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는 ‘스승’과 ‘선생’과 ‘강사’를 구분지어 설명하고 있다. ‘스승’은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이며 ‘선생’은 학생을 가르치거나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며 ‘강사’는 학교나 학원에서 위촉 받아 가르치는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 가운데에는 스승은 지식만을 전수하는 사람이 아님을 내포하고 있다. 스승을 가리키는 한자 ‘師’자의 어원은 고위관료로서 ‘師氏’라고 불렀다. 이는 스승을 나무의 뿌리에 비유해 후인들을 위한 지식의 근본이자 내원임을 밝힌 것이다. 무도(武道)인들은 스승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는 뜻에서 ‘師父’ 라고 높여 불렀다.
옛사람들은 임금의 스승 되는 사람의 역할을 강조했다. 임금의 통치철학을 책임질 사람이 스승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사람이 지도자가 될지 모른다. 전제군주제하에서는 임금이 될 사람이 대개 정해져 있다. 그러니 임금 될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이 중요했다. ‘치국평천하’의 운명이 임금 한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의 어원은 춘추전국시대 역사서인 『國語』에 나온다. 요약하면 ‘사람은 세 명의 아버지 같은 존재에게서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것이니, 섬기기를 동일하게 하라. 부모는 낳아주시고 스승은 가르쳐 주시고 임금은 먹여 주시는 분이다.’
오늘날 ‘선생은 있으나 스승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 원인에는 교권이 땅바닥에 떨어졌음이다. 인권만능주의에 학생 권리헌장은 있어도 교권은 안중에도 없다. 어린 시절 늘 들어 온 말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고 가르침 받으며 스승은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학부모 스스로가 아이의 선생님을 교육자로 보지 않고 지식 전달자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학부모 가운데는 자신이 아이의 선생님보다 더 훌륭한 인격자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여기까지 이르기 까지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으나 교육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획일적 교육을 시키는 데에도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 교사의 사기가 저하되어 사명의식이 결여된 때문이라 확신한다. 우리가 학생이던 시절은 이념적 교육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슨 권리로 오욕됨으로 가르치는가? 좌우이념을 심어주는 것이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것일까? 모든 학생이 받은 달란트대로 즐겁게 교육 받고 교육할 수 있는 학교가 되기를 희망하며 참 스승이신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을 회고해 본다.
선생님 과목은 공업이었다. 선생님은 우리학교 선배님이어서인지 수업시간 열정은 다른 선생님들의 추종을 불허했다. 선생님 나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나 우리 반 담임을 맡을 때가 40대 초반쯤으로 기억한다. 한명이라도 더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하여 쉼 없이 독려하며 특히 공업과목 만큼은 만점을 받게 하겠다는 의지가 몹시 강했다. 그 열정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선택과목으로 공업을 택하였으며 다른 과목 평균에 비해 모의고사 성적가운데 유독 높았다. 얼마나 많은 출제빈도와 유형을 분석하였는지 교과서를 모두 외워서 가르쳤음은 물론 당시 모든 문제집의 문제들을 섭렵하여 중요한 부분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다. 내 과목은 걱정하지 말고 다른 과목에 시간을 할애하라고 했다. 흔히 말하는 일류 입시학원 일류 강사처럼 족집게 수업을 했다.
대학진학에 관심이 없던 나는 형식적으로 치른 예비고사에서 서울은 떨어지고 경북에는 합격하는 점수를 받았다. 그 당시는 그 점수만 하여도 일류대학은 어렵지만 삼류대학 삼류학과는 갈 수 있었다. 예비고사 합격률이 50% 넘는 고등학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마을에 전화가 없던 시절 편지를 보내 대학 원서를 쓰라고 연락이 왔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그 일은 내 인생 가운데 후회할 열 가지 가운데 하나다.
우리의 나이가 담임 선생님 나이가 되었을 때 쯤 대구에 거주하는 친구들끼리 매월 모이던 동기모임의 총무를 맡게 되었다. 그해 5월 스승의 날에 담임이 아니었어도 모두들 좋아하던 공업 선생님을 초청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모교를 떠나 모 전문대학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선생님의 연락처를 몇 사람을 거쳐 알아내어 연락을 했다. 당시만 해도 자가용 승용차가 흔하지 않아 정류장에 마중을 나갔다. 모시고 오는 택시 안에서 특별히 너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우리 기수에게 유독 정이 많이 갔다는 이야기로부터 그날 저녁 학창시절 이야기는 끝이 날줄 몰랐다.
그날 이후로 스승의 날이나 추석 명절 설 명절에 빠짐없이 인사를 했다. 인사라야 직접 찾아뵙지도 못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고작 이었다. 선생님은 네 같은 제자가 있어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는 야기를 한 번도 빼 놓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추석 인사를 했다. 90이 넘으셨을 선생님이 손수 제작한 전자카드를 답장으로 보내 왔다.
“잊지 못할 崔明淳님”
‘지금 이 순간 심덕 깊은 귀하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잊지 않고 찾아준 그 인정
오래 오래 기억 하리이다
이 몸 望九峰 언덕 베기에
서성이며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한탄 합니다
진정 감사 합니다
오래 기억 하리이다’
고마운 선생님 만수무강을 빕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