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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가 1843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묏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 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 교구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숲 속에 마련된 야외제대.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했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성지 입구 모습으로 조금 올라가면 삼성산 성령선교 수녀회의 청소년 수련원이 있고, 그곳에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성지에 도착한다.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11년 6월 27일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43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다. 1970년 5월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동(현 서원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삼성산 본당은 성지 녹화사업을 추진하고 매주일 성지에서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01년 11월 성지에 설치된 성모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해 다음해 3월에 새로운 성모상을 봉헌했고, 2001년 12월에는 성지 입구에 건립된 삼성산 성령수녀회 본원과 청소년 수련관 및 피정의 집 축복식을 가졌다. 2012년 10월 12일에는 삼성산 본당 설립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성지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1796-1839년)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그 자신은 총명할뿐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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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재생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 전보다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고,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도록 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주교는 여러 번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한 군사가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다른 군사는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열 명 가량의 병정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9월 21일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1803-1839년)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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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cus),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의 상황 하에서 조선 내에서의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2일에는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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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해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1803-1839년)
성 쟈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신부의 한국 성은 정(鄭)씨이고, 이름은 본명인 야고보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아각백(牙各伯)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10월 7일 프랑스 디뉴(Digne) 인근에 있는 마르쿠(Marcoux)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양떼 지키는 일로 부친을 도왔다. 그는 1823년에 신학교에 들어가 3년 만에 성품성사를 받고, 이듬해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교육을 받고 프랑스를 출발하였으나, 얼마동안 중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중,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동행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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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기해년에 이르러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샤스탕 신부는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체포되고 이어 자수를 권고하는 주교의 편지를 은신처에서 받았다. 앵베르 주교의 권고를 따라 그는 모방 신부와 함께 9월 6일 관청에 자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성 마태오(Matthaeus) 축일에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샤스탕 신부와 다른 두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고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그들의 유해는 1843년에 발굴되어 삼성산에 안장되었다가 시복 수속이 진행된 1901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옮겨졌고, 같은 해에 다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옮겨졌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증거자 박순집(朴順集) 베드로(1830-1911년)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듣고, 목격한 것을 증언하고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朴順集) 베드로는 1890년에 인천 제물포로 이주(移住), 1911년에 숙골(현 도화동)에서 82세의 나이로 선종, 인천 교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박순집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朴) 바오로와 김(金) 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 바오로 나이 21세에 맏아들 요왕을 낳고, 24세 둘째 아들 베드로를 낳았다. 두 아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나 베드로가 세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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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해(己亥)박해 때 그의 부친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訓練都監 砲手)로 봉직하고 있었기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교, 신부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에 박 바오로는 몇몇 교우들의 도움으로 새남터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지키던 군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모래로 대강 덮은 무덤 가까이 가서 손으로 모래를 파헤치고, 잘라진 목과 시체를 전부 찾아내어 머리 셋은 다 수염이 길어 입에 물고, 시체 삼구는 등에 업고 양팔에 끼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교우들이 준비한 관에 대강 수습하여 그 밤으로 노고산(老古山, 현 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하였는데 이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 후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안장한 성직자의 묘가 안심이 안 되어 1843년, 박씨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장하며 사기그릇에 순교 연월일과 이름을 먹으로 써서 묘에 함께 묻고, 후일 찾기 쉽게 표식을 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삼성산에 모셔진 묘로 그의 아들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후일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을 찾을 터이니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가르쳐 드려야 한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박 바오로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安城) 미리내로 이장되기 전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새남터에서 김 신부의 시신을 찾아내서 와서(瓦署, 현 용산구 한강로3가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가는 김대건 신부를 목격하였다.
