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거리 : 9.5km 산행시간 : 6시간
저구고개 - 다대산성 - 학동재 - 망등 - 가라산(585) - 진마이재 -
뫼바위 - 마늘바위 - 노자산 (565) - 거제자연휴양림
푸른 바다를 건너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누군가 그랬다. 봄이 오면 발정난 수컷처럼 설레야 옳다고..
순하게도 남해바다는 푸른 욕조처럼 섬과 섬 사이에 떠 있다.
바다의 거울 하늘은 그 장구한 섬들의 수식은 띄우지 않아도, 바다의 빛깔로 대답하는 것만은 잊지 않는다.
햇살에 부서지는 바다의 비늘은 수천개의 설렘처럼 쨍쨍 빛나고 섬들은 대답하듯 말 달린다.
표표히 떠 있는 섬마다 거기, 봄이 업히고 봄햇살이 무등 탄다. 참 정다운 봄이다.
사람들이 바다의 산으로 오르는 단 하나의 이유처럼 빛나는 3월.
바다에 봄이 온 것이다.
남해바다에 떠있는 섬은 언제나 두근두근 가슴을 두드리는 무언가를 지녔다.
파도로 만들어진 길모퉁이, 섬과 섬 사이 골목길, 섬이 지닌 제 이름과 그에 맞는 표정까지....
바다가 그려내는 수채화 열 두폭마다 섬은 언제나 이렇듯 다정하다.
주인공이기 보다는 그저 완성품 속에 들어만 있어도 족하단 표정이다.
그 겸손함이 사랑스럽다. 자신으로 인해 명품 한려수도라는 바다의 훈장을 받는데도
이렇게 낮게 떠 바다를 가꾸는 데 소홀하지 않다.
오늘도 그런 훈장에 손사래를 치는지 번다하게 오며가며 그저 바쁘단다.
그 섬의 부표 위로 남녘 바람이 불어온다. 육지에서 차갑다고 말하는 꽃샘바람이다.
삼월은 꽃샘추위가 찾아오는 달, 그러나 꽃샘바람은 이렇게 손사래를 치며 걱정하지 말란다.
봄이 봄답게 오는 것이라고.. 그냥 오기 미안해 헛기침 한다는 게 그만 들킨 거라고.
아무려나...바다에서부터 봄이 오는데...
3월엔 우리나라 바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해금강의 거제도로 향했다.
우리가 오른 산은 거제시 남부면 가라산(585m)과 동부면 노자산(565m)이다.
묶음 종주를 한 것이다.
3월엔 어디로든 가되 그곳이 따뜻한 남녘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 어느 순간보다 화창하기를 또 얼마나 바랐던가.
이름하여 '자연의 발정기'라는 것이다. 세상에 분분한 꽃가루는 자연의 정자이자 난자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봄이 오면 설렌다고....
그래서 그 사람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저자이자 명강사)은
'봄에는 발정하는 수컷처럼 설레야 옳다'고 정의했던 것이다.
사방이 갇힌 도시의 공간보다 시골 주택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훨씬 자유롭다는 것이다.
나는 주택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 들을 때가 제일 좋다.
그런 봄이 오는 3월, 봄이 넘실대는 바다로 눈을 확장시키러 가는 발걸음.
사람들이 어찌 이 '옳은' 일에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안선이 가장 긴, 한국에서 두 번째 큰 섬나라 거제도.
거제도 해안선 구빗길은 바닷물이 그려놓은 실루엣이다.
느린듯 완만하고 아기자기한듯 지루하지 않다.
마침 구름을 지난 차분한 빛자락이 이 맑은 봄바다에 닿으며 눈부셔 하고 있었다.
바다는 늘 잘게 파도치면서도 언제나 더 잘게 부서지는 햇살을 소중히 품는다.
산길 6시간이 바다에 떠 있었다.
적당히 밴 땀을 식혀주는 아직 시린 바람도 좋았다.
