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정경희
가을겉이 끝난 들판에는 선선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멈춘 듯 흐르는 강물은 햇볕 받아 반짝이고 있다. 한 무리의 자전거 동호인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며 손을 흔든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멋진 모습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나도 저렇게 자전거 타면서 생동감 있게 살고 싶다.
옛날, 자전거는 부자의 상징이었다. 1900년대 초 우리나라는 정부 관리들을 위해 자전거 1백대를 도입했다고 하니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더 이상 교통, 운반수단이 아닌 레저용품이 되었다. 그래도 내 어릴 때 시골에서는 여전히 자가용 자동차 역할을 하였다.
까까머리 남자 중·고등학생들은 하교시간마다 자전거로 곡예운전 하느라 신작로는 시끌벅적하다. 아침마다 막걸리 배달하는 아저씨는 자전거 세워둔 채 가게 술 항아리에 하얀 막걸리를 쏟아 붙고 있다. 짐칸 옆으로 주렁주렁 달린 술통이 신기하여 발걸음 멈추고 구경하였다. 자전거 탄 채 담장 너머로 아버지와 인사 나누는 동장 아저씨는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다.
20대 중반까지 나는 자전거를 타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좀처럼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줄 몰랐다. 억척같이 몸으로만 때우며 평생 살았으니 우리 집 자전거 없는 것은 당연하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초임 직장까지 걸어서 10분 내에 있었으니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하였다.
어느 날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령이 났다. 참 난감하였다. 버스는 가끔 있고 걸어서 출퇴근하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요즈음처럼 ‘하루 만보걷기’ 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자전거를 배우기로 하였다. 내 차림은 치마에서 바지로, 하이힐은 굽 낮은 신발로 바뀌었다. 잔뜩 멋 부리던 새침때기에서 세파에 물들어 가는 직장인이 되어갔다.
바구니 달린 작은 바퀴의 자전거는 잠시도 쉬지 않고 밟아야 한다. 서툰 실력으로 골목길 지나다 담벼락에 부딪힌 상처는 지금도 팔꿈치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자동차 쌩쌩 달리는 길이면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다. 바람 안고 출근하는 날은 도무지 나아가지 않는다. 쩔쩔매는 내가 우스운지 남자고등학생들이 핸들에서 손 뗀 채 꼿꼿한 자세로 휑하니 지나간다. 내 자전거 타는 실력은 어지간히 어설펐다.
무서움이 즐거움으로 변할 때 쯤 자전거가 없어졌다. 누군가 급해서 타고 어딘가 던져 놓았는지, 아니면 진짜 훔쳐갔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남의 자전거 타고 아무 곳에나 버리는 일이 잦았다. 그것도 보물이라고 대부분 체인으로 잠가 두는데, 방심하였다. 바람 부는 날 정말 힘들었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
소형 오토바이를 구입하여 출퇴근하였다. 손동작 하나에 빠르고 느리기를 조정하면 얼마나 편리한지 오가는 길이 즐거워졌다. 좀 더 신나게 이동하는 것이 좋았고 성격까지 서글서글하게 바뀌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너도 나도 자동차 모는 시대가 되었다. 변화에 발맞추어 면허 따고 중고자동차를 구입하였다. 아버지와 달리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온 셈이다.
세월이 흘러 작은 자전거 타고 힘들어하던 기억은 까마득한 추억이 되었다. 주말 낮 시간에 산책하기 좋다는 낙동강 변으로 갔다. 입구에는 자전거 대여점이 줄지어 있고 남녀노소 많은 이들이 붐비고 있다. 시간 당 몇 천 원하는 자전거를 빌렸다. 작은 바퀴로 안장이 낮은 것이면 좋으련만 딱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많은 사람 손때 묻은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갈 때면 터덜터덜 소리를 내었다.
자전거 타는 것은 기능이라 하였다. 한번 배워두면 계속 쓸 수 있다는데 나는 아니었다. 주말에 쏟아져 나온 이들이 자전거 길과 산책 길 구분 없이 다니는 통에 마음대로 달릴 수 없다."따르릉 따르릉" 누를 사이 없어 "비켜 주세요. 비켜 주세요."를 외치며 비틀 거렸다. 지나가는 이들은 날벼락 맞을까 순식간에 길을 터주며 웃었다.
한참 갔다. 산책하는 이들이 없는 조용한 길이 나온다. 잠시 숨 고르기 하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남자가 자신의 자전거 자랑을 하였다. 복장이나 안전장구도 갖추지 않은 채 고물 자전거 끌고 나온 나와 너무 비교된다. 특수 재질을 사용해서 가볍다고 하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물건을 구입해서 조립하였는지 가격은 몇 백만 원 이라고 자랑이 끝이 없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강물과 어우러진 강변 풍경에 내 마음이 너그러웠던 탓인가? 낮선 사람 붙들고 자랑하는 이의 순수함이 좋아 보인다.
좀 더 외곽으로 나가니 터덜거리는 일반 자전거 끌고 나온 이는 보이지 않는다. 온 몸에 쫙 붙는 옷과 헬멧 등 안전장구를 완비한 이들이 물 찬 제비마냥 달리고 있다. '그래, 저 정도는 되어야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일하는 데만 골몰하여 저렇게 멋진 취미생활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고물 자전거를 끌다, 타다 하는 중에 시선은 흘러가는 강물을 향한다. 저 강물처럼 내 세월도 많이 흘러가 버렸다. 그동안 멋진 취미하나 갖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다.
어느 날 친척 오빠 입원 소식이 전해졌다. 오빠는 남편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였다. 자전거 타다 많이 다쳤다고 한다. 보통은 자전거 타다 넘어져 무릎 깨지는 것이 일쑤이었다. 구멍 난 바지 꿰매고 빨간 약으로 소독하면 그만이었다. 얼마나 심하면 큰 병원에 입원까지 하였을까? 남편과 함께 병문안 갔다. 갈비뼈는 물론이고 머리까지 다쳐 걱정 많았는데 이제는 괜찮아졌다며 너스레를 떤다. 내리막길에 넘어지며 굴렀다는데, 자전거 타기의 위험에 열변을 토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장비 다 갖춘 날씬한 모습으로 강변을 달리고 싶었다. 탄탄한 허벅지로 힘차게 페달 밟으며 강바람 맞는 기분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갑작스런 친척 오빠 병문안으로 멋진 자전거 타고 싶은 마음이 오락가락 하고 있다. 사람 많은 길에 비켜 달라 소리치는 내 실력으로 무얼 하겠는가? 그래도 아쉬움은 남아 있다. 번쩍거리는 자전거 즐비한 가게 앞에서 머뭇머뭇 안을 기웃거린다. 웬만하면 들어와서 보라고 권할만한데 주인은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 그 중 제일 멋진 자전거 하나에 올라타고 강변 달리는 상상을 한다. 시원한 바람이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20241112)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