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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천하마도(天下魔道)
①
그것은 실로 괴기스런 광경이었다.
백천강이 서 있는 곳은 방원 삼십 장 정도에 달하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석실은 푸르스름한 향연(香煙)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냄새였다.
영혼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만 같은 죽음의 냄새가 석실 안을 자욱이 맴돌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석실 중앙에는 넓이가 십 장쯤 되는 독지(毒池)가 있었다.
부글부글.......
시커먼 독수가 독지 안에서 끓고 있었다.
일백팔 개의 청동향로가 생사진(生死陣)을 형성하며 독지를 에워싸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와도 같은 향연은 바로 청동향로에서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천오백 년의 세월동안 꺼지지 않고 피어오르다니!'
백천강은 놀란 눈빛을 거두지 못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놀라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천강은 독지 가까이 다가가다가 번개를 맞은 듯이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백천강의 두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독지 속에는 십인의 인물이 잠겨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서 천장을 향해 반듯이 누워 있었다. 모두들 잠자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각각 남녀 다섯 명씩이었다. 모두 이십 세 전후의 절세미녀와 미남자들이었다.
여인들은 가히 뇌쇄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영글어 터질 듯한 젖가슴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피부는 백옥같이 희고 투명했다.
대리석같은 두 다리는 반듯이 합쳐져 있었다. 그때문에 하복부의 부드러운 융기부분이 삼각으로 마주쳐 있었다. 두 팔은 옆구리에 단정히 붙여져 있었다.
그야말로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곳 없는 완미(完美)를 가진 여인들이었다. 그것은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귀공자의 모습이었다.
"저... 저들이 정녕 천오백 년 전의 사람이란 말인가?"
백천강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백천강은 한동안 독지 속의 인영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것은 반 식경이 지난 때였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백천강은 독지 옆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석단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석단을 향해 다가갔다.
석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것이 아닌, 진짜 기환궁주의 시신이 앉아 있었다. 가부좌를 튼 기환궁주의 무릎 위에는 여러 개의 독(牘)이 한 묶음으로 묶여져 놓여 있었다.
"......!"
백천강은 석단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백천강의 눈에 독의 제목이 들어왔다.
<기환마마비해(奇幻魔魔秘解).>
잠시 망설이던 백천강은 마침내 독의 묶음을 집어들었다.
기환마마비해는 모두 고대의 전자체로 씌여져 있었다. 백천강은 자신의 처지조차 잊고 기환마마비해를 읽는데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기환궁주인 혈성군 공야후가 남긴 기환궁의 독문마공의 정해(精解)였다.
기환궁의 무공은 원래 대막 혈천마국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혈성군 공야후는 그것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독창적인 마공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 그 정해를 여러 개의 독에 기술했다. 그것이 바로 기환마마대해였다.
"......!"
기환마마대해를 읽어 내려가는 백천강의 안색은 수십 차례나 변했다. 한순간 붉게 타오르던 그의 안색은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창백하게 변했다. 때로는 두려운 표정이 얼굴 가득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백천강은 쉬지 않고 기환마마비해를 읽어나갔다.
아수라천지멸겁강(阿修羅天地滅劫 ), 극사마라공(極邪魔羅功), 마마무천파멸장(魔魔無天破滅掌), 공공흡인심강(空空吸引心 ), 사라혈옥기(邪羅血玉氣), 십이고루음부마공(十二孤壘陰府魔功).......
그 속에는 이제껏 듣고 보도 못한 온갖 개세마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백천강은 내처 기환마마비해를 읽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백천강은 불현듯 신음성을 토해냈다.
"이... 이것은?"
백천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러 개의 독 가운데 피로 제목을 쓴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기환만겁윤회마공(奇幻萬劫輪廻魔功).>
실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져 있었다.