꽃샘추위란 말이 바다에 닿으면 산길을 위무해주는 따스한 산들바람이 된다.
제 발로 만들어낸 바닷말사전에는 꽃샘추위, 그런 단어란 없다.
나를 띄워주는 마술같은 손길, 그런 바람만 있었다.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위해 남과여가 만나 결혼이라는 둥지를 만든다.
한 사람은 꼭 붙잡으며 사랑받길 원하고 한 사람은 기대어주며 사랑을 이끈다.
여자가 바다 너머의 사람에게 다가갈 때에는
그것이 언덕이라는 생각을 하며 걸어갔을 것이다.
진정림에게 윤해님은 거제 앞바다에서 눈만 뜨면 바라보던 바다햇살이었다.
바다(해)를 보며 살아가야 할 영원한 바다의 여자.
그녀의 고향은 거제도 학동 바닷가. 바로 아랫마을 어딘가에서 바다만 보고 살았을 터.
의령이라는 심심산골에서 '바다'라는 뜻을 가진 '윤해'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그녀는 고향의 바다를 보았을까.
바다에 몸을 던진 그녀의 첫 떨림이 궁금하다. 아직도 그날의 첫 떨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그의 진정한 님, 진정림. 그녀는 분명 바다가 가야할 길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바다에 닿아 있다.
아직도 그런 사랑이 가능하다는, 그들의 사랑이.. 오늘따라 질투난다.
내가 읽고 있는 책 제목은 앞에서 말했듯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이다.
책 제목을 본 지은이의 아내가 물었다.
"당신, 진짜로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해?"
약간 주저하다 대답한다.
"응, 가끔..."
아내는 잠시 창가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이내 몸을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
"난, 만족하는데...."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는데, 아내가 나지막하게 남자의 가슴을 깔끔하고도 깊숙이 찌른다.
"아주 가끔..."
-본문 중-
나는 이말만 아저씨를 다르게 바라본다.(나도 아줌마이면서 아저씨라 해서 죄송하지만^^;;)
겨울동안 한번도 산행을 하지 않으셨던 아저씨는 봄이 시작되자 허물을 벗듯 나오셨다.
마라톤을 하듯 산행을 하시는지 처음엔 산에서 걷는 것쯤이야 우습게 여기시는 듯 보였다.
처음 아저씨는 남편의 닉네임인 '남산돌이'에 이유(딴지)를 거셨는데, 한번도 남산에서 본 적 없는데다,
남편의 남산사랑이 아무래도 거짓스러워 초면 이렇게 따지셨다.
"아요? 남산에는 내가 잘 도는데 우째 그 쪽이 남산돌인교?"
남산돌이의 속뜻은 하도 가본 산도 없고 남산만 돌아봐서 남산돌이였는데,
이말만 아저씨 입장에서는 뺏긴 이름같아 억울하실 만도 하였겠다.
늘 선두그룹에 서시던 아저씨는 어느날 (월악산으로 기억한다)
늘 후미에 서는 내 뒤에 바투 오시며
한마디 툭, 놀라운 말씀을 던지고 가셨다.
"아지매 글 읽어본게 ... 뭐 쪼매 되겠던데예."
(이 말을 스스로 적는 건 굉장히 못할 짓이지만, 이야기의 진행상...)
나는 그랬다. 아저씨께서 이 지루한 산행기를 읽으신단 말인가.
그 감사한 충격!
그것은 내가 정말로 길고 지루하게 산행기를 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때 굉장한 위로이기도 했지만
내가 진정 놀랐던 것은 짧은 말씀 속에 감추어진 '함축'의 여운 같은 것이었다.
아저씨 말씀에는 어눌한(^^)듯 들리는 목소리에도 내용 전달만은 그 누구보다
정확하였고 깊이까지 보였던 것이다. 구구절절 장광설보다 짧고 명쾌한 한 줄 댓글에 어울리는 말씀.
