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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오영 수필 16편>
부끄러움 / 윤오영(1907 ~ 1976)
고개 마루턱에 방석 소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나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의 몸매며 옷매무새는 제법 색시꼴이 박히어 가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시골서 좀 범절 있다는 가정에서는 열 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 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넌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넌방은 조용하고 깨끗하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지금 막 건넌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박이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모서리에 걸린 분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애도 새롭기는."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흘낏 훔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뺨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곶감과 수필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枾)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 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 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 글이 유창하고 재미있고 미려해도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잡문이다. 이 말이 거슬리게 들린다면 문장 혹은 일반수필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든 문학 작품은 아니다.
밤은 복잡한 가시로 송이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껍질이 있고, 또 보늬가 있고 나서 알맹이가 있다. 소설은 복잡한 이야기와 다양한 변화 속에 주제가 들어 있다. 복숭아는 살이다. 이 살 자체가 쳔년반도千年蟠桃의 신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시는 시어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조성되어 있다. 그러면 곶감은 어떠한가.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열매가. 그러나 그 푸른 열매는 풋감이 아니다. 늦은 가을 풍상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 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문장이다. 문장은 원래 문채文采란 뜻이니 청적색靑赤色이 문文이요 적백색赤白色이 장章이다. 그 글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文章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袁中郞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枾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의 시설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수필 특유의 것이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수필에 있어서 스타일이 될 것이다. 즉 구 수필, 그 수필 마다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곶감의 시설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서적 ` 신비적 이미지가 아닐까. 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비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졸과 같은 무드다.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쌓인 신비로운 정서에 있는 것이다.
방망이 깎던 노인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청량리 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차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배가 너무 부르면 옷감을 다듬다가 치기를 잘 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해먹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기(竹器)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죽기는 대쪽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죽기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약재(藥材)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숙지황(熟地黃)을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윗질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포(九蒸九曝)한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 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 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방망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를 깎다가 유연히 추녀 끝에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북어 자반을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 북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난다.
방망이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다듬이질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만호도의성(萬戶擣衣聲)이니 위군추야도의성(爲君秋夜擣衣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참새
짹짹 짹, 짹 짹. 뭇 참새의 조잘대는 소리, 반가운 소리다.
벌써 아침나절인가. 오늘도 맑고 고운 아침. 울타리에 햇발이 들어 따스하고 명랑한 하루를 예고해 주는 귀여운 것들의 조달대는 소리다. 기지개를 펴고 눈을 비빈다. 캄캄한 밤이 아닌가.
전등의 스위치를 누르고 책상 위의 시계를 보니, 새로 세 시다. 형광등만 훤하다. 다시 눈을 감아도 금방 들렸던 참새 소리는 없다. 눈은 멀거니 천정을 직시한다.
참새는 공작같이 화려하지도, 학같이 고귀하지도 않다. 꾀꼬리의 아름다운 노래도, 접동새의 구슬픈 노래도 모른다.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지도, 완상가에게 팔리지도 않는 새다. 그러나 그 조그만 몸매는 귀엽고도 매끈하고, 색깔은 검소하면서도 조촐하다. 어린 소녀들처럼 모이면 조잘댄다. 아무 기교 없이 솔직하고 가벼운 음성으로 재깔재깔 조잘댄다.
쫓으면 후루룩 날아갔다가 금방 다시 온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마음마다 집집마다 없는 곳이 없다.
진달래꽃을 일명 참꽃이라 부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삼천리강산 가는 곳마다 이 연연한 꽃이 봄소식을 전해 주지 않는 데가 없어 기쁘든 슬프든 우리의 생활과 떠날 수없이 가까웠던 까닭이다.
민요시인 김소월이 다른 꽃 다 버리고 오직 약산의 진달래를 노래한 것도 다 이 나라의 시인인 까닭이다.
하고 한 새가 많건만 이 새만을 참새라 부르는 것도 같은 뜻에서이다. 이 나라의 민요 시인이 새를 노래한다면 당연히 이 새가 앞설 것이다. 우리 집 추녀에서 보금자리를 하고 우리 집 울타리에서 자란 새가 아닌가. 이 새 울음에 동창에 해가 들고 이 새 울음에 지붕에 박꽃이 피었다. 미물들도 우리와 친분이 같지가 않다. 제비는 반갑고 부엉새는 싫다.
까치 소리는 반갑고 까마귀 소리는 싫다. 이 참새처럼 한집안 식구같이 살아온 새도 없고, 이 참새 소리처럼 아침의 반가운 소리도 없다.
"위혀어, 위혀어" 긴 목소리로 새 쫓는 소리가 가을 들판에 메아리친다. 들곡식을 축내는 새들을 쫓는 소리다. 그렇게 보면 참새도 우리에게 해로운 새일지 모르지만 봄여름에는 벌레를 잡는다. 논에 허수아비를 해 앉히고 새를 쫓아, 나락 먹는 것을 금하기는 하지만 쥐 잡듯 잡아 없애지는 않는다. 만일 참새를 없애자면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반드시 추녀 끝에 서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매몰하지도 않았고, 이삭이나 북데기까리나 겻속의 낱알, 수채의 밥풀에까지 인색하지는 아니했다.
"새를 쫓는다."고 하지 않고 "새를 본다."고 하는 것도 애기같이 귀엽게 여긴 부드러운 말씨다. 그리하여 저녁 때 다 같이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 생각하면 황금빛 들판에서 푸른 하늘을 향하여 "위혀어, 휘혀어" 새쫓는 소리도 유장하기만 하다.
새 보는 일은 대개 소녀들의 일이다. 문득 목단이 모습이 떠오른다. 목단이는 우리 집 앞 논에 새를 보러 매일 오는 아랫말 처녀다.
나는 웃는 목단이가 공주 같다고 생각한 일이 있다. 나보다 너댓 살 손위라 누나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나는 굳이 목단이라고 부르고 누나라고 불러주지 아니했다. 그는 가끔 삶은 밤을 까서 나를 주곤 했다. 혼자서는 종일 심심한 까닭에 내가 날마다 와서 같이 놀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도 만일 지금 살아 있다면 물론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패가한 집을 가리켜 "참새 한 마리 안 와 앉는 집"이라고 한다. 또 참새 많이 모이는 마을을 복 마을이라고도 한다.
후덕스러운 말이요, 이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참새는 양지바르고 잔풍한 곳을 택한다. 여러 집이 오밀조밀 모인 대촌大村을 택하고 낟알이 풍족하고 방앗간이라도 있는 부유한 마을을 택하니 복지일 법도 하다.
풍족한 마을에서는 새한테도 각박하지가 않다. 언제인가 나는 어느 새 장수와 만난 적이 있었다. 조롱 안에는 십자매, 잉꼬, 문조, 카나리아 기타 이름모를 새들도 많았다. 나는 " 참새만 없네" 하다가, 즉시 뉘우쳤다. 실은 참새가 잡히지 아니해서
다행인 것을..... 나는 어려서 조롱鳥籠을 본 일이 없다. 시골서 새를 조롱에 넣어 기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제비는 찾아와서 <논어>를 읽어주고, 까치는 찾아와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고, 꾀꼬리는 문 앞 버들가지로 오르내리며 "머리 곱게 빗고 담배 밭에 김매러 가라"고 일깨워주고, 또한 참새는 한집의 한식구인데 조롱이 무엇이 필요하랴.