<혈천마국의 숱한 마공을 익혔으나 끝내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부 혈성군은 모든 마공을 누를 영세제일의 마공을 이루기 위해 모든 심혈을 쏟았다. 그 결과... 죽기 직전에야 하나의 마공을 창안했다. 이름하여 기환만겁윤회마공이다. 이는 제마공의 으뜸이며 영세제일마공이다. 비록 노부자신조차 영성치 못했으나 가히 천상천하제일의 마신지경에 이를 수 있는 마공임을 자부하노라. 십 성이 넘으면 인의 경지를 벗어 마신
경(魔神境)에 입경(入境)하므로.......>
"아!"
탄성과 함께 백천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환만겁윤회마공. 그것은 곧 마인, 아니 마신이 되는 마공이었다.
인간이 신선이 될 수 없듯이 어찌 마신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기환만겁윤회마공은 능히 그것을 이룰 수 있었다.
백천강은 한동안 전율을 금치 못했다. 마침내 그는 그 구결을 읽기 시작했다.
"오오! 이... 이것은... 인간의 무학이 아니라 마의 무학이다!"
백천강은 전신을 부르르 경련했다. 마침내 읽기를 끝마친 그는 격동을 이기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이것이다. 영겁불사마신을 부릴 수 있는 방법은!"
백천강은 흥분하여 외쳤다.
기환만겁윤회마공의 맨 마지막 장에는 독지 속에 누워 있는 다섯 쌍의 남녀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영겁불사마신이란 마도에서 내려오는 밀법이었다. 그것은 산 인간을 독지에 담가 잠재우는 방법으로써 혼을 금제하고 영원히 죽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마신체를 이룬 것을 말했다.
독지 속의 다섯 쌍의 남녀.
그들은 본래 기환궁주인 혈성군 공야후의 제자들이었다. 혈성군은 기환궁이 천재지변에 의해 지하에 갇히고 살아나갈 희망이 없어지자 그들을 영겁불사마신으로 만든 것이다.
일단 영겁불사마신이 된 이상에는 누군가가 깨울 때까지 영원히 독지 속에서 잠들어 있어야만 했다.
설사 깨어난다해도 오직 일인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른바 실혼인(失魂人)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위력은 엄청났다.
영겁불사마신은 금강불괴의 신체임은 물론 수(水), 화(火), 독(毒)이 침범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무공도 십 배 가량 높아져 오직 영주(靈主)만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다.
혈성군 공야후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지하세계에 갇힌 후에 하늘을 증오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인가는 반드시 나타날 기환궁의 후인이 영겁불사신의 힘으로 또 한 번 천하혈세를 만들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②
백천강은 손가락을 물어 뜯었다.
팟!
살갗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 끝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자신의 피를 한 입 가득 물었다.
"......."
그는 내심 구결을 외우며 합장을 했다. 뒤이어 그는 입 안에 담고 있던 자신의 피를 힘껏 뱉아냈다. 자욱한 혈무가 그의 입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스스스.......
혈무는 먼저 그의 몸을 뒤덮었다. 나아가서 그것은 독지 위를 감싸듯이 뒤덮었다.
그때였다. 새파란 향연과 어울린 혈무가 돌연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우... 우... 우웅... 우우웅.......
그때를 기다려 백천강은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생혼계(生魂啓)를 읊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마(魔)의 혼령(魂靈)이여......
일천 오백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라......
암흑의 영겁을 떨치고 일어나라......
저주의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라......
더이상 죽음은 없다......
구천구백구십구 번의 죽음으로 그대들의 혼이 부활하고......
팔만사천 번의 절망으로 그대들이 영생하리니......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바로 그때였다.
괴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림사 이래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대괴사였다.
"호호호......!"
"크크크......!"
혼백을 삼킬 듯한 요기(妖氣)스런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독지 속의 독액이 출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스.......
그 뒤를 이어 독지 속에서 천오백 년 간이나 잠들었던 다섯 쌍의 영겁불사마신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욱한 혈무를 입과 코로 들이마시며 독지로부터 일 장 위로 떠올랐다.
