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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3권 제4장 전장(戰場)에도 꽃은 피는가
①
혼전(混戰)이었다.
번쩍이는 병장기들, 말발굽 소리 그리고 처절한 비명.
빼앗은 말을 타고 가는 단호삼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광풍당의 부당주인 마광수가 꼬치에 낀 어육 마냥 죽어 가고 있었
고,
퍽!
대갈통을 부수지 못해 안달을 하던 파두자 이호는 마침내 한 놈의
머리를 부수었다. 허나 그 순간에 그 역시도 천가진 꼴을 면치 못
하고 있었으니.
어디 그뿐인가.
녹산영웅문도들은 이리 떼에 쫓기는 양들같이 이리저리 쫓기며 죽
어 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단호삼의 백혼검만큼 날카로운 검이 없었고, 무공도
약했기 때문이었다. 기실 녹림영웅문의 태반은 산적과 땅군들인지
라 그들은 구환금도 두진이 이끌어온 검문의 무사들보다 약했고,
살청막의 살객들보다 더더욱 약했다.
우우우!
석 자 여섯 치의 백혼검이 두 배로 늘어나며 울음을 터뜨리고, 단
호삼의 동공이 터질 듯이 팽창되었다.
그러나 살기!
이쯤 되면 누구라도 감지할 수 있는 살기가 솟구쳐야 마땅하건만
그에게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몸과 마음이 따
로인 듯했다.
어느 순간,
쑤욱!
단호삼의 신형이 말등에서 유령처럼 솟아났다. 단숨에 무려 십 장
이나 날아간 그는 허공을 사이에 두고 백혼검을 그었다.
순간 치켜든 창으로 단호삼의 등을 찌르려던 철갑인의 몸이 멈칫
정지하는가 싶더니 상반신이 갈라지며 피분수를 뿜는 것이 아닌
가.
보고도 믿지 못할 가공스런 위력의 무형기검이었다.
후루루 땅에 내려서던 단호삼은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다시 비쾌
하게 솟구쳐 올랐다.
파파파팡!
이기선풍각이 연속으로 펼쳐지며 철갑인들은 피곤죽이 되어 나가
떨어졌다. 진득한 핏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철갑 사이로 스
물스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안은 어떻게 되었는지?
피융!
어느새 주워 들었는지 그의 손에서 길다란 장창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쿡!"
하나를 꿰뚫었다.
"으악!"
또 하나를 꿰뚫었고 모자라 다섯을 꿰뚫고야 장창은 땅에 떨어졌
다.
수하들의 죽음에 팽후는 눈알이 뒤집혔다.
다섯 명의 철갑인을 죽인 그의 전신은 누구의 피인지 온통 피범벅
이었다. 그리고 몇 군데에서는 시뻘건 피가 흐르는 것이 엿보였
다.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허나 이 정도의 상처는 애들 장난이다. 죽어 가는 수하들에 비한
다면.
"씹새들, 모조리……."
치를 떨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못박이듯 고정되었다.
"크악!"
녹산영웅문도 중 어느 하나가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으로 보아 필
시 동맥이 절단되었으리라.
눈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뒈져!! 이 개잡놈아!"
단숨에 이 장 거리를 날듯이 달려들었다.
그것을 본 철갑인의 눈은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진득한 살기로 번
들거렸다. 눈알이 빨간 것이 마치 피에 굶주린 늑대 같았다.
"불나방 같은 놈… 죽어!"
그는 말을 몰아 달리며 장창으로 땅을 쓸 듯이 쳐 올렸다.
파파팟!
장창이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흙먼지를 피워 올릴 정도로 그 기세
가 사뭇 무서워 달려들던 팽후의 몸이 일시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철갑인이야말로 철마각에서 초혼쾌창(招魂快槍)이라 불리
는 자로서, 이미 단호삼에 의해 고혼(孤魂)으로 변한 철기쌍창과
같이 철마각의 네 대주(隊主)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철마각의 인원은 정확히 이백 명으로 오십 명이 한 대(隊)로 되어
있으며, 초혼쾌창은 사상(四象)을 본떠 만든 일월성신(日月星辰)
중 월마대주(月魔隊主)였던 것이다.