뒷문을 열면 진달래 개나리가 창으로 들어오고, 발을 걷으면 복사꽃 살구꽃 가지각색 꽃이 철따라 날고, 뜰 앞에 괴석에는 푸른 이끼가 이슬을 머금고 있다. 여기에 만일 꽃꽂이를 한다고 꽃가지를 꺾어 방안에서 시들리고, 돌을 방구석에 옮겨 놓고 먼지를 앉혀 이끼를 말리고 또 새를 잡아 가두어 놓고 그 비명을 향락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악취미요, 그것은 살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 참새도 씨가 져서 천연기념조로 보호대책이 시급하다는 이야기다. 세상에 참새들조차 명맥을 보존할 수가 없게 되었는가. 그동안 이렇게 세상이 변했는가. 생각하면 메마르고 삭막하고 윤기 없는 세상이다.
달 속의 돌멩이까지 캐내도록 악착같이 발전해 가는 인간의 지혜가 위대하다면 무한히 위대하지만, 한편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한 마리의 참새나마 다시 그 아쉽고 그립지 아니한가.
연화봉蓮花峯에서 하계로 쫓겨난 양소유楊少遊가 사바 풍상을 다 겪고 또 부귀공명을 한껏 누리다가, 석장錫杖 짚은 노승의 "성진아" 한 마디에 황연대각, 옛 연화봉이 그리워 다시 연화봉으로 돌아갔다.
짹 짹 짹, 잠결에 스쳐간 참새 소리는 나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려는 것인가. 날더러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사십 년 간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네 소리. 무슨 인연으로 사십 년 전 옛 추억-. 가버린 소년 시절, 고향 풍경을 이 오밤중에 불러 일으켜 놓고 어디로 자취를 감춘 것이냐. 잠결에 두 눈은 이제 씻은 듯 깨끗하다.
나는 문득 일어나 불을 피워 차를 다리며 고요히 책상머리에 앉는다.
염소
어린 염소 세 마리가 달달거리며 보도 위로 주인을 따라간다. 염소는 다리가 짧다. 주인이 느릿느릿 놀 양으로 쇠걸음을 걸으면 염소는 종종걸음으로 빨리 따라가야 한다. 두 마리는 긴 줄로 목을 매어 주인의 뒷짐진 손에 쥐여가고 한 마리는 목도 안 매고 따로 떨어져 있건만 서로 떨어질세라 열심히 따라간다. 마치 어린애들이 엄마를 놓칠까봐, 혹은 길을 잃을까봐 부지런히 따라가듯. 석양은 보도 위에 반쯤 음영을 던져 있고, 달달거리고 따라가는 염소의 어린 모습은 슬펐다. 주인은 기저귀처럼 차복차복 갠 염소 껍질 네 개를 묶어서 메고 간다. 아침에 일곱 마리가 따라왔을 것이다. 그 중 네 마리는 팔리고, 지금 세 마리가 남아서, 팔릴 곳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팔리게 되면, 소금 한 줌을 물고 캑캑 소리 한 마디에, 가죽을 벗기고 솥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저 주인의 어깨 위에는 가죽 기저귀가 또 한 장 늘 것이다. 그러나 염소는 눈앞의 운명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방 소파의 어린이 예찬에는 “어린이는 천사외다. 시퍼런 칼날을 들고 찌르려 해도 찔리는 그 순간까지는 벙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성스럽습니까. 그는 천사외다.”했다. 그렇다면 나도 “염소는 천사외다.” 할 것이다. 주인의 뒤를 따라 석양에 보도 위를 걸어가는 어린 염소의 검은 모습은 슬프다. 짧은 다리에 뒤뚝거리는, 굽이 높아 전족(纏足)한 청녀(淸女)의 쫓기는 종종걸음이다. 조그만 몸집이 달달거려 추위 타는 어린애 모습니다. 이상스럽게도 위로 들린 짧은 꼬리 밑에 감추지 못한 연하고 검푸른 항문이 가엾다. 수염이라기에는 너무나 앙징한 턱밑의 귀여운 수염, 그리고 게다가 이따금씩 어린애 목소리로 우는 그 울음, 조물주는 동물을 점지할 때, 이런 슬픈 우형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페이터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무한한 물상(物象) 가운데 네가 향수한 부분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네게 허여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 앞에 네 존재가 어떻게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기꺼이 운명의 직녀, 클로우도우의 베틀에 몸을 맡기고, 여신이 너를 실 삼아 어떤 베를 짜든 마음을 쓰지 말라”했다. 이 염소는 충실한 페이터의 사도다. 그리고 그는 또 “네 생명이 속절없고, 너의 직무, 너의 경영이 허무하다 할지라도, 적어도 치열한 불길이 열과 빛으로 변화시키듯 하잘것없는 속서(俗事)나마 그것을 네 본성에 맞도록 동화시키기까지는 머물러 있으라” 했다. 염소가 그 주인의 뒤를 총총히 따르듯, 그리고 주인이 저를 흥정하고 있는 동안은 주인 옆에 온순하게 충실히 기다리고 서 있듯, 그리고 길가에 버려 있는 무청 시래기 옆에 세워두면 다투어 푸른 잎을 뜯어먹듯, 그리고 다시 끌고 가면 먹던 것을 놓고 총총히 따라가듯. 이 세 마리의 어린 염소는 오늘 저녁에 다 같이 돌아가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나오게 될 것인가, 혹은 그 중의 한 마리는 가다가 팔려서 껍질을 벗겨 솥 속으로 들어가고, 두 마리만이 가게 될 것인가, 또는 어느 것이 팔리고, 어느 것이 남아서 외롭게 황혼의 거리를 타달거리고 갈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염소 자신도, 끌고 가는 주인도, 아무도 모른다. 염소를 끌고 팔러 다니는 저 주인은 또 지금 자기가 걸어가는 그 길은 알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염소가 지나간 그 보도 위로 걸어오는 것이다.
붕어
내 세간 난지 얼마 아니해서, 봄이 왔다. 양지 편에 핀 진달래는 아직도 추워서 꽃잎이 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마루 끝에서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방보다 따뜻하기 때문이다. 금붕어 이고 가는 장사, 마치 새봄을 담뿍 실어다주는 듯, 어항과 금붕어 몇 마리를 샀다. “조것은 알 뱃나 봐요” 아내는 한 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흥, 제법 배가 똥똥하지” 하고 웃어 보였더니 아내도 낯을 잠깐 붉히며 웃었다. 물을 날마다 갈아 주고 하느라고 했건만 한 마리 두 마리 죽어가고 빈 어항이 돼 버렸다. 대신 냇붕어를 잡아다 길렀다.
아내가 근친 가던 어느 날, 불을 끄고 혼자 누웠으려니까 미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낙숫물 듣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햇병아리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차 끓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그러나 훨씬 작은 소리, 생각하면 눈 녹는 소리 같기도 했다. 불을 켜고 주위를 살펴봤다.
불어 물 먹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있는지? 그것이 바로 붕어들이 물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놈이 입을 모으고 뻘죽뻘죽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입귀에서 좁쌀 같은 물방울이 생겼다 꺼졌다 한다. 금붕어보다 냇붕어가 좋았고, 노는 것보다 밤에 물켜는 소리가 더 신비롭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이슥토록 누워서 책을 보다가 일어나 앉아 담배를 피우려니까 옆에 지켜 앉았던 아내가 나를 가만히 건드리며 신기한 듯이 “저 소리 들려요? 붕어 물 먹는 소리예요”한다. “아까는 더 크게 똑똑히 잘 들렸는데…….” 둘이서 어항을 가까이 들여다본다. 물 키는 소리보다 벌름벌름 마시는 그 입들이 더욱 귀여웠다.