게다가 구수한 말투까지... 나는 절대 사적인 마음을 넘어서는 본 바를 그냥 말할 뿐이다.
이번 산행에서 아저씨는 예의 그 요약적인 말씀으로 좌중을 그만 쓰러지게 만드셨다.
"우리 아지매 얼마 전에 하루종일 28km 걸려 놓은께..그만...일주일이 조~용 하대예."
역시 이런 말들은 말씀의 대가들만 호흡할 수 있는 분야이다.
설명부터 시작했다면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을 전후사정들을, 이렇게 단 한 줄로 요약정리 하신다는 건
보통 담백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야기의 주변은 사실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말의 전달은 요약과 핵심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언뜻 건진 이말만 아저씨의 오늘의 어록을 소개하겠다.
우리는 보통 약한 사람을 보고 뼈만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저씨는 회화적인 분야까지 측정하도록 말하셨다.
앙상하게 메마른 나뭇가지를 바라보듯 사람 몸도 그렇게
"앙상 말랐다."고....
나는 그렇게 아저씨의 말을 수집하고 있다.
잠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푸른 물에 눈을 적셔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움이 차오른 사람들이 토해낸 저 옥빛 바다로 외로운 섬 하나가 떴다.
외도.
배를 타고 섬으로 갈 때 저 작은 섬은 찾아가야 할 꽃동산이자 누군가의 히트상품이었다.
그러나 저보다 조금 나은 이쪽 언덕에서 바라보는 그네는 차라리 작고 외로운 육신으로 보인다.
보듬어주고 싶은 하나의 작은 영혼, 외로워서 외도.
바다에 떨어진...자그마한 구름 같아라.
작은 저 섬은 '바람의 언덕'을 품고 있다.
누렇게 잔디가 깔린 튀어나온 일부분이 '바람의 언덕'이다.
뒤편으로 하얗게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배는 '해금강'으로 떠나는 듯하다.
바다가 시를 쓴 증거처럼 이름들이 바다를 이미 말해주고 있다.
때론 말 없이 바라보기 ... ....
산에도 바위는 있고 들에도 바위는 있다.
세상의 바위가 바다를 바라볼 때에만 유독 생각에 잠기는 이유는 무얼까?
꽃 진 자리마다 사람꽃이 피었다.
바닷가 마을 학동에는 하얀 포말처럼 사람들의 집들이 피었다.
"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
.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호승 -수선화에게 중에서-
나의 산행기는 언제나 바다를 만나면 정박해 버린다.
산행이라는 긴 고역의 길보다 유독 바다에만 가면 내 추억과 함께 아프거나 즐겁거나 둘 중의 하나로
사색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바다를 벗어나도 바다여자의 진한 갯내음마저 벗어내지 못한 나름의 숙명 때문이라고
서툴게 해석해 볼 뿐.
바다에만 갔다 오면 병을 앓듯 시름시름 그리움을 앓는다.
그렇게 해석해 볼 뿐.
바다의 기후에 알맞은 동백나무가 마지막 하산길의 피로를 대신 받아주고 있었다.
저 빛이 춤을 추는 동백길은 해풍에 더욱 건실해진 듯 쉬고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9.5km 산길은 마치 어린 시절 흙마당을 걷는 듯했고
바다는 마지막 구간에서도 쉼없이 같이 했다는 듯 어느 구비에선 혀를 내밀기도 했었다.
함께 걸었던 많은 산님들은 통영으로 옮긴 저녁식사에서
한 잔 술에 짭쪼름한 바닷바람을 닦아냈을까?
바다는 갑자기 소주처럼 캬~하는 그리움을 준다고
출렁, 가슴에서 무언가가 일어났을까?
바다는 언제나 내 그리움의 진원지다.
물밀듯이 그리움이 차오른다.
그래서 조용히 사람과 풍경을 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