심장이 덜컹 멈출 만치 놀란 팽후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그것은 바로 옆으로 뒹구는 뇌려타곤이었다. 일전에 화삼객 과두
성을 뒹굴게 만든 것을 자신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아하하, 멋진 신법이다!"
휙! 하고 바람같이 스쳐 지나갔던 초혼쾌창이 어느새 말머리를 돌
렸는지 질풍같이 달려들며 껄껄껄 웃자, 벌떡 몸을 일으키던 팽후
의 얼굴이 일시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북새통에 누가 보겠느냐마는 창피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
다.
"이놈!"
버럭 고함을 지른 팽후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 마냥 훌쩍 뛰
어오르며 수중의 검을 철갑 사이에서 빨갛게 번들거리는 눈을 향
해 쏘아갔다.
②
평범한 청강검과 자신의 내공으로는 철갑을 약간 자를 수 있을 뿐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죽은 다섯 철갑인들도 다
이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하나 지금 상대는 그들이 아니었다.
"병신! 뒈지려고 환장했군."
또다시 비웃음을 날린 초혼쾌창은 장창을 옆으로 긋다가 번개같이
찔렀다.
그 속도와 변화는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 정
도였다.
길이에서부터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장창이 쏘아져 들어오자 막무
가내로 덮치던 팽후의 안색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죽었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으려 할 때였다.
멈칫!
돌연 쏘아져 들어오던 장창이 허공의 한 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가. 천재일우(千載一遇)이든, 놈의 실수이든 생각할 겨를이 없었
다.
팽후는 장창을 왼손으로 벼락같이 때려 옆으로 돌리고 초혼쾌창의
살기에 찌든 눈알에 검을 쑤셔 박았다.
푹!
아무 저항 없이 들어간 눈에서 먼저 시커먼 먹물이 터져 나오고,
뒤이어 핏물이 퍼졌다. 초혼쾌창의 머리를 관통한 것이다.
한데 이게 웬일?
별안간 그의 무공이 높아졌는지 건드리지도 않은 초혼쾌창의 머리
가 떨어져 나가며 검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지 않은가.
과연 팽후의 무서운 무공에 견디지 못하고 절로 뜯겨 나간 것일
까?
팽후가 자신의 몸 속에 혹시 초인적인 어떤 힘이 숨어 있나, 아니
면 얼굴도 가물거리는 사부가 자신 몰래 절세 영약을 먹였던 것이
잠복기를 지나 이제야 그 효력이 나타나는 것인가 하고 반가우면
서도 한편으로 혼란스러워할 때다.
무언가 모를 희끗한 물체가 번개처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싸움을 끝낸 뒤에 확인을 해보자고 생각한 그는 비쾌하게 검
을 위로 쳐 올렸다. 한데 초혼쾌장의 수급(首級)이 달려 있어서인
지 검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팽후가 반쯤 검을 뻗었을 때, 무언가 억센 손이 손목을 덥석 잡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아무리 급해도 상대를 좀 보시오."
나직하나 묵직한 음색.
그 음성을 듣는 순간에 팽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초혼쾌장이 왜
갑자기 멈칫 했는가를.
자신에게 숨겨진 초인적인 능력도, 인색했던 사부가 영약영초를
먹인 것도 아니었다.
팽후는 손을 빼면서 히죽 웃었다.
"일마는 본 문주가 죽인 거다, 너. 그리고 아까 좀 전에……."
뇌려타곤을 펼치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으려던 팽후는 그 말을 되
삼켜야만 했다.
단호삼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아픔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아니 살아 있기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위해서 상
대를 죽이고 있지만 그들의 덧없는 죽음에 못내 가슴 아파하고 있
는 것이다.