농촌
아까부터 찌는 듯한 날씨에 검은 구름이 몰리더니 마루턱에 오자, 금방 비가 쏟아질 듯했다. 땀을 흘리며 걸음을 재쳐 동구까지 왔을 때는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동구 안에는 기와집이 한 채 있으나 첩첩이 닫힌 패옥이요, 안채로 붙은 작은 초가에서만 사람소리가 났다. 맞은편 시냇가에 우뚝 솟은 수각이 눈에 띄었다. 우선 그리로 올라갔다.
비는 장대같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우선 비를 피하니 다행하고, 난간을 의지하여 빗소리를 듣는 운치도 제법 상쾌했다. 그러나 그칠 줄 알았던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아 장마철 같았다.
그만 누운 채 잠이 들어버렸다. 더위에 시달리고 걸음에 지쳤던 판이라. 세상모르고 자다 깨보니, 비는 그치고 냇물이 창일하게 흐른다.
저녁때가 된 것 같았다. 갈 길이 걱정이고 시장기까지 났다.
초가집 일각문으로 한 부인이 목판을 들고 아이를 앞세우고 수각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어느새 부인은 수각 앞에 와 서 있고 아이놈이 목판을 받아 내 앞에 놓으며
"손님, 잡수세요" 한다.
밀젬병, 초장, 오이김치, 참외 들이다. 의외의 일에 놀라 웬 일이냐고 물었더니
"비에 막혀 못 가시는 것 아니에요, 아침나절에 오셔서 지금까지 점심도 안 하셨으니 잡수시래요, 우리어머니가!"
일어서서 인사를 하려고 했더니 부인은 벌써 돌아서서 가고 있고, 아이 놈도 달아나듯 가 버린다.
고맙기도 하려니와, 시장한 판이라 모두가 진미다. 먹으며 보니 수각의 풍경도 일층 아름답다. 물소리는 옥을 쪼는 듯하고, 엉뚱한 생각으론 약주나 한 병 곁들이고, 부인이 나와 대화나 해준다면 연기가 연화봉이 아닌가.
아이 놈이 냉수를 떠가지고 왔다.
"네 성이 뭐냐?"
"김해 김가예요"
"몇 살이냐?"
"열한 살이예요"
"학교에 다니냐?"
"아뇨 놀아요. 읍에나 학교가 있지 여긴 없어요"
"내가 아침에 와서 이 정자에 종일 있는 것을 어떻게 아시니?"
"집에서 다 보이는 걸요"
"집에 아버지 계시냐?"
"어머니랑 나만 집 보고 있어요"
나는 목판을 내주며 "아버지나 형님이 계시면 가서 고맙습니다고 인사를 드려야 할터인데, 어머니만 계시다기 바로 가니, 어머님께 고맙습니다구 잘 말씀 여쭈어라."
"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헤어졌다(그때만 해도 남녀 간에는 직접 대화를 하지 않은 것이 예의였었다).
그 농촌 부인의 순박하면서도 의젓하던 모습! 그리고 아직 남아 있었던 농촌의 순후한 풍습!
하정소화(夏情小話)
내 봄을 사랑함은 꽃을 사랑하는 까닭이요. 겨울을 사랑함은 눈을 사랑하는 까닭이요. 가을을 사랑함은 맑은 바람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봄을 사랑하고 꽃을 사랑함은 실은 추운 겨울을 벗어난 기쁨이요, 맑은 바람을 사랑하고 가을을 사랑함은 뜨거운 여름에서 벗어난 기쁨이다.
만일 겨울의 추움과 여름의 뜨거움이 없었다면 봄과 가을이 그처럼 반갑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름은 오직 뜨거울 뿐이다. 그 무덥고 훈증하고 찌는 듯한 여름을 좋아할 사람은 적다. 그래서 여름은 모두 피하려 한다. 피서란 여기서 온 말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더위를 피하지 않으려 한다. 만일 내가 여름에 여행을 하고 수석을 찾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피서를 위해서가 아니요 휴가를 이용했을 뿐이다. 더우면 더울수록 기쁨으로 참는다.
땀이 철철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히며 풀잎이 바짝바짝 마르고 흙이 쩍쩍 갈라져 홍로 속에 들어앉은 것 같지만, 무던히 즐겁게 참아 나가는 것은 한줄기 취우를 기다리는 마음에서다.
이와 같이 달구어 놓고 나야 먹구름 속에서 천둥 번개가 일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그때의 상쾌함이란 어디다 견줄 것인가. 금방 폭포 같은 물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뜰이 바다가 되어 은방울이 떴다 흩어졌다 구르는 장관, 그 상쾌함이란 어디다 견줄 것인가. 비가 뚝 그친 뒤에 거쳐 오는 상쾌한 바람, 싱싱하게 살아나는 푸른 숲, 씻은 듯 깨끗한 상봉우리, 쏴하고 가지마다 들려오는 매미소리, 그 청신함이란 가을을 열두 배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위를 참고 극복하는 즐거움이란 산정을 향하여 험준한 계곡을 정복하는 등산가의 즐거움이다.
험준한 산악을 정복하는 쾌감도 좋지만, 소유자적하는 산책의 취미는 더욱 그윽한 데가 있다. 여름에는 여기에 견줄만한 즐거움이 또 있으니 저녁후의 납량이 그것이다. 하루의 찌는 듯한 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신선한 바람이 황혼을 타고 불어온다. 이때 건건이 발로 베적삼을 풀어헤치고 둥근 미선을 손에 든채 뜰에 내려 못가에 앉아 솔바람을 쏘인다. 강이 보이는 언덕이면 더욱 좋고, 수양버들이 날리는 방죽, 하향이 떠오른 못가, 게다가 동산에서 달이 떠오르면 그 청쾌함이란 또 어떠한가. 어렸을 때 본 기억이지만 베 고이 적삼을 걸친 촌옹들이 등꽃이 축축 늘어진 정자나무 밑에서 납량하던 모습이 이제와선 한 폭의 신선도 같이 떠오른다. 또 귀가댁 젊은 여인들이, 잠자리 날개 같은 생초적삼에 물색고운 갑사치마, 제 각기 손에 태극선을 들고 연당에서 달을 보며 납량하던 모습은 천상미인도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제 비좁고 복잡한 서울의 거리, 흙내초자 아쉬운 두옥사는 사람들에게는 납량이란 꿈같이 환상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가 짐을 꾸려가지고 처음 이 돈암동 구석을 찾아온 것은 어느 해 여름철이었다. 콧구멍 같은 집에서 진땀을 흘렸다. 어느 날 밤늦게 잠이 깨인 나는 우리 집 건너편에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내고 가만히 일어서서 대문 밖으로 나갔다. 판잣집이 옹기종기 있는 골목 사이로 아카시아나무 밑을 지나 언덕길로 가면 쉽게 등성에 올라갈 수 있었다. 군데군데 나무가 서 있고 드문드문 바위도 깔려 있었다. 우선 시원한 바람이 흉금을 상쾌하게 했다. 주위는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어둠은 끝없는 바다같이 퍼졌는데 시내의 등불들이 하늘의 뭇 별인 양 아름다웠다. 이렇게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일 줄은 몰랐다.
"만호등광(萬戶燈光)은 성경경(星耿耿)이요, 일천모색(一天暮色)은 해망망(海茫茫)!" 백낙천은 이사가서 오동나무에 걸린 달을 보고 흥에 겨워 집값을 더 주었다지만 나는 이 동산 주인을 찾아가 세전을 얼마나 치루어야 족할 것인가. 나는 이사를 참 잘 왔다고 생각했다. 그후, 이 소구는 나의 유일한 납량처가 되었다.