찰나지간 백천강의 입에서 기이하고 음산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바로 섭혼제령(攝魂制靈)의 마후음이었다.
"영겁불사마신.... 너희들의 혼과 영은 이제 나의 것이다. 나는 너희들의 주군... 너희들의 령주이니... 오직 나만을 위해 너희들은 존재하리라!"
우우웅... 우웅웅.......
마후음 속에 들리는 그의 음성은 불가사의하게도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였다.
"호호호호......!"
"크크크크......!"
고조되어가던 영겁불사마신들의 웃음소리가 돌연 딱 그쳤다.
스르륵.......
허공 중에 누워 있던 그들의 신형이 곧바로 곧추섰다. 다음 순간 그들은 감았던 눈을 일제히 떴다.
"......!"
영겁불사마신들의 눈빛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잔혹했다.
다섯 쌍의 잔혹한 눈빛은 일제히 백천강의 시선을 파고 들었다.
'으읏! 지... 지면 허사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맞는 말이었다.
기환만겁윤회마공 속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결국 눈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렇게 되면 영겁불사마신은 다시 영원한 잠으로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백천강은 완전히 실혼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
무서운 눈 싸움은 한 식경을 넘도록 계속 되었다.
백천강은 그 뒤로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일념을 다하여 영겁불사마신들의 눈빛을 맞받았다.
차츰 영겁불사마신의 눈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천강은 자신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마침내 영겁불사마신의 눈빛은 깊이 침잠되고 말았다. 그들은 안으로 응결된 눈빛으로 백천강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응시라고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겁불사마신들은 분명히 백천강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기도 했다. 그들의 초점은 백천강의 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은 백천강의 뒤에 있는 무한한 어둠 속에 고정된 것만 같았다.
"가까이 오라."
백천강의 입에서 무심한 말이 떨어졌다.
스스.......
영겁불사마신들은 마치 연기가 흐르듯 움직이며 백천강에게로 다가왔다.
이어 그들은 백천강의 발밑에 오체투지(五體投地)하듯 엎드리는 것이었다.
"......!"
백천강의 검미가 푸르르 떨렸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제 그대들과 나는 영으로 맺어졌다. 삶과 죽음이 그대들과 나를 한몸으로 이어놓은 것이다!'
백천강은 마침내 깨달았다. 영겁불사마신과 자기 자신은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백천강은 다시 석실 안을 둘러 보았다. 한쪽 석벽에 마경 수천 권이 가득 꽂혀있는 서가가 있었다. 그것은 기환궁도들이 남긴 것이었다.
서가의 마경을 발견하는 순간 백천강은 수중의 기환마마비해를 내려 보았다.
휙!
백천강은 그것을 독지에 던졌다.
화르르.......
독묶음들은 독지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불이 붙으며 즉시 녹아 버렸다.
백천강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영겁불사마신들을 하나하나 훑어 보았다.
"......!"
다섯 명의 여인들은 한 마디로 우물이었다. 여인들은 무르익어 터질 듯한 농염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나신으로 서 있는 남자들도 천하미남이었다.
백천강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대들은 전생에 맺어지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맺게 해주리라."
백천강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를 거둔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을 짝지어 주마. 어디를 가나 언제든지 항상 짝을 지어 행동하게 될 것이다. 후후... 너희들을 이제부터 극락십령이라 부르겠다. 일령과 육령이 짝을 짓고 이령과 칠령, 삼령과 팔령, 사령과 구령, 오령과 십령이 짝을 지어 이룬다."
백천강의 말이 끝났다.
스슥.......
극락십령은 한 차례 움직이더니 각기 짝을 이루었다.
한 쌍씩 나란히 짝을 이룬 것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천강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후후... 과거 너희들의 짝을 찾은 것이냐? 아무튼 약속하마. 너희들은 혼을 잃었으나 결코 천오백 년의 긴 잠이 헛되지 않도록 행복하게 해주마."
백천강은 말을 마친 후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행복하게 해준다고? 나 자신조차도 가누지 못하는 주제에.... 후후훗.......'
