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근본주의의 등장
영국의 오리엘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신학적 조크를 소개한 적이 있다. “신학은 독일에서 창조되어 영국에서 교정되고, 미국에서 타락한다.” 웃어넘길 만한 농담이지만 20세기 초반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을 들었더라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수적인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또 다른 십자군 전쟁으로 간주했다. 유럽에서 진행 중인 전쟁은 철저하게 자유주의에 물들어 있는 독일의 신학과 맞설 수 있는 십자군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보수적인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이와 같은 생각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에서 이미 1730년부터 시작된 제1차 대각성운동, 그리고 가까이는 20세기 초반 뉴욕에서 개최된 나이아가라 성서 대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09년 8월, 딕슨(Amzi Dixon)의 설교를 듣고서 감동한 사업가 라이먼(Lyman)과 밀튼 스튜어트(Milton Stewart)가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을 소개하는 소책자들의 출판을 위해서 20만 달러를 헌금했다. 그렇게 해서 1910년에 출판된 「근본: 진리에 대한 증언」(The Fundamentals: A Testimony of the Truth)이라는 소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명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성서의 축자영감설. 둘째,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셋째, 세상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넷째,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 다섯째, 그리스도의 재림.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그 소책자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주장을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근본주의자들은 사사건건 시대정신이나 문화와 충돌하지는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자유주의적인 후천년주의자들과 보수적인 전천년주의자들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근본」의 저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하나님이 진화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과 인간의 이성과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사회 분위기의 급속한 변화 때문에 기초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버틀러 법과 원숭이 재판
1920년대 미국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서 촉발된 내부 분열에 대한 불안과 진화론에 대한 불만이 더욱 팽배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의 내용과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이 양립할 수 없다고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진화론의 반대자들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도록 로비를 했다.
테네시 주는 1925년에 그런 내용을 담은 버틀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성서의 가르침인 하나님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부정하는 이론을 가르치는 것과 인간이 하등한 동물로부터 유래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게 그 법안의 요지였다. 버틀러 법에 따르면 테네시 주의 공립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칠 수 없었다. 이처럼 서로를 향해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마주 달리는 두 대의 기차가 결국 같은 선상에서 서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존 스콥스(John Scopes)는 테네시의 데이튼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고등학교의 미식축구 코치로 부임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았다. 스콥스는 대학에서 법학대학원의 예비과정을 마쳤다. 평소에 미식축구 코치와 수학을 담당하던 그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스콥스는 학기 말에 몸이 불편한 생물 교사를 대신해서 두 주 동안 수업에 들어갔을 뿐이었다. 버틀러 법안이 통과되자 데이튼 주민 가운데 일부가 자신들의 동네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으려고 했다. 그들은 스콥스가 학생들에게 원숭이와 사람은 같은 조상에서 나온 것으로 가르쳤다고 확신했다. 스콥스는 버틀러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결국, 1925년 7월에 재판이 열렸다.
재판은 아주 싱겁게 끝날 수도 있었다. 기소된 스콥스가 버틀러 법을 위반했노라고 직접 인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재판은 그리 간단히 종결될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진보 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유명한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가 미식축구 코치의 변호사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에 맞서 스콥스를 기소하는 측에서는 세 차례나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Bryan)을 검사로 내세웠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두 사람의 법률가가 법정의 전면에 나서게 되자 사람들의 이목이 온통 재판에 집중되었다. 한여름의 찜통 같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무려 1천 명의 방청객이 운집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5일째 되는 날 대로우 변호사는 검사 브라이언을 증언대에 세웠다. 대로우가 물었다. “성서의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당신의 주장입니까?”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성서의 모든 내용은 그 자체로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소. 어떤 성서의 내용은 본보기로 주어진 것이오.” 대로우는 창조의 기간을 문제 삼아서 브라이언을 몰아붙였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는 구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나는 그것을 꼭 24시간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소.” 대로우는 그 ‘기간’이 무슨 뜻인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브라이언이 고함을 쳤다. “대로우 씨의 유일한 목적은 성서를 모독하는 것이오!” 대로우 역시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이의 있소! 나는 이 지상에 지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을 수 없는 당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거론하고 있는 중이오!”