"모옥삼간이 치만금, 성중에 자유소산림!" 이 동산이 이웃에 있음으로 해서, 내 집은 만금이 비싸다고 자부했다. 달밤이면 더욱 아름다웠다. 푸른 잔디가 달빛에 젖고 어른거리는 나무 그림자가 물에 뜬 마름 같고, 호수같이 고인 그 달빛! 정밀이 이 속에 있고 청허가 이 속에 있었다. 불시의 청추가 여기 있다.
어느 달밤에 밤이 훨씬 깊어서 올라갔더니 내가 늘 앉았던 바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월하미인이라더니 달밤이라 그런지 매우 아름다웠다. 그 단아하게 앉은 자태며, 한복 차림의 청초한 모습이 그림 같았다. 한참 바라보다가 미안한 생각에 앞을 지나 등성 너머로 자리를 옮겼다. 한식경이나 훨씬 넘어서 돌아와보니 그 여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가만히 고개를 들어 약간 미소를 띠며,
"선생님 댁이 이 근처세요?" 묻는다. 나는 의아했다.
"더러 뵈온 걸요." 나는 더욱 의아해서,
"어디서?" 물었으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도 더 묻지 않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 후 나는 늘 오르내렸으나 그 여인은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직 그 여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때때로 바위 위에 앉은 모습이 떠오르기는 한다. 그러나 나는 더 묻지 않아 좋았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어느 다방 마담이었거나 범속한 여인이었다면 '월하미인'으로 길이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하며 한 폭의 풍경화로 간직하느니보다 아예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동산도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고층 주택 세 채가 서 있다.
조약돌
전등은 나가고 훤한 달빛만이 영창에 어리는 외로운 밤이다. 무심히 머리맡의 조약돌을 만져본다. 어렸을 때 조약돌이 좋아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일을 생각한다. 이 돌이 언제부터 내 방에 들어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꽤 오래 전부터다. 어느덧 나는 심심하면 이 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들었다. 가슴이 울컥하다가도 이 돌을 주무르면 사르르 가라앉기도 한다.
<조약돌 같은 인간> 불쑥 이런 생각을 하며 픽 웃기도 한다.
이 돌을 물속에 던지면 얼마나한 파문이 일까. 탐방 가라앉고는 말리라. 자손에게 전해줌직한 아무것도 없는 나니, 이 돌이나 유산으로 줄까, 그러나 이 외로움을.
박 연암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느 과부가 장속, 깊이깊이 쌓아 두었던 엽전 한푼을 들고, 세 아들 앞에서 설움의 일생을 하소연한다. 긴긴 밤을 새우기 위하여 이 엽전을 굴리고 굴려서 엽전의 테두리와 글자가 다 닳아 없어졌다는 거다. <이것이 네 어미의 인사부로다>라 했다. 이 조약돌에는 내 외로움의 손자국이 물들어 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누추하고 꼴사나운 시체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이불 속에 이 돌 하나만 남겨놓고 밤새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가뿐하고 깨끗할까?
죽은 후 시체는 살라버리고, 쓰던 손세간 필묵 다 살라버리고, 무덤이나 위패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내 손으로 이 돌에다 비문 한 줄만 써두고 가리라. 보이지 않는 약물로, <고요한 밤에 이 돌을 주무르다 간 한 어리석은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성명과 행장은 이 돌에게 물으라> 이렇게 써서 바닷가 많은 조약돌들 틈에 던져 두리라. 그러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돌의 비문은 우묵우묵 패여 좀먹은 자리같이 뚜렷이 나타나리라. 혹 석두기에 나오는 도사가 주워 갈지도 모른다. 또 이것이 기연이 되어 금릉 십이작의 정근이 될 지도 모른다. 아무것이 되기로 내 알 바 있으랴? <조약돌같은 인생> 다시 조약돌을 쥐고 만져본다. 부드럽고 매끄럽다. 옥도 어난 것을, 구슬도 아닌 것을, 그러나 옥이면 별것이요, 구슬이면 별것이냐. 곱고 깨끗한 것이 부드럽게 내 손에 쥐어지면 그것이 곧 옥이요 구슬이지. 그윽하고 맑은 것이 내 가슴에 울어주면 그것이 또 거문고다. 빛도 없는 이 옥이, 소리도 없는 이 거문고가 더욱 정겨웁고 아늑하다. 길에 버리면 주워갈 이도 없을 이 옥이기에, 발에 채면 돌아다 볼 이도 없을, 이 거문고이기에 더욱 안타까이 어루만져 본다.
순아
“농촌에는 물이 있어요. 물 잡수러 오세요. 미큰한 수통물, 찝찔한 펌푸물이 아닌 ....”
이런 편지를 읽고서 석천에서 자란 생선같이 싱싱한 순아의 팔뚝을 생각했다. 순박하고 숭굴숭굴 하면서 별로 말수도 없는 소녀가 약간 장난기를 띈 말투로 가끔 나를 놀라게 했다.
이 편지도 어느 세련된 글 솜씨로도 생각 못할 한마디가 그대로 불쑥 나와 나를 웃기게 했다.
" 이 마을에서 제일 경치 좋은 데가 어디냐 ?“ 하고 물으면 피 웃으며 "좋은 데가 어디 따로 있나요. 다 좋지요" 서울 사람은 서울이 좋고 . 시골 사람은 시골이 좋다는 거다.
"어째서 ?" 하고 물으면 정든 곳이 제일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이다. 엉뚱한 대답 같으면서 따지고 보면 조리가 서는 말이기도 했다.
"저녁 때 살구나무 위로 달뜨는 것만 보면 정들만한 집이지요". 한다. 나는 심심 할 때면 순아를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실없이 즐거웠다. 순아는 그때 17살인가 그랬을 것이다.
어느 날 무교동 다방을 들렀다. 레지가 차를 같다가 주는데 보니 분명 순아다.
" 너 순아 아니냐 . 웬 일이냐?" 하고 물었더니 씩 웃고는 말이 없다. 때마침 손이 붐벼서 오래 머물게 할 수도 없었다. 나도 바빠서 이윽고 일어서야 했다. 순아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으나 그 숭굴숭굴한 태(態)와 아직도 가시지 아니한 순박한 촌티는 남아 있었다.
그 후 나는 일부러 그 다방을 찾아 갔다. 순아를 만나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아는 보이지 않았다. 순아의 성이 이가라는 것을 아는 까닭에 미스리라고 물어도 아는 이는 없었다. 지금 이 다방에 없는 것만은 사실이고 날마다 드나들다 시피 하는 레지라 저의끼리도 서로 모르는 모양 같았다. 또 별로 대단치 않게 묻는 낮선 손님에 말에 그 이상 생각해 가며 대답할 흥미도 없을 것이다.
파주(坡州)서도 외딴 마을 살구나무가 서있는 순아네 초가집을 생각해 본다. 그 집 싸리문 밖에 있는 몇 그루에 당댑싸리와 마당 앞에 옥수 같이 흐르는 물 그 물이 흘러서 고인 우물에서 보리를 대끼고 있는 순아. 웃으며 바가지에 물을 떠주던 그 미끈한 팔 이런 것들이 생각난다. 사실 순아는 독립된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그 집 마당에 살구나무와 싸리문 밖의 당댑싸리와 맑은 샘물과 한데 있어야 할 배치된 자연의 일부이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순아는 거기를 떠나서는 신묘한 운향(韻香)을 잃고 또 그 자리에 순아가 없어서는 자연의 일부가 미완성일 것만 같다. 또 나는 순아가 나이도 더 먹지 말고 모습도 변하지 말고 그대로 언제 까지나 있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아가 그런데 있었으므로 가다가 나를 놀랠 만한 대사를 토할 수가 있었지. 그곳을 떠나서는 결코 그런 명(名)대사는 나오지 못할 것만은 틀림이 없다.