그 순간 백천강은 가슴이 갑자기 공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극락십령의 짝을 이룬 모습을 보는 순간 하나의 얼굴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것은 순결무구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설화영.......'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쌍봉도... 설화영.......'
문득, 또 다른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천강은 안색을 찌푸렸다.
그 순간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으음... 공야운리......."
음양궁주 공야운리. 그녀는 처음으로 백천강에게 색의 벽을 무너뜨리게 한 여인이었다.
생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와 관계를 맺은 여인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악가장의 시녀 교홍을 비롯하여 팽무위의 정혼녀인 천아월.......
그 여인들은 얼굴은 처절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 악마!
...... 너는 악마!
백천강의 귀에는 그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부르르.......
순간 백천강은 세차게 몸을 떨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뇌리에 또 하나의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구원처럼.
그 여인은 그를 향해 해맑은 웃음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모... 모용란!'
백천강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 사랑해요.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단 한 번... 한 번만이라도 만족할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눈은 무한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두 눈에 애정을 가득 담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부르르.......
백천강은 돌연 몸을 떨었다.
그는 가까스로 자신이 환상 속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백천강은 주먹을 굳게 움켜 쥐었다. 그리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오직 있다면 혈륜천하를 이루는 일뿐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극락십령을 바라보았다.
"가자!"
스스스.......
백천강은 짧게 외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극락십령도 연기처럼 그를 따라 솟구쳐 올랐다.
암공으로 떠오른 그들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③
풍운(風雲)이 일었다.
그것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대풍운이었다. 무림사에 일찌기 없었던 전무후무한 대풍운이 중원을 괴멸시킬 듯이 휘몰아쳐 온 것이다.
콰콰쾅!
청천벽력(靑天霹靂)이 따로 없었다.
중원천하에 섬전(閃電)이 번뜩임과 동시에 우뢰성의 포고(布告)가 울려터진 것이었다. 그것은 무림을 향해 피의 폭풍을 예고하는 엄청난 대선언이었다.
...... 혈륜천하를 이루리라! 기환천하, 대마인천하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혈륜궁이 이루리라!
...... 모이라! 압박받고 패배하여 천지사방, 사해팔황(四海八荒)으로 흩어졌던 백만마도인들이여! 대혈륜궁에 입궁하라! 마도의 날개를 활짝 펴게 하리라!
...... 천하는 썩을 대로 썩었다. 대혈륜이 피로써 천하를 씻으리라! 모이라! 백만마도인이여! 수천 년의 한을 풀리라!
느닷없이 등장한 대혈륜궁에 무림은 경악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혈륜궁에서 곧바로 터져나온 광풍노도와 같은 포고가 무림을 휩쓸었을 때, 전 무림은 전율하고 말았다.
사풍객.
그가 일으킨 사풍혈세의 악몽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회오리처럼 불어닥친 대혈륜궁의 등장은 무림의 전통과 정기를 삽시에 뒤흔들어 놓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뒤이어 들리는 소문은 실로 상상도 할 수 없이 엄청난 것이었다.
...... 대혈륜궁은 대마성(大魔城)과 전설의 마종, 기환궁의 후예이다!
...... 대혈륜궁에 입궁하는 마도인들은 기환궁의 마공을 얻을 수 있다!
...... 천하절색의 미녀, 황금, 개세마공(蓋世魔功)이 모두 대혈륜궁에 있다! 대혈륜궁도는 무엇이든 마음껏 취할 수 있다!
...... 대혈륜궁의 궁주는 혈륜공자다! 그는 인간이 아닌 천상천하제일의 마신이다!
정말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동반한 대혈륜궁의 등장이었다. 중원무림은 한순간 광풍폭우에 휩싸이고 말았다.
대별산(大別山).
대별산을 오르는 인파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그들은 대별산의 한 기슭을 향해 장강의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았다. 움푹 꺼진 눈에는 무서운 마광이 번뜩였다.