혈문에 되도 않는 경고문을 보낼 때 단호삼은 이렇게 말했었다.
아무리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자라고 해도 그들의 삶은 소중
한 것이라고.
그러면서 지나가는 말로, 하나를 죽임으로서 열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겠지요,라고.
문득 단호삼은 환하게 웃었다.
"문주님이 뇌려타곤을 시전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안심하시오."
그리고 그는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③
생전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서운 법이다. 구환금도
두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고함쳤다.
"죽입시다, 태상!"
이어,
"맞습니다!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놈들은 살 가치가 없는 놈들입니다! 부디 허락을!"
"살려봐야 또 선량한 양민들을 괴롭힐 놈들입니다!"
울부짖는 음성이 땅과 하늘 사이에 맴돌았다가 단호삼의 귀에 내
려앉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선처를 바란다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십여 명의 사내들 눈을 바라보았다.
투구와 철갑을 벗어 던진 그들의 눈에는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
득했다.
'차라리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가슴이 납덩이를 단 것처럼 답답했다.
천신(天神)과 같이 무위(武威)를 떨치던 단호삼을 보고 이들은 항
복을 하였고, 녹산영웅문도들은 형제들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죽
이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다.
"예로부터 항복한 사람을 죽인 예가 없다. 모두 태상의 지시에 따
르라!"
뜻밖에도 팽후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쉬이 꺾일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히 두진은.
"놈들을 살려 보내면 본문이 혈문을 장악한 것을 마륭방이 알게
될 겁니다! 하니, 절대 돌려보내면 안됩니다!!"
"그, 그건……."
팽후는 일시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이 소식을 들은 마륭방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무림맹보다 먼저 철퇴를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 피가 거의 녹산영웅문의 것이 될 거라는
것이다.
단호삼은 여전히 철마인들의 눈을 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흘렸다.
"소문이 안 나게 하려면 난주에 있는, 아니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죽여야 할 것이오."
그 뜻은 누구의 입을 통해서라도 소문은 퍼진다는 말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두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담담한 음성을 토
했다.
"그럴 자신이 있으면 이들을 죽이도록 하시오. 허나 나는 그럴 자
신이 없으니 빠지겠소."
"!"
순간 모두의 눈이 흔들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났지만 어느 누구 한 사람 나서지 않았다.
내심 어거지를 쓰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싶은 단호삼은 나직하
나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지금 분노하고 있는 것은 바로 형제들의 죽음 때문이오!
하면, 이들은 어떻소이까? 그들의 동료들이 죽지 않았소? 그런데
승자(勝者)는 분노를 터트려도 되고, 패자(敗者)는 그저 죽어야만
하오이까?"
말을 멈춘 그는 형형한 안광이 서린 눈으로 녹산영웅문도들의 눈
을 하나씩 맞추었다. 허나 그 누구도 그의 눈을 똑바로 보는 이가
없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라 모두들 찔끔하는 눈치였다.
단호삼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우리에게 부모형제가 있듯이 이들에게도 있을 것이오. 친구도 있
을 것이며, 자식도 있을 것이오. 그 사람들은 이들을 무척 보고싶
어 할 것이고. 그런데 우리가 항복한 사람마저 죽인다면 그들이
가만있겠소. 필시 복수를 하려들 것 아니겠소. 그러니……."
그는 한숨을 쉬듯 끝을 맺었다.
"그만 보내 줍시다."
어려서 그런 시련을 겪었으면 세상을 원망할 법도 하지 않은가.
더욱이 지금은 천하무적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으니 웬만한 사
람이면 세상에다 칼을 들이밀 것이다.
한데도 단호삼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더러 누구보다도 여린 마
음씨를 갖고 있었고,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속하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단호삼의 진실이 통한 것이다.
두진에 이어 모두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자 단호삼은 환한 웃음
을 보이며 다독거렸다.