나는 어느 친구에게 끌려서 비교적 조용한 술집을 찾은 적이 있다. 매우 귀엽게 보이는 젊은 (어린이라 할까) 여인이 들어와서 술을 따라 주었다.
"나는 너의 집을 잘 안다. 살구나무 선 집." "너 순아 아니냐." 했다.
"참 어떻게 아세요? 제 이름이 순아예요 ." 한다.
그녀도 친절하기보다도 정숙하게 굴었다. "글쎄........" 하고 대답했더니
"이런데 잘 아니 오시는 가봐." 하고 제멋대로 판단을 내린다.
왜냐고 물었더니 약주를 잘 못하시니까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옳게 본 말이다.
"안녕히 가세요 " 인사를 하고 나서도 네 손을 가만히 쥐며 "순아 잘 있거라 해주지 않아요 ?" 하고 응석 투로 속삭였다.
나는 나오면서 내가 왜 그를 순아라고 했는지. 그녀는 왜 또 순아인 체했는지, 정말 그녀의 이름도 순아였는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해 봤다.
그러나 내가 순아를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인 순아가 아니요, 그 외딴 마을의 자연의 일부로서의 순아다. 그런 까닭에 그 파주 살구나무 집에 순아가 없다면 실로 공허한 풍경이요, 그 배경을 잃는다면 순아 될게 없다. 그 술집에 순아가 있다 해도 그것은 또 별다른 순아다.
서양화에서는 사람 그린 그림을 많이 보지만. 동양화에서는 초상화가 아닌 이상 사람을 그린 것이 별로 없다. 동양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게 자연의 일부로서 대치된 인간들이다. 그리고 보면 서양화가는 사람의 위치에서 인물과 자연을 보고 동양화가는 조물주의 위치에서 보는지 모른다.
"저녁에 살구나무위에 달뜨는 것만 보면 정든다." 는 말은 백낙천의 시흥을 방불케 하는 말이다. "농촌에는 물이 있으니 물먹으러 오라" 는 초대장은 어느 시인이 따를 풍류인가. 그런 소녀의 모습이 서울 다방에 나타난다는 것은 자연의 붕괴요 시인의 운명(殞命)이 아닐까.
나는 그 후 파주 그곳이 군대 막사가 되고 많은 처녀들이 놀아나서 서울로 왔고 미군부대를 에워싸고 가지각색 버리고 생활해 가는 사람들과 많은 여인들의 군상이 한 시장을 이루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는 한 폭의 사라진 풍경이다. 그림자나마 이 글에 머물러 있으라.
초가을
초가을은 사십 고개를 접어든 조용 나직한 여인의 눈매와 같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있거니와 사십은 실상 인생의 초가을이다.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여인의 눈매가 아닌가 한다. 십대의 소녀를 봄의 푸른 싹과 같다면 이십 대는 꽃봉오리다. 웃음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은 곱고 아름다운 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작열한 향기를 피우며 떨어지려는 정열의 꽃이랄까. 오뉴월 염천의 수은주와 같이 상승할 줄만 아는 불꽃이다. 그러나 사십 고개에 들어서면 어느덧 눈가에 싸늘한 침착성이 나타나며 진주 같은 눈에는 슬기로운 이슬까지 돈다. 인생을 음미하고 생활을 다시 한 번 가다듬으려는 지성의 의지와 알뜰한 부지런에 틀이 잡혀 갈 때 그의 눈매에는 엷은 애수가 깃든다. 오십에 서리가 앉아 육십이면 이미 겨울이다. 그래서 나는 초가을을 사십 고개를 접어든 여인의 눈매라고 한다.
‘여자는 고운 봄을 슬퍼하고 남자는 시원한 가을을 슬퍼한다.’고 한다. 슬퍼한다는 말은 지극히 사랑한다는 뜻이다. 담원춘(譚元春)이란 예전 문인은 가을을 장부의 계절이요. 운사(韻士)의 계절이라고 했다. 가을을 봄에 비하면 가인(佳人)을 놓고 고승(高僧)과 만난 격이요, 여름에 비하면 귀인(貴人)을 버리고 청천백석간(淸泉白石間)을 놓고 시인과 노는 격이요, 겨울에 비하면 고졸한 노인을 버리고 비오는 밤, 청등 밑에서 영웅을 만나는 격이라고 했다. 어디까지나 여자는 봄이요, 가을은 장부의 가슴을 움직이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봄이 되면 모든 것이 봄이요, 가을이 되면 모든 것이 가을이다. 더군다나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의 연령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음에랴.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여인의 눈매가 아닐까.
낮에는 아직도 불볕이 끓어 여름이건만 아침, 저녁으로 싸늘한 기운이 이미 가을이다. 이 신선한 바람이 실어오는 한 줄기 싸늘한 기운이 어느덧 여름과 가을을 교차시키는 것이다. 아직도 풍만하고 씩씩하고 정열과 웃음이 어제와 같은 여인의 눈매에서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한 줄기 침착(?)의 선(線)이 엿보일 때, 인생의 초가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깊이 있는 애정과 일생의 참스러운 대화는 여기서 즐거워지는 것이다. 어찌 고승이나 영웅뿐이랴.
가을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흔히 달을 말하고, 산천의 소조한 풍경을 말하고, 드높고 맑은 하늘을 말하고, 끝없이 푸른 강물을 말하고, 맑은 바람을 말한다. 그러나 달과 산천과 하늘과 강이 가을에 비로소 생긴 것은 아니다. 단풍을 말하고 황국(黃菊)을 말하고, 벌레 소리를 말하고, 구슬 같은 이슬을 말한다. 그러나 단풍이 들어서 가을이 되고 국화가 피어서 된 것은 아니다. 하물며 풀끝에 맺힌 이슬이나 섬돌 밑에서 우는 벌레들의 대단치 아니한 것이 가을의 벅찬 감정을 노래하는 데 무슨 값어치가 되랴. 그러나 나는 단원(檀園)의 군선도(群仙圖)를 본 적이 있다. 바둑을 두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돌에 걸터앉은 사람,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사람, 일어서 있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오는 사람, 가슴을 내 놓고 있는 사람, 배를 내 놓고 있는 사람, 맨발로 있는 사람, 대머리진 사람, 눈썹이 긴 사람, 수염이 많은 사람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하나하나 신기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바둑을 둔다고 무슨 신선이며 배를 내 놓고 있다고 무슨 신선인가.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체가 어딘지 알 수 없는 탈속(脫俗)된 선풍신운(仙風神韻)에 휩싸여 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기형스러운 사람들이 모두 다 신선으로 나타난다. 아니 돌 한 개, 풀 한 포기까지도 선경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이 된다.비로소 단원의 흉중에 가득 찬 신선들이 그의 붓끝에서 바람같이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양을 떠나서 따로 군선도는 없다. 한 줄기의 가을 기운이 일어나면, 세상의 모든 것이 가을이다. 단풍만이 가을이 아니다. 푸른 솔도 어제 보던 솔이 아니다. 이슬만이 가을이 아니다. 이끼 낀 돌도 이미 가을이다. 따라서 내 혈관에 도는 피가 이미 가을이요, 내 눈망울이 이미 가을이다. 낸들 어떻게 가을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이는 것이 모두 다 가을이다. 그러나 가을은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달이요, 물이요, 이슬이요, 하늘이요, 벌레 소리다. 여기서 가을을 보고 가을을 듣는 것이다.
