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25) 방랑의 길에서 만난 여인
오대산 남쪽 기슭에는 집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있고, 뒤로는 잘 가꾸어진 과수원과 다시, 우거진 나무숲과 웅장한 산비탈을 등지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기와집이 있었다.
장비가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한다.
"저 집입니다."
"대궐같은 집이구나."
유비가 앞장서서 말을 천천히 몰아가노라니까, 그 기와집 담장 옆으로 젊은 미인 하나가 동자에게 악기를 들려 가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보아선 산골에서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유비는 그 얼굴을 보다가 흠칫 놀랐다.
먼 빛으로 보아서 얼굴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뒤태를 보아하니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미인은 미처 얼굴을 확인할 사이도 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저 낭자가 누구일까?)
그런 궁금증에 잠겨 있는 동안에, 그들 일행도 대문 앞에 이르렀다.
집 주인인 유 대인은 대문 밖까지 나와 있다가 유비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내가 이 집 주인 유회(劉恢) 올시다. 원로에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두 분의 말씀은 장비 공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내집이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지만 1년이고 2년이고 내집처럼 편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 시골이라 대접할 것이 적지만, 술만은 넉넉하게 있으니까, 양 껏 드시면 되겠습니다."
유회의 말에 일동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술만 넉넉하면 그만이지, 그 외에 우리가 또 무엇을 바라겠소. 형님들!? 그렇지 않소! 하하하.."
장비가 너스레를 떨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유비는 일행을 대신하여 주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린 뒤에 주인이 몸소 인도해 주는 깨끗한 객사에 들어앉았다.
주인은 유비, 관우, 장비를 위해 깨끗한 방을 특별히 제공해 주었다.
"형님들! 어떻소? 이만하면 됐지요?"
장비가 자랑삼아 물었다.
"우리에게는 너무 과분한 방이네."
유비가 그렇게 장비를 칭찬하자 관우도 한 마디 거든다.
"장비야! 세상에 이렇게도 도량이 넓은 사람도 있었구나."
"그렇습니까? 하하하...! "
장비가 흡족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렇게 유비, 관우, 장비 등 삼형제가 오대산 기슭에 있는 유 대인 집에서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다.
항상 복잡 다단한 생활과 치열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살아오던 삼형제에게는 지금같은 지나친 평화는 오히려 지루할 지경이었다.
산과 들에 살구꽃, 복사꽃이 피기 시작하자, 유비는 늦은 밤이면 슬며시 자취를 감춰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유비 형님이 이제는 여기서 놀고만 있기가 지루한 모양이지? 늦은 밤이면 종종 자취를 감춰 버리는데, 어디를 가시는 것일까?"
어느 날 밤, 유비가 또다시 슬며시 자취를 감추자, 관우가 장비를 보고 물었다.
"형님은 아직도 그걸 모르시오?"
장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응? 무슨 말이야?"
"유비 형님이 주인집 조카인 부용(芙蓉)아가씨하고, 밤마다 집 뒤 과수원에서 몰래 만나고 계신다오! "
"뭐? 유비 형님이 주인집 조카하고 몰래 만난다면,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게 사실인가?"
관우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내 말이 미덥지 않거든 형님이 과수원으로 직접 나가 보기구려. 지금쯤은 아마 과수원 속에서 애타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게요."
"음 .... 우리 형님이 그런 줄은 몰랐는걸. 가만있어! 내가 한번 나가 보고 오지! "
관우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집 뒤 과수원으로 나가 보았다.
마침 달이 기울어 고즈녁한 달밤이었다.
관우는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겨가며 달빛 사이로 과수원을 천천히 살펴 보았다.
과연 어느쯤에 한 쌍의 남녀가 가지런히 앉아 속삭이는 것이 눈에 띠었다.
관우는 그 모양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옛부터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고 한다.
영웅은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인데, 유비라고 연애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삼 형제가 세상을 바로 잡아 보겠다는 도원결의를 한 마당에 여자 문제 때문에 웅지(雄志)가 굽혀지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관우는 못 볼 것을 본 것 같이 얼른 객사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장비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관우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유비 형님이 연애하는 것을 보셨소? "
하고 물었다.
