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6월 20일(목) 전도서 11:1-8 찬송 372장
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3.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4.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6.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7. 빛은 실로 이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개역 개정)
- 인생 허무 극복을 위한 절대적 교훈들(11:1-12:7) -
전도자는 지금까지 때로는 해 아래 속한 자들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절대 허무를 드러냄은 물론
또 때로는 여호와를 경외함에서 비롯되는 신본주의적 인생관을 가질 때만의
인생 허무를 극복하게 할 수 있음을 밝힘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이 보다 현명한가를 교훈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제 4강화 후반부인 9:17-12:7의
두 번째 단락인 11:1-12:7에서는 또다시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본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전도서의 주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전달한다.
이 단락에서 전도자가 제시하고 있는 신본주의적 삶의 구체적인 실천 사항은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라는 것(11:1-8)과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대비하는 삶을 살라는 것(11:9-12:7)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사항은 지금까지 전도자가 거듭 진술해 왔던 바
필연적으로 허무를 초래하게 하는 해 아래 인생,
곧 인본주의적이며 세속적인 삶의 방식과 완전히 대조되는 삶이다.
다시 말해 본 단락을 통해 전도자가 가르치는
해 아래 인생 허무 극복을 위한 절대적 교훈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 사실과 인간이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현실 생활 가운데서도 그러한 원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
곧 신본주의적 삶을 살아가라는 요구인 것이다.
한편 본단락 후반부인 11:9-12:7에 기록된 바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닥칠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묘사는
우리에게 큰 영적 교훈을 준다.
실로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육체적인 죽음을 맞게 되며
그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아래 인생들은
이 세상에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육적 쾌락에만 몰두하며
지금 소유한 것을 영원히 가질 것처럼 집착한다.
전도자는 이러한 그릇된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삶의 작은 편린(片鱗) 밖에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도록 피맺힌 외침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자가 강력히 주장하는 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본주의적 삶이야 말로
해 아래 인생들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궁극적인 허무를 극복하게 하는
유일한 그리고 절대적인 길임을 깨닫고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따르는 성숙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1절)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솔로몬은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말씀으로 제 4강화(8:14-12:7)의 마지막 교훈부(11:1-12:7)를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솔로몬은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였다.
이는 일면 솔로몬의 해상 교역과 관련이 깊은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역사상 솔로몬은 이스라엘 열왕들 중 에시온게벨에 조선소와 항만을 건설하고
무역업을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다.(왕상9:26-28)
물론 당시 신하들은 배로 어마어마한 곡물과 재화를 실어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반대도 많이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천(日淺)한 선박 운항과 무역 기술,
오고가는 장거리 여행에서의 안전등이 염려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처럼 배를 바다에 띄워 상대국까지 도달하게 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곡물과 재화를 물에 던지는 것과 같이 무모한 행위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은을 돌같이 여길 만큼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였다.(왕상10:27)
이러한 점에서 1절은 무역에 대한 의미로 보는 이들도 있다.
사실 솔로몬이 이룩한 업적이나 본절의 표현 그 자체만 보았을 때
그러한 의미로 보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2절을 감안할 때 본절의 표현에는
구제에 대한 암시가 강력하게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 그는 구제를 떡 곧 빵(밥)을 물 위에 던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는 구제하되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고 행하라는 것이다.
물 위에 떡(밥)을 던지는 자는 그것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제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구제에 대한 교훈과도 일치한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도 사람에게 보이거나 사람이 알게 하지 말며,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도록,
그리고 값없이, 대가를 바라지 말고 구제할 것을 명하셨다.(마6:2-4)
그런데 전도자 솔로몬은 이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구제를 행하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것임을 말한다.
1절 후반절의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말씀이 이를 확연하게 해준다.
즉 흩어 구제할 때 당장은 다 잃은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구제한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가난한 자를 지으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선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 갚으시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 신실하심을 믿고 확신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이를 분명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 외에도 성경은 구제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한다.
곧 가난한 자, 연약한 자를 도우며 그들과 더불어 필요한 것을 나누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임을
여러 가지로 확증하고 있다.(신15:7-14; 잠11:24; 14:21; 19:17; 28:27)
왜냐하면 구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드러내는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성경이 이처럼 많은 곳에서 구제와 봉사에 대해서 다루는 것은
거기에는 그만큼 확실하고 분명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 주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는 말씀까지 하신 바 있다.
생각해 보면, 냉수 한 그릇까지도 베풀면 상을 주시리라 약속하신
주님께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명령에 순종하여 구제하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시지 않겠는가?
오히려 흩어 베푼 것에 비할 바 없는 축복과 상급을 준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덧없는 세상, 허무와 회의가 가득한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확실한 축복 가운데 살기를 소망한다면 땅의 것에 연연해하지 말라.
그것을 움켜쥐고 창고에 쌓으려고만 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흩어 나누며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베푸는 자로 더욱 많이 베풀며 나눌 수 있도록
이 땅에서도 복을 주시며 장차 영원한 축복의 나라,
사랑과 은혜의 나라 천국으로 우리를 영접하실 것이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시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