나는 사십 대에 들어선 여인의 눈매에서 초가을을 느낀다고 했거니와 어찌 이뿐이랴. 가을걷이를 하는 중년 농부의 억센 팔뚝에서도 초가을을 느끼는 것이다.
깍두기설
C군은 가끔 글을 써가지고 와서 보이기도 하고, 나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나도 그를 만나면 글 이야기도 하고 잡담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다.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깍두기를 좋아한다고, 한 그릇을 다 먹고 더 달래서 먹는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깍두기를 화제로 이야기를 했다.
깍두기는 이조 정종(正宗) 때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의 부인이 창안해 낸 음식이라고 한다. 궁중에 경사가 있어서 종친의 회식이 있었는데, 각궁(各宮)에서 솜씨를 다투어 일품요리(一品料理)를 한 그릇씩 만들어 올리기로 했다. 이때 영명위 부인이 만들어 올린 것이 누구도 처음 구경하는 이 소박한 음식이다. 먹어 보니 얼근하고 싱싱한 맛이 일품이다. 그래서 위에서
“그 희한한 음식 이름이 무엇이냐?”
고 하문하시자,
“이름이 없습니다. 평소에 우연히 무를 깍둑깍둑 썰어서 버무려 봤더니, 맛이 그럴듯하기에 이번에 정성껏 만들어 맛보시도록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깍두기구나.”
하고 크게 찬양을 받고, 그 후 오첩반상의 한 자리를 차지해서 상에 오르게 된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그 부인이야말로 참으로 우리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솜씨 있는 부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다른 부인들은 산진해미(山珍海味) 희귀하고 값진 재료를 구하기에 애쓰고 주방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무 ‧ 파 ‧ 마늘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갖은 양념 갖은 고명을 쓰기에 애쓰고, 소금 ‧ 고춧가루는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료는 가까운데 있고 허름한데 있었다. 옛날 음식 본을 뜨고 혹은 중국사관(中國使館)이나 왜관(倭館)음식을 곁들여 규격을 맞추고 법도 있는 음식을 만들기에 애썼으나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국중에 올릴 음식을 그런 막되게 썬 규범에 없는 음식을 만들려 들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무를 썰면 곱게 채를 치거나 나박김치 본으로 납작납작 예쁘게 썰거나 장아찌 본으로 걀쭉걀쭉하게 썰지, 그렇게 깍둑깍둑 썰 수는 없다. 기름 ‧ 깨소금 ‧ 후춧가루 식으로 고춧가루도 적당히 치는 것이지 그렇게 시뻘겋게 막 버무리는 것을 보면 질색을 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깍두기는 무법이요, 창의적인 대담한 파격이다.
그러나 한국 음식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면 이 대담한 새 음식은 탄생될 수 없다. 실상은 모든 솜씨가 융합돼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무법 중의 유법이다. 무를 깍둑깍둑 막 써는 것은 곰국 건지 썰던 솜씨요, 고춧가루를 벌겋게 버무린 것은 어리굴젓 담그던 솜씨요, 발효시켜서 익혀 먹도록 한 것은 김치 담그던 솜씨가 아니겠는가? 다 재래에 있어온 법이다. 요는 이것이 따로 나지 않고 완전 동화되어 충분히 익어야 하고 싱싱하고 얼근한 맛이 구미를 돋우도록 염담(鹽淡)을 잘 맞추어야 한다. 음식의 염담이란 맛의 생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인의 구미에 상하 귀천 없이 기호에 맞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격식이 문제 아니요, 유래가 문제 아니다. 이름이야 무엇이라 해도 좋다. 신선로(神仙爐)니 탕평재(蕩平菜)니 두견화다(杜鵑花茶)니 가증스럽게 귀한 이름이 필요 없다. 깍두기면 그만이다. 이 깍두기가 반상 오첩에 올라 어육(魚肉)과 어깨를 나란히 하되 오히려 중앙에 놓이게 된 것이요, 위로는 궁중 사대부가로부터 일반 빈사(貧士) 서민에 이르기까지 애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C군은 영리한 사람이다.
“선생님, 지금 깍두기를 빌어 수필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지요? 수필의 소재는 우리 생활 주변에 있고 다시 평범한 데 있는 것이요, 신기하고 어려운데서 구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무가 싱싱하고 단 무라야 깍두기 맛이 나지 썩은 무나 시든 무야 되겠나?”
“그것은 글의 품위에 관계 되겠지요. 청신하고 진실한 것으로 깊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야 되겠지요.”
“이름이야, 소품(小品)이라 하든 에세이라고 하든 잡문이라고 하든 상관할 바 아니지요. 나는 내 글을 쓰는 것이니까요. 어느 이름에 구애될 필요는 없지요. 어느 형식이나 유파에 따를 필요도 없지요. 오직 파격이 필요하지요. 램의 수필이 어디까지나 환상적이요, 정서적인가 하면, 노신(魯迅)의 수필은 정열적이며 혁명적이었고, 주자청(朱自淸)의 수필이 서정적이요 미문적이었다 하면, 푸르스트의 수필은 사색적이요 내심적이었거니와 그들의 수필을 기준으로 할 아무 필요도 없으니까요. 서구적인 저널리즘이 칼럼니스트들을 수필문학가라 하고 한편에서는 서투른 작문을 수필 명작이라 떠드는 것을 추종할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남들이 내 글도 수필이라고 불러 준다면 그런대로 받아들여 족하고요. 다만 읽어서 싱싱하고 얼근한 깍두기 맛만 낸다면 소설 ‧ 시와 같은 문학들과 함께 오첩반상에, 오히려 중앙을 차지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던 중 무를 숭덩숭덩 썬 것이 무법인 듯하되 곰국 건지 썰던 법이요 운운하시던 말씀인데, 수필에서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자네가 내 말을 지나치게 생각하니까 좀 무서우이마는 수필에 정서가 흐르는 것은 서정시에서 빌어온 법이요, 수필에서 서술이 긴박하고 빈틈없이 나가는 것은 단편소설에서 빌어온 법일세. 설리(設理)는 평론의 수법에서, 묘사는 배경 소설의 수법에서, 독자에게 친절감을 잃지 않는 것은 저명한 서간문의 수법에서, 사색적요 반성적인 것은 저명한 일기문의 수법에서, 문장의 활기 있는 긴장은 희곡의 수법에서, 문단과 문단이 갈릴 때마다 청신(淸新)한 전환은 시나리오의 신(Scean)을 바꾸는 솜씨에서 자유자재로 섭취 활용해 가며 자기의 독특한 문체와 참신한 문태(文態)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거나 의식적인 기교에 지나치거나 익지 아니한 날내가 나면 그 글은 원숙한 글이 아닌 것일세.”
“음식 맛의 생명은 염담(鹽淡) 맞추기에 있다고 하셨는데 문장에서 염담이란 무엇에 해당됩니까?”
“문장의 농담(濃淡)이지. 문장의 농담이 없으면 정물화(靜物畵)에 음영(陰影) 없는 것과 같고, 음악에 박자 없는 것과 같지. 문장은 이 농담에 의해서 함축도 있고 여운도 있고 기환(奇幻)도 있고 내재적인 리듬도 있어 비로소 시취(詩趣)를 갖게 되는 것일세. 고인이 농담 없는 문장을 가리켜 몰골도(沒骨圖)라고 풍자한 이가 있어, 우리 모양으로 문장이 미숙하고, 또 배워 보려는 사람들은 이 깍두기에서 얻은 바가 있을 것일세.”
일후(日後)의 참고삼아 이 날의 문답을 적어 둔다.