그렇다. 그들은 일인, 일인이 모두 개세혈마들이었다. 수많은 마도인들이 장강의 물결처럼 몰려가는 곳.
그곳은 바로 대혈륜궁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마도인의 천하혈세는 바야흐로 실현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하제패의 염원을 풀기 위해 대혈륜궁으로 몰려가는 것이었다.
사해팔황(四海八荒).
사해팔황은 일부(一府), 삼전(三殿), 오문(五門), 팔곡(八谷)으로 이루어진, 오랜 전통을 이어온 마도문파들이었다.
대마성이 무너진 후 그들은 심산유곡에 깊이 숨어 있었다. 그런 그들이 드디어 혈검의 녹을 문지르고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밖에도 대막(大漠), 천축(天竺), 북해(北海), 묘강(苗疆), 남해(南海) 등등의 오지에 숨어 살던 대마두들이 속속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의 얼굴에는 살기등등함과 아울러 희색이 만면했다.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인영은 전신에 피처럼 붉은 혈의를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얼음으로 조각한 듯 냉막하면서도 준수했다. 그러나 그의 얇은 입술은 밀랍처럼 창백했다.
두 눈 속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아니 생명체라면 의당 가지고 있어야 할 희노애락 따위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
혈의인영은 대별산의 한 고봉에 우뚝 선 채 몰려드는 군마(群魔)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뒤.
일 장 가량 떨어진 혈의인영의 등뒤에는 형언할 수없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십인의 흑의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섯 쌍이었다.
한결같이 천하절색이자 미남자였다.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안으로 침잠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혈의청년의 입에서 인간의 음성같지 않은 어조가 흘러 나왔다.
"크크ㅋ! 온다. 그들이 오고 있다. 이천 년 무림사를 바꾸어 놓을 마도인들이 오고 있다. 크크ㅋ!"
섬뜩한 웃음을 흘리는 혈의인영. 그는 바로 혈륜공자 백천강이었다.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다섯 쌍의 흑의인들은 바로 극락십령이었다.
"크핫핫핫......! 이제부터 대혈륜은 중원천하를 구르기 시작할 것이다. 핫핫핫!"
백천강은 광소를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얼굴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피어났다. 그것은 백천강이 마신지경(魔神之境)에 이르렀다는 증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④
제독부(提督府).
제독부는 대명천하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그 자체가 자금성(紫金城) 못지 않은 삼엄한 경비와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사광천(査光天).
그는 제독부에 기거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대명의 팔십일만 금군통령(禁軍統領)이자 대원수(大元帥)를 겸임하고 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位)에 있는 사람이었다.
대원수 사광천의 권력은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새라 할지라도 말 한 마디로 떨어뜨릴 정도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행운이 겹친 사람이었다. 그는 황상(皇上)의 총애와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대명천하에서 그의 지위는 확고했다.
그런 사광천은 슬하에 일남일녀를 두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은 그저 존재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광천이 둔 아들 하나와 딸 하나.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룡일봉(一龍一鳳).
천하인들은 사광천이 둔 일남일녀를 그렇게 호칭해 불렀다.
신주제일룡 사유성과 우내일봉(宇內一鳳) 사운봉(査雲鳳).
그들 남매는 그야말로 인중용봉(人中龍鳳)이었다.
사유성은 이미 강호의 후기지수 제일인자의 명성을 쌓고 있었다. 그러나 사운봉은 아직 신비 속에 가려져 있었다.
세인들은 말하기를 그녀의 용모는 가히 구름 속을 노니는 봉황같다고 했다. 정말이지 그녀는 황실에서도 탐을 내는 봉재(鳳才)였다.
제독부 깊숙한 곳에 하나의 가산(假山)이 있었다. 가산 주위에는 화원이 있었다.
온갖 꽃이 만발한 화원이었다. 중원사해에서 옮겨다 심은 온갖 기화요초로 인해 화원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이 여겨졌다.
밤이었다.