"괜찮소. 내가 왜 그대들의 마음을 모르겠소. 다 이해하오."
나이답지 않은 대범함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꽈꽈꽈꽝!
뇌성대작(雷聲大作)이 따로 없었다. 근접 거리였으면 고막이 터지
고, 내공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칠공에서 피를 흘리고 죽을 천지대
란(天地大亂)의 굉음이었다.
이어 피우우웅! 하고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를 들은 단호삼은 벼락
같이 외쳤다.
"폭탄이다! 모두 피하시오!"
그 음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구 할 것 없이 불붙은 갈대밭의
메뚜기들처럼 흩어졌다.
그 순간,
꽈꽈꽈꽝!
땅거죽이 불쑥 튀어 오르며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흙먼지는 일 리
밖에서도 보일 만큼 하늘 높이 피어 올랐다가 서서히 가라앉았고,
그 무렵 또다시 허공을 발기발기 찢는 굉음이 뒤따랐다.
엄청난 폭음 속에 얼마나 죽어 갔는지 모른다. 그들의 비명은 모
두 폭음 속에 파묻혀 버렸고, 몸은 피도 볼 수 없도록 가루로 변
했을 테니까.
④
팽후는 혈문 쪽을 노려보며 이를 으드득 갈아붙였다.
"죽일 놈들! 진천뢰(震天雷)를 쓰다니……."
여전히 이십 장 밖에서 빗발치듯 하는 폭발을 보던 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천뢰가 아닌 것 같소. 진천뢰라면 이렇게 원거리까지 쏠 수는
없지요."
이때였다. 해답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옳습니다. 저것은 진천뢰가 아니라, 관부에서만 사용되는 천지굉
음포(天地轟音砲)라는 것입니다."
"관부도 인신매매에 결부되어 있소?"
흠칫 놀란 단호삼이 고개를 돌려 아무 거리낌없는 태도로 물어오
자 말을 꺼낸 사내, 즉 철마각 사대대주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진
마대주(辰魔隊主)인 풍운만리창(風雲萬里槍) 유상천(柳上天)은 쉰
일곱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
다.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그리고 지금 혈문에는 난주의 현관이 있습
니다."
"썩을……!"
팽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불끈 쥔 두 주먹으로 허공을 때
리며 악을 썼다.
"야이! 빌어먹을 세상아! 어디까지 썩어 문드러져야 속이 시원하
겠느냐?!"
분개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와 관부는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묵계(墨契) 때문이 아니
다. 사람을 돈으로 사고 파는 인신매매 같은 추악한 범죄 행위를
막아야 할 관부가 도리어 앞장을 섰다는 게 원통해서였다. 그렇다
면 힘없는 양민들은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인가.
"고정하시오. 전부 그런 것은 아닐 것이오."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
단호삼의 말에 고개를 홱 돌린 팽후의 눈에 불똥이 뚝뚝 떨어졌
다. 그는 마치 단호삼이 그 썩을 관부 놈으로 보이는 듯 험악하게
말했다.
"그 몇 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는지 아느냐?"
단호삼은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전체 중에 불과 몇뿐인데, 그 몇
때문에 모두를 싸잡아 똑같이 생각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이런 말들도 한다.
너도나도 빠지면 대체 이 궂은 일은 누가 하냐고 말이다.
나쁜 일에는 하나요, 좋은 일에는 전체를 생각하여야 한다니 참으
로 묘한 논리가 아닐 수 없었다.
단호삼은 내심 길다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들은 보지 말고 선한 사람들만 보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말끝을 흐린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혈문에 현관 말고 관병(官兵)들도 있습니까?"
유상천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현관을 호위하고 온 관병 말고는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고개를 끄덕이던 단호삼은 폭음이 서서히 멈추는 것을 보고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폭탄이 다 떨어진 모양이지. 하긴 그렇게 무차별 사격을 가
했으니, 떨어질 때도 됐지."