스콥스의 변호를 담당한 대로우는 검사 브라이언에게 최종 발언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재판은 8분 만에 끝났다. 존 스콥스가 버틀러 법을 위반했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윌리엄 브라이언은 미식축구 코치에게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재판이 끝나자 근본주의자들은 브라이언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창조는 하루 24시간씩 6일에 걸쳐서 진행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그들과 달리 성서의 하루를 보다 길게 보았다.
그러면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승리를 손에 넣었을까? 재판에서 이겼지만, 미국 사회가 근본주의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1967년에 버틀러 법은 폐지되었지만, 1999년 8월 캔자스 주 교육위원회는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을 배제하도록 허용하는 안건을 근소한 표 차로 통과시켰고, 이외에도 13개 주에서 여전히 진화론을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불씨를 제공한 근본주의는 스콥스 재판 이후로 분열의 길에 들어섰다.
근본주의 진영의 분열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일부가 현대 세계와는 거의 담을 쌓고 지내다시피 하는 근본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바로 이른바 ‘신복음주의자들’이었다. 1942년 3월에 147명의 신복음주의자들이 미국의 부흥을 위해서 세인트루이스에 집회를 개최하고서 전국복음주의자연합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gelicals, NAE)를 결성했다. 그들은 스콥스 재판을 통해서 드러난 근본주의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이미지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의했고, 계속해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엄격한 교리를 고수한 반면, 신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동의하기만 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화를 추진했다. 영국 출신의 기독교 작가 루이스(C. S. Lewis, 1898-1963)의 작품이 복음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루이스는 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돈과 권력, 섹스에 탐닉하고 진실한 선과 사랑과 기쁨의 매력을 상실해버렸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가 정통주의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기독교 단체들과 협력을 모색하면서 세력을 확대하는 신복음주의자들에게 강력한 동력을 제공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복음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칼 헨리(Carl Henry, 1913-2003)와 대중적 설교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2018)이 그들이었다. 칼 헨리는 풀러 신학교의 설립을 도왔을 뿐 아니라 그레이엄이 창간한 <크리스차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편집을 한동안 담당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빌리 그레이엄을 이론적으로 적극 지원했다.
그레이엄은 1949년에 개최된 복음주의자들의 집회를 통해서 혜성처럼 나타났다. 집회의 주 강사였던 그레이엄이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하는 것을 계기로 대중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다. 집회 초반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마지막 날에는 1만 1천 명의 사람들이 그레이엄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들었다. 그 집회 이후로 우리에게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윌리엄 그레이엄은 미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신복음주의의 성장
빌리 그레이엄은 언젠가 자신이 주도하는 선교 캠페인을 이끌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전쟁 때문이겠지만 이 세계는 복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진 것 같다.” 그는 1977년까지 185개국의 2억 1천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수억을 헤아린다. 1974년에는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여의도에 모인 1백만 명 이상의 대중을 상대로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직접적인 설교 이외에도 문서 매체에 관심을 갖고서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빌리 그레이엄이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나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 때문에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레이엄의 발빠른 행보를 문제 삼아서 밥 존스(Bob Jones)와 같은 복음주의자들이 신복음주의와 완전히 등을 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리 그레이엄을 중심으로 결집한 신복음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전반적으로 더욱 강해졌다. 사실, 그레이엄에게도 나름대로 한계가 없지는 않았다. 그가 1998년에 직접 인정했던 것처럼 미국 우선주의(혹은 아메리카니즘)를 하나님의 나라와 혼동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기대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게 되었다.