까치
까치 소리는 반갑다. 아름답게 굴린다거나 구슬프게 노래한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고 기교 없이 가볍고 솔직하게 짖는 단 두 음절 ‘깍 깍. 첫‘깍’은 높고 둘째‘깍’은 얕게 계속되는 단순하고 간단한 그 음정(音程)이 그저 반갑다. 나는 어려서부터 까치 소리를 좋아했다. 지금도 아침에 문을 나설 때 까치소리를 들으면 그 날은 기분이 좋다.
반포지은(反哺之恩)을 안다고 해서 효조(孝鳥)라 일러 왔지만 나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좋다. 사랑 앞마당 밤나무 위에 까치가 와서 집을 짓더니 그것이 길조(吉兆)라서 그 해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영전(榮轉)이 되었다던가, 서재(書齋) 남창 앞 높은 나뭇가지에 까치가 와서 집을 짓더니 글재주가 크게 늘어서 문명(文名)을 날렸다던가 하는 옛 이야기도 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까치 소리는 반갑고 기쁘다.
아침 까치가 짖으면 반가운 편지가 온다고 한다. 이 말이 가장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왜냐 하면, 그 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반가운 소식의 예고같이 희망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까치뿐이 아니라 까치집을 또 좋아한다. 높은 나무 위에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엉성하게 얽어 놓은 것이, 나무에 그대로 어울려서 덧붙여 논 것 같지가 않고 나무 삭정이가 그대로 떨어져서 쌓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소쇄(瀟灑)한 맛이 난다. 엉성하게 얽어 논 그 어리가 용하게도 비가 아니 샌다. 오직 달빛과 바람을 받을 뿐이다.
나는 항상 이담에 내 사랑채를 짓는다면 꼭 저 까치집같이 소쇄(瀟灑)한 맛이 나도록 짓고 싶었다. 내가 완자창(卍字窓)이나 아자창(亞字窓)을 취하지 않고 간소한 용자창(用字窓)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정서에서다. 제비집같이 아늑한 집이 아니면 까치집같이 소쇄한 집이라야 한다. 제비집은 얌전하고 단아한 가정부인이 매만져 나가는 살림집이요, 까치집은 쇄락하고 풍류스러운 시인이 거처하는 집이다.
비둘기장은 아무리 색스럽게 꾸며도 장이지 집이 아니다. 다른 새 집은 새 보금자리, 새 둥지, 이런 말을 쓰면서 오직 제비집 까치집만 집이라 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의 집에 대한 관념이나 정서를 알 수가 있다. 한국 건축의 정서를 알려는 건축가들은 한 번 생각해 봄 직한 문제인 듯하다. 요새 고층 건물, 특히 아파트 같은 건물들을 보면 아무리 고급으로 지었다 해도 그것은 ‘사람장’이지 ‘집’은 아니다.
지금은 아침 여덟 시, 나는 정릉 안 숲 속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 오래간만에 까치 소리를 들었다. 나뭇잎들은 아침 햇빛을 받아 유난히 곱게 푸르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파란 하늘이 차갑게 맑다. 그간 비가 많이 왔던 관계로 물소리도 제법 크게 들려온다. 나는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여길 와 본 적이 있었다. 보건 운동을 하러 온 사람, 약물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붐비어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 보니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윽한 숲 속이 한없이 고요하다. 지금이 제일 고요한 시간이다. 까치들이 내 앞에 와서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이른바 까치걸음이다. 귀엽다. 손으로 만져도 가만히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사람이 옆에 앉아 있다는 데는 아무 관심이나 의구심도 없이 내 옆에서 깡충깡충 뛰놀고 있다.
나는 일찍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민화(民畫) 하나를 생각한다. 한 노옹(老翁)이 나무 밑에서 허연 배를 내놓고 낮잠을 자는데, 그 배 위에 까치 한 마리가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신기한 그 상상화에 기쁨을 느꼈다. 민화란 어린아이와 자유화(自由畫)같이 천진하고 기발한 데가 있어서 저런 재미있는 그림도 그려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저 까치들을 보고 그것은 기발(奇拔)한 상상이 아니요,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이지봉(李芝峯)이 정호음(鄭湖陰)의 “산과 물이 바람에 소릴 치며, 강물은 거세게 울먹이는데, 달은 외로이 비쳐 있다.”는 시를 보고 ‘강물이 거세게 이는데 달이 외롭게’란 실경(實景)에 맞지 않는다고 폄(貶)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달이 고요히 밝은 밤중에는 물결이 잔잔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김백곡(金栢谷)이 황강역(黃江驛)에서 자다가 여울 소리가 하도 거세기에 문을 열고 보니 달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그래서 비로소 그 구가 실경을 그린 명구(名句)인 것을 알았다는 시화(詩話)가 있다. 나도 그 민화가 실경인 것은 모르고 기상(奇想)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 태고연(太古然)한 풍경의 민화 한 폭이 다시금 눈앞에 뚜렷이 떠오른다. 나무 밑에서 허연 배를 내놓고 누워서 잠자는 노옹(老翁), 그 배 위에 서 있는 까치 한 마리.
마고자
나는 마고자를 입을 때마다 한국 여성의 바느질 솜씨를 칭찬한다. 남자의 의복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호사가 마고자다.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같은 다른 옷보다 더 값진 천을 사용한다. 또, 남자옷에 패물이라면 마고자의 단추다.
마고자는 방한용이 아니요 모양새다. 방한용이라면 덧저고리가 있고 잘덧저고리도 있다. 화려하고 찬란한 무늬가 있는 비단 마고자나 솜둔 것은 촌스럽고 청초한 겹마고자가 원격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노인네가 겨울에 소탈하게 방한삼아 입으려면 그 대신에 약식인 반배를 입었던 것이다.
마고자는 섶이 알맞게 여며져야 하고, 섶귀가 날렵하고 예뻐야 한다. 섶이 조금만 벌어지거나 조금만 더 여며져도 표가 나고, 섶귀가 조금만 무디어도 청초한 맛이 사라진다. 깃은 직선에 가까워도 안 되고 , 너무 둥글어도안 되며, 조금 더 파도 못쓰고, 조금 덜 파도 못쓴다. 안이 속으로 짝 붙으며 앞뒤가 상그럽게 돌아가야 하니, 깃 하나만 보아도 마고자는 솜씨를 몹시 타는 까다로운 옷이다.
마고자는 원래 중국의 마괘자에서 왔다 한다. 귀한 사람은 호사스러운 비단 마괘자를 입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청마괘자를 걸치고 다녔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마고자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고자는 마괘자와 비슷도 아니 한 딴 물건이다. 한복에는 안성맞춤으로 어울리는 옷이지만, 중국 옷에는 입을 수 없는, 우리의 독특한 옷이다.
그리고 그 마름새나 모양새가 한국 여인의 독특한 안목과 솜씨를 제일 잘 나타내는 옷이다. 그 모양새는 단아하고 아취가 있으며, 그 솜씨는 섬세하고 교묘하다. 우리 여성들은 실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어받아 온 안목과 솜씨를 지니고 있던 까닭에, 어느 나라 옷을 들여오든지 그 안목과 그 솜씨로 제게 맞는 제옷을 지어 냈던 것이다. 만일, 우리 여인들에게 이런 전통이 없었던들, 나는 오늘 이 좋은 마고자를 입지 못할 것이다.