그 말을 들은 유상천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그 동안 본 바로는 폭탄은 수만 발이었습니다."
순간 단호삼은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경고성인가? 다가오면 죽인다는? 놈들도 되게 똥줄이 타는가 보
군.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야 없지.'
생각을 마친 그는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해 씨근덕거리는 팽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밤이 되면 공격합시다. 아무래도 우
리의 바람은 헛된 것 같으니 말입니다."
이어 그는 유상천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좋은 말씀, 감사하게 들었습니만. 이제 이곳 일은 우리에게 맡기
고 그만 돌아가십시오. 아무도 막지 않을 겁니다."
한데 그 순간, 유상천이 털썩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돌아갈 데도 없는 몸입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이 한목숨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단호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늘 이런 식이었다. 가래도 가지 않는다. 수십 년 간 천하가 좁다
고 활개치던 강호가 그리워서일까? 아니면 진정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일까?
⑤
아닐 것이다. 둘 다.
자파(自派)로 돌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작은 것에도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어쩌자고 그 동안 그렇게 몹
쓸 짓을. 휴우! 내가 무슨 덕이 있다고…….'
나직이 한숨을 쉬던 단호삼은 팽후에게 총대를 넘기기로 결심했
다.
"이 일은 문주님이 결정하실 일이지요."
갑작스런 말에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팽후를 보며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리는 단호삼을 향해
팽후가 '어어!' 하며 잡으려 하자 곁에 있던 환사가 가로막았다.
"그냥 가시게 놔두시오. 아마 그 여인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오."
있을 수 없는 말에 팽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인이라 했소, 지금?"
"그렇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환사는 말을 이었다.
"사실 서안에서부터 계속 따라오는 사람이 있어 잡으려 했더니 태
상이 말리더군요. 아는 사람이라고. 그러다 얼마 전 누군가 싶어
몰래 찾았더니 여인이더이다. 그것도 아주 예쁜 미인이었소."
이어 그는 좀 미안한 표정으로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문주님께 보고를 드리려 했지만 태상께서 알리지 말아줬으면 하
는 눈치인지라… 이거, 죄송합니다."
팽후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깟 거야 아무러면 어떻소. 그보다… 허 참! 내 기가 막혀서.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더니 언제 여인을 꿍쳐 두었지?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주위의 이목이 모두 자신의 입에 쏠려 있자 말을 흐린 팽후는 문
득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환사의 귀에다 뭐라고 속닥거리자 돌연
환사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아무리 그렇다고 그걸 검사하려 했다니. 하하하! 너무
심했소."
"쉬이! 조용. 애들이 다 듣겠소. 음성 좀 낮추시오."
"미안하지만, 벌써 다 들었소."
무슨 일인가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서황이 나서자 팽후는 정말인가
싶어 물었다.
"뭐라 했는데?"
서황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뭘 검사한다 그러지 않았소."
'자식, 제대로 모르면서 꼭 아는 체한다 말야.'
팽후는 하얗게 웃으면서도 짓궂게 물었다.
"뭐가 뭔데?"
"그게 뭐냐면, 음……."
잠시 대답이 궁색해 머뭇거리던 서황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환사가
전음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아마 내 짐작에는 태상에게 사내새끼들만 꼬인다고……."
운을 띄운 그는 불쑥 손가락으로 팽후의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귀신 할망구가 좋아하는 문주님의 거시기나 검사해 보시오! 요즘
잘 지내는지."
귀신 할망구란 바로 팽후를 죽자살자 따라다니는 청상과부인 정다
희를 지칭하는 말이다.
빠르게 쏘아붙이듯 말을 끝낸 그는 팽후가 얼떨떨해 하는 사이 벼
락같이 도망쳤다.
뻗대고 있어봐야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⑥
들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야트막한 동산.