복음주의는 빌리 그레이엄 이외에도 세계 각국의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다. 영국 성공회의 지도자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는 영국 전역의 대학교와 영어권 국가들을 상대로 복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있고 직접 자신을 찾아오는 젊은 복음주의자들을 가르쳤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마이클 캐시디(Michael Cassidy)는 아프리카를 복음화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사업회(African Enterprise, AE)라는 단체를 창립해서 적극적으로 선교에 나섰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지역은 빌리 그레이엄과 친분이 깊은 루이스 팔라우(Luis Palau)가 선교에 나서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변화하는 로마 가톨릭
로마 가톨릭은 20세기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도 특별한 변화를 겪지 않았다. 세상은 걷잡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했지만, 가톨릭은 사회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위협적인 세력으로 간주하던 공산주의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전통적인 권위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1958년 10월 이탈리아 출신의 안젤로 쥐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1881-1963)가 교황 요한 23세의 자리에 오르면서 급속히 바뀌었다.
추기경들은 고령의 교황에게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다. 사실, 추기경들은 그를 선택한 것도 76세라는 나이 때문이었다. 고령의 교황이 적극적으로 정치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중론이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교황은 노구를 이끌고서 사회로 걸어 들어갔다. 성탄절에 교도소를 방문한 것으로 시작된 그의 행보는 로마 가톨릭으로 하여금 5년 만에 4세기 이상 소요되던 변화를 경험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교황들은 개신교인들을 주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정죄했다. 하지만 교황 요한 23세는 개신교 신자들을 ‘떨어져 나간 형제’라고 불렀다. 요한 23세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도 참관인을 파견했고, 로마 가톨릭을 현대 세계에 걸맞도록 고치는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마침내 공회를 소집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은 행동으로 평가했다. 제1차 바티칸 공회에서 이미 교황에게 무오성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도 또다시 공회를 개최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교황 요한 23세는 그런 부정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1962년 2,500명의 추기경들, 주교들, 그리고 대수도원장들이 로마의 바티칸으로 모여들었다.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시작이었다. 500명의 대표자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참석했다. 공회의 주제는 아지오르나멘토(aggiornamento), 즉 외부 형식의 갱신이었다. 요한 23세는 이 공회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암과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서 교황이 된 바오로 6세(1897-1978)가 계속해서 공회를 주재했다. 1962년부터 1965년 사이에 공회가 네 차례나 열렸다. 공회는 라틴어 대신 각 지역의 일상어로 미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결정했고, 유대인들에 대한 바티칸의 해묵은 교훈 역시 전폭적으로 수정했다.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최종 선언은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의 합동 성명서였다. 공회의 회기가 끝나기 하루 전인 1965년 12월 7일, 교황과 대주교는 1054년에 두 교회가 서로 상대방을 정죄하고 갈라선 일을 유감으로 간주하고 취소했다. 두 명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 기간 동안의 슬픈 사건들과 함께… 모욕적인 말을 한 것은 유감이다. 또 그들은 파문을 선고한 것을… 철회한다.” 이로써 9백여 년 동안 지속된 불신과 반목의 관계가 화해와 협력 관계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가톨릭은 이후에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 1920-2005)라는 이름의 신부가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탈리아 이외의 지역 출신으로 교황이 된 최초의 신부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정략적으로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그는 1979년에 이스탄불에 있는 콘스탄티노플 총대교구를 직접 방문해서 총대주교 드미트리오스 1세와 함께 가톨릭-정교회 공동 신학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당시 뮌헨 대교구 교구장이었고, 나중에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이 위원회의 창립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계속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방문했고, 유대인의 대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가톨릭이 도덕적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그는 계속해서 동유럽이 자유를 확보할 때까지 줄기차게 저항하도록 격려했고, 그런 노력은 20세기 후반에 동유럽이 붕괴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로마 가톨릭은 여성의 성직 안수와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교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만, 외형상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회 이후로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루터교회와의 신학적 합의를 이끌어낸 것을 꼽을 수 있다. 덕분에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회 사이에 500년 가까이 계속되어온 칭의 논쟁이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1999년 10월 31일,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교 세계연맹과 로마 가톨릭의 대표자들이 만나서 ‘구원과 칭의에 관한 공동선언문’(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JDDJ)에 서명했다. 44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선언문은 “신앙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면서 “우리는 인간의 어떤 덕목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고백한다”고 밝혔다. 대표자들은 “선행하라는 권고는 신앙을 실천하라는 권고”라고 절충하고 “칭의는 신앙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선행은 참된 신앙의 핵심적 표지”라는 데 서로 합의를 보았다.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회와 대화를 계속해서 루터교회와의 공동선언문에 감리교회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화해를 주제로 2006년 금란교회에서 개최된 19차 세계감리교대회(WMC) 셋째 날에 루터교회와 감리교회, 그리고 가톨릭의 대표자들이 서명식을 가졌다.
