제시하지만 늘 최종적인 이유(conclusive reason)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정치적 의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법을 준수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고 본다. 언제, 어떤 조건에서 정치적 의무가 행위의 프로 탄토 이유에 머무르고 최종적 이유가 되지 못하는지는 물론 여러 이견의 대상이 되는 질문이다. 이견을 풀어나가는 데 법과 정의의 관계가 주요하게 동원된다.
2. 정의의 자연적 의무
정치적 의무와 정의의 관계를 정돈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가들이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롤스에게 법을 준수할 도덕적 의무를 지탱하는 것은 정의의 자연적 의무(natural duty of justice)이다.
『정의론』에서 롤스는 공정성 원칙에 근거하여 시민의 일반적인 정치적 의무를 확립하기는 어렵다고 결론짓는다. 대신 롤스는 행위자의 자발적 행위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자연적 의무로 눈을 돌린다. 자연적 의무에는 다양한 선제도적(preinstitutional) 의무가 포함되는데, 가령 타인을 해하지 않을 의무, 타인에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을 의무, 타인을 도울 의무 등 우리가 ‘상식적 도덕(commonsense morality)’의 의무라 부를 만한 것이 여럿 있다. 『정의론』에서 롤스에게 핵심적인 자연적 의무는 정의의 자연적 의무이며, 롤스는 이 의무를 다음처럼 구체화한다.
[정의의 자연적 의무는], 정의로운 제도가 존재하고 우리에게 적용될 때 이 제도를 지지하고 그에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아직 확립되지 못한 정의로운 제도 체계를 증진할 것을, 적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지나친 비용을 수반하지 않을 경우에 요구한다.
공정성 원칙에 따른 의무와 달리, 정의의 자연적 의무는 우리가 특정한 이득을 받아들이거나 우리의 이익을 위해 제도를 활용했는지와 무관하게 발생한다. 롤스에 따르면, 정의의 자연적 의무는 바로 이런 점에서 시민의 일반적인 정치적 의무의 원천으로 더 적합하다. 정의의 자연적 의무 개념의 또 다른 혁신은 부정의 상황에서도 개인에게는 여전히 일종의 의무가 발생한다고 보는 점인데, 주목할 점은 정의의 상황과 부정의의 상황에서 의무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정의론』 내에서 정의의 자연적 의무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 편이지만, 정의의 자연적 의무를 부정의의 상황에 적용해서 이론화하는 토미 쉘비(Tommie Shelby)의 논의에 초점을 맞춘다. 그전에 정의의 상황에서 롤스가 말하는 자연적 의무가 발생한다고 볼 이유를 살펴본다.
T. M. 스캔런(T. M. Scanlon)은 이 이유를 “존재하고 우리에게 적용되는 정의로운 제도(just institutions that exist and apply to us)”라는 표현의 분석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 존재하는 제도가 정의로운지는 우선 제도의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이러한 목적의 달성 방법이 목적의 성격에 맞아야 한다. 스캔런은, 제도가 우리에게 “적용(apply)”되는지 역시 제도가 목적으로 삼는 이득에 비추어 해석한다. 적어도 정의로운 제도라면, “해당 이득 제공을 위해서는 그 참여가 필요한 이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할 수 있고, 나아가 해당 이득이 참여자들에게 가하는 제약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해야 이러한 적용을 주장할 수 있다”.
스캔런은 이런 의미에서 존재하고, 정의롭고, 우리에게 적용되는 제도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해당 제도의 적용을 공히 받는 다른 이들에게 정당화 불가능한 비협조이자 호혜성(reciprocity)의 위반이라고 본다.
3.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tolerable injustice)의 범주
그렇다면, 부정의한 제도의 규칙을 준수할 의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롤스는 정의의 자연적 의무가 분절되는 지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경계로 삼는다.
롤스 자신은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범주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정의론』 후반부에서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부정의의 부담은 사회 내 다양한 집단에 대략 고르게 나뉘어야 하므로, “오랜 시간 동안 부정의를 감수한 지속적 소수자의 경우에 [제도] 준수의 의무는 문제적이다”는 것이다. 사회 협동체 내 특정 개인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정치적 의무의 강도와 범위, 성립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견해이다. 요컨대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범주와 그 규범적 함의를 식별함에 있어서, 사회 내 부정의가 누구에게 어떤 부담을 지우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주의 정치철학자이자 미국의 인종 부정의에 관한 주요 연구자인 쉘비는, 미국의 도시 빈곤 지역, 이른바 게토(ghetto) 지역에 밀집해서 거주하는 흑인 소수 인종 구성원들의 상황에 주목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한계를 탐색한다.
정의로운 사회가 호혜성의 관점에서 공정한 사회 협동체라면, 부정의한 사회는 호혜성의 기준이 무너져서 공정한 몫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곳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는 이들이 그럼에도 협동체의 규칙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여전히 그 규칙을 준수하면서 규칙의 틀 내에서 제도 개선을 시도해야 합당한 범주, 즉 시민적 참을성의 임계점을 규정한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상황에서는 법을 준수할 일반적인 도덕적 의무가 여전히 유효하며, 쉘비는 이러한 의무를 “시민적 의무(civic obligation)”로 분류한다. 반면 자연적 의무는 우리가 단지 “도덕적 존재로서(qua moral person)” 얻게 되는 의무이다.