고운 잔양(殘陽)이 융단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잔디를 비추고 있었
고, 그 잔디 위에 한 폭의 미인도(美人圖)처럼 그린 듯이 아름다
운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활동하기 편한 쪽빛 경장에 동색(同色)의 피풍의를 부는 바람에
맡기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은 바로 지봉 추영화
가 아닌가.
그녀가 어떻게?
기실 신비선옹에게 구함을 받고 깨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추영화는 한달음에 단호삼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한천애
에 오른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싸움의 흔적
과 핏자국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단호삼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불쑥 떠오른 기억의 파편 한 조각!
"허허허, 예쁜 아이야, 이 늙은이는 사람들이 신비선옹이라 부르
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서안으로 가 있도록 해라.
그러면 그 몹쓸 녀석을 필히 보내주마."
당시 떠오른 이 말은 구원의 빛이었다.
고금(古今)을 통틀어 신비선옹이라는 이름만큼 빛나는 이름이 없
을 것이다. 그런 분이 직접 나섰으니.
서안으로 달려간 추영화는 만접열화루 주위를 맴돌면서 이제나저
제나 목을 빼고 단호삼을 기다렸고, 마침내 건강한 모습으로 단호
삼이 나타났지만 그녀는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신비선옹의 말처
럼 과연 그가 자신을 사랑은 아니더라도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단호삼은 녹산영웅문
을 이끌고 바삐 떠났고, 목적지도 모르면서 추영화는 혼이 빼앗긴
사람처럼 여기까지 따라왔던 것이다.
아무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따라온 터라 한 달이 넘도록 나무 열
매와 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눈에 뜨일 정도로 초췌했고 쪽빛 피풍
의도 군데군데 찢어지고 더러워져 있었다.
위이잉!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
바보처럼. 왜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지. 이렇게 주위에서 맴돈다고
그가 알아줄 거나 같니?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위해 밥을 짓
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영원히 살고 싶다고 왜 말을 못하는 거
니, 이 바보야? 뭐가 두려워서…….
"흑!"
추영화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였다. 참을 수 없
는 사랑의 아픔이 가슴을 적셨다. 그녀는 숨죽여 오열하기 시작했
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버썩.
잔디가 자지러지는 소리가 나며 하나의 그림자가 쪼그리고 앉은
그림자 위를 겹쳤다.
흠칫 놀란 추영화가 퉁기듯 일어나면서 몸을 돌린 순간,
"다, 당신은……."
그녀의 몸이 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부르르 떨렸다. 뒤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단호삼이었기 때문이었다.
"!"
몰라보게 수척해진 그녀의 모습에 단호삼의 깊은 눈으로 언뜻 당
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 그는 추영화의 머리
너머로 개미같이 작게 보이는 녹산영웅문도들을 응시하며 입술을
떼었다.
"내 손에, 내 몸에는 피냄새가 배어 있소."
그는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피를 묻혀야 할지도 모르오. 그러다 누구
의 손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영웅호걸이 될 자신도,
마음도 내게는 없소."
단호삼의 눈길이 돌려졌다. 그는 추영화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이오, 나는. 자격도 없는 그런 놈이 욕심스럽게도 당신
을 사랑하고 있소이다."
순간 추영화의 전신이 부르르 전율하며 동공이 팽창되었다. 그녀
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바, 방금 뭐라 하셨나요?"
잠시 물끄러미 그녀의 눈동자 깊숙이 응시하던 단호삼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랬소."
이번에는 너무나 분명히 들었다. 환청이 아닌 것이다.
"아……!"
추영화의 입이 벌어졌다.
"야속한 사람. 그걸 왜 이제야……."
순간 움찔 놀란 단호삼은 긴장된 음성으로 물었다.
"너무 늦은 거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도리질하던 추영화는 돌연 단호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음껏 울기 시작했다.
여인에 대해서는 숙맥인 단호삼은 돌연한 그녀의 울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러시… 음!"