합의 서명문의 내용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감리교회는 과거 루터교회와 가톨릭 간의 합의에 동의한다는 것, 둘째,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감리교회의 의견 표명, 셋째, 공동선언에 기초해서 칭의 교리의 이해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톨릭교회와 루터교와 감리교는 이러한 성과와 약속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바라시는 온전한 친교와 세상 앞에서의 공동 증언을 위한 노력의 일부라고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동방정교회의 수난과 발전
앞서 거론했듯이 동방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교구를 중심으로 구성된 기독교 종파이다. 동방정교회는 자신들의 교회를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계승한 유일한 교회라는 뜻으로 정통 기독교, 즉 정교회라고 부른다. 반면에 서방교회는 그냥 동방교회라고 부르기 때문에 중립적인 용어로서 동방정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동방정교회는 지역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진다. 가령, 러시아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정교회로 이름이 바뀌는 것이다. 동방정교회의 전체 교인 수는 1억 4천만 명을 헤아리지만 대부분이 러시아와 동부 유럽에 거주하고 있다.
동방정교회는 어째서 기독교의 다른 종파와 달리 폭넓은 지역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무슬림들의 견고한 세력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볼 때 동방정교회와 이슬람의 본거지가 서로 겹쳤다. 7세기 이후로 무슬림들은 동방정교회의 확산을 강력하게 저지해왔다. 또 다른 이유는 공산당의 등장이다.
공산당과 러시아 정교회
10세기에 키예프 대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본명은 Alexandr Yaroslavich, 1252-1263 재위)이 동방정교회를 국교로 삼기로 결정한 이래 러시아 정교회는 이슬람권과 종교적인 갈등을 빚은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부터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형식의 종교 박해가 일어났다. 1917년에 러시아의 황제가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정치와 경제는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같은 해 10월에 공산당의 전신인 볼셰비키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지시를 받고 혁명을 일으켰다. 1922년까지 서방의 지원을 받는 백군(白軍)과 러시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적군(赤軍)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지만, 결국 승리는 적군의 몫이 되었다. 레닌은 공산화된 러시아를 지배하는 최초의 독재자가 되었다.