박순집은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되었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브르트니에르(白) 신부, 볼리외(徐) 신부, 도리(金) 신부, 프티니콜라(朴) 신부, 푸르티에(申)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이 3월 7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박순집은 군인으로 참여하게 되어 이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박순집은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朴順之,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음) 시신을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왜고개)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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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유로 박순집의 가족도 결국 검거망에 걸리게 되어 양화진(현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 17일 형 요왕의 아들 박 바오로(20세), 고모 박 막달레나, 1868년 3월 29일 부친 박 바오로(63세)가 잡혀 순교하였고, 포청 옥에서 1868년 3월 26일 큰삼촌 박 바오로(70세), 큰삼촌 아들과 그의 부인, 작은삼촌과 그의 부인, 3월 29일 형 박 요왕(46세), 형수 손 발바라(39세), 12월 21일 장모 홍 유시디아(58세), 1870년 2월 21일 팔촌 형 박 바오로와 함께 옥사하였고, 인천 제물포에서 이모부 손 베드로 넓적이(68세)와 이모, 이모부의 사위 박치문(요왕, 42세)이 1868년 4월 20일에 인천에서 순교하였고, 형 박 서방(58세)이 4월 20일에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박순집 일가에서 16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래서 박 베드로는 가족 시체들을 찾아내어 아버지와 형님 내외분, 백부의 시체를 '둔짐'이란 곳에 안장하였다.
공식적인 박해가 철회된 1876년, 박순집은 교회의 밀사 최지혁(崔智赫, 요한)과 고종의 유모 박(朴) 마르타의 딸 원(元)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드게트(崔) 신부, 블랑(Blanc, 白) 신부 등을, 1877년에는 리델(Ridel, 李, 제6대 교구장) 주교, 두세(丁) 신부, 로베르(金) 신부 등을 입국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1888년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白) 주교가 프오델(朴) 신부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하자 프오델 신부는 박순집을 불러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기 권 타대오에게는 한 마디도 바꾸지 말고 기록하도록 하여 증언록이 작성되었는데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丙寅事蹟 朴順集證言錄)으로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899년 10월 30일, 박순집의 도움으로 와서에 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장되었고, 1901년 10월 21일에 삼성산에 묻혀 있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도 발굴되어 예수성심신학교를 거쳐 같은 해에 명동성당 지하실에 안치되었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와서에 묻혀 있던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성당에 안치되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과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은 1878년에 홍제원(현 홍제동) 장거리 고개 밑에서 살았는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1888년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 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수녀회에 입회시켰다. 그래서 박 수녀는 조선인 최초 5명의 수녀 중 한 분으로 그가 95세의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이 글에는 자신의 가족들의 순교 행적과 신앙생활, 수도회 역사의 내용으로 아버지 박순집 증언록처럼 교회의 산 기록이 되고 있다.
1889년에는 인천에 사는 한 교우가 박순집을 찾아와서 인천 제물포(濟物浦)로 내려와 전교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자 1890년에 전교의 원대한 포부를 간직하고 아들 식구와 전 가족을 데리고 제물포로 이사했다. 박순집이 제물포에 와서 근교에 교우를 살펴보니 자기를 인천으로 초대한 교우 가정과 또 한 가정, 일본인 교우집, 중국인 한 사람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베드로는 1889년에 한국인 59명, 일본인 25명으로 설립된 답동본당(초대 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도우며 전력을 다하여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1893년에 박순집의 집터가 경인 철도 부설로 인하여 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외곽지역인 주안 숙골(현 도화동)에 밭을 사서 이주하여 생활을 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하였다.
그런데 방안에는 향기가 풍기어 장손 요셉이 밖으로 나가 지붕을 올려 보자 동쪽으로 뻗친 두 줄기 광채는 마치 쌍무지개 같았고, 이웃 동네 사람들은 온통 불빛에 쌓여 있는 박 베드로의 집을 보고 불이 난 줄로 알고 손에 손에 물통을 들고 불을 끄려고 몰려왔다. 그러나 집은 타지 않고 광채의 서기만 있어 모두 놀라 장남 요셉에게 신비스런 현상을 이야기하며 주위를 살피니 박순집 베드로가 선종하면서 나타난 서기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땅에 무릎을 꿇고 박순집 베드로가 성인이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박순집 베드로의 시신은 독쟁이(현 용현동)에 묻었다.
이처럼 박순집 베드로의 일생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증언자의 삶이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이주해 와서 산 20여년은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여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 된 삶이었다.
그래서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는 교구 신자들의 순교자 현양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용현동(독생이)에 묻혔다가 1961년 8월 31일 천주교 서울교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내로 천묘된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서울교구의 도움으로 2001년 5월 24일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도화동과 인연이 있는 도화동 성당 내에 봉안하여 순교자 현양 기도 모임을 갖고,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 성지 내에 천묘하였다.
[출처 : 갑곶순교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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