교교한 월광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교연화(皎蓮花)를 비추었다.
월광을 받은 교연화가 수줍은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순간 교연화의 향긋한 꽃내음이 바람에 실려 떠올랐다. 달빛을 타고 오른 교연화의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한 채의 정자(亭子)가 화원 옆에 있었다. 가산에 엇비스듬히 세원진 정자였다.
"휴우......."
정자 안으로부터 가벼운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뜻밖에도 그 한숨은 교연화의 향기보다 더 향기로웠다. 그것으로 보아 한숨을 쉬는 인영은 분명 여인이었다.
여인의 한숨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교교한 달빛이 불현듯 정자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달빛도 여인의 한숨소리에 궁금증을 어쩌지 못한 것이 분명했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한 절세가인이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있는 것이 드러났다.
화용월태(花容月態)라 하였던가? 아니면 폐월수화(閉月羞花)?
도저히 말로는 형언이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런 형용이 여인의 품위를 흐리게 할 뿐이었다.
여인은 일신에 입은 자의궁장을 입고 있었다.
여인의 손은 옥으로 깎은 듯 가늘면서도 섬세했다. 분가루가 묻어날 듯 흰 손은 비파(琵琶)를 안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두 눈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흑요석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입술은 선홍빛 도화꽃잎 두 조각이 맞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사슴처럼 가녀린 목의 선은 정녕 신이 손수 빚은 것만 같았다.
"......."
궁장여인은 엷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일순 아련한 그리움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돌연 궁장여인이 비파를 바로 안았다. 이어 그녀는 빙어(氷魚)같은 손가락으로 금현(金絃)을 튕기기 시작했다.
띠딩... 띵... 띵.......
비파음은 끊어질 듯이 이어져 갔다. 달빛조차 비파음에 이끌린 듯 더욱 신비롭게 빛났다.
띵.......
문득 비파음이 그쳤다. 뒤이어 여인의 음성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 음성 속에는 뜻밖에도 얕은 한숨이 뒤섞여 있었다.
"아! 오라버니는 강호로 나가신 지 오래도록 돌아오시지 않고... 나 사운봉은 이렇게 구중심처에서 한숨만 쉬고 있구나."
그녀는 바로 사광천의 외딸인 우내일봉 사운봉이었다. 사운봉은 그윽한 눈으로 달을 바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과연 강호라는 곳이 그토록 재미있는 곳일까? 오라버니가 돌아올 줄을 모르니......."
사운봉의 눈에는 어느덧 강호에 대한 동경이 어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흙을 밟아보지 못할 정도로 귀하게 자라왔다. 그랬기에 그녀는 단 한 차례도 제독부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사유성이 뛰어든 강호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녀에게는 강호라는 혈겁의 세계가 미지의 신세계로만 여겨졌던 것이었다.
"아! 나도 마음껏 날아 강호세계로 뛰어 들었으면......."
사운봉은 한숨을 쉬며 또다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허허허! 낭자, 그렇게도 강호로 나가고 싶소?"
문득 그녀의 뒤에서 자애로우면서도 낭랑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어머! 스승님!"
그 음성을 듣자 사운봉은 반색을 하며 돌아섰다.
정자 위로 뒷짐을 진 채 올라오는 청수한 용모의 중년선비가 있었다. 그는 이마가 단정하고 용모가 청수한 백색유삼 차림의 문사였다.
이제 오순 정도의 나이를 지닌 중년인. 그는 바로 백문선생(百文先生) 우문기(宇文奇)였다.
백문선생 우문기는 바로 사운봉의 글선생이었다. 백문선생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우문기는 백 가지 문학에 달통했다. 뿐만 아니라 천 가지 예에도 달한 기인이었다.
수 년 전 그가 제독부에 들어왔을 때 사광천은 그와 하룻밤을 얘기해 보고 그에게 단단히 반해 버렸다. 그날 이후로 그는 사운봉의 글선생이 된 것이다.
