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해미읍성 (순례지/성지)
간략설명: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
도로주소: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을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 수비를 명목으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을 기록한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지속적인 박해 동안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읍성, 사적 제116호)에 있던 두 채의 큰 옥사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또한 옥사 앞에는 당시 순교자들의 손발을 묶고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던 일명 호야나무(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가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 지금도 우뚝 서 있다.
그래서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옥사터 주변 땅 1,800여 평을 확보하여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이란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한 후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옥사터에 대한 교회 자체적인 성역화 사업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내포 지방에서 끌려와 옥사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의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교수 · 참수 · 몰매질 · 석형 · 백지사형 · 동사형 등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즉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