단호삼의 눈이 부릅떠졌다.
언제 돋움발을 했는지 목에 매달리다시피 한 추영화가 입술로 덮
쳤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부드러운 설육(舌肉)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따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이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어디 둘 곳을 몰라 어색하게 늘어져 있던 두 팔로 추영화의 몸을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한 쌍의 남녀
는 격렬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격정의 시간이 지나자 추영화를 슬쩍 밀어낸 단호삼은 어색하게
웃었다.
"갑시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소."
⑦
녹산영웅문도들의 시신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시신의 수가 무려
백 스물두 구였다. 이는 녹산영웅문의 사분지 일에 해당하는 엄청
난 인원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을 애도(哀悼)하기에는 이곳은 너무 처량한 곳
이었다.
춥고, 습한…….
살아서도 인간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을 죽어서까지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인생과 청춘을 가슴에 담고 기다렸다.
밤이 오기를…….
그리고 드디어 밤이 찾아왔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다행히 야천(夜天)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습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그러나,
피우우융!
폭죽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불덩이가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다 폭발
하고 있었다. 전과 달리 무질서하게 퍼붓는 융단 폭격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작된 폭격은 일경(一景)인 지금까지도 늦춤
이 없다. 밤에 있을 기습을 대비함이리라.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 전면전을 벌이겠는가. 특공조라고 할 수
있는 인원이 차출되었다.
단호삼을 비롯해 환사와 흑매, 그리고 과거 살청막의 살객들이 모
두 동원되었다. 이들이 차출된 것은 무엇보다도 경공술이 남다르
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혈문에 은밀히 잠입, 중요한 인물들만 처
단하기 위함이었다.
혈문의 건물 배치도에 대한 설명을 마친 풍운만리창 유상천은 단
호삼을 향해 말했다.
"기억을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속하가 안내를 하는 것이 낫지 않
겠습니까?"
유상천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한 터라 스스로를 속하라 하고 있었
다.
그의 내심을 간파한 단호삼은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
다.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상천이 직접 안내를 하면 훨씬 움직이기가 수월할 것이다. 그러
나 불과 몇 시진 전까지 혈문과 동맹(同盟) 관계였다가 손을 쓴다
는 것은 그에게 못할 짓이다.
"하지만……."
단호삼은 손을 저어 말을 잘랐다.
"걱정 마십시오. 실수없이 처리하겠소이다. 자, 그럼."
그가 목례를 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추영화였다.
"무슨 할말이라도?"
단호삼이 부드럽게 물어오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이 많은 인원을 다 데려가실 거예요?"
'많다고? 그럼 더 적어야 된다는 말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오십 명인데 많다는 거요?"
추영화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소매는 훨씬 적은 인원으로 간추려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가장 무공이 고강한 분들만으로요. 왜냐하면……."
추영화는 손을 들어 폭발이 일어나는 곳을 가리켰다.
"저렇게 빗발치는 폭발을 뚫고 지나가자면 무엇보다 경공이 뛰어
나야겠죠.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런 능력을 가진 분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봐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최정예만 가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단호삼은 우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가는 도중에 사상자(死傷者)가 생길
것이라고 지적하는 말이었다.
'역시 지봉(知鳳)이라는 말은 괜히 듣는 것이 아니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꿰뚫어보다니 말야.'
내심 감탄하는 가운데 흐뭇해진 그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조금은 익살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옳은 말이오. 그럼 어떤 식으로 뽑으면 좋을지 말해 보시오. 내,
그대로 따르리다."
결코 싫지 않은 몸짓에 추영화는 곱게 눈을 흘기며 멀뚱히 서 있
는 환사를 가리켰다.
"그것은 호법님께 일임하는 것이 좋을 듯해요. 왜냐하면 누구보다
이분이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리고 세 조로 편성해서 각자가
맡을 인물도 선정해 역할을 분담해야 훨씬 효율적이 되겠지요."
첫댓글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