"스승님. 저의 넋두리를 들으셨군요?"
사운봉은 봉목을 상큼 뜨며 물었다.
"허허. 그렇게 되었소."
"아이 참, 제게 하대하기로 했잖아요."
사운봉이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우문기의 말투는 여전했다.
"허허.... 나는 일개 글선생, 낭자는 제독부의 천금이 아니오?"
"정말 그러실 거예요?"
사운봉이 토라진 듯이 말했다. 바로 그때였다.
쌔액!
사운봉은 느닷없이 옥수(玉手)를 칼같이 세우는 것이었다.
이어 그녀는 놀랍게도 우문기를 향해 칼을 베는 것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백색의 수강(手 )이 실같이 뻗었다.
"허헛! 청출어람이라더니... 정말 못당하겠군!"
미소를 띈 음성과 함께 백문선생 우문기는 슬쩍 부채를 흔들었다.
팟!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이 닿는 순간 수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호호...! 스승님. 그래도 제자에게 하대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렇다면 이번엔 마심인(魔心刃)을 쓰겠어요!"
사운봉은 깔깔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자 동그라미 속에서 새파란 인강이 쏘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쓰쓰쓰.......
새파란 인강은 나선형으로 퍼지며 우문기를 향해 쏘아져갔다.
"허허허.... 알겠어. 알겠다구요!"
백문선생은 여유롭게 웃으며 부채를 연속 일곱 번 접었다 폈다 했다. 그러자 인강은 다시 흔적도 없이 소실되었다. 정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문선생 우문기.
그는 단지 사운봉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개 유생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천하절세 고수였던 것이다.
결국 우문기는 사운봉에게 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극고한 무공까지 가르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두 당사자들을 빼놓고는.
"스승님. 정말 강호란 곳은 그토록 풍운만변하는 곳인가요?"
사운봉의 입에서 불현듯 호기심어린 질문이 떨어졌다. 우문기는 뒷짐을 지고 달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 강호는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삶과 죽음은 물론이거니와 야망과 복수, 음모와 사랑까지도......."
"......!"
사운봉은 호기심어린 눈을 연신 반짝였다.
그때였다. 사운봉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문선생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왜 가고 싶으냐?"
"네! 정말 봉아는 마음껏 날고 싶어요!"
"허허헛... 소원이라면 날게 해주마."
"넷? 어... 어떻게요?"
사운봉은 봉목을 휘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백문선생은 담담히 말했다.
"내 너에게 가르쳐준 만변환용공(萬變幻容功)이 있지 않느냐?"
사운봉은 깜짝 놀랐다.
"저보고 변장을 하라고요? 그럼 이곳은 어떻게 비우죠?"
"허허.... 시녀 매작(梅作)으로 하여금 너를 대신케 하면 되지."
순간 사운봉은 팔짝 뛰며 손뼉을 쳤다.
"그...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바로 그때였다. 찰나지간 백문선생의 깊이 모를 눈 속에 기광이 스쳐갔다.
"강호로 나가 인생을 배우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이것은 노부의 지론이다."
"그럼요!"
사운봉은 우문기의 내심을 알 길이 없었다. 사운봉은 양뺨에 보조개를 내며 어린아이처럼 맞장구쳤다. 그 모습은 실로 천하절색이었다.
사운봉의 행동 하나하나는 천진스러웠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에게서는 우물의 교태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
백문선생의 눈에 순간적으로 욕정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사라졌다.
우문기는 내처 말을 이어갔다.
"내 언제고 이럴 줄 알고 미리 안배해 둔 것이 있다."
"안배를 해두다뇨?"
사운봉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네가 강호에 나가게 되면 반드시 무림의 일에 뛰어들게 될 것이다. 이 사부는 그때에 대비해 준비해 둔 신분이 있다."
"신분이요?"
사운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백문선생은 신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무림일비(武林一秘)다."
"무림일비?"
사운봉의 눈에 흥미로운 광채가 반짝였다.
첫댓글 굿..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