롤스에게 정의의 자연적 의무는 분절된 구조를 띤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를 넘어서는 부정의의 상황에서 정의의 자연적 의무는 제도를 지지하고 준수할 의무에서 정의로운 제도를 새로이 만드는 데 각자 몫을 할 의무로 변모한다. 마찬가지로 쉘비에게도 시민으로서 획득하는 시민적 의무는 해당 정치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만을 수반할 때 발생하며, 임계점을 넘어 부정의한 상황에서는 시민적 의무가 소멸하여 도덕적 존재로서 조건 없이 지는 자연적 의무만이 남는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임계점으로 쉘비는 우선, 적어도 헌정적 요체(constitutional essentials)가 확립되어 지켜지는 것을 기준으로 고려한다. 헌정적 요체는 롤스의 정의의 1원칙에 의해 확립되는 제도적 기반으로, 헌정적 요체가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주의적 권리들—표현과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참정권, 적법 절차에 관한 권리들, 이동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이 보장되고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정치 절차가 수호되며, 형식적 정의가 지켜지는 가운데 모든 시민의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는 수준의 최소 사회 보장이 제공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형식적 차별이 없고, 헌정 질서의 차원에서 모든 구성원의 동등한 지위가 인정된다. 나아가 생물학적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의 물질적 결핍도 없다.
쉘비는 헌정적 요체 기준 자체에 반론을 제기한다. 이러한 시각은 통상, 당장 만족스럽지 않은 일을 해야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더 나은 기회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전제한다. 쉘비는 이러한 전제에 초점을 맞춰 헌정적 요체 기준을 비판한다. 헌정적 요체 기준만 충족하는 사회에서는, 더 나은 기회의 전망이 실현되지 않을 수 있어서이다.
롤스에게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를 통한 정의의 원칙 구현이 완전히 정의로운 사회의 구상이라면, 쉘비는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임계점은 헌정적 요체 이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공정한 기회 균등까지 보장하지 못하더라도, 모두에게 ‘시장성’ 있는 기술을 개발할 충분한 기회(adequate opportunity to develop marketable skills)까지는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회마저 부정당하는 구성원은 협동체 내 착취의 대상일 뿐, 스스로 호혜적 협동의 당사자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쉘비의 결론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기준은 (1) 헌정적 요체와 (2) 모든 구성원에게 시장성 있는 기술 개발의 충분한 기회 보장의 두 요소를 포함하며, 이 가운데 하나 이상의 요소가 결여된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의(intolerable injustice)의 상황이다.
4. 자연적 의무와 정의로운 제도 확립의 책임
쉘비의 주된 관심사는 개인 윤리가 아니라 정의의 자연적 의무이다. 그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의의 상황에서는 억압 여부와 무관하게, 정의로운 제도를 새로이 확립하고 증진할 의무가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주장하는 것은 투박한 “피해자 비난하기(blaming the victim)”의 태도와는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정의한 사회 구조가 게토 빈곤층에 부과한 경악스러운 조건에 대한 책임을 게토 빈곤층에 물어서는 안 되지만, 이들 역시 이러한 조건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 게토 빈곤층이 협동체 내 호혜적 당사자가 아닌 착취의 대상으로만 대해진다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층이 사회 개혁의 책임을 나눠야 한다는 결론은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쉘비는 심지어, 현실적으로 실제 변화를 끌어내려면 착취 대상인 게토 빈곤층이 더 많은 책임을 부담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부정의의 직접적 피해자가 아닌 많은 동료 시민은 무관심과 무심함, 이기심으로 제 몫의 노력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서이다. 이처럼 불균형한 책임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기저 의무의 성격 때문이다. 이런 불균형이 “어떤 의미에서 불공정하다는 것은 사안과 상관없는 사실”인데, 부정의 상황에서 정의로운 제도를 새로이 만들 의무는 시민 사이 호혜성에 기반한 의무가 아니라 단지 인간으로서 획득하는 자연적 의무로 “동료 시민들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의무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쉘비가 소외 계층 당사자의 관점에서 정의의 자연적 의무를 구체화한다면, 스캔런은 여타 시민의 관점에서 해당 의무의 함의를 검토한다. 그는 특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의의 피해자들이 탈세 등의 위법한 행위로 사회 협동체의 법 규범을 어겼다는 점이 그들에게 공적 보조나 의료 서비스와 같은 지원을 거둘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흔히 법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협동체 내 스스로 몫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이 경우 협동을 통해 발생한 이득을 누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의의 상황이라면 애초에 그 부정의의 피해자들에게는 협동체의 법을 준수할 일반적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가령 복지 정책이나 일탈 행위에 대한 형사적 대응 수위와 방식 등에 관해 우리가 어떤 정책적 입장을 취할지에 규범적 함의를 지닌다. 이런 사안은 일견 그저 “사회 정책의 문제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정치 공동체의 “근본적 정의(fundamental justice)”와도 관련된다.
미국 흑인 게토 지역의 예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의 상황이 특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로, 이 예시를 활용해 쉘비가 논증한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기준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법과 정의의 관계를 고찰하는 데에도 유용할 수 있다. 예컨대,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의 임계점이 헌정적 요체와 충분한 기회의 보장으로 정해진다는 쉘비의 논변에 동의한다면, 이 기준을 활용해서 현재 한국 사회의 부정의는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계층과 집단의 구성원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의의 피해자인지 구체적으로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법과 정의 (송지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