"응 .... 보았네! 여기 오래 있다가는 큰일 나겠는걸! 우리들이 지금은 비록 숨어서 지내지만 때가 이르면 풍운을 일으키며 세상밖으로 뛰쳐나가야 할 몸인데, 형님이 이렇듯 여자에 빠져 있으니 큰일이 아닌가말야! "
"너무 실망하실 것 없이 술이나 한잔 드시오! "
"나는 마음이 불안해서 술 생각도 없네. 자네는 진작부터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에게 귀띰조차 하지 않았는가?"
"영웅호걸도 평화로운 시기에는 마음에 녹이 쓰는 법이지만, 그러나 우리 형님이 설마 그 때문에 웅지를 버리기야 하겠소?"
장비는 태평세월이었다.
"때를 얻지 못한 울분을 여자 문제로 풀게 되면 그게 마지막이 되기 싶상이라네. 그런데 유 대인 조카라는 아가씨는 어떤 여잔가?"
"형님이 물으시니 말인데, 실은 그 아가씨는 내가 모시던 홍가(鴻家)의 따님이오. 우리가 형님을 알기 전에, 유비 형님이 그 아가씨를 황건적 손에서 구해 준 일이 있었소."
"그래? 그렇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였구먼! "
바로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주인 유회가 들어왔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 무슨 말씀이십니까?"
관우와 장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을 맞았다.
주인은 두 사람에게 정중한 어조로 말한다.
"좀 딱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낙양에서 순찰사(巡察使)가 이곳 대주에 내려오게 되어서 태수와 함께 우리 집에서 며칠 동안 묵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관가(官家)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도 없으니, 함께 온 스무명의 일행은 예외로 하더라도 관가에서 찾고 있는 세 분께서는 그 동안만이라도 잠시 몸을 피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관우와 장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관우가 주인을 보고 말하였다.
"미리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댁에는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많았습니다. 형님이 돌아오시는대로 상의해 가지고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손님을 쫓아내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뭣 하시면 내가 믿을 만한 친구에게 안심하고 계실 수 있는 집을 알아봐 드릴 수도 있으니 필요하면 말씀을 해주십시오."
주인이 그런 말을 남기고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비가 돌아왔다.
"형님! 지금 주인 양반이 다녀가셨는데, 이 집에는 며칠 후에 낙양에서 온 순찰사와 정주 태수가 오는 관계로 우리가 몸을 피해야 한다고 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관우와 장비가 유비에게 주인의 말을 전하면서 의견을 묻자, 유비의 얼굴에는 일순간 실망의 빛이 농후하게 감돌았다.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는 슬픔이 눈앞에 다가온 것 때문이리라.
그러나 다음 순간, 유비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집을 떠나야지! 그동안 신세도 많았지만 주인에게 누를 끼쳐서야 안 될 말이 아닌가? 그러잖아도 우리가 너무도 한가롭게 세월만 보내고 있었어! "
관우는 이렇게 대답하는 유비를 보며 크게 기뻐하였다.
(역시 우리 형님은 일개 여자에게 사로잡히지 않는 큰 인물이로구나! )
관우는 속으로 그렇게 감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형님은 부용 아가씨와 헤어지기가 섭섭하지 않으시오?"
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그러자 유비는 얼굴이 붉어지며,
"아우님들도 그 일을 알고 계셨던가? 그러나 너무 연연해 마시게, 우리가 앞 둔 큰 일이 있는데 내가 사랑에만 연연해 하지 않을 것이니..."
하고 한 마디로 대답해 버린다.
"역시 형님이오! 실은 장비와 나는 형님이 사랑에 빠져버려 큰일을 망각하면 어떻하나 걱정하던 참이었소."
"천만의 말씀 ..... 내가 남을 사랑할 때에는 진심을 담아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이오. 또 나는 여자를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오. 그러나 아우님들은 안심하시오. 내가 아무리 부용 아가씨를 좋아하기로, 우리들의 큰 뜻이야 저버릴 수 있겠소. 그것만은 나를 믿어 주시오."
"....."
관우와 장비는 일시나마 유비를 걱정하며 그의 인격을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워서 잠시 대답할 바를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