레닌의 종교관은 단순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신이라는 개념을 부추기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타락이다.” 레닌의 치하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기존의 사회적 지위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모스크바 정교회의 대주교 티콘은 그와 같은 레닌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에 따른 보복으로 레닌의 추종자들이 주교 28명과 사제 1천 명을 살해했다. 하지만 이런 비극은 레닌의 후계자 요제프 스탈린(Joseph Stalin)의 만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탈린이 신학생 출신이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는 신학생이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해서 일찌감치 러시아 정교회를 떠난 인물이었다. 스탈린의 잔혹한 독재 때문에 수많은 성직자들이 투옥되고 살해되었다. 18세 이하의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는 종교를 가르치는 게 법적으로 불가능했다. 나중에 공산당 간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을 떠나서 더 형편없는 곳으로 이주해서 살아가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은 더욱 수준이 낮은 학교에 다녀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의 상황은 다른 종파들에 비하면 훨씬 양호했다. 정교회 이외의 종파들은 훨씬 더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침례교회나 루터교회,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그랬다. 공산당의 극심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우는 편법도 마다할 수 없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부터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가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소련 군대를 적극 지원하면서부터 가능해진 일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절박했던 스탈린은 교회의 건축물들을 복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덕분에 폐쇄되었던 수도원과 교회, 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제는 교회를 비워둔 채 여전히 사회에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야 했고, 어린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치는 것 역시 계속해서 불가능했다. 스탈린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등장한 흐루시초프 역시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견제를 늦추거나 박해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힘겨운 상황은 소련이 미국과의 군비경쟁에 나서는 바람에 결국 경제적으로 상당한 압박을 받아야 했던 1990년대 직전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면서 기존의 상황은 완벽하게 달라졌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약속한 내용을 한 해 뒤에 그대로 지켰다. 그는 과거처럼 소련 사람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공산당 집권 이전처럼 자유롭게 성서가 배포되고, 성직자들이 자유롭게 전도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예상 밖으로 그런 상황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 종교적 자유가 다른 종파의 활동을 자극해서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게 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정부와 불편하면서도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정교회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게 사실이고, 그 세력의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증가세는 여전히 꺾이지 않고 있다.
옛것에서 새것으로, 다시 새것에서 옛것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1000년을 눈앞에 둔 중세 시대 사람들은 엄청난 전율에 사로잡혔다. 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유럽 사람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천년왕국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대로 임박한 그리스도의 심판과 무저갱에서 풀려나서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닐 사탄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독실한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거리로 몰려나와서 지은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희망하는 열광 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중세 시대는 이처럼 우울하고, 열광적이고, 심지어 살벌하기까지 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했다. 얼마 뒤에 천년왕국의 마법에서 풀려난 중세 사람들은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다. 중세학자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의 지적처럼 하나님은 구름 바깥으로 나와서 위엄을 확립했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나 개성을 잃지 않은 채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세 번째 밀레니엄에 들어선 우리는 어떨까? 두 번째 천년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해서 중세 시대의 소박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적절한 투자 소재로 확신한 영화와 일부 사업자들의 이벤트만 요란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정도 흡사했다. 19세기의 사람들이라면 거침없이 미래를 낙관했다고 장담했겠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렇게 대답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성인이 되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이제는 기독교의 예언자만이 인류의 종말을 말하지 않는다. 과학계는 현재의 상황이 계속될 경우 조만간 인간이 맞이하게 될 종말을 확신하고서 시나리오까지 구체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세속화, 인종의 평등, 성의 혁명, 동성연애, 지구촌, 세계화, 다원주의, 생명공학, 인공지능, 인터넷 등의 낱말들이 20세기를 장식했고, 21세기를 훌쩍 넘어선 지금 이후로는 얼마나 더 많은 생소한 낱말들이 목록에 추가될지 아무도 모른다.
교회의 미래 역시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교회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간단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측은 현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요청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주류 교회들은 20세기 중반에 잃어버렸던 활기를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교인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 한 곳의 교인들이 더 많다. 신학 역시 논의는 다양하지만 분명한 음성을 듣기 어려운 상황이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owkins)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날 선 비난은 기독교의 행보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신앙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상상 속의 존재일 뿐인데 많은 이들이 마치 실재하는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미국 서부와 중남미, 우리나라와 싱가포르,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교회 성장이 있어 위안이 되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사그라들고 있다.
기독교의 미래에 관해서는 현재에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지금 교회가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을 근거로 기독교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이들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앞으로 어떤 도전과 난관에 직면하더라도 한 가지 사실은 달라질 수가 없다. 시리아의 안티오크(Antioch)에서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기독교 공동체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맡겨진 선교의 소임을 다할 것이다(행1:8). 우리에게는 이런 주장을 증언할 수 있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히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