문화의 모든 면이 다 이렇다. 전통적인 안목과 전통적인 솜씨가 있으면 남의 문화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든다 할지라도 이를 고쳐서 새로운 제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송자에서 고려의 비취색이 나오고, 고전 금석문에서 추사체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예전엔 남의 문물이 해동에 들어오면 해동 문물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탱자가 아니라 진주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남의 것이 들어오면 탱자가 될 뿐 아니라, 내 귤까지 탱자가 되고 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석류장(石榴杖)
그는 처음부터 나를 유혹했다. 내가 충무로 고물상 앞을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용춤 항아리에 꽂혀 있으면서 유리창으로 내게 손짓을 했다. 그래서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다가, 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손을 덥석 잡고 말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는 지금까지 십오 년을 같이 살아왔다. 그는 잠시도 나와 떨어져 있은 적이 없다. 잘 때도 내 방 구석에 꼭 지켜 서 있다. 그는 필시 남쪽 지방의 출생일 것이다. 그는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열은 적이 없다. 그도 한 때는 붉게 타는 꽃을 피워 사람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요, 그 보석을 간직한 열매로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혹은 그 보석 같은 붉은 알이 하얀 식혜 위에 동동 떠서, 귀한 댁 아가씨 사시 위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너무 강직하고 모양이 우툴두툴해서 괴기하기 때문에 호사자의 손어 꺾이어 단장이 돼 버리고만 것이다. 그런데 누구 손에서 옮겨 어디서 유랑하다가 고물상까지 팔려 왔는지 말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그와 그럭저럭 지내는 동안에 그는 완전히 내 의지를 지배하고 말았다. 나는 이제 그의 그림자가 돼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어느 때나 그와 더불어 산책을 한다. 그는 이제 하나밖에 없는 좋은 친구다. 가끔 나를 끌어낸다.
나의 거취는 어느덧 그에게 맡기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가끔 나를 말꾼들이 잘 모이는 이웃집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문앞까지 가서는 슬쩍 돌아서 오기도 한다. 나는 그의 변덕에 아무 이의도 없어야 한다. 그가 가다가 주춤 섰을 때는, 먼 산에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가다가 걸음을 가만히 멈추고 무엇을 듣는가 하면, 발밑에서 맑은 물소리에, 이름 모를 꽃송이에 그는 항상 예민했다. 그가 공중에 원을 그리면, 나는 맑은 하늘에 새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가 발길을 가볍게 옮길 때 나는 경쾌했고 그가 무겁게 땅을 밟을 때 나는 침울했다. 그가 내 뒤에 비스듬히 누워서 끌여올 때 나는 솜같이 피로했고 그가 내 무릎에 누워서 떠가는 구름을 읊조릴 때 나는 애상과 추억에 잠기어야 했다.
그가 한 허리를 중심으로 널뛰기를 흉내 낼 때 나는 출근 시간이 십 분밖에 안남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오만한 신사를 만나면 그는 너도 배를 내밀고 버티어야 된다고 내 뒤에 가서 허리를 버티어 준다.
그는 나를 영화관으로 끌고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덕스럽게도 대합실 의자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웠다가 오기도 했다.
가장 그가 분개한 때는 내가 어느 연회에 초청을 받아가서 부득이 그를 현관에서 개 패 같은 패가 달린 오래기로 얽어서 구두와 함께 문간에 맡기고 들어갔을 때의 일일 것이다. 나도 그의 분노한 감정을 느낀 관계인지 노래와 춤과 질펀한 음식과, 오고 가는 화제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술은 받아 놓은 첫잔을 잠깐 입술에 댄 채 그대로 연회를 마치고 말았다. 빨리 나와 그를 찾았다. 그는 신발들 틈에서 곤욕을 당했다.
해방이나 된 듯이 와락 내 앞에서 내달았다.
그는 나를 천병으로 끌고 갔다. 시원한 바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희미한 밤하늘의 별빛이 약간 슬펐다.
그는 어느 헙수룩한 술집으로 나를 끌었다. 궤짝 같은 걸상 위에 걸터앉아 나는 대폿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는 내가 몽롱하게 취한 뒤에야 서울의 밤 거리를 휘저으며 걸어왔다.
그의 울퉁불퉁한 굵은 선은 꽤 험상스러워 보이지만 한 번도 사람을 때려 본 적은 없다. 역시 신사도를 아는 친구다. 그러나 그는 또 젊은 혈기를 보여 주는 때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언덕에서 소릴치며 눈앞에 잔디를 힘껏 내리치고는 껄껄 웃는 때도 있었다.
달밤
내가 잠시 낙향(落鄕)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윗마을 김 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 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 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 됐소, 농주(農酒) 두 사발이 남았더니······."
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죽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 본 적은 일찍이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
윤오영(1907-1976) 치옹. 동매실주인
190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보성고보에서 20년간 교편생활을 했습니다.
양정고보에 재학시절 동아일보 학생문예에 시를 발표했고, 서울시내 문학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작가로써의 삶은 그로부터 40년 후인 1957년, <현대문학>에 <측상락(厠上樂)>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문학적 활동이 없던 시절, 윤오영은 독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문학적인 힘을 보충했는데 그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어, 양정고보 3년 후배인 금아 피천득은 “밤이면 송강과 노계를 읽고 연암을 숭상하면서 현대 중국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성탄과 노신을 좋아하고 동양철학에 정진하여 사서삼경은 물론 노자 장자도 탐독했다.”고 술회 했습니다.
59년 9월 『현대문학』에 「측상락(鬪上樂)」을 발표하면서 수필계와 인연을 맺었고, 72년 3월 창간된 『수필문학』 4월∼10월호까지 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이라는 필명으로 「수필문학 강론」을, 72년 5월부터 「수필문학의 첫걸음」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양잠설(養蠶說)」을 게재하였고, 이 두 편이 75년 『수필문학 입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73년 4월호에「파회기(波駑記)」「박꽃」「정야(靜夜」3편, 73년 7월호에 「방망이 깎던 노인」, 73년 11월부터 74년 11월까지「동매실산고(桐梅室散稿)」49편, 74년 3월에는 관동출판사에서 출간된 『고독의 반추』에 80편을 상재하였고, 75년 9월부터 76년 1월까지「속동매실산고(續桐梅室散稿)」8편, 76년에 발간된 편저『한국수필정선(韓國隨筆精選)』에 7편을 수록하였으며, 식도암으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다듬었던 「와병 수감(臥病隨感)」을 마지막으로 151편의 수필을 남겼습니다.
기존의 한국 수필계에 대해서 이론적인 부족함을 느낀 윤오영이 남긴 수필 이론인 1975년 <수필문학입문>, 1976년 <한국수필정선> 유일한 수필집 <고독의 반추>(1974)과 <방망이 깎던 노인> (76.3)등을 발간했습니다.
특히 <고독의 반추>는 1970년대 수필문학의 주요한 성과로 평가되고 있으며, <연암의 문장>, <노계 가사의 재평가> 등 과거 문장의 연구에도 소흘치 않았습니다. 1976년 8월 22일 70세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동시대의 수필가 금아 피천득과 함께 양정고보 졸업한 그는 졸업 후에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윤오영의 작품 <비원의 가을> 에 등장하는 금아가 바로 피천득이라고 합니다. 현재 그의 수필 원고와, <방망이 깍던 노인>에 등장하는 방망이는 그의 모교인 양정고보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현재 출간되어 우리가 사 볼 수 있는 윤오영의 책으로는 범우문고 104 <방망이 깎던 노인>(범우사), <수필문학입문>(태학사), <곶감과 수필>(태학사)가 있습니다.
그의 수필이력은 비교적 만년인 53세에 시작하여 타세한 70세까지이다. 그는 소설을 넘보지도 시 세계를 기웃거리지도 않고, 수필에서 시작하여 수필로 끝